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263)화 (263/456)

263. 같이가요(4)

“얘들아, 그냥 웃어.”

“헷…. 웃어도 돼요?”

“그렇게 입꼬리 씰룩거리는 거랑 웃는 거랑 다른 게 뭐야?”

잔뜩 긴장한 상태로 레드카펫을 지나온 멤버들은 그 위에서 본인들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정신을 차린 후 마주한 건 빨갛게 얼은 얼굴로 훌쩍이며 핫팩을 움켜쥔 서로의 얼굴이라, 사진이 뜨기 전까지는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다.

그런 우리를 다 꿰뚫고 있다는 듯 대기실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소현 팀장님은 노트북을 쓱 밀어주셨다.

이왕이면 큰 화면으로 보라는 배려에 찬이도 세빈이도 눈을 반짝거리며 팀장님을 바라보았다.

의상과 메이크업에 신경 써야 했던 터라 평소처럼 달려들어서 매달리지는 못했지만, 시선은 이미 충분했다.

“이 사진 괜찮다.”

“어떤 거요?”

“여기, 이거.”

손에 든 태블릿으로 이리저리 사진을 체크하던 우진 형이 내게 보여준 사진.

그 안에는 나란히 선 우리가 반듯하게 몸을 세우고 웃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까 하나도 긴장 안 한 것처럼 생겼네요….”

“우리도 이제 프로 의식이 생긴 게 아닐까요?”

“어딜, 택도 없다.”

두근두근했는지 설렌다는 듯 희주 누나한테 속닥거리던 세빈이는 가희 누나의 철벽에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니, 근데 영빈 형이랑 내 의상만 너무 야한 거 아니에요? 나 미성년자라고요!”

“야하긴. 너풀거리긴 해도 노출 심한 옷도 아닌데 뭐. 영빈이는 워낙 목선이 예뻐서 드러내는 게 더 잘 어울려.”

“빈이 형, 형도 뭐라고 좀 해봐요….”

“이제 와서 뭐라고 해. 그냥 포기하면 편해, 환아.”

역시 영빈 형은 그냥 포기한 것 같았다.

물론 지금 와서 의상을 바꿀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투정이라도 하고 싶었다.

준이 형처럼 수트의 정석, 아니면 경환 형처럼 더블 수트 느낌도 좋았을 텐데.

나 혼자 장르가 다른 것 같아 손등을 살짝 덮는 소매와 프릴이 영 신경 쓰였다.

“경환이는 역시 이마를 까는 게 인물이 더 사는 것 같단 말이지.”

“얼굴 훤히 드러내는 건 영 적응이 안 돼서….”

말끔하게 앞머리를 다 넘겨 단정한 얼굴을 한 경환 형은 오늘따라 이목구비가 심하게 자기 주장하는 것 같았다.

저 형은 자기 얼굴을 객관적으로 알고는 있을까…?

선이 가는 내 얼굴과는 또 다른 느낌을 주는 경환 형의 얼굴이 내심 부러웠던 터라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이왕이면 나도 좀 선도 굵직하고 고전적인 미남상이면 좋았을 텐데.

평소의 검정 츄리닝이 아닌, 멀끔한 경환 형이 낯설었던 우리는 형을 툭툭 건드리기도 하면서 주변을 맴돌았다.

평소의 스타일은 서포트 팀분들이 챙겨주니 열외로 치고, 무대 의상은 컨셉에 맞추는 거라 제외.

그런 것들을 전부 빼버리면 경환 형은 그놈의 츄리닝을 못 잃어서 찬이가 꽤 잔소리했었다.

옷장 안에 있는, 검은색이 아닌 다른 색 옷들은 대부분 선물 받은 것들이었다.

잘 때 입던 그 노란색 티도 어머님이 사주셨다고 했고.

멤버들은 대부분 옷에 큰 관심이 없는 편이었다. 가장 관심 없는 사람이 경환 형, 그다음이나 정도?

하지만 제일 막내 둘은 옷에 관심이 많은 편이라 이것저것 사 모으고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는 일도 많았다.

그런 막내들은 늘 검정 반팔 티만 주워 입는 경환 형을 바꿔놓겠다는 사명감에 불타올라 툭하면 옷으로 잔소리를 했었고.

물론 그런 삐약거림에 변하면 경환 형이 아닌 다른 무언가라는 걸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왜.”

“형이 형 안 같아서.”

“그 말 되게 이중적인 뜻인 건 알지?”

“둘 다 라고 생각하면 될 거 같아.”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던 우리는 이제 따뜻해진 팔다리를 주무르며 나갈 준비를 했다.

오늘 무사히 시상식을 끝내려고 스킬 유지 시간까지 계산하면서 전전긍긍했던 내가 대기실에 오니까 되레 덤덤해지는 것도 신기했다.

사람은 이렇게 적응하는 생물이라는 걸 실시간으로 깨달았다.

문을 나서려던 차, 나는 포잉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두리번거렸다.

“지환아, 왜? 뭐 찾아?”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포잉은 그새를 못 참고 주변을 둘러보러 나간 것 같았다.

칼바람에 엉망이 됐던 메이크업과 의상을 모두 정리한 우리는 무대로 나가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까마득한 선배들이 득실거릴 공간에서 무사히, 사고 치지 않고 평화롭게 다녀오자고 다짐하면서.

* * *

무수히 많은 인사 끝에 복도를 벗어났지만, 넋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유력한 신인상 후보라는 말은 ‘너네 신인상 받을 거야’라는 말이랑 크게 다르지 않다고 회사 분들이 이야기했었다.

하지만 회사 분들의 추측을 듣는 것과 이 자리에서 이렇게 인사를 받는 건 또 다른 느낌이었다.

올해 데뷔한 신인 중에 그나마 사람들 입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건 DCL과 우리, 플라이하이, 그리고 드리밍이라는 걸그룹 정도였다.

그 말은 이 그룹들 외에 모든 사람이 다 선배님들이라는 소리였다.

다들 바쁘게 오가는 와중에도 마주칠 때마다 축하한다, 고생했다 등 좋은 말들을 건네주셨다.

아직 확정이 아님에도 몇 년씩 이 바닥에서 살아온 그들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웃었다.

그 모습에 인정받았다고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이렇게 무서운 곳이구나 하고 더 마음을 다잡아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비단 나만 그런 건 아니었는지, 평소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팔랑거리며 날아다니던 찬이도 조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게 힘겹게 무시무시한 선배님들 사이를 벗어나 겨우 본 행사장 출입문 근처에 도착했다.

“왔어?”

“선배님! 오랜만에 뵈어요!”

“그러게, 내가 바쁘다고 우리 귀염둥이들 보러도 못 갔네.”

“선배님, 안녕하세요!”

“어휴, 그놈의 선배님. 형이라고 하라니까 말 안 듣긴.”

출입문 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연수 선배님 모습에 멤버들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그동안 형님이 스케줄로 바빴던 터라 자주 마주치지 못했고, 덕분에 더 반가웠다.

“내가 우리 병아리들 길 잃을까 봐 여기서 기다렸다.”

“형님까지 병아리라뇨….”

“그거 거의 너희 팀명 같던데? 다들 그렇게 부르더라.”

쾌활하게 웃으며 찬이 어깨를 두드리는 모습이 처음 우리에게 콘서트 게스트 제의할 때 모습과 똑 닮아있었다.

이쯤 되면 팀명을 병아리로 할 걸 그랬다면서 능숙하게 우리를 리드해주셨고, 우리는 그 뒤를 삐약거리며 쫓아갔다.

고척스카이돔.

그 거대한 공간은 존재만으로도 압도적인 기분이 들었다.

이 안을 가득 채운 관객들, 우리가 미친 척 뛰어다녀도 공간이 남아돌 것 같은 크기의 무대.

그리고 한쪽에 따로 준비된 출연자석.

긴 공연 시간을 고려해서 스킬을 활성화했는데도 순간적으로 아찔한 기분이 들 만큼 머리가 핑 돌았다.

비단 나만 그런 건 아니었는지 내 손을 잡고 있던 세빈이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준이 형과 영빈 형은 출입문 너머의 광경에 여러 감정이 드는지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런 우리를 보며 픽 웃던 선배님은 두 맏형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가자, 병아리들아.”

언제까지 넋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한 발짝 앞부터는 객석에서도 우리 모습이 보일 테니까.

넋 놓고 있던 표정을 갈무리한 우리는 서로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별들이 내려앉은 이 거대한 공간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우리 모습을 평생 기억하기 위해 머릿속에 꾹꾹 눌러 담았다.

* * *

천천히 오셔도 될 텐데 우리를 위해 일찍 입장해준 선배님과 이야기 하는 사이, 비어있던 의자에는 하나둘 사람들이 차기 시작했다.

익숙한 얼굴도 있었고 TV에서만 보던 얼굴도 있었다.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는 세빈이를 잘 달래고 있는데, 옆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진짜 사이좋은가 봐요, 어휴, 귀엽다. 귀여워.”

“감사합니다….”

“우리, 저번에 봤죠?”

“네, 선배님. 초록우산 패션쇼 때 뵈었어요.”

명랑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준 사람은 패션쇼에서 마주친 적 있었던 미리내의 예나 선배님이었다.

“옆에 분이 막내죠?”

“어?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 봐도 막낸데요, 뭐. 우리 소린이도 저렇게 귀여웠을 때가 있었는데….”

“언니!”

예나 선배님 외에는 처음 뵙는 분들이라 멤버들이 몸을 돌려 인사하려 하자, 미리내 선배님들 모두가 손을 내저으며 말렸다.

그렇게 의도치 않게 다른 그룹 분들과 친분을 다지기도 하고 객석을 향해 환히 웃어 보이기도 하던 그때, 조명이 암전되며 시작을 알려왔다.

“이상하게 이렇게 불 꺼지면 더 긴장되지 않아?”

“나도. 좀 기분이 이상하더라.”

옆에 있던 찬이가 슬며시 붙어서는 속닥거렸다.

한쪽엔 세빈이, 다른 쪽엔 찬이.

이렇게 앉으라고 정해준 팀장님의 의도가 너무 투명하게 보이는 것 같았지만 약자인 내가 참기로 했다.

가뜩이나 큰 눈이 더 커져서는 주변을 둘러보느라 바쁜 우리 세빈이 챙기랴, 찬이 손잡아주랴 오늘도 나는 바빴다.

“환아, 저기 봐. 우리 이름도 있어.”

“우리 솜뭉치들도 많이 왔나 봐. 예쁘게 웃자.”

제일 막내인 우리는 목소리를 낮춰 속닥거리며 객석에서 열심히 솜뭉치들을 찾았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얼마나 반갑던지.

곧이어 시상식의 시작을 알리는 효과음과 MC들의 멘트가 스피커를 타고 울려 퍼졌다.

출연진 석에 앉은 건 처음이었지만, 시상식까지 처음은 아니었다.

현장에서 본 것과 집에서 영상으로 봤던 것까지 합치면 내가 HMA만 몇 년을 봤는데.

첫 무대는 음악방송에서 마주쳤던 핑크밤 선배님들이었다.

발랄한 분위기와 활기찬 안무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분들이었다.

이번 앨범의 컨셉은 치어리딩이었고, 그만큼 안무가 굉장히 에너지 넘쳤다.

실제로 선수로 진학할 생각을 했던 멤버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떠올랐다.

“우와….”

“엄청 멋있다….”

쉬지 않고 스텝을 밟으며 칼같이 어깨선, 손끝 선을 맞추는 모습, 물결치듯 퍼져나가는 대형에 우리 애들은 물개박수를 치며 응원하고 있었다.

아니, 얘들아….

“저거 연습하느라 진짜 죽어났겠다. 어휴.”

“우울한 얘기 하지 말라고 했지?”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소곤거리며 타 그룹의 무대를 즐기고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우리 애들은 마냥 신기해하고 있었고, 연차가 있는 선배님들은 연습량을 추측하며 동질감을 나눴다는 것.

그렇게 첫 무대가 끝나고 첫 시상이 이어지는 동안 능숙하게 진행을 해나가는 두 MC의 얼굴도 매우 익숙했다.

“민수 형님 이렇게 보니까 완전 다른 사람 같다, 오….”

“김수아 배우님 이렇게 보니까 포스 쩐다….”

우리 애들은 그냥 다른 분들이 숨만 쉬어도 신기한지 객석에 앉은 팬분들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냥 재밌는 하연수 선배님의 웃음에 민망한 건 두 맏형과 내 몫이었다.

계속되는 수상자 호명, 다른 가수의 무대, VCR 등 시간은 어떻게 이렇게 훌쩍 잘도 가는지.

나는 곧 있을 우리 무대와 신인상 생각에 초조해 죽겠는데, 경환 형이나 찬이는 태연해 보여서 신기할 지경이었다.

시스템이라는 초월적인 능력의 힘을 빌린 나도 겨우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데 어지간히 강심장이다 싶었다.

“우리 곧 준비해야 하지 않아?”

“응? 뭘?”

“무대. 우리 순서 얼마 안 남은 것 같은데….”

사전 공지 받은 순서를 떠올리며 순서를 가늠해보던 내가 옆에 있던 찬이에게 속삭였다. 그러자 방금까지 멀쩡했던 우리 찐빵의 퓨즈가 내려간 것처럼 혼이 쏙 빠진 얼굴이 돼버렸다.

강심장인 게 아니라 현실도피 중이었던 모양이었다.

불안한 마음에 준이 형에게 애타는 눈빛을 보내는 사이, 더 무서운 소리가 들려왔다.

- 2017년 올해는 유독 무서운 신인들이 많았던 한해였죠?

- 어마어마한 실력을 갈고닦아온 슈퍼 신인이 많았어요. 실제로 몇 분들은 뵙기도 했는데 정말 멋졌습니다!

네? 신인이요?

세빈이와 찬이를 현실로 끄집어오는 사이 스피커에서는 무시무시한 멘트가 시작되고 있었다.

신인상에 대한 멘트와 곧이어 이어지는 소개 영상.

익숙한 DCL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고 더 익숙한 우리 애들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나오고 있었다.

배경으로 보이는 우리 뮤직비디오 영상과 초조해진 듯 양쪽에서 내 손을 꽉 쥔 막내들.

순식간에 입이 바짝 말라버린 나는 버릇처럼 준이 형을 바라봤지만, 준이 형은 영빈 형과 경환 형에게 붙들려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와,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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