346. 너나 해(1)
광고에 사용할 사진과 포스터용 사진을 찍는 건 즐거웠다.
평소 입던 의상과 다른 스포티한 의상이 새삼스럽기도 했지만, 세트장도 한몫했다.
학교 체육관처럼 꾸며진 세트장에서 농구공을 가지고 노는 멤버들.
교실처럼 꾸며진 공간에서 우리끼리 장난치고 칠판에 낙서하는 모습 등.
단체 컷은 장소에 맞게 우리끼리 노는 모습을 보여달라고 했다.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모습을 통해 작위적인 느낌을 빼고 최대한 광고라는 거부감을 줄여볼 생각이라고 했다.
어차피 광고라는 걸 우리도 알고, 광고주님도 알고, 보는 모든 분도 알 테지만, 저항감을 낮춰보려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어떻게 자연스러운 일상 모습을 보이나 했는데, 다행히 우리에게는 찬이와 경환 형이 있었다.
둘은 금방 농구공을 가지고 장난치기 시작했고, 곧 모두가 신나서 몰려들었다.
농구 규칙 따위는 저 멀리 던져버리고 서로 물고 물리는 꼬리잡기 같은 모습.
이게 더 마음에 들었던 건지, 연신 좋다는 말과 몇 가지 포즈를 요구하는 이야기만 들려왔다.
“이 장면은 광고에 써도 될 것 같은데요?”
“괜찮네. 영상 따로 넘기자.”
신나게 한바탕 뛰어다니고 모니터링을 위해 몰려든 우리는 카메라 너머의 모습에 호들갑을 떨었다.
“우와, 진짜 우리가 이래요?”
“너무 잘생기게 나왔잖아! 작가님 최고다!”
“우리 힘찬 형이 이렇게 생겼을 리 없는데!”
막내들이 카메라를 붙들고 있던 작가님을 둘러싸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우러러봤다.
“큼, 모델이 좋아서 그런지 아주 잘 나왔어요. 왜 연우가 언래블 칭찬했는지 알겠어.”
아부성 멘트가 줄줄 흘러나왔지만, 멤버들이 신나서 좋다고 폴짝거리자 작가님도 덩달아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연우 선생님도 아세요?”
“제 후뱁니다. 언래블이랑 촬영하면 재밌다고 저한테 자랑하길래 저도 벼르고 있었죠.”
“으으, 부끄러워! 너무 잘 찍어주셔서 잘 나온 거죠!”
서로 얼굴에 금칠해주는 약간은 민망하고 수줍은 시간을 가졌다.
우리 애들이 이렇게 사회생활을….
아니, 근데 막내 라인인데?
사회생활이 아니라 다 진심인가.
약간의 혼란이 있었지만, 멤버들이 좋아하니 그냥 나도 좋아하기로 했다.
예전처럼 무서워하고 낯가리는 것보다는 이렇게 즐거워하는 게 여러모로 나으니까.
흐뭇한 얼굴로 막내 라인을 지켜보는 나를 준이 형이 묘한 얼굴로 바라봤다.
“왜요?”
“아무것도.”
“…?”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뭐 때문에 그러냐고 옆구리를 찔러봤지만, 형은 그냥 너희 모습이 재밌어서 그렇다며 말을 돌렸다.
표정이 그게 아니었는데!
멤버들이 신나는 마음으로 촬영에 임한 덕분에 오랜 촬영 내내 현장은 화기애애했다.
멤버들 사진도 꽤 많이 건졌으니 나중에 솜뭉치들을 위해 한번 풀어줘야겠다.
좋은 건 다 같이 보고 즐기는 게 또 맛이지.
* * *
“왜 보자고 했어?”
날이 선 목소리가 이상하게 전혀 타격을 주지 못했다.
모자로 가려진 얼굴 아래가 거뭇거뭇한 게 그저 한숨만 나올 지경.
멜트의 활동에 관해 인터넷을 조금 뒤져보니 불화설이 솔솔 피어날 정도로 에드는 대외 활동에 끼지 않고 있었다.
멤버들끼리 나가서 놀 때조차 에드의 모습은 없었던 것.
워낙 지켜보는 눈이 많다 보니 완벽히 숨겨지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올린 예전 사진과 현재 사진의 비교 샷만 봐도 분위기가 달라진 게 보였다.
팬들이 열심히 쉴드치고 있었지만, 이대로는 안 될 것 같다는 마음 쪽으로 추가 더 기울었다.
멤버들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하기 어려워도,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우진 형을 통해 에드에게 내 연락처를 넘겼고,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우진 형은 못마땅해했지만 내 의사를 존중해주었다.
개인적으로 움직이면 오해를 살 수 있어 팀장님과도 따로 상의했다.
얼마 전, 팀장님은 우리를 불러 상담을 계속하고 싶은지 물었다.
우리는 지속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고, 상담 텀도 규칙적으로 유지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자유를 가진 대가로 우리는 스스로를 단속했다.
악플을 보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뜬소문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려 언급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데도 은연중 들리는 말들은 있었고, 아직 다 아물지 못한 상처도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상담은 꽤 많은 도움이 되었다.
상담을 진행하면서 더 많은 것들을 이성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졌다.
찬영 선생님은 오래된 고목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를 유지해주셨다.
덕분에 속에 꾹꾹 눌러 담았던 것들을 조금씩 더 털어놓기 편했고.
누나의 보살핌과 회사의 케어, 멤버들과의 유대.
그리고 상담을 통해 나도 이제는 세상과 교류하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그러면서 점점 더 에드는 이런 안정감이 없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양손 가득 쥐고 있어도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자꾸 욕심만 넘치고.
어설프게 위로할 생각은 없었지만, 이야기 정도는 나눠보고 싶었다.
공정한에 대한 분노는 참을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 솔직히 에드는 귀찮다는 느낌이 더 강했으니까.
이러다 멜트에서 에드가 쫓겨나기라도 하면 내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았다.
그러니 이건 나를 위한 행동이다.
“사람을 만나면 인사부터 해요. 무슨 영화 찍어요?”
“뭐?”
한심하다는 듯 툭 내뱉는 말에 발끈한 에드가 노려봤다.
“드라마에요? 첩보 영화도 아니고 만나자마자 원하는 게 뭐냐고 묻고. 제가 뭘 원한다고 하면 들어줄 거예요?”
“…후. 너 이렇게 말꼬리 잘 잡는 애라는 거 형들은 아냐?”
자기 꼴이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웠던 걸까?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진정시킨 듯한 에드는 ‘형들’을 언급했다.
골든아워 형들인지 새벽 형들인지 아니면 진우 형인지 모르겠다.
“그 형들이 모르겠어요? 어떤 사람들인지는 그쪽도 잘 알 텐데.”
내 말에 에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형들이 누구든 간에 우리보다 긴 시간 동안 연예계에서 잘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눈치가 없을까?
하다못해 우리 찬이도 이제는 눈치라는 걸 보는데.
“그냥 얼굴 마주하고 단둘이 이야기해보고 싶었어요. 도대체 왜 그랬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시종일관 덤덤하게 말하는 내 말투에 경계심이 조금 옅어진 건지, 아니면 그냥 속이 탄 건지.
에드는 앞에 놓인 커피를 마셨다.
각자 앞에 놓인 커피를 마시며 조용한 시간이 흘렀다.
속마음이 재촉한다고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걸 알기에 그냥 기다렸다.
이런 조용한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
“몰라. 나도 모르겠어. 왜 그랬는지.”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지친 듯한 에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질투 나서 그랬겠지? 난 내 자리를 만들려고 그렇게 아등바등 몇 년을 마음졸이며 살았는데. 너희는 순식간에 차지했잖아.”
자조 섞인 목소리에는 온갖 진득한 감정들이 고여있었다.
그리고 난 그게 몹시 못마땅했다.
은근히 이게 남 탓을 하네?
“왜 남 탓을 해요.”
“알아, 나도 내가 못난 거. 그러니까 너까지 뭐라고 하지 마.”
“아니 무슨 로맨스 찍어요? 차지하긴 뭘 차지해. 나보다 형이면서 왜 이렇게 유치해요?”
무슨 후회 남주세요?
자기 혼자 비련의 주인공처럼 구는 꼴을 보고 있자니 부아가 치밀었다.
“멜트 형들이고 골든아워 형들이고 여태 막내라고 당신한테 그냥 예쁘다 예쁘다 했을 거 아냐. 근데 당신이 삽질해서 망한 거잖아.”
그냥 안됐다는 생각에 대화나 조금 해보려고 나왔는데, 이 인간은 자기 연민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자기가 잘못해서 이 사단을 만들어놓고 지금 뭐라는 거야?
“사람이 소유물이야? 왜 니 꺼 내 꺼를 나눠. 진짜 유치해서 못 들어주겠네.”
“누가 들어달라고 했어?”
“했잖아요.”
“내가 언제!”
몰아붙이듯 쏘아대는 내 말에 에드 얼굴은 빨갛게 변했다가 하얗게 질렸다가 다채로웠다.
적어도 부끄러운 건 아는 사람인가?
“마지막 촬영 때도 보란 듯이 혼자 구석에 짱박혀서 세상 다산 얼굴 하고 있고. 다른 형들한테 들으니까 맨날 방에 처박혀서 나오지도 않는다면서요?”
멜트 형들을 통해 에드에 관한 이야기도 조금 들었다.
형들의 배신감을 내가 다 다독여줄 수는 없지만, 이야기 정도는 들어줄 수 있으니까.
넌지시 물어보니 디아 형은 말을 돌렸고, 사피 형과 페리 형은 내게 하소연했다.
루 형은 굉장히 냉정한 목소리로 제대로 반성하고 다가오지 않는 이상 동생으로 생각하지 않을 거라고 했고.
유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루 형이 가장 단호한 모습을 보여 무척 놀랐다.
하지만 그만큼 형들도 많이 상처받았던 게 아닐까?
“본인이 사고 쳐서 팀 이미지 망쳐놓고 수습할 생각은 있어요?”
“네가 뭘 안다고…!”
“당신보단 내가 더 잘 아는 거 같은데.”
화를 낼 것처럼 주먹을 움켜쥐던 에드는 매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다 갑자기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도대체 나보고 어쩌라고…. 사과하래서 사과했잖아. 이미 실망해서 날 쳐다도 안 보는 사람들한테 내가 뭐라고 해.”
와, 생각보다 더 애잖아?
기가 찬다는 듯 그를 바라봤지만, 에드는 혼자 무언가 중얼거릴 뿐 눈을 마주칠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이봐요, 박화영 씨.”
“….”
“안 쳐다보면 쳐다봐 달라고 쫓아다녀야죠. 미안하다고 말만 할 게 아니라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야지. 팀에서 나갈 거예요?”
“안 나가!”
팀을 언급하자 우중충했던 얼굴이 까맣게 죽었다.
“나라고 처음부터 우리 애들이랑 잘 지낸 거 같아요? 초반에 내가 얼마나 사고치고 다녔는데.”
세상에, 공지환 많이 컸다.
내가 다른 사람한테 사람 관계에 관해 이야기할 날이 오다니.
격세지감을 느끼며 한숨을 푹 내쉰 나는 이전 지환이와 내 경험을 섞어서 이야기했다.
내가 어떤 성격이었는지, 멤버들과 다툴 때는 어떻게 했는지, 그리고 교통사고 이후 멤버들에게 어떻게 했는지.
“도움이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난 그렇게 했어요. 계속 두드리고 내가 잘못한 건 진심으로 사과하고. 아쉬운 건 상대가 아니라 나잖아요.”
아쉽다는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했다.
그때 내게는 언래블밖에 없었으니까.
무조건 적응하고 여기 남아 살아가야 했다.
언래블이 되어 데뷔하는 게 소원을 이루는 방법인 줄 알았으니까.
내가 언래블 팬이라는 걸 빼고도 그때 나는 절박했다.
하지만 지금 에드는 전혀 절박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자기 자신이 가장 불쌍하다는 그런 망상에 빠진 것 같아 솔직히 꼴불견이었다.
난 열심히 노력해도 잘 안돼서 좌절하고 지쳐있는 건가 했는데 이렇게까지 애새끼일 줄 몰랐지.
한심하다는 듯 그를 쳐다봤지만, 에드는 제대로 반격조차 못 했다.
적어도 자신이 부끄럽다는 걸 느끼기라도 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진짜 밑바닥까지 떨어지면 그런 생각할 시간조차 없을걸요. 적어도 화영 씨는 팀에서 쫓겨나지도 않았고, 숙소에서 쫓겨나지 않았잖아요. 진짜로 형들이 당신 꼴 보기 싫었으면 그냥 뒀을까.”
“…그럼 어떻게 해야 해?”
“뭘 어떻게 해요, 열심히 형들한테 반성하고 뉘우치는 모습 보여야죠. 이대로 진짜 잃기 싫으면 노력해요.”
아까까지는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질투와 두려움, 후회와 원망이 뒤섞여있었다.
하지만 지금 나를 바라보는 에드의 시선에는 간절함만 남아있었다.
내가 무슨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인 줄 알아?
“여태까지는 형들이 당신을 아껴주고 노력했으니까 이번엔 에드, 당신이 해요.”
아, 진짜 울지마!
“…도와줘.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에드는 울음이 가득 들어찬 목소리로 조그맣게 도와달라고 했다.
그냥 이야기하러 나왔는데 고민 상담을 하고 있었다.
이러려고 없는 시간 쪼개서 나온 게 아니었는데!
그것도 속 터져 죽겠는데 이제는 울고 있네. 아오.
“환장하겠네, 진짜.”
뭔가 잘못 엮인 것 같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우리 막내가 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