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269)화 (269/456)

269. 아름다운 밤(5)

“전에 실장님이 그러셨잖아요. 싫은 건 싫다고 말해도 된다고. 저희는 이 몰래카메라가 싫어요. 근데 그냥 무작정 싫다고 하면 저 사람들이 우리를 철부지로 볼 것 같아서요.”

양쪽에서 세빈이와 찬이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여태까지 회사에 ‘싫어요!’하고 직접적으로 의견을 말한 적 없어서 우진 형이 우리를 아낀다는 걸 알아도 무서운 것 같았다.

그런 둘의 마음을 이해했기에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지지 않도록 웃었다.

“형, 우리는 그런 몰카 안 찍어도 충분히 서로를 아끼고 있다는 걸 알아요. 그리고 가뜩이나 예민한 우리 멤버들이 억지스러운 상황 때문에 스트레스받는 것도 싫고요.”

일부러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하자 우진 형이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그렇게 서로 놀라고 마음 상해가면서 찍는 몰카는 우리 팬들도 안 좋아할 것 같아요.”

우진 형이 진지하게 이야기를 듣고 있자, 세빈이도 마음이 한결 놓였는지 자기 생각을 천천히 말했다.

“맞아. 형, 우린 싫으니까 그 사람들이나 몰카 하라고 하자. 난 차라리 몸이 힘든 게 낫지 이렇게 머리 아픈 거 싫어.”

찬이까지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며 자기 생각을 말하자 형도 피식 웃었다.

“그래, 그냥 단순히 싫어요! 하고 투정 부리는 것보다 직접 경험해보고 얼마나 더러운 기분인지 느껴봐라, 이거지?”

“아니, 뭐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건 아니지만요.”

우진 형이 대놓고 놀리듯 말하자 거기다 대고 맞다고 하기도 민망했다.

늘 그렇듯 우리는 불리한 상황에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방긋 웃었다.

“어휴, 이놈 자식들.”

꿀밤을 때리는 시늉을 하던 우진 형에게 전화가 온건 그때였다.

* * *

최병섭은 생각보다 일이 커지자 곤란해졌다.

선배인 윤관영의 부탁을 받았을 때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이미 스토리도 정해져 있으니 적당히 찍고 적당히 지나가면 된다고.

그러다 촬영 내용을 확인했을 때, 너무 심심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밍밍하고 무난한 내용으로는 주목을 받기 힘들 테니 약간의 양념을 쳐주기로 했다.

서브 미션처럼 이 정도는 감독의 재량으로 가능하다고 판단했기에.

추가 제작비가 소모되는 것도 아니고 촬영을 조금 더 하는 것으로 새로운 콘텐츠 하나를 뽑을 수 있는 거니까 되려 이득이라 생각했다.

최병섭도 별다른 악의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늘 하던 대로, 조금 더 큰 자극이 더 많은 뷰수를 뽑는다는 생각으로 움직였을 뿐.

그의 입장에서는 되레 더 재밌는 영상을 뽑아주자는 약간의 선의와 미래 고용주가 될지도 모를 ON 엔터에 대한 서비스였다.

하지만 그의 가장 큰 문제는 언래블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것이었다.

하필 스태프들 역시 윤 감독처럼 언래블을 세세히 알지 못했고, 실제로도 몰래카메라는 흔히 쓰는 소재라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다들 당연히 해당 내용이 ON 엔터와 이야기가 됐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분위기가 더 흉흉해지자 그제야 다들 무언가 잘못됐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하준은 연기라고 쳐도 상황을 모를 지환의 반응이 굉장히 날카로웠다.

마치 여태까지 현장에서 마주했던 지환과는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감정이 상했는지 빈정거리듯 말하던 지환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자 멤버들과 우진 매니저까지 그를 따라 움직였다.

심각한 얼굴이 된 하준, 무표정한 경환과 괴로운 듯한 영빈.

결국 상황을 빨리 밝히고 정리해야겠다고 판단한 감독이 하준을 따로 불러내려 할 때, 옆에 있던 스태프가 귓속말로 물었다.

“감독님, ON 엔터에 사전 양해 구하신 거죠···?”

“이 정도 변경도 미리 이야기해야 합니까?”

“그, ON 엔터가 멤버들 스트레스에 조금 민감해서요. 지금이라도 빨리 말씀하시는 게···.”

혹시라도 나중에 문제가 발생할 것을 염려한 조언이었지만, 최병섭은 약간이나마 기분이 상했다.

그리 크지 않은 거실이었기에 몰카를 촬영 중인 지금, 이런 대화를 나누기에는 적절치 않았다.

한숨을 푹 내쉰 최병섭이 촬영 중지를 선언하고 숙소 밖으로 나와 우진에게 전화한 것이 그때였다.

“매니저님, 최병섭입니다.”

회사에 직접 꽂기는 괜히 찝찝했던 병섭이 우진과 이야기해서 적당히 마무리 지으려 한 것.

“네. 감독님. 마침 저도 이야기를 나눴으면 합니다.”

하지만 병섭의 생각과 달리 전화를 받은 우진의 목소리가 서늘했다.

처음 인사를 나눌 때만 해도 굉장히 호인처럼 보였던 우진이었지만, 지금은 다른 사람 같았다.

꽤 일이 귀찮게 됐다는 예감에 혀를 차며, 병섭은 우진에게 이동했다.

그리고 우진을 만나 이야기를 하며 생각보다 더 심각해진 상황에 당황했다.

“예? 병원이요?”

“네. 지환이가 스트레스에 많이 취약해요. 혹시 애들 관련해서 사전에 전달받은 이야기 없으신가요.”

“딱히··· 아.”

심각한 표정의 우진에 병섭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흘러가자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한 것.

그리고 전달받은 이야기를 떠올리던 중, 흘려들었던 선배 윤관영 감독의 말이 생각났다.

‘애들이 안 좋은 일도 좀 겪고 그래서 괜찮은 척하는데, 아직 썩 좋진 않을 거야. 별다른 내용은 없으니까 괜찮겠지만 너무 타이트하게 찍지 마.’

이미 스토리가 정해져 있기에 윤 감독은 촬영 현장의 분위기만 언급했었다.

하지만 병섭은 별다른 생각 없이 그 말을 흘려보냈다. 연예인들이 예민하게 구는 게 하루 이틀 일이냐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이다.

“안 좋은 일이 있었다는 얘기는 들었고, 저도 기사 봤습니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요.”

“평소 애들이 최대한 티 안 내려고 애쓰는 편이라서요.”

우진은 우진 나름대로 적당히 애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고 상황을 종료하려고 했다.

“이 영상은 못써 먹겠네요, 그렇게 예민해서야···.”

최병섭 감독이 애들을 탓하는 듯 말하지만 않았다면.

울컥하고 무언가 우진의 속에서 치미는 걸 느꼈다.

한창 혈기 왕성할 때의 우진이었다면 지금쯤 병섭의 멱살을 잡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우진은 이 바닥에서 적당히 구른 만큼 참아야 할 때를 아는 사람이었다.

명분을 만들고자 마음이 깎여가는 상황을 선택한 멤버들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쁜 건 나쁜 것.

“정윤 실장님께 보고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건 좀 과하지 않습니까?”

정윤 실장의 인맥은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정확한 실체는 모르지만, 은연중에 그런 소문이 돌았다.

병섭도 아차 싶었는지 그제야 삐딱한 자세를 수습했다.

제논 엔터가 박살 났을 때 정윤 실장이 한 팔 거들었다는 소문은 병섭도 들었었다.

아예 척을 지기로 작정한 거면 모를까 프리랜서로 움직이는 병섭은 앞으로의 밥줄을 위해서라도 적당히 둥글게 지내야 했다.

비록 아이돌은 한 그룹뿐이지만, ON 엔터는 소속 연예인 수가 적은 곳이 아니었다.

“실장님이 애들을 좀 각별히 여기셔서요. 특히 건강에 많이 예민하세요. 말씀 안 드리면 나중에 제가 한 소리 듣습니다.”

멤버들에겐 늘 푸근하게만 웃어주던 우진이었지만, 얼굴을 굳히며 말하자 은근한 위압감이 흘러나왔다.

몰래카메라 한편 찍으려다가 판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며 병섭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데뷔한 지 일 년도 안 된 아이돌 그룹을 이렇게까지 싸고도는 ON 엔터가 이상해 보이기도 했고.

그때, 병섭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살짝 눈치를 보다 전화를 받은 병섭은, 들려오는 소리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

- 감독님! 우진 매니저님이랑 올라오셔야 할 것 같아요. 분위기 너무 안 좋아요···.

갈수록 태산이라는 게 이런 상황에 쓰는 말인가 싶은 병섭이었다.

* * *

그들이 숙소로 돌아오자 냉랭한 얼굴을 한 멤버들이 둘, 셋씩 뭉쳐서 떨어져 앉아있었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아이고, 매니저님, 너무 애들한테 뭐라고 하지 마세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듯 우진이 멤버들에게 일갈하자 거실의 온도가 이삼 도쯤 더 내려간 것 같았다.

입을 꾹 다물고 한껏 가시를 세운 멤버들과 잔뜩 성난 것처럼 목소리를 높인 우진.

졸지에 중간에 끼게 된 병섭은 죽을 맛이었다.

그저 용돈 벌이라고 가볍게 생각하고 왔는데 일이 자꾸만 커졌다.

차라리 빨리 멤버들에게 몰래카메라였다고 밝히고 정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촬영만 마치면 자신은 돌아가도 되니 그 후 멤버들 간의 불화야 알 바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병섭보다 먼저 창백한 얼굴을 한 영빈이 입을 열었다.

“우진 형, 준이 몰카 때문에 이렇게 된 거라면서요. 맞아요?”

“형, 너무한 거 아니에요? 저희 되게 서로 조심하면서 사는 거 알잖아요. 그 일이 있었는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고작 몰카 때문에 환이 병원까지 가고. 이게 뭐예요···.”

영빈이 입을 열기가 무섭게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던 경환, 찬이가 한마디씩 보탰다.

그러자 멤버들의 원망 어린 시선이 꽂힌 우진이 병섭을 조용히 바라봤다.

차라리 우진이 무어라 말이라도 했으면 덜 불안했을 텐데, 아무 말도 안 하고 쳐다만 보니 마음이 더 불편해졌다.

“여러분, 진정합시다. 이거 다들 감정이 격해졌네. 하하.”

병섭에게 언래블이나 우진이 문제가 되진 않았다.

그저 그 너머의 ON 엔터와 정윤 실장이 어떻게 대응할지 알 수 없으니 초조할 뿐.

식은땀이 등을 타고 또르륵 흘러내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병섭이 최대한 진정시키려는 듯 어색하게 웃으며 양쪽에 말을 걸어봤지만 묵묵부답.

초조함이 치즈를 탐하는 쥐처럼 신경 줄을 갉아 먹기 시작했다.

‘미안하다고 숙여야 하나?’

‘아니, 시발 이게 이렇게까지 난리 칠 일이야?’

등등 오만 생각이 허공에 둥둥 떠다니던 그때, 갑자기 숙소의 문이 벌컥 열렸다.

병원에 갔다던 지환의 등장이었다.

“어···? 괜찮아요?”

스트레스에 취약하다더니 하얗던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병섭의 말에 별다른 대꾸 없이 타박타박 한 걸음씩 걸어왔다.

삐리릭 하는 도어락이 닫히는 전자음, 사람들의 숨소리 외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던 공간.

병섭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오싹함을 느꼈다.

자신에게 시선을 고정한 지환의 새까맣고 투명한 눈동자가 이상하게 거북했다.

표정이 사라진 마네킹 같은 얼굴이 자신에게 가까워지자 병섭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지환이 갑자기 사르륵 눈매를 접더니 하얗게 웃었다.

“감독님, 몰래카메라에요.”

“어···?”

“지금까지 최병섭 감독님의 몰래카메라였습니다!”

“와아! 저희 연기 잘했죠?”

“어휴, 정말 힘들었어요.”

방금까지 숨소리 한 번 내기 어려울 만큼 정적을 유지하던 멤버들이 순식간에 얼굴을 바꾸더니 환하게 웃었다.

순간 자신이 속았다는 생각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불쾌한 마음에 한마디 하려던 그 타이밍, 순순히 내버려 둘리 없었던 우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감독님, 죄송합니다. 하하, 애들이 감독님께 몰래카메라 하면 더 새롭고 신선하지 않겠냐고 하도 졸라서요.”

아까까지 흉흉한 분위기를 풍기던 우진이 순박하게 웃으며 악수를 청해왔다.

“아휴, 진짜 깜박 속았어요! 이야, 언래블 연기 많이 늘었네요?”

“감독님 진짜 놀라셨나보다, 하하!”

몰래카메라라는 말에 긴장해있던 스태프들까지 싱글벙글 웃으며 감독에게 말을 건네자 병섭은 화를 낼 수도 없어졌다.

“하, 하하···. 이거 제가 아주 된통 당했네요.”

어색한 웃음과 억지로 잡은 손.

그때 오싹함까지 느끼게 했던 지환이 하얗게 웃으며 병섭에게 말했다.

“사실 감독님은 다 알고 계시면서도 장단 맞춰주신 거죠? 너무 엉성했을 텐데. 남 속이고 이런 걸 저희 멤버들이 잘 못 해서 되게 웃기게 찍혔을 거 같아요.”

그제야 병섭은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아냐, 우리 언래블 연기 엄청 늘었네! 잘했어. 진짠 줄 알고 걱정했잖아.”

“에이, 저희 평소에 얼마나 저희끼리 이상하게 노는지 다 아시잖아요.”

이미 병섭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화기애애하게 그저 몰래카메라였다고 웃고 있었다.

찝찝하고 불쾌하고 기분이 상한 건 병섭뿐이었다.

된통 당한 그는 자신도 모르게 몰래카메라는 이제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당사자가 아니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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