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 게릴라(1)
정윤은 최근 1년 사이 자신이 어디까지 분노할 수 있는지를 누군가 시험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냥 일만 하고 살아도 연애는 꿈도 못 꿀만큼 허덕이는데.
무슨 사건 사고가 이렇게 많이 터지는지 기가 차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후….”
UDTC 예능 국장은 최대한 이 일을 덮고자 했다.
연예인의 우울증이, 세상을 등지는 일이 이제 더는 먼 이야기가 아닌 세상이었다.
혹시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며 자신이 도울 수 있는 건 모두 돕겠다 했다.
정윤은 당사자의 의사를 들어보고 결정하겠다고 했다.
이 와중에도 억울하다는 눈빛을 보내는 주영욱이 우습기도 했고.
정윤은 이 일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되는 공정한이 제일 걱정이었다.
“응, 소현팀. 고생했어. 애들은 어때?”
소현이 수화기 너머로 멤버들의 무사함을 알렸다.
지환이도 생각보다 더 괜찮아 보인다는 말과 함께 모두 숙소에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래. 회사에서 보자. 연희 씨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소현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공연희.
그녀와의 통화가 떠올랐다.
정윤은 방송국으로 달려오는 동안 많은 사람과 연락을 했다.
그중 가장 먼저 연락한 것은 연희였다.
당사자인 만큼 제일 먼저 알려야 할 것 같다는 판단에서였다.
지환의 상태와 상황을 설명하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연희가 걱정되었다.
연희는 침착한 목소리로 자신의 회사에 이야기한 뒤, ON 엔터로 오겠다고 했다.
그 모습이 더 걱정되었던 정윤은 애들의 상담을 맡은 선생님을 추천해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갓 스무 살의 어린 나이로 부모님을 잃고 동생을 지켜온 연희.
생각해보면 지환뿐만 아니라 연희도 몹시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을 터.
쓸데없는 오지랖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추천 정도는 괜찮겠지 싶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그들의 계획처럼 일이 진행되지 않아 연희에게 꽂히는 시선이 많지 않으리라는 것.
연예인 가족을 둔 사람들은 그 나름의 곤란함과 불편함, 혹은 고통을 안고 살게 된다.
최대한 당사자의 삶이 존중될 수 있도록 정윤이 힘써볼 생각이었다.
“안녕하세요, 정윤입니다. 네. 이진아 기자님 맞으시죠?”
뉴데일리의 이진아 기자.
언래블에 매우 호감을 갖고 있는 기자로 패션쇼 사진으로 제법 많은 인지도를 쌓은 사람이었다.
“방금 뜬 기자 보셨죠? 이번 사건으로 이야기를 조금 하고 싶은데…. 당연히 이 기자님한테 좋은 소스 먼저 드려야죠. 네, 언제 시간 괜찮으세요?”
정윤은 그 후로도 친분이 있는 몇 명의 기자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주영욱 PD도 여론을 움직여보려고 했던 것 같았지만, 안타깝게도 여론전은 정윤의 특기였다.
* * *
“이건 예정에 없었잖아! 이제 어떡하지?”
프로젝트 ‘Origin’의 메인 작가 이경주는 급히 자신의 집으로 도망쳐왔다.
당장 그 자리에 있어 봤자 하등 이득 될 것이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주영욱 PD의 계획을 처음 들었을 때는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당사자가 아닌 가족에 대한 의문을 직접 언급하는 것도 아니고 운만 띄워주는 것.
언래블이 아닌 일반인에게로 초점이 맞춰지면 소속사에서도 날을 세우기 애매해질 테니까.
명분은 연습생들이 아이돌로 성공적인 데뷔를 했을 때 생길 수 있는 여러 문제.
그것을 성공적으로 해결한 언래블을 통해 배운다는 것이었다.
방송에서 가족과의 소통을 돕는다는 그럴듯한 겉껍데기도 씌워놨었다.
하지만 그들의 모든 계획은 그 자리에서 쓰러진 언래블 멤버로 인해 시작부터 어그러졌다.
나머지는 전부 다른 기자들이 알아서 할 것이라는 주영욱 PD의 말을 믿는 게 아니었다고, 경주는 이를 갈았다.
분명 그 자리에 있었으면 자신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겼을 터.
한숨을 내쉬며 노트북을 서재에 둔 이경주는 수북하게 쌓인 메시지를 무시한 채 인터넷을 열었다.
- 프로젝트 ‘Origin’ 방송사고?
- 녹화 중 쓰러진 언래블 멤버, 원인은 트라우마?
주영욱 PD가 스태프로 위장시켜 기자 몇 명을 넣어놨다는 걸 알고는 있었다.
그 때문에 바로 기사가 뜰 것이라 예상하긴 했지만, 내용이 문제였다.
기사는 대부분 방송을 안일한 태도로 기획한 제작자들을 탓하는 내용이었다.
불행한 일을 겪었던 소년이 아이돌이 되어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았지만, 방송국에서 그 트라우마를 자극했다는.
“박쥐 같은 새끼들, 하.”
미리 말을 맞춰둔 기자들이라고 했지만, PD가 불러온 기자니 그 수준이 뻔하다고 경주는 이를 갈았다.
우후죽순 올라오는 기사 중, 어느 곳 하나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기사는 없었다.
불안한 듯 입술을 물어뜯던 경주가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던 그때, 포잉이 나타났다.
PD나 공정한에 비하면 비교적 단순한 욕망에 움직인 인간.
하지만 그것은 포잉이 알 바가 아니었다.
거실에서 안절부절못하던 경주가 침실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포잉은 노트북이 있는 서재로 향했다.
사전에 공모했다는 증거물을 찾기 위해서였다.
연락은 핸드폰으로 했어도 노트북에서 메신저를 사용했으면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메일로 주고받은 정보도 분명 한두 가지쯤은 남았을 터.
포잉은 익숙한 손길로 노트북을 조작했고, 자동 로그인이 걸려있는 메일에는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포잉은 노트북에 로그인된 메신저를 통해 PD와의 대화 내용을 촬영했고, 정윤 실장의 이메일로 한 통의 메일을 보냈다.
자신은 주영욱 PD가 시켜서 대본을 작성한 죄밖에 없다며 선처해달라는 내용.
실상은 자신도 공모했다는 자백이나 마찬가지였다.
노트북을 다시 닫아둘까 했던 포잉은 창만 모두 닫은 채로 노트북을 그대로 두었다.
그저 메모장을 열어 문장 하나를 적어놓았을 뿐.
[당신이 벌인 일들을 알고 있다]
이런 일을 작당할 정도면 평소에도 곱게 살아오진 않았을 터.
주영욱 PD만큼은 아니지만, 저 작가도 충분히 역겨운 향을 풍기는 인간이었다.
혼자 작동한 노트북을 보고 겁에 질려 덜덜 떨 것을 상상하니 한결 기분이 좋아진 포잉.
현장을 빠져나오는 포잉의 등 뒤로 찢어질 듯한 비명이 들려왔다.
기운찬 포잉의 발걸음이 유난히 경쾌해 보였다.
* * *
상황을 파악하고 빠르게 손을 써둔 덕에 포잉은 순서를 지켜 하나씩 정리할 수 있었다.
이경주 작가 후에는 최병섭이었다.
애먼 짓거리를 한 탓에 ON 엔터의 방해로 일거리가 끊긴 상태였던 병섭.
그는 자신의 집에서 소주를 들이켜고 있었다.
주영욱을 돕고 방송국으로 복귀를 꾀해보려 했지만, 시작부터 어그러졌다.
“에드, 그 새끼 말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병섭이 얼큰하게 취한 얼굴로 식탁을 쾅 내리쳤다.
‘이거 봐라?’
포잉은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속으로 멜트의 에드를 떠올렸다.
어디서 정보를 수소문했나 했더니 에드에게 어느 정도 정보를 주워온 모양이었다.
이것만으로는 어디까지 가담했는지 알 수 없기에 에드에 대한 처분은 잠시 뒤로 밀어두었다.
지금 당장 급한 건 사실 이들이 아니라 공정한이니까.
포잉은 병섭에게 가할 응징은 어느 정도로 정해야 할지 조금 더 고민해보기로 했다.
숙소에서 확인한 계약자의 얼굴이 생각보다 괜찮았기에 공정한에게 들렀다가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휴, 바쁘다. 바빠.’
종일 이놈 저놈 쫓아다니며 움직이다 보니 늘 뽀송뽀송했던 발바닥에 땀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놈이 남았기에 포잉은 피곤한 몸을 조금 더 혹사하기로 했다.
나중에 계약자 놈에게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며 안마를 부탁할 생각이었다.
한편, 자신의 집으로 빠르고 돌아온 공정한은 핸드폰에서 방송국 놈들과의 접점을 지우고 있었다.
어차피 자신은 나가서 말 한두 마디밖에 한 게 없으니 다른 처벌을 가하긴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원래가 비실비실해 보이던 지환이니, 쓰러진 것은 자신의 탓이 아닐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저 아이돌 한다고 체중 감량을 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그렇게 애써 자신을 속였다.
마침 아내는 친정 식구들과 여행 중이었고, 자식들은 커서 분가한 지 오래였다.
그러니 이 집에 찾아와도 가족들에게 쓸데없는 소식이 전해지진 않을 터.
다른 형제들에게는 말하지 않았던 일이라 이대로 적당히 잘 넘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왜인지 모를 불안감에 거실을 서성이던 그때.
어디선가 희미하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이 스치는 소리라기보다 비닐이 바람에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가까웠다.
꺼진 TV를 다시 한번 확인한 정한은 현관문의 잠금장치를 확인했다.
도둑이 든 건 아니겠지, 하는 불안감에 조심스럽게 서재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그것만으로는 안심이 안 된 정한은 서재에 놔둔 골프채를 꺼내 꽉 움켜쥐었다.
자신 외에 아무도 없어야 할 집안에서 소리만 들려오니 불안해진 것.
서재의 문을 닫으니 바스락거리던 소리는 사라졌지만, 어디선가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도둑고양이 새끼들, 싹 잡아 치워야 하는데. 도대체 공무원 새끼들은 내 세금 처먹고 뭐 하는 거야?”
가뜩이나 마음이 불편했던 정한은 동네에 돌아다니는 고양이를 떠올리며 조그맣게 욕설을 내뱉었다.
손안에 골프채를 움켜쥐고 나니 없던 용기가 솟아난 듯했다.
조금씩 들썩이던 마음이 가라앉고 밖으로 나가 집안을 확인해볼까 하던 그때.
- 냐앙
“뭐, 뭐야?”
조그만 울음소리가 창문 쪽이 아닌 서재 문 너머, 그러니까 집 안쪽에서 들려왔다.
어디서 고양이가 집으로 들어온 건가 하는 생각이 들자 정한의 얼굴이 분노로 달아올랐다.
조금 전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필시 고양이가 집안을 뒤지는 소리라고 판단한 정한.
그는 보이는 즉시 골프채로 내리치리라 다짐하며 서재를 나섰다.
천천히 발걸음 소리를 죽여가며 집 안을 둘러보았지만 기이하게도 어느 곳 하나 고양이의 흔적은 없었다.
간신히 가라앉았던 마음이 다시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조용한 집안이 몹시 마음에 들었지만, 오늘따라 불길한 느낌에 자꾸만 식은땀이 흐를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 부엌에서 다시 한번 음산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 도둑고양이 새끼가!”
겁에 질린 만큼 큰 소리로 욕을 내뱉은 정한이 부엌으로 뛰어갔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시 들리는 고양이 울음소리.
골프채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뒹굴었다.
비싸게 주고 산 탓에 금이야 옥이야 아꼈던 물건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생각할 정신이 없었다.
이번에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온 곳은 서재였으니까.
주방과 서재는 일직선 상에 있어 무언가 움직였다면 정한이 못 봤을 리가 없었다.
방금까지 분노로 붉으락푸르락했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그리고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서재로 다시 향한 정한.
서재 문의 손잡이를 잡는 정한의 손이 발작이라도 하는 듯 떨리고 있었다.
평소에는 귀신같은 게 어디 있느냐고 큰소리를 쳐왔던 정한이지만, 지금 집 안에서 벌어지는 괴이한 일은 상식 밖의 일들이었다.
그렇게 떨리는 손으로 겨우 서재 문을 연 정한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저, 정욱아…!”
서재의 창문 앞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인 동생, 정욱이 서 있었다.
공정욱.
연희와 지환의 아버지인 그는 핏기없는 창백한 얼굴로 정한을 노려보고 있었다.
“넌 죽었잖아!”
비명처럼 외치는 정한을 한동안 말없이 노려보던 정욱은 천천히 한 손을 들어 올려 정한을 가리켰다.
그리고 다시 들려오는 고양이 울음소리.
달싹이던 입술이 무어라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던 정한은 경련하듯 사지를 떨다 혼절해버렸다.
정한이 정신을 잃자 정욱의 모습을 한 유령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포잉이 서 있었다.
‘이제 시작이다, 인간 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