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 어느날 머리에서 뿔이 자랐다(5)
준이 형 말에 내 심장도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각자 상황을 숨기는 건 나쁜 징조였다.
최근에는 다들 숙소에 오면 씻고 잠들기 바빠서 이전보다 대화가 줄어들긴 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리더인 하준 형에게도 말하지 않는다는 건 안 될 말이었다.
“나나 영빈이가 물으면 애들이 자꾸 입을 다물어버려. 넌 애들이랑 같은 학교잖아. 혹시 애들 학교에서 무슨 일 있어? 너한테는 따로 말 안 했어?”
내게도 둘이 별다른 말을 한 적은 없었다.
그저 평소와 비슷하게 흘러갔다고 생각했는데….
그때 문득, 최근 세빈이 일이 생각났다.
학교에서 안 좋은 말을 듣고도 우리에게 말하지 않았던 세빈이.
혹시 그 일도 이번에 애들 태도가 바뀐 것과 연관 있는 게 아닐까?
내 예상보다 더 큰 문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말을 골라서 조심스럽게 전했다.
“형, 저도 최근에 세빈이 일이 하나 있었는데요.”
녹화 당시에 있었던 일을 들은 준이 형은 이마를 부여잡았다.
“갑자기 둘이 한꺼번에 사춘기라도 온 거야, 왜들 이러냐.”
같은 팀이라고 서로에게 모든 것들을 오픈할 필요는 없지만, 여태까지와 달라진 태도에 준이 형은 당황스러운 듯 보였다.
늘 서로와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해온 준이 형이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지금처럼 견고한 분위기를 만들 수 있었다고 생각했고.
하지만 갑자기 스스로 어린이가 되겠다고 드는 둘의 모습에 준이 형은 무척 걱정되는 듯했다.
“…혹시 저 때문은 아닐까요?”
“너? 왜? 싸웠어?”
“아뇨, 싸울 일이 뭐 있겠어요. 그냥 제가 워낙 다사다난해서 애들이 좀….”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그게 왜 네 탓이야.”
방금까지 근심 걱정 가득했던 형의 얼굴이 엄하게 변했다.
“다른 애들만 이상한 생각 하나 했더니, 이놈도 마찬가지였네. 하아….”
갑자기 혼나는 것 같아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바라보자, 한숨을 내쉰 준이 형이 말을 이었다.
“내가 생각엔 힘찬이랑 세빈이도 너같이 생각한 거 같다.”
“네?”
“너도 그렇고 애들도 그렇고 다들 자기가 잘못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고. 내가 그렇게 혼자 판단하지 말라고 했는데.”
나에게 혹시 멤버들이 이상한 모습을 보인 적은 없는지 물으러 왔던 준이 형은 결국 스스로 답을 찾았다.
비록 그 과정이 내 의도와 아주 달랐지만.
“안 되겠다. 너도 따라와.”
“나도?”
“그래. 오늘 다 같이 이야기 좀 하자.”
얌전히 있었을 뿐인데 졸지에 혼나게 생겼다.
‘잘됐네. 넌 좀 혼나야 함.’
‘나 왜…?’
‘아직도 모르는 게 네놈의 가장 큰 문제다, 계약자 놈아.’
포잉까지 나서서 잔소리하자 어깨는 점점 더 축 내려갔다.
‘불쌍한 척 하지 마셈. 안 통함.’
‘쳇.’
포잉마저 내 편이 아니라니.
오늘은 그동안 못한 작곡 연습도 좀 하고 일찍 숙소 가서 쉬나 했는데 아무래도 그른 듯했다.
시무룩해진 얼굴로 준이 형의 뒤를 졸졸 쫓아 연습실까지 터덜터덜 걸어갔다.
“어라, 준이 형?”
“영빈이는?”
“보컬 룸에 있을걸요?”
“너희 여기 다 앉아봐.”
찬이가 무슨 일이냐고 눈동자를 굴렸지만, 준이 형 모습이 워낙 단호해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평소보다 굳어있는 준이 형 얼굴에 세빈이도 찬이도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은근슬쩍 도망가려던 경환 형은 바로 뒷덜미 잡혀서 자리에 앉혀졌고.
연습 중인 영빈 형까지 연습실로 불러 모은 준이 형은 팀장님께 무어라 메시지를 보냈다.
아마도 우리끼리 이야기한다고 미리 말씀드린 거겠지….
“내가 그냥 넘어가려다 안 되겠어서 모았어.”
“왜요? 우리 무슨 일 있어요?”
연습실 구석에 동그랗게 모여앉은 우리를 향해 준이 형이 평소보다 조금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영빈 형만 상황을 알고 있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형이 너희한테 못 미더울 수도 있어.”
“네? 절대 아니에요!”
“왜 그렇게 생각해요!”
“일단 들어. 준이 말 끝나면 말해.”
첫 문장부터 우리 마음을 콕콕 찌르는 말을 내뱉는 준이 형.
화들짝 놀란 우리가 아니라고 펄쩍 뛰었지만, 영빈 형이 단호하게 말을 막았다.
영빈 형은 평소엔 늘 허허 웃고 말던 사람이라, 막내들이 잔뜩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물론 준이 형이 이런 상황을 어느 정도 의도하고 말한 것임을 눈치챘지만, 빈말은 하지 않는 사람이라 이게 진심이라는 것도 알았다.
“너희가 전부터 한사람 몫을 하고 싶어 한다는 건 알고 있어. 그리고 이미 충분히 너희는 너희가 할 수 있는 만큼 잘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
찔리는 구석이 있는 세빈이와 찬이가 흠칫했지만, 의외로 경환 형도 같이 움찔했다.
저 형도 말만 안 했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네.
영빈 형이 경환 형을 보고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형들 오늘따라 한숨이 깊구나….
“하지만 그거랑 너희가 맞닥뜨리는 문제들을 상의하지 않는 건 다른 문제야. 형은 좀 서운하다.”
준이 형은 우리를 혼낼 때, 어떻게 하면 우리가 더 집중하고 잘 알아듣는지 너무 잘 알고 있는 게 문제였다.
금방 울상이 돼버린 세빈이와 시무룩해진 찬이.
“우리 데뷔하기 전에 형이 말했잖아. 우리는 한 팀이니까 꼭 서로에게 이야기하고 서로 도움이 되어주자고.”
“네….”
“응. 기억해.”
조그맣게 대답하는 찬이와 느릿하고 작은 목소리로 답하는 경환 형.
“기억하는데도 우리한테 말하지 않으니, 내 입장에서는 내가 못 미더워서 말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막내들에게 준이 형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우리에겐 우리 입장이 있듯이, 형들에겐 형들의 입장이 있었다.
우리는 그걸 간과한 거고.
“나도 영빈이도, 그리고 너희도 아직 어린 게 맞아.”
잠시 숨을 고른 준이 형은 우리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며 힘주어 말했다.
“그러니까 실수도 있을 거고 늘 옳은 결정을 내리지는 못할 거야. 그게 당연한 거고. 그래서 다 같이 고민하자고 말했던 거야.”
준이 형은 서로가 실수하지 않도록 우리가 서로를 도와야 한다고 했다.
설령 실수하더라도 다 같이 고민한 결과이니 그 과정에서도 얻는 게 있을 거라고.
그렇게 형은 최근 느낀 우리 태도와 걱정에 관해 이야기했고, 형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이야기했다.
“그냥… 우리도 우리가 알아서 잘하면 형들이 덜 힘들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랬어.”
얌전히 이야기를 듣던 찬이가 조심스럽게 자기 생각을 이야기했다.
가장 사고를 많이 치고, 혼나는 것도 자신과 세빈이었으니 자기들만 잘하면 될 것 같았다고.
나는 둘이 그런 생각까지 하는 줄을 미처 몰랐기에, 맏형들이 왜 그렇게까지 걱정하고 있었던 건지 그제야 알았다.
나보다 맏형들이 우리를 더 잘 알고 있었던 것.
나는 내가 얽혀서 생긴 문제들로 멤버들이 부담을 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 막내들은 자신이 짐이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했던 것.
심지어 경환 형은 본인이 형 노릇을 못 하는 것 같다 생각하고 있었다.
각자 생각했던 내용을 조심스럽게 꺼내자 모든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던 영빈 형이 입을 열었다.
“왜 우리가 대화가 중요하다고 했던 건지 알겠어?”
차분한 목소리가 각자의 아집에 빠져있던 우리를 흔들었다.
“급하게 어른이 될 필요도 없지만, 어른은 어떤 거다, 라고 정해진 것도 없어.”
안타까움이 깃든 영빈 형의 눈.
너무 성장에만 목매는 듯한 우리를 영빈 형은 안타까운 목소리로 멈춰 세웠다.
“그저 우리는 그때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고 서로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 손을 잡아주면 되는 거야.”
차분하고 조용조용한 영빈 형의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우리 사이에 깊이 내려앉았다.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누구나 혼자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게 있으니까.”
영빈 형의 말이 끝나자 준이 형이 이야기를 매듭지었다.
두 맏형의 경험이 묻어나는 이야기에 네 명 모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문득 쥐구멍이 있다면 들어가서 숨고 싶어졌다.
왜 내 기준으로 우리 애들을 재단하려고 했을까.
당장 나는 내 앞가림도 잘 못 하는 사람인데.
막연히 나 때문에 우리 애들이 힘들 텐데 하고만 생각했는데, 우리 애들은 그보다 더 깊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서로에게 더 도움이 되고 싶어서 고민하다 잘못된 방법을 택했던 것뿐이었다.
부끄러움이 몰려와 깊은 한숨을 내쉬자, 그때까지 단호한 얼굴을 하고 있던 준이 형이 픽 하고 웃었다.
“솔직히 형은 서운했다. 너희가 갑자기 입을 다물어 버려서.”
“그런 거 아닌 거 알면서….”
“말을 안 하는데 어떻게 알아, 인마.”
찬이가 힘겹게 부정했지만, 준이 형의 한마디에 금방 침몰해버렸다.
“난 힘찬이, 세빈이 너희 둘이서만 쑥덕거릴 때가 제일 불안해.”
“우리 왜요!”
“맞아! 우리 요새 잘하고 있는데!”
“몰라서 물어?”
영빈 형이 한마디 툭 덧붙이자 막내 둘이 삐약거리며 반항을 시도했다.
“그놈의 알림 소리 때문에 진짜 미치는 줄 알았어.”
영빈 형은 알림에 앙금이 남았는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잠은 진짜 어쩔 수 없어…. 난 이제 하준 형 목소리가 아니면 못 일어날 것 같아.”
“나도. 영빈 형이 깨워주는 거 아니면 잠이 안 깨요.”
이제 혼나는 시간이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두 막내는 각자 룸메이트 옆으로 슬쩍 붙었다.
하필 두 막내가 맏형들과 같은 방이었으니, 그동안 저 둘을 지켜보느라 형들이 고생 많았을 게 뻔했다.
준이 형 가슴에 머리를 들이밀며 되지도 않는 애교를 부리는 찬이와 못 볼 꼴 봤다는 듯 질색하는 세빈이.
세빈이는 그러면서도 영빈 형 옆에 붙어 앉아 힐끔거리며 영빈 형을 바라봤다.
“이제 와서 눈치 보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구요….”
영빈 형은 우물쭈물하던 세빈이 머리를 헝클어주었다.
각자의 방식으로 형들 기분을 풀어주려는 모습에 맏형들도 어이없다는 듯 웃고 말았다.
한편, 애교 부리는 막내들을 한번 보더니 나를 바라보던 경환 형이 무언가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왜요?”
“…왜 우린 반대야?”
“그건 형이 제일 잘 알고 있지 않을까?”
형은 그냥 듬직한 곰돌이로 남아줘, 저런 이상한 거 바라지 말고.
“우리 환이도 형이 안아줄까?”
“아, 하지 말라니까요?”
마냥 아쉬웠는지 양팔을 벌리며 나를 바라보는 거대한 곰돌이 형.
질색하며 하지 말라고 소릴 빽 질렀더니, 씩 웃으며 다가와 나를 와락 끌어안고 흔들어댔다.
“알았으니까 이제 좀 놔봐, 형!”
“그래그래, 형이 앞으로 더 신경 써줄게.”
“난 그게 아니잖아!”
훌쩍 들어서는 흔들어대던 경환 형은 자기가 만족할 만큼 날 흔들어대다 바닥에 툭 하고 놔버렸다.
“쟤 진짜 종잇장 같아, 어떻게 저렇게 흔들리지?”
“경환이가 힘이 좋은 게 아니고?”
“둘 다인 것 같은데.”
찬이가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리자 준이 형과 영빈 형이 덤덤하게 답했다.
평화로워진 저쪽과는 달리 나는 멀미가 날 것처럼 힘겨웠지만.
“오늘 연습량은 다 채운 거지?”
“그럼요!”
“개인 연습 하던 중이니까.”
“팀장님이 우리 대화 끝나면 숙소 가서 쉬라고 하셨어.”
그동안 숨 가쁘게 달려오다 간신히 짬이 난 하루였다.
우리끼리 이야기할 거 하고 나머지 시간은 좀 쉬라는 팀장님의 배려가 고마웠다.
어지러웠던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붙드는 사이, 경환 형은 혼자 만족스러워하고 있었다.
“아니, 왜 자꾸 나만 가지고….”
가만히 있다가 날벼락 맞은 나만 연습실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고, 막내들은 숙소에 가도 된다는 말에 신나있었다.
내가 진짜 언젠가 복수하고 만다.
흐느적거리는 나를 붙잡아준 영빈 형은 그러게 잘 먹어야 된다고 하지 않았냐며 잔소리를 했다.
내가 여기서 얼마나 더 잘 먹어야 해, 형…?
지금도 다른 사람보다 내가 먹어야 하는 양이 많은데?
억울한 마음에 쳐다봤지만, 영빈 형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진짜 부끄러워서, 내가.’
‘아니, 내가 뭘?!’
‘어디 가서 내 계약자라고 하지 마셈, 하.’
평소보다 더 싸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포잉의 발언에 억울한 건 나 혼자뿐이었다.
내 편이 아무도 없어!
분위기가 한 꺼풀 더 좋아진 건 다행이었다.
그저 그게 내 희생을 밑바탕으로 얻어진 거라는 게 슬플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