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265)화 (265/456)

265. 아름다운 밤(1)

까맣게 암전된 무대에 오를 때면 늘 온갖 생각들이 물결친다.

내 옷이 아닌 남의 옷을 입은 것 같았던 거북함, 불편함이 손끝을 맴돌았다.

적응하기까지는 너무나 많은 시간과 심력이 소모되었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에 지쳐있었다.

연습, 연습, 그리고 또 연습.

그저 한 명의 팬이었던 내가 이 자리를 차지하는 게 맞는지도, 되려 언래블에 누가 되는 건 아닌지도.

아이돌이라는 꿈을 품은 적 없었던 내게 일어난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도 늘 의문이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어떻게든 일상은 적응해 나갔고, 맞지 않은 옷 같던 삶을 조금씩 재단해 몸에 맞췄다.

그렇게 첫 무대를 경험하고, 환호성을 들으며 이걸 위해 그동안 그 고생을 했구나, 하며 웃기도 했고.

이제는 제법 익숙하게 무대에 선 자신이 조금은 웃기기도 했고 기특하기도 했다.

나, 잘하고 있구나.

뿌듯함을 닮은 미소가 얼굴을 스치는 사이 무대 위로 대형을 잡은 멤버들의 등이 보였다.

넓게 퍼져있는 네 명의 멤버, 그 뒤에 선 자신과 세빈이.

아직 신인상이라는 눈에 보이는 성과에 심장이 쿵쿵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심장 소리와 닮아있는 드럼 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울리기 시작하자 꾹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깊게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는 마냥 무섭지만은 않았다.

그러니 괜찮다.

* * *

어두웠던 무대에 핀 조명이 내리꽂히자, 그 자리에는 언래블이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I'm OK’의 전주가 아닌 익숙한 듯 낯선 멜로디에 무대 아래 팬들이 갸웃거리는 사이.

- 쿵

하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멤버들의 손이 허공을 맴돈다.

무언가 찾는 듯 빛을 받은 하얀 손이 허공을 더듬거리는 사이 다시 한번 ‘쿵’하고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커다란 소리가 날 때마다 정지 컷처럼 멤버들의 몸이 한 번씩 움직였고, 어느새 대형이 V자로 바뀌어 있었다.

따따딴, 쿵!

박자에 맞춰 무대를 박차는 구둣발 소리가 묵직하게 울리며 무대 앞쪽으로 이동했고 그 순간 ‘I'm OK’의 전주가 흘렀다.

그 순간, 멤버들은 일제히 얼굴을 가린 가면을 벗어던졌다.

새하얀 가면이 바람에 찢겨 날아간 꽃잎처럼 애처로웠다.

새파란 조명이 사방을 채우고 묵직한 하준의 목소리가 묻는다.

[어차피 모두 겪는 일이라고,

이게 대수롭냐고,

그 두려움은 누구나 겪는 일이래.]

하준이 의문을 던지는 동안 힘찬과 세빈이 읊조리듯 노래했다.

[I'm OK. Are you all right?

이 말을 믿는 사람이 있었네.

I'm OK. Are you all right?

그래, 괜찮아. 아무것도 아닌 거니까.]

자조가 섞인 쓸쓸한 노랫말과 아픔을 토하는 랩이 어우러지는 사이 푸른 조명이 무대에 내려앉았다.

그 사이 멤버들은 하준의 주변을 날 듯 돌면서 조금씩 흩어졌다.

[너무 커다란 세상,

너무 커다란 의무.

그 안에 숨죽인 너무 작은 나.]

물결처럼 하준을 중심으로 퍼지던 멤버들 사이에서 경환이 우뚝 멈춰서고, 서로 마주 본다.

그 둘을 둘러싼 멤버들이 유려한 손짓으로 물결을 만들어내고 두 래퍼는 어느새 하얀 천을 꺼내 손에 쥐었다.

날 듯 뛰어올라 하얀 천을 휘날리자 푸른 조명을 받은 천이 물결처럼 넘실거렸다.

잔잔한 호수의 물결처럼 부드럽게 요동치던 천이 바닥에 닿는 순간, 다른 멤버들도 천을 말아쥐고 둘의 주변에서 다시 멀어졌다.

푸른 빛 때문에 멤버들의 얼굴이 유독 더 창백해 보였다. 무대 아래서 올려다 본 그들의 얼굴이 유독 붉은 입술만 선명했다.

지직거리는 노이즈 같은 잡음이 들리더니 단조로운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와 함께 무대 위 멤버들은 줄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졌고, 댄서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멤버들의 모습이 가려졌다.

댄서들의 손에는 검푸른 천이 하나씩 쥐어져 있었고, 강인한 팔 동작과 손짓을 따라 천도 함께 펄럭거렸다.

조금 전 멤버들의 몸짓은 비교적 잔잔한 호수였다면, 수많은 댄서가 그리는 건 풍랑으로 넘실대는 바다였다.

어느새 멤버들은 다시 가면을 쓰고 있었고 가면의 눈가에는 검은 눈물 자국이 그려져 있었다.

검은 파도가 멤버들을 몰아넣듯 뒤로 밀어붙였지만, 하얀 천을 한 손에 말아쥔 멤버들은 묵묵히 단호한 몸짓으로 헤쳐나왔다.

조명이 변하면서 푸른빛을 발하던 하얀 천들은 이제 조금 더 짙고 푸른, 새로운 파도가 되었다.

가볍게 무대를 박차고 날아오르는 힘찬과 지환은 검은 파도를 조롱하듯 몇 번의 손짓으로 제 주변의 파도를 전부 밀어냈다.

[잘 닦인 길 위에 널 세워두고 환히 웃는 저 사람들을 봐.]

영빈은 세빈을 보호하듯 앞장서며 길을 만들었다.

[숨을 헐떡이며 달려가는 그 길이,

정말 네가 택한 길이었어?]

가끔 위협적으로 날아드는 검은 파도는 영빈의 보호 아래 있는 세빈에게 닿지 못했다.

경환과 나란히 선 하준은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몰려드는 파도를 거칠게 밀어냈다.

[무수히 많은 길이 있다던 가르침은 이미 낡아버렸어.

희망도 꿈도 이 길 위에선 아무런 가치가 없는걸.]

몇 번이나 댄서들이 위협적으로 다가와 멤버들의 팔다리를 움켜쥐었다.

족쇄처럼, 깊은 수렁으로 끌고 가려는 손길처럼, 혹은 뱀처럼 멤버들의 몸을 움켜잡았다.

뿌리치는 듯한 몸짓과 함께 눈물 흘리던 가면은 파도 속으로 사라졌다.

각자의 파트너와 검은 파도를 사방으로 밀어낸 멤버들은 적을 향해 공격적으로 노래했다.

[이 길에 없는 가치와 같잖은 희망은 내버려 둬.]

상냥을 가장한 지환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너희를 위한 거라고 노래하며 배경음처럼 맴돌았다.

[널 위한 거야, 널 위해 준비했단다.]

그사이 둘씩 나뉘었던 멤버들은 한 곳에 모여 영빈을 가운데 두고 엑스자로 나란히 섰다.

[내 꿈도 가치도 여기엔 없어]

고음의 노래는 영빈이 내지르는 비명 같기도 했고, 울분 섞인 외침 같기도 했다.

대형을 유지하는 구둣발 소리는 전장을 향하는 군인들처럼 결의에 차가 있었다.

[마음껏 비웃어, 괜찮아. 네 생각은 중요치 않으니까.]

영빈의 목소리에 지환의 목소리가 더해지자 어느새 멤버들이 앞 열에 나와 있었다. 댄서들은 스르륵 무대 뒤쪽으로 밀려났다.

위협적이던 검은 파도들은 어느 순간 멤버들과 같은 푸르고 부드러운 파도로 변해 있었다.

[손가락질해도 괜찮아, 곧 돌려주러 갈 테니까.]

빠르고 무섭게 몰아치던 멜로디가 조금씩 느려지더니 지금은 다독이는 듯 부드럽게 울려 퍼졌다.

언래블의 팬이 아닌 사람들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익숙한 멜로디였다.

[난 여기에 있었을 뿐인데.

I just stayed still.

그래, 난 그저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

댄서들이 스르륵 무대 밖으로 사라지는 동안 지환이 한발짝 앞으로 나서며 쓸쓸한 목소리로 노래했다.

고요한 호수이길 바랐던 아이들은 자신들이 있는 곳이 쉼 없이 물결치는 바다라는 걸 깨닫고 슬퍼했다.

그럼에도 다시 한 발짝 내디디며 새로운 변화를 꿈꿨다.

창백하게 빛나던 푸른 조명이 어둑한 분위기를 조성하다 이내 별빛처럼 쏟아졌다.

언래블이 서 있던 무대와 뒤쪽의 스크린에는 부드럽게 물결치는 바다와 그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별들이 흘러나왔다.

[Why do you hate me?

알려줘, 다시 나를 사랑해줘.

Did I do something wrong?

말해줘, 우리가 함께 빛날 수 있게.]

방금 전까지 격렬한 안무와 함께 무대를 뛰어다니던 건 꿈이었던 것처럼, 멤버들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나란히 섰다.

[네가 이름을 붙여줬고, 난 빛을 찾았어.

Yes, I'm just here]

언래블의 노래가 막바지를 향하면서 공연장 내부는 수많은 별이 빛나는 우주로 변해 있었다.

* * *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땀범벅이 된 나와 멤버들이 무대가 끝나고 대기실에 오는 내내 스태프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무대를 짜도 도와주시는 분들이 없으면 말짱 꽝이라는 걸 하준 형이 누누이 강조했기에 꼭 마주칠 때마다 큰 소리로 인사했었다.

오늘 무대 멋있었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분도 있었고, 어깨를 두드려 주는 분들도 있었다.

그 모든 인사를 끝내고 대기실로 들어오자 우진 형이 달려와 우리 등을 마구 두드렸다.

“잘했어! 생각보다 훨씬 더 멋졌다!”

“혀엉!”

“야, 들러붙진 말고! 땀부터 닦아!”

“의상 망가진다! 얼른 갈아입어!”

방송을 보고 있는 시청자들의 반응이나 현장의 반응을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나쁘진 않은 것 같았다.

여러 번의 회의 때마다 우리를 고민하게 했던 건, 각각의 곡들이 너무 강해서 하나로 묶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물론 아이돌이 추는 화려하고 절도 있는 안무는 어디서든 늘 사랑받는 편이었지만, 시상식에서까지 그전과 똑같은 무대를 보일 수가 없었다.

머리를 부여잡던 우리를 구해준 건 A&R 팀 직원분의 푸념이었다.

‘아예 주제를 바꿀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낮과 밤, 음악, 이건 뭐 어떻게 나타내야 되냐.’

시상식의 슬로건에 맞추려니 우리 곡이랑 안 맞고, 무시하자니 우리 노래는 죄다 때려 부수겠다는 소리고.

‘차라리 우리 노래의 메인 메시지를 이번에 좀 다르게 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주제를 바꾼다는 말에 무언가 번뜩인 듯 하준 형이 입을 열었고, 홀린 듯이 경환 형이 말을 받았다.

‘꼭 원 주제대로 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요. 어차피 똑같은 무대는 우리 팬들도 많이 봤을 테니까 다른 곡을 만드는 것처럼….’

생각의 기준점을 옆으로 쓱 옮겼더니 더 많은 소재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몇 가지는 다음 앨범 때 고려해도 좋을 만큼 괜찮은 생각이어서 따로 메모해두기도 했을 만큼.

그렇게 우리가 만든 건 점점 더 멀리 퍼져가는 세계의 확장이었다.

편곡을 담당한 엔지니어분이 흐느적거리는 좀비가 될 때까지 사방에서 볶였다고 푸념하셨지만, 얼굴엔 뿌듯한 미소가 어려있었다.

“어휴, 이제야 살겠다. 이제 좀 마음 편하게 시상식 즐기다 돌아가자.”

“네!”

“좋아요!”

“끝나고 맛난 것도 먹어요, 우리!”

우리보다 더 신나 보이는 팀장님, 그런 팀장님을 바라보다 한숨 쉰 실장님, 마냥 우리를 대견하게 보는 우진 형 등.

뿌듯한 마음으로 빠르게 의상을 갈아입은 우리는 메이크업과 헤어를 다시 한번 손보고 출연자석으로 돌아갔다.

“고생했네, 무대 멋있더라.”

“헤헷…. 열심히 했어요.”

“어이구, 그랬어요?”

연수 선배님이 세빈이 어깨를 토닥여주며 칭찬하자 세빈이 볼이 발그레해졌다.

가방에 연수 선배님 앨범을 넣어 다닐 만큼 선배님 노래를 좋아하던 세빈이었다.

동경하던 선배님에게 칭찬받고 나니 우리 애는 하늘을 날 것처럼 들떠서 방실방실 잘도 웃고 있었다.

선배님도 직접 가방에서 앨범을 꺼내 사인해달라고 했던 걸 기억하시는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마음껏 칭찬했다.

찬이가 자기도 칭찬해달라고 선배님 옆에서 괜히 툴툴거리는 작은 소동이 있었지만, 다행히 금방 수습되었다.

다시 시상식으로 시선을 돌린 우리는 후련한 마음으로 활짝 웃으며 시상식을 즐길 수 있었다.

그렇게 화려한 별들의 축제가 끝나가고 있었다.

* * *

다 같이 뒷풀이 겸 맛있는 거 먹자고 신나하던 팀장님은 2차를 외치다 실장님께 뒷덜미를 잡힌 채 끌려가셨다.

연수 선배님과는 처음 갖는 회식이라 긴장했던 것도 잠시, 우리 애들은 금방 목줄 풀린 강아지들처럼 뛰어다녔다.

특히 영빈 형과 세빈이는 연수 선배님 옆에 앉아서 누가 봐도 설레하고 있었다.

준이 형은 경환 형과 찬이를 옆구리에 끼고 스태프들 사이를 오가며 넉살 좋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멤버들에 비해 체력이 한없이 비루했던 나는 고기나 많이 먹고 있으라는 우진 형의 만류 덕에 편하게 있을 수 있었다.

고깃집에 오기 직전, 잠깐 GIVE 앱을 켜서 솜뭉치들과 신인상 받은 소감을 얘기하는 시간을 가졌었다.

처음으로 받은 상이었고, 신인상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다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제대로 꺼내지 못했다.

그건 우리 솜뭉치들도 마찬가지였는지 고맙다는 말과 사랑한다는 말이 채팅창 가득 넘실거렸다.

평소라면 우리를 놀리고 장난치느라 바빴을 텐데.

서로 우물쭈물하는 우리를 보다 못한 포잉이 한마디 할 정도였다.

‘너희는 왜 새삼스럽게 내외함?’

‘아냐, 그냥 막… 말이 잘 안 나와서 그래.’

‘쯧, 언제쯤 씩씩해질런지.’

포잉에게 이상한 오해를 받았지만 정말 목이 턱 막힌 것처럼 말이 자꾸만 목 안으로 숨어들었다.

시간 관계상 짧게 끝내야 했지만 그래도 꼭 하고 싶은 말은 했으니 괜찮았다.

우리 솜뭉치들은 고맙고, 사랑한다고 말했던 우리의 서툰 말 안에 담긴 더 많은 감정을 이해해줬으리라 믿었다.

‘아, 맞다.’

‘?’

부른 배와 지친 몸 때문에 고깃집 의자에 기대 느리게 눈을 끔뻑거리던 내가 포잉에게 말을 걸었다.

귀를 쫑긋해주는 몸짓에 혼자 슬며시 웃었더니 못 볼 걸 봤다는 듯 포잉이 훽 하고 고개를 돌렸다.

‘고마워, 포잉.’

‘별 쓸데없는 소리를.’

툴툴거리고 있지만, 포잉도 우리 솜뭉치들처럼 서툰 내 말에 담긴 마음을 알 거라 믿으며 한 번 더 속삭였다.

‘내 요정님 해줘서 정말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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