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 I Don‘t Care(1)
언래블의 공식 채널에 새로운 영상이 업로드되었다.
영상은 언래블의 팬이라면 익숙할 연습실.
화면 속 멤버들은 카메라를 등지고 서서 자기들끼리 무언가를 이야기하며 웃고 있었다.
하준이 바람처럼 가볍게 웃으며 경환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니 힘찬이 해맑게 웃었다.
영빈이 지환의 어깨를 두드리며 무어라 이야기하자 지환의 귓불이 빨갛게 물들었다.
무언가 부끄러운 것 같기도 하고 기쁜 것 같기도 했다.
세빈이 웃고 있던 힘찬의 등을 두드리며 무어라 말했다. 그때 지환이 카메라를 발견한 건지 카메라를 가리켰다.
당황한 듯 카메라 가까이 다가온 하준이 이리저리 만지는 듯 화면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 진짜 켜져 있었어요? 와씨, 나 좀 부끄러운데.
- 뭐, 어때. 나쁜 짓 한 것도 아닌데.
멤버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던 그때, 세빈이 물었다.
- 카메라 켜진 김에 우리 요새 연습하는 거 보여주는 건 어때요?
- 그럴까? 안 틀릴 자신 있는 거지?
- 이거 찍을 때 틀리는 사람이 화장실 청소하기!
- 지독한 사람들이야, 진짜….
자기들끼리 뭐가 그리 즐거운지 대화하는 내내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 음, 여러분, 안녕하세요? 언래블입니다. 인사가 늦었네요.
- 솜뭉치들 안녕요!
- 좀 제대로 인사할 수는 없는 거야?
하준이 카메라를 들었는지 멤버들이 투닥거리는 모습이 높은 앵글로 보였다.
힘찬의 등에 매달린 세빈이가 종알거리며 힘찬에게 잔소리하고 있었다.
그 옆에 선 지환은 뭐가 그리 좋은지 흐뭇한 얼굴로 멤버들을 지켜보고 있었고.
이윽고 하준은 조만간 얼굴을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말로 앞으로의 스케줄을 넌지시 알리며 씩 웃었다.
- 다 보여드리는 건 안 되니까 조금만 보여드릴게요.
다정한 목소리가 비밀을 이야기하듯 속삭이더니 원위치에 카메라를 올려놓는 듯했다.
이윽고 대형을 갖춘 멤버들은 노래도 없는 상태에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빈이 중앙이었고, 다른 멤버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박자를 세듯 고개를 까딱거리던 세빈이 바닥을 한번 툭 치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물결치듯 손을 움직였다.
그 손짓을 따라 사방을 둘러싸고 있던 멤버들이 가볍게 몸을 돌려 세빈의 뒤에 일렬로 늘어선다.
부끄러웠는지 얼굴이 조금 달아오른 세빈이 제 자리에서 통통 바닥을 튕기듯 가벼운 스탭을 밟으며 빙그르르 돌았다.
세빈의 손끝이 허공을 톡톡 건드렸고, 그와 동시에 멤버들이 한 명씩 세빈을 중심으로 대형을 유지한 채 돌았다.
짧은 시간 펼쳐진 퍼포먼스 후 카메라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선 힘찬이 씩 웃더니 손가락을 세워 입술 앞에 가져다 댔다.
- 쉿, 비밀이에요.
간질거리게 웃던 힘찬의 미소를 끝으로 영상은 끝났다.
영상이 공개되자마자 팬들의 댓글이 무수히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새 앨범의 힌트를 주는 건가 했던 팬들은 영상 속 안무가 어딘가 익숙하다는 사실을 금세 깨달았다.
방금 멤버들이 보인 춤은 꽤 인기 있었던 곡의 안무였다.
그리고 얼마 후, 포털 사이트의 연예란에는 하나의 기사가 업로드되었다.
[메인쇼] 언래블의 ‘영원하기를’이 기대되는 이유
‘메인쇼’라는 프로그램은 메이저 프로그램이라고 하기는 모호했지만, 커버 무대를 보여주는 것으로 유명했다.
게스트에게 주어지는 미션은 과거 인기곡의 커버 무대.
다만, 이 프로그램은 화려하고 웅장한 무대를 지향하지 않았다.
얼마나 과거의 무대 분위기를 잘 재연하느냐에 중점을 두었기에 호불호가 많이 갈렸다.
팬들의 의견도 도대체 왜 출연하냐는 쪽과 질 나쁜 프로그램보다는 이게 낫다는 쪽이 나뉠 정도.
추억 재탕용 프로라고 불리는 게 보통의 평이었다.
그럼에도 팬들은 그 모든 것을 떠나 설레는 기분이 들었다.
언래블이 커버 송을 부른 적은 있어도 타 가수의 무대를 보여준 적은 없었으니까.
* * *
“춤추려면 어려운 포즈로 버티거나 평소에 안 쓰는 근육까지 다 쓰면서 움직여야 하니까 근력이 중요해.”
“맞아! 그러니까 운동을 해야 한다니까?”
“날 그냥 포기해, 쫌!”
양쪽에서 내 팔을 붙들고 진지하게 말하는 둘을 애써 무시하며 이마를 짚었다.
타이틀 곡에 대한 최종 결정만을 남겨놓은 터라 연습 시간은 점점 더 늘어만 갔다.
곧 출연할 프로그램을 대비해 연습하는 시간은 별도였고.
일정을 소화하는 것만으로도 지치는데 경환 형과 찬이가 체력단련을 빌미로 운동하자고 조르고 있었다.
제발 나 좀 그냥 놔뒀으면 좋겠다….
둘은 숨이 죽어버린 솜인형처럼 흐물거리는 내 모습이 안쓰럽다고 했다.
그러니 운동을 해서 체력을 더 키워야 한다고.
걱정해주는 건 고마웠지만, 내게 필요한 건 휴식이라는 걸 제발 좀 알아줬으면 싶었다.
준이 형과 영빈 형도 있는데 왜 나만…!
간신히 둘의 등을 떠밀어 보내버린 나는 팔다리를 주무르며 오늘 지적받았던 내용을 떠올렸다.
매일 이렇게 연습을 하는데도 늘 아쉬운 점이 나온다.
얼마나 더 하면 아쉽지 않을까.
안무를 떠올리다 보니 꿈에도 나왔던 여태까지의 안무들도 떠올랐다.
I‘m OK와 폭풍전야는 어두운 분위기였다.
곡 분위기 따라 춤까지 너무 무거우면 듣고 보는 사람이 숨 막힌다는 제영 쌤.
웅장하고 절도 있지만 무거워 보이지는 않도록 안무를 짤 때 꽤 많은 정성을 쏟았다고 들었다.
칼같이 각을 잡아 절도있게 몸을 움직이지만, 최대한 발의 움직임을 줄였다.
덕분에 춤추는 우리를 볼 때 크게 바빠 보이지 않았다.
섬세한 연기를 위해 손끝은 나긋나긋하게 움직여야 했고.
그 분위기 사이, 연주에 맞춰 강렬한 포인트를 넣었다.
허공으로 뛰어올라 무대를 찍는 장면이라든가, 무릎 꿇은 상태에서 몸을 반 바퀴 돌려 퍼지는 장면 등.
사실 이런 안무가 죽을 것처럼 힘들었다.
몸이 흔들리면 춤이 경박해 보이고, 하늘하늘한 게 아니라 흐느적거리는 것같아 보인다고.
제영 쌤에게 반쯤 울면서 살려달라고 외치던 멤버들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깔딱거리는 숨을 겨우 몰아쉬던 꼬질꼬질했던 내 모습도.
으, 꿈에 나올까 무섭다.
고개를 휘휘 저어 무서운 기억을 치워버렸지만, 어째서인지 등골이 오싹했다.
타이틀곡이 확정되지도 않았는데 이번 안무도 쉽지 않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Pluto’ 때와 같이 부드러운 움직임만 있는 무대를 바라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래도 나와 우리 애들의 관절은 소중하니까.
영빈 형에게만 뼈에 좋은 약을 사다 주는 게 아니었다.
그냥 인원수만큼 살걸….
그때의 어리석은 날 탓하며 지적받았던 동작을 다듬던 그때, 우진 형이 찾아왔다.
“환아, 시간 됐다.”
“아, 벌써요?”
“가자. 갔다가 너희 저녁도 먹어야지.”
어깨를 툭툭 두드려준 형을 따라 걷다가, 나는 포잉을 조용히 불렀다.
‘?’
‘포잉, 우진 형 이제 괜찮은 거야?’
‘나아지고 있음. 당사자가 철저히 관리하고 있기도 하고.’
‘다행이다….’
우진 형의 병을 알아낸 그때부터 포잉은 틈틈이 형을 치료했다.
내 불안을 이해해준 포잉 덕에 형은 몸이 좀 가뿐해졌다고 말할 정도로 좋아졌고.
모든 게 처음에 비하면 훨씬 안정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계속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일까?
자꾸만 답답해지는 가슴을 꾹 누르며 자잘한 생각을 털어버렸다.
난 늘 생각이 너무 많아서 문제였으니까.
* * *
세빈은 노트를 뒤적거리다 얼마 전의 일을 떠올라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눈앞의 경환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지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가수라는 직업을 평생의 일로 생각한 만큼 노래에 대한 욕심은 늘 있었다.
가장 좋은 건 춤이었지만, 그렇다고 노래를 소홀히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런 세빈이 더 자극받고 용기 낼 수 있었던 건 같은 팀 형들 덕분이었다.
형들은 가끔은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이상하게 굴기도 했다.
모든 의욕을 상실한 사람처럼 바닥에 눌어붙어 꿈쩍도 안 하는 날도 많았고.
하지만 함께한 많은 밤과 수많은 대화의 끝은 언제나 노래였다.
형들은 늘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과 언래블이 하고 싶은 음악을 이야기했다.
세빈은 아직 그 둘의 경계를 나누기 어려웠다.
세빈은 함께 하고 싶은 무대는 굉장히 많았지만, 홀로 하는 무대는 상상되지 않았으니까.
그런 세빈이 하준을 찾은 건 어쩌면 당연한 행동이었다.
하준은 리더였고 의지할 수 있는 형이었으니까.
그런 세빈을 위해 하준은 생각을 적어보자고 했다.
어떤 노래를 하고 싶은지, 어떤 곡을 만들고 가사를 쓰고 싶은지 구분하지 말자고.
그냥 노래를 듣다 느끼는 것도 좋고 갑자기 생각난 생각도 괜찮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하준의 조언에 용기를 낸 세빈은 그때부터 메모를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날, 경환에게 노트를 보여주게 되었고 한 발자국 더 나아갈 수 있었다.
엉성했던 단어들로 노랫말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경환에게 배웠다.
힘찬과 안무를 만들어 볼 때와는 또 다른 설렘이 있었다.
세빈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팀의 모든 형이 세빈에게 언제나 적절한 조언과 용기를 주었기에 세빈은 더 움직일 수 있었다.
전처럼 소심하고 겁 많은 자신이 이만큼 변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세빈아, 너는 이걸 누가 불렀으면 좋겠어?”
“네?”
다른 멤버들에게는 말하지 않고 경환과 둘이 곡 하나를 완성한 날, 경환이 물어왔다.
“이거 누구 생각하고 쓴 거 아냐?”
경환의 눈이 은밀하게 반짝였다.
장난치기 전의 모습이라는 걸 세빈도 알았지만, 틀린 말도 아니어서 반박하기 어려웠다.
처음 가사를 적어봤던 그 날처럼, 세빈은 이번 곡에 가사를 적으면서도 멤버들을 떠올렸다.
그때는 우리를 괴롭히는 것들과 힘들어하는 멤버들이 떠올랐다.
반면 이번에는 이상할 정도로 뚜렷하게 대상이 정해져 있었다.
간질거리는 느낌 때문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져 입을 꾹 다물었다.
“우리 막내, 부끄러워요?”
“처음 해보는 거라 그래요!”
“처음은. 플루토 작사에 네 이름도 올라갔을 텐데?”
자꾸만 놀리는 경환을 한 대 때려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한편 경환은 그런 동생을 마냥 귀엽다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자기 이름을 말하는 것도 부끄러워했던 동생이었다.
그런 주제에 노래만 틀어주면 홀린 듯이 박자를 타고 몸을 놀렸던 애라 신기했다.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동안 조금씩 대화는 늘었지만, 늘 사람을 무서워했다.
제일 작았고, 어렸고, 몰캉하고 하얗기만 했던 소동물 같았던 막내.
시선을 마주치는 것조차 쭈뼛거렸고, 좀처럼 먼저 말을 걸지도 않았다.
그랬던 세빈이 이제는 훨씬 명확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고, 호와 불호를 입에 담았다.
그런 변화에는 지환의 태도가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생각해 보면 모든 멤버들이 그랬다.
영빈은 멤버 간의 장난을 이제 편하게 받아들였다.
당장 경환만 해도 이전 자신이 어떻게 멤버들을 대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힘찬은 더 중심이 잡혔고, 세빈은 솔직해졌다.
가장 한결같았던 건 하준뿐이었다.
“그래도 환이는 네가 이야기하면 기뻐할 것 같은데?”
“그럴까요?”
누가 불렀으면 좋겠냐는 물음에는 주저하던 세빈이 경환의 말에 냉큼 답해버렸다.
“그럼. 환이가 막내를 오죽 아껴야지.”
“다 그렇죠, 뭐. 형도 환이 형 맨날 기특하다는 듯이 보면서.”
둘은 지환을 두고 잠시 이러쿵저러쿵 투덜거리다 결국 웃어버렸다.
당사자 앞에서는 못할 부끄러운 말들이 꽤 많이 흘러나온 탓이었다.
“어쨌든 형은 지환이 목소리도 괜찮을 것 같아. 그러니까 한 번 물어볼게.”
“저도 환이 형이 형이랑 같이 부르면 잘 어울릴 것 같아요.”
핸드폰 표면을 톡톡 두드리던 세빈은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지환이 보지 못한 곳에서 멤버들은 이렇게 또 조금씩 자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