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287)화 (287/456)

287. I Don't Care(3)

이미 깊어진 어느 밤, 지속된 연습과 일정에 지친 멤버들은 쓰러지듯 누워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잠든 그 시간, 세빈은 형들 몰래 거실에 나와 공용 노트북을 켰다.

수면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건 너무 힘들었지만, 자신만 뒤처진다는 느낌이 또다시 세빈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다른 멤버들이 알면 세빈에게 괜찮다고, 다 같이 커나가는 중이라고 다독일 것이라는 걸 알기에 비밀로 하고 싶었다.

멤버들의 다정한 위로는 늘 받고 있기에, 세빈은 자기 자신만이라도 스스로 혹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현실에 안주해버리면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 같아 조금이라도 시간을 쪼개서 부족한 점들을 채우려 했다.

최대한 일정에 지장을 주지 않아야 했기에, 공부 시간은 삼십 분에서 한 시간을 넘기지 않도록 하고 있었다.

오늘도 늦게까지 이어진 연습에 이미 눈꺼풀이 무겁고 침대에 눕고 싶었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

익숙한 공간이 주는 편안함, 폭신한 러그의 감촉, 따뜻하고 몽글한 이 공간에서 멤버들과 보낸 시간.

모든 것들이 소중했고, 그렇기에 앞으로도 더 오래도록 지속되길 바랐다.

‘잘하고 싶어.’

세빈은 데뷔가 확정되기 전, 숙소에서 연습생으로 지내는 동안 느꼈던 감정들을 가끔 꺼내어 곱씹었다.

수많은 사람이 각자의 꿈을 안고 왔었고, 포기하고 절망하며 떠나갔다.

더 좋은 곳으로 가서 잘 된 사람도 있었고, 데뷔는 했지만 금방 사라진 사람도 있었다.

온갖 욕망이 이전 숙소에 덕지덕지 남아있었다.

그 공간에서 세빈은 나약했다.

제일 어렸고, 작았고, 보컬 레슨 때는 늘 지적받아야 했다.

평가 때마다 심각한 얼굴을 한 트레이너 쌤들의 얼굴이 무서웠고, 엄격한 팀장님의 시선이 무서웠다.

하지만 버티고 버티다 보니 데뷔 조가 되었고 결국 지금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

다만, 최근에는 지금까지처럼 버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현대 무용 학원에서는 칭찬받는 일이 더 많았지만, 여기서는 그저 한 명의 연습생이라는 걸 너무 뼈저리게 알아버렸다.

‘부스럭.’

세빈은 졸음을 깨기 위해 주머니에 있던 레몬 사탕을 조심스럽게 꺼내 입에 물었다.

금방 입안 가득 새콤달콤한 맛이 퍼지면서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곧 이어질 앨범 촬영이나 뮤직비디오 때문에 다들 식단을 조절하는 중이지만, 하나 정도는 괜찮겠지 싶었다.

이어폰을 고쳐 끼고 인터넷 강의에 집중하는 얼굴이 무척이나 진지했다.

세빈이 기초 이론을 제대로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형들의 대화를 점점 이해하기 힘들어져서였다.

형들은 곡을 만들 때 멤버들의 의견을 많이 담고 싶다고 말해왔다.

우리가 부를 노래니까 되도록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싶다고.

모두가 그 의견에 긍정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게 어느 순간부터 전문적인 영역에 들어서자 그때부턴 이해가 힘들었다.

세빈이 가장 신기했던 건, 자신과 두 살 차이인 지환이 형들과 어려움 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

지환에게 그런 모습이 멋있다고 이야기하자, 되려 쑥스럽다는 듯 웃으며 춤에 대해 이야기 하면 자신은 못 알아듣지 않냐고 했다.

하지만 세빈은 알고 있었다.

데뷔 조가 확정됐을 때, 그리고 데뷔 초.

지환이 다른 멤버들 몰래 어떻게 연습을 했는지.

사고 후 남들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모습을 보였지만, 홀로 작은 연습실에서 울고 있던 뒷모습을 보았다.

얼마나 지친 건지 평소에는 예민한 사람이 인기척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불도 제대로 켜지 않은 어두운 연습실, 좁은 공간의 울림, 유난히 작아 보이던 뒷모습.

잘 안된다고, 어떡하냐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너무 힘겨워 보여서 그 장면이 뇌리에 새겨넣듯 각인 돼버렸다.

많이 사용한 공간 특유의 희미한 먼지 냄새와 바닥에 툭툭 떨어져 있는 물방울의 얼룩.

눈감고도 찾아갈 수 있을 만큼 익숙한 연습실이었지만 그날만큼은 세빈에게 그 공간이 평소와 전혀 다르게 보였다.

늘 차갑기만 했던 지환이 다정해져서 좋다고만 생각했는데.

사실 자신을 바꾸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노력했던 건 아닐까?

세빈은 지쳐있는 뒷모습을 남몰래 한참 동안 지켜보다 돌아갔다.

당시 지환이 너무 위태로워 보여 세빈은 차마 어떤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다른 형들에게는 말하지 않은 세빈만의 비밀이었다.

무섭다고 피할 게 아니라 먼저 다가갔어야 했다는 후회.

그날 이후 세빈은 자꾸 지환에게 시선이 갔고, 막연히 더 잘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숨기려 했던 모습을 훔쳐봤다는 미안한 마음에서 시작된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지금, 그렇게 버거워하던 지환은 과거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동안 멤버들 모르게 얼마나 많은 눈물을 삼켜가며 공부했을까 싶어 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무거웠던 눈꺼풀을 꾹꾹 누르던 세빈이 다시 눈을 떴을 때, 눈동자에는 졸음이 아닌 독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언제까지고 멤버들에게 보호만 받아서는 성장할 수 없다고, 세빈은 그렇게 이를 악물었다.

* * *

팀장님이 이야기했던 대로 뮤직비디오를 촬영하게 될 감독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재밌고 즐거운 시간이었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머릿속의 이미지를 실제 현실로 끌고 와 시각화를 한다는 게 막연하고 어렵기만 했었는데.

그동안 우리 뮤직비디오를 쭉 촬영해주셨던 감독님이라 친근해서 부담이 덜했던 것도 있었다.

“지환아, 영상엔 관심 없니?”

“제가요? 어휴, 그냥 짧은 영상 짜깁기나 조금 하면 모를까요.”

과거 덕질하던 때를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내 모습에 감독님은 재밌다는 듯 웃었다.

“관심 있으면 언제든 물어봐. 알려줄 수 있는 건 알려줄게.”

“진짜죠? 나중에 막 귀찮아하시면 안 돼요?”

“어이쿠, 벌써부터 겁난다, 야.”

단순히 혼자 상상했던 것들이 감독님, 회사 관계자들과의 대화를 거치며 점점 구체화되었다. 그건 곡을 만들 때랑은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물론 내가 할 수 있는 건 소스를 제공하는 정도였기에 실무진들의 대화는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굉장히 부담스러웠던 처음과 달리 편안하게 흘러간 분위기였기에 더 몰두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환이가 복덩이야, 복덩이.”

“팀장님, 그만 해요….”

“왜, 맞구만. 일도 잘 골라오지, 곡도 잘 만들지, 이제는 뮤직비디오 스토리도 짜오고. 아주 팔방미인이구만, 뭘.”

“으아아! 그만 하세요!”

놀리듯 건네지는 칭찬에 얼굴이 화끈거려 질색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하나같이 재밌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평소 찬이를 놀리던 업보가 이렇게 돌아오는 건가 하는 생각에 기운이 쪽쪽 빠져나가 버렸다.

“자, 그러면 일단 정리를 해보자.”

“일단 세트는 여기랑 여기를 이어서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소품은 여기서 저렴하게 대여할 수 있다고 하네요.”

긴 시간 이어진 회의에 다들 피곤해했지만, 조금 전 작은 소동으로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린 것 같았다.

그래요, 여러분이 힘이 났다면 제 한 몸 희생해서….

어쩐지 속이 쓰린 것 같았지만, 모른 척하기로 했다.

“근데 팀장님, 이렇게 두 편을 찍어버리면 비용이 너무….”

“어허, 병아리들은 그런 거 신경 쓰는 거 아냐.”

아니, 저기요, 팀장님?

다른 분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나는 속으로 꾹꾹 눌러두었던 걱정거리를 조용히 팀장님께 속삭였다.

여러모로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물 들어왔을 때 열심히 노 저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투자 비용을 생각 안 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그만큼 돈을 못 벌면 앞으로 더 힘들어질 텐데 하는 걱정도 있었고.

내부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모르겠지만, 두 곡 모두 앨범에 넣기로 했다는 말에 좋아했었다.

다행히 두 곡이 같은 작곡가의 곡이어서 이야기가 더 잘 되었다고.

가장 의외였던 건, 그렇게 좋은 곡을 보내준 작곡가가 신인이라는 점이었다.

기존의 인기 작곡가분들이 이리저리 재보다 더 인지도 있는 아이돌에게 곡을 넘겼다는 건 분위기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곡을 듣고 나니 차라리 그렇게 돼서 다행이다 싶었다. 덕분에 우리가 이 곡들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

둘 다 이번 우리 앨범과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내심 이걸 바라기도 했었다.

하지만 뮤직비디오가 두 편인 건 조금 다른 문제였다.

근심, 걱정 가득한 내 시선을 눈치챈 팀장님은 태연한 얼굴로 어깨를 두드리며 싱긋 웃었다.

“투자할 거면 제대로 하는 게 대표님 스타일이야. 너희는 앞으로 훨씬 더 잘될 거니까.”

정작 당사자인 나는 불안해하는데 팀장님은 우리가 무척이나 잘 될 거라고 자신만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마음을 쿡쿡 찔러대서 더 무어라 말을 할 수 없었다.

그저, 최대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야겠다고 다짐할 뿐.

오늘도 포잉은 그런 내 모습을 투명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포잉, 정말 괜찮을까?’

‘내가 듣기에도 둘 다 꽤 괜찮았음. 둘 다 잘되면 좋은 거 아님?’

‘그렇긴 한데….’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라는 포잉의 위로에도 담이 작은 내 심장은 콩닥거리기 바빴다.

제발, 잘 됐으면 좋겠다. 진짜로.

* * *

“오늘은 여러분을 위해 손님들이 왔어요.”

“기대되죠? 개인적으로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분들입니다.”

연습실 밖에서 대기하던 우리는 연습실 안에서 능숙하게 능청을 떨고 있는 골든아워 형들 모습에 입꼬리를 꾹꾹 눌렀다.

너무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등장하는 건 못나 보일 것 같았으니까.

“들어오세요!”

약속된 사인에 연습실에 들어가자 초롱초롱한 눈동자들이 우리에게 따라붙었다.

“안녕하세요, 언래블입니다.”

“반가워요!”

활기차게 인사하는 우리에게 단우 형이 다가와 눈을 찡긋하더니, 내 어깨를 감싸 안고 다른 형들 앞으로 끌고 갔다.

“혹시 언래블 모르는 분들 없죠?”

“에이, 설마. 최근에 제일 핫한 신인이잖아요.”

“제발, 당사자들 앞에 두고 금칠은 그만해주세요…. 저희 애들 부끄러워 죽으려고 하잖아요.”

사전 건네받았던 대본을 숙지했던 터라 우리 대화는 어색함 없이 쭉쭉 이어질 수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 터라 낯을 많이 가리는 세빈이가 조금 긴장한 듯했지만.

“개인적으로도 굉장히 좋아하고 기대하고 있는 그룹이에요. 어쩌면 저희보다 여러분 마음을 더 잘 이해하고 도와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요.”

평소의 능글맞고 장난기 가득했던 말투가 아닌 다정한 선배의 모습으로 이야기하는 하겸 형이 굉장히 낯설었다.

나도 저 모습에 속았지만….

“자, 그럼 우리 모두 좀 편하게 앉아서 이야기를 계속 나눠볼까요?”

촬영하는 동안에는 연습생이나 현역이나 모두 서로에게 예의를 갖춰 말하게 되어 있었다.

편하게 말을 하면 친근해 보일 수는 있었지만, 너무 격이 없어 보일 수 있다는 작가님의 설명이 떠올랐다.

골든 아워 형들의 옆에 우리가 쪼르르 앉았고, 맞은 편에는 ‘Origin’ 프로젝트의 참가자들이 앉아있었다.

20명의 연습생.

그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길게는 몇 년, 짧게는 몇 달 동안 이미 연습생 생활을 해왔을 이 사람들에게서 처음 우리 애들을 마주했을 때 모습이 보였기 때문일까?

간절함과 기대감이 뒤섞인 시선에 더 잘해줘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오늘은 첫날이니까 가볍게 서로 대화를 조금 나누고, 팀 미션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이번 팀 미션에서 우승한 팀에게는 그만큼 혜택이 돌아갈 예정이니까 다들 열심히 해줬으면 좋겠어요.”

인하 형과 하준 형이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연습생들에게 앞으로의 일정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우리는 방긋 웃는 얼굴로 우리가 무해함을 어필하고 있었고.

이번 프로그램에선 골든아워 형들이 팩트로 연습생을 두들겨 패는 역할이었고, 우리는 연습생들을 다독여주는 역할이었다.

무서운 직속 선배님이랄까.

이후 등장할 멜트가 우리 역할을 이어서 수행하고, 중재자로 입지를 굳히면서 우리는 퇴장하는 그림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하겸 형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연습생들을 살피고 있었다.

뭐지, 무슨 일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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