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 Labyrinth(1)
포잉이 제출한 사유서를 확인 요정 장로 포포는 이런 내용을 써놓고 당당히 앞발로 도장을 찍은 포잉을 불렀다.
포잉은 장로들의 눈에 들 정도로 총명하고 또랑또랑한 요정이었다.
다만 그 성정이 문제라 다들 혀를 내둘렀을 뿐.
그래도 포포는 더 많은 생명과 교류하고 나면 분명 포잉의 날카로운 점들도 잘 다듬어지리라 믿었다.
하지만 타고난 성정은 쉽게 바뀌는 게 아니었으니.
“포잉, 계약자 외의 인간에게는 능력 사용을 최소로 해야 한다는 걸 알지 않느냐.”
“알죠.”
“아는 놈이 다른 인간들에게 계속 능력을 사용하느냐!”
점잖게 이야기하던 포포는 불퉁한 포잉의 대꾸에 미간이 왈칵 찌푸려지며 뒷목이 당겨오는 것 같았다.
원래부터 서글서글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능력이 제법 출중한 요정 아이였는데.
때문에 포잉이 자잘한 말썽을 부리거나 사고를 쳐도 포포는 대부분 포잉의 편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최근 포잉이 인간을 위해 치료 마법을 사용하고 다른 인간들의 꿈에 관여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계약자를 위한 마법은 사용할 수 있지만, 타인에게 직접 마법을 사용하거나 위해를 가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이 내용이 온 세계 모든 생명을 돕는 요정들의 기본 규칙이었다.
“하지만 치료 마법을 쓴 건 계약자가 정신력이 약하기 때문에 회복 가속을 쓴 것뿐이에요. 이미 보고서로 올렸잖아요.”
심약한 계약자의 정신건강을 위해 사용했다는 내용은 포포도 확인했다.
어떻게 보면 말장난이지만, 포잉이 맡은 계약자 자체의 특수성을 생각해 장로회는 따로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악의가 없는 행위였고, 실제로 죽음에 이를 정도로 심각한 질병이 아니었음을 고려한 결과였다.
다만, 종종 계약자와 함께 생활하는 인간들의 꿈에 관여하는 건 조금 다른 문제였다.
꿈은 소원 요정의 영역이 아니었다.
예로부터 꿈을 통해 여러 이야기를 전하는 건 신과 그의 사자들의 영역이었다.
“계속 계약자 외 인간들의 꿈에 관여하면 중급 시험을 중지시킬 수도 있다.”
애써 침착을 되찾은 포포가 포잉에게 엄하게 꾸짖었지만, 포잉은 코웃음을 쳤다.
“저 저, 버르장머리하고는!”
포잉의 모습에 분노한 포포의 꼬리가 거칠게 바닥을 탁탁 때렸다.
“솔직히 걔네가 자기 영역 뺏길 거 같으니까 게거품 물고 덤빈 거 아니에요?”
“너는 제발 요정의 품위를 생각하면서 입을 열어라, 이놈아!”
결국 포잉을 혼내는 건 포기한 포포가 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며 애써 마음을 다스렸다.
반감이 있을 수는 있지만 꿈의 영역을 담당하는 이들의 말도 틀리지 않으니까.
“꿈으로 예언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악몽을 행복한 꿈으로 바꾼 것뿐인데 뭐가 그리 제 발 저려서 난리들이래요?”
“각자의 영역에서 충실했기에 지금의 체제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게야. 앞으로는 제발 조심, 또 조심하거라.”
인간들이 흔히 백호라 부르는 호랑이의 모습을 한 포포.
포포는 이미 나이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긴 세월을 살아온 요정이었다.
그만큼 무수한 어린 요정들을 보아왔고, 하나하나가 모두 본인의 자손처럼 소중했다.
영리한 고양이인 포잉이 삐딱선을 타기 시작하면 어떤 사고를 칠지 몰랐기에 포포는 최대한 포잉을 달랬다.
“너도 잘 알고 있지 않으냐. 법칙은 지켜져야 한다는 걸. 모두가 예외를 만들기 시작하면 세상이 혼란에 휩싸일 것이야.”
“저도 알아요.”
포포가 자신을 걱정하기에 잔소리한다는 걸 포잉도 알고 있었다.
자꾸 잔소리하는 게 못마땅했지만, 으레 나이를 먹은 장로급의 요정들은 걱정이 많다.
“계약자를 위한다는 건 좋은 일이란다, 포잉. 하지만 꼭 능력을 사용하기 전에는 정말 계약자를 위한 것인지 두 번, 세 번, 고민 후 사용하거라.”
“알겠어요.”
포포의 앞발만 한 포잉은 정말이지 겁도 없는 요정이었다.
포포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포잉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겨우 포잉에게서 원하는 답을 얻어낸 포포는 포잉을 돌려보냈다.
처음부터 시스템의 존재 의미에 반감을 표했던 포잉.
사용자를 배려하지 않은 시스템이 무슨 쓸모가 있느냐고 최근 신랄한 보고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그 시스템 개발자가 누구인지 아는 건 소원 요정 중에서도 단 두 명뿐.
그중 한 명인 포포는 기가 막히면서도 내심 포잉이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는 걸 기특하게 보기도 했다.
요정 입장이 아닌, 실사용자인 계약자의 관점에서 서술된 꽤 쓸만한 내용이었다.
아직은 더 여물어야겠지만 여러모로 기대되는 아이였다.
포포는 부디 제 앞발만 한 어린 녀석이 무사히 임무를 끝내기를 빌었다.
이왕이면 사고도 치지 말고.
* * *
최병섭은 주영욱의 지시에 따라 언래블의 뒤를 캐고 있었다.
뒤를 캐는 것도 찝찝했고 누군가의 지시를 듣는 것도 썩 못마땅했지만, 이미 한배를 탄 이상 거부하기 어려웠다.
이미 방송국에서 자신만의 입지를 만들어가고 있는 주영욱이 자신을 불러준다는 약속은 무척이나 달콤했다.
처음 방향을 잡은 건 멤버들의 과거사였다.
이전 ‘알려지지 못한 이야기’로 꽤 많은 기사가 났었던 악플을 중점적으로 파기 시작했다.
허황한 이야기도 많았지만,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도 제법 숨어있었다.
당시에는 자신도 꽤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있기에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멤버들 개개인에게 큰 악감정은 없었지만, 이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 아닌가?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끝낸 최병섭은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ON 엔터가 언래블의 악플러들에게 어떻게 대응했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
특히나 정윤 실장은 척을 지면 여러모로 괴로워진다는 걸 직접 겪은 병섭이었다.
멤버들은 대부분 무난한 삶을 살아왔지만, 역시나 소문의 주축이었던 몇 명은 다양한 이야기가 나왔다.
대부분은 이미 여러 매체에서 수두룩하게 털었던 터라 딱히 건질만한 게 없었다.
하지만 지환에 대해 파면서 그의 친누나, 그리고 친가에 대한 여러 소문을 움켜쥘 수 있었다.
최근 지환의 누나가 어떤 병원을 방문했던 것과 그곳에서 말다툼을 벌였던 것.
큰 병원에는 눈도 귀도 많았고, 이미 이름을 알린 아이돌 그룹인 터라 취재 중이라고 말하면 대부분은 쉽게 입을 열었다.
병섭은 그런 이들에게 약간의 취재비를 쥐여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람은 자고로 무언가 대가를 받게 되면, 다른 사람이 물어도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 법.
병섭은 병원 특유의 건조하고 서늘한 느낌을 애써 지우며 볕을 즐기는 환자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슬리퍼를 끌며 링거 거치대를 밀고 오가는 환자들의 표정은 다양했다.
체념인지 포기인지 모를 무기력한 몸짓으로 한걸음, 한 걸음 내딛는 사람.
자신의 몸보다 커다란 환자복을 입은 작은 아이와 친구들이라도 온 것인지 신난 얼굴의 청년 등.
그 모든 얼굴을 지나 깡마르고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의 사내가 다가왔다.
‘공정한.’
그가 공지환의 큰아버지였다.
이름을 지어준 부모의 뜻이 너무 투명하게 보였지만, 정작 이름과 다른 그 행보에 병섭은 웃음을 삼켰다.
공정한. 그는 혈육의 정 따위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얼마든지 버릴 수 있는 차가운 피의 소유자였다.
본인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보였지만.
병섭은 직업이 직업인지라 이런 이들을 숱하게 만나보았기에 알 수 있었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정한의 뿔테 안경 너머로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한 희미한 흥분마저 보였다.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제가 연락드린 최병섭 PD입니다.”
“반갑습니다. 제가 공정한입니다.”
허허 웃으며 마주 잡은 손에는 서로의 욕망이 덕지덕지 묻어났다.
“전화로는 자세한 대화를 나누기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아서 이렇게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이렇게 얼굴을 한번 보고해야 서로 믿음도 생기고 하지 않겠습니까?”
주거니 받거니 하며 서로의 눈치를 보던 둘은 씩 웃더니 병원 근처의 카페로 이동했다.
그리고 이어진 대화는 최병섭이 그토록 바라던 지환에 대한 내용이었다.
더불어 정한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연희를 배제하고 지환을 휘두를 기회였고.
정한은 얼마 전 마주한 연희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말을 듣지 않던 연희는 커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지환을 제대로 챙기지 못해 병원을 들락거린 것을 뻔히 아는데도 부득불 자신이 기르겠다고 했다.
그걸 빌미로 동생의 유산을 모두 가져간 그 뻔뻔한 얼굴은 제 어미를 빼다 박았다.
그 여자는 처음 동생인 정욱을 꼬여냈을 때부터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원래 집안의 첫째가 잘돼야 그 아래 동생들도 보살피고 거둘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 교육 덕분에 정욱은 연희의 어미를 만나기 전까지는 월급을 착실히 집안에 보태던 착한 동생이었다.
그런 동생이 여자를 잘못 만나 삐뚤어졌고, 기어코 그 여자가 정욱을 잡아먹었다고, 정한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 아직 어린 지환은 본인이 잘 교육하는 게 옳다고 진심으로 믿었다.
유산 문제만 해도 그랬다.
자신에게 맡겼다면 어련히 잘 쓰고 불려서 각자 크면 돌려줄 텐데, 감히 자신을 사기꾼 취급했었다.
그러더니 이제는 지환이 벌어오는 돈까지 그 여자의 딸이 마음대로 취할 것을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치솟았다.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고 자신은 집안의 맏이인 만큼 아래 동생들의 관리도 자신의 몫이라고 정한은 속으로 되뇌며 눈앞의 PD를 바라보았다.
서로의 이익을 위해 각자가 필요한 만큼의 속내를 꺼내 보이는 둘의 모습이 무척이나 닮아있었다.
아마도 포잉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역한 감정들의 냄새에 코를 틀어막았을 것.
그렇게 정한은 정한대로 병섭은 병섭대로 만족할만한 성과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정한과 헤어진 병섭은 곧바로 영욱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한편, 영욱은 본인의 계획에서 조금씩 틀어진 방송 내용으로 심기가 불편했다.
골든아워의 행동을 넌지시 JC 엔터에 이야기해 보았지만, 이미 지환이 스킬을 사용해둔 덕분에 담당 실장은 별 반응 하지 않았다.
골든아워가 가진 회사 내의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인 데다 굳이 언래블을 곤란하게 만들 필요가 있느냐는 이야기였다.
획기적으로 시청률을 올리고 관심을 끌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면 JC 엔터에 먹히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 영욱.
그런 영욱에게 병섭이 전해온 지환의 가정사는 매우 흥미로웠다.
이 내용을 적당히 자극적으로 포장해 방송에 내보낸다면 꽤 많은 시청률을 챙길 수 있을 터.
다만 영욱이 작정하고 언래블을 곤란하게 하는 행동으로 보이지 않도록 세심한 포장이 필요했다.
영욱은 담당 작가에게 연락해 속살거렸다.
담당 작가도 자신의 대본대로 진행하지 않은 골든아워의 행동에 못마땅했던 터라 꼬여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들에게 무서운 건 JC엔터를 등에 업은 골든아워였지, 이제 막 기존 그룹 대열에 합류한 언래블이 아니었다.
게다가 언래블을 위한 자리라고 적당히 포장지만 덮어주면 그들에게는 별다른 관심이 쏠리지 않으리라 판단했다.
어차피 이전의 악플 사태처럼 물어뜯을 빌미만 하나 던져주면 사방에서 알아서 퍼트려 줄 테니까.
지환과 포잉이 알 수 없는 어느 곳에서 이미 그들의 작당 모의는 진행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