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 같이가요(3)
차 안의 초조한 감정들이 손에 잡힐 것처럼 너무 선명해서 색이 보이는 것 같았다.
준이 형은 혼란스러운 라벤더색, 영빈 형은 창백한 푸른색, 경환 형은 회색과 침잠하는 갈색이 뒤섞인 색 같았다.
찬이가 반짝거리는 금빛에 새벽 같은 보라색이 섞인 느낌이었고, 세빈이는 물거품처럼 투명하게 흩어지는 파도 색이었다.
멤버 전부가 현실과 비현실 중간에 서 있는 것처럼 눈동자에 초점이 없었다.
그런 우리만큼은 아니더라도 늘 평온해 보였던 우진 형조차 평소보다 훨씬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얘들아, 레드카펫 조심하고, 포토존에서 카메라 잘 찾고. 알지?”
긴장하며 말이 많아지는 타입인지 우진 형은 끊임없이 우리가 주의해야 할 내용을 떠올리며 이야기해 주었다.
그 와중에도 운전대는 양손으로 꽉 잡고 있는 걸 보니 괜히 웃음이 나왔다.
“환이 쟤는 긴장도 안 되나 봐, 아주 혼자 태평해.”
“실감이 안 나서 그래. 솔직히 지금도 몰카 같아.”
“나도. 내렸을 때 언래블 스토리 제작진 서 있어도 안 놀랄 거 같아.”
“으, 진짜 우리 잘 할 수 있겠지?”
우리는 고척돔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솔직히 정말로 몰래카메라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차에 올라타면서도 했었다.
꽤 유력한 신인상 후보라는 말도, 대표님과 실장님의 기대감 서린 눈도 싱글벙글했던 팀장님 표정도.
현실감이 없어서 되려 자꾸 비실비실 웃음이 나왔다.
전생에 언래블은 간신히 신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
수많은 시상식 중 단 한 곳에서만 언래블에게 신인상을 내주었다.
전형적인 상 나눠 먹기처럼 모든 곳의 신인상 수상자가 달라 그때도 말이 많았었다.
반면 지금은 반년 만에 1위를 하고 신인상을 노리고 있고….
그래서 더 믿기지 않았다.
고척돔에 간다고 하면서 사실은 다른 이상한 곳으로 데려가는 게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다.
“나 괜찮아? 안 이상해?”
“평소처럼 못생겼어. 괜찮아.”
“야, 나 진짜 진지하다고!”
“찬아, 괜찮아, 잘생겼다. 오구오구.”
“아, 경환 형….”
꽤 긴 시간을 배정받은 만큼 무대에 올릴 곡을 연습하느라 다들 잠이 부족했다.
덕분에 서포트 팀의 누나들은 매일 매일 우리 피부 상태를 점검하면서 울상이었다.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가 뽀송뽀송했던 멤버들 피부가 푸석해진 탓이었다.
꼭 자기 전에 마스크 팩을 하라고 하도 들들 볶여서 세상 게으른 경환 형이 직접 챙길 정도였다.
누나들의 시선이 얼마나 예리한지 팩을 한 날과 안 한 날을 귀신같이 구분했다.
정작 당사자인 우리들은 잘 느끼지 못했지만.
“세빈아, 너 괜찮아?”
“안 괜찮은 것 같아요. 멀미 나요….”
늘 뽀얀 찹쌀떡 같았던 우리 막내는 하얀 게 아니라 창백해진 얼굴로 준이 형 손을 꽉 붙들고 있었다.
우리가 이렇게 대환장하는 동안에도 차는 부지런히 움직여 결국 행사장에 도착했고, 우진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착했어, 얘들아.”
서로 들러붙어서 오들오들 떨던 우리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수많은 사람과 카메라에 숨이 탁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때.
“잘하고 와.”
우진 형이 어느새 평소처럼 푸근한 미소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형이 평소 우리를 배웅할 때처럼 ‘잘하고 와’하고 웃어주니까 갈피를 못 잡던 마음이 차분하게 내려앉는 게 느껴졌다.
우리끼리 떨린다고 발을 동동 구르며 어떻게 하느냐고 아등바등했었는데.
나만 그런 게 아닌지 울기 직전까지 갔던 세빈이까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우리 잘하고 올게요! 좀 이따 봐요!”
“우진 형, 걱정하지 마요! 우리만 믿어!”
제일 오들오들 떨던 세빈이와 찬이가 우진 형에게 언제 떨었냐는 듯 씩씩하게 답했다.
차 문이 열리고, 섬광 같은 빛이 몰아치는 레드카펫 위에 우리는 그렇게 첫발을 내디뎠다.
울망울망했던 얼굴은 어디 가고 멤버들은 하나같이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여유로운 척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우리 애들이어서, 허리가 아플 만큼 긴장했던 몸에 살짝 힘이 빠졌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카메라 플래시와 온갖 목소리.
언래블을 부르는 이름, 중간중간 섞인 멤버 개개인의 이름들.
무수한 소리가 귓가에 울려 정신은 혼미했지만, 내 걸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바로 앞에서 도도하게 걷고 있는 내 요정님 덕분이었다.
나 때문에 팔자에도 없던 레드카펫을 걸어본다며 앞발로 톡톡 건드리며 장난치는 포잉 덕분에 숨통이 트였다.
처음 며칠간은 제대로 잠도 못 자면서 포잉을 붙들고 고민했었다.
여태까지 해냈던 어떤 스케줄보다 많은 사람과 카메라가 있을 터라 상상만 해도 아득했었다.
‘계약자야, 무서우면 내 꼬리만 보고 따라오셈.’
그런 내가 너무 없어 보였는지 한참을 달래던 포잉은 같이 입장해줄 테니 정 안되면 자기만 보라고 했었다.
이렇게 내 요정님이 귀엽고 든든했다.
전생에 입덕하고 얼마 안 됐을 때, 누나가 HMA 입장권을 거머쥐는 데 성공해 나를 데려갔었다.
나이 들어 스탠딩은 힘들다며 좌석을 잡아채던 누나는 흡사 한 마리 매와 같았달까.
처음으로 행사장을 갔던 그때, 가수도 아니면서 그 행사장 분위기 자체만으로도 신기하고 들떴었다.
그랬던 내가 이 붉은 카펫 위를 걷게 될 거라는 걸 누가 알았을까.
아우성 같은 환호가 비처럼 쏟아져 내려 울컥울컥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우리가 여기까지 왔구나.
무사히 레드카펫을 지나 포토 월에 일렬로 예쁘게 설 수 있었다.
“둘, 셋! 안녕하세요! 언래블입니다!”
신인 주제에 시간을 오래 끌 수 없었던 우리는 미리 연습한 대로 구호를 외치며 환한 미소를 장착했다.
이미 긴장은 떨쳐냈는지 페도라를 비스듬히 쓴 찬이가 씩 웃으며 솜뭉치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슬쩍 확인하니 평소보다 한껏 차려입은 멤버들 모두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 올해의 신인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그룹이죠, 뚜렷한 색을 빛내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언래블입니다!
한껏 우리를 치켜세워주는 MC의 멘트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양손을 몸 앞에 곱게 모은 멤버들.
- 팬들의 환호성이 엄청난데요, 가슴에 와닿는 가사를 멤버들이 직접 쓴 것으로도 유명하죠.
이어지는 MC의 멘트 사이사이, 평소보다 의젓하게 선 세빈이와 희미한 미소를 지은 경환 형이 연신 팬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준이 형에게 마이크가 주어졌다. 형은 미리 준비했던 대로 이어지는 질문에 온화한 얼굴로 대답하고 있었다.
- 유력한 신인상 후보 중의 한 팀이죠! 굉장히 떨릴 것 같은데요, 어떠세요?
“이 자리에 설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굉장히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과분할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아서 저희끼리는 몰래카메라 아니냐는 말도 했었어요.”
몰래카메라라는 말에 사방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우리 막내는 마냥 좋은지 보조개가 움푹 파일만큼 환히 웃었다.
이어지는 몇 가지 질문에 준이 형이 그동안 갈고 닦은 유려한 말솜씨로 답했다.
그사이 다른 멤버들은 사방을 가득 메운 카메라를 향해 미소 지었다.
- 단체 포즈 준비된 게 있을까요? 한가지 부탁드릴게요~
솔직히 멤버들이 손가락 하트를 하자고 했을 때, 나는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다 보니 내가 먼저 손가락 하트를 방송 중에 해버렸고, 그 뒤로 멤버들은 틈만 나면 팬들에게 손가락 하트를 보였다.
그러다 보니 몇몇 방송에서나 언래블 스토리에서도 종종 활용되어서, 이제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포즈를 취해달라는 말에 일렬로 나란히 섰던 멤버들이 몸을 틀어 한쪽 손을 앞사람 어깨에 얹고는 다른 손으로 카메라를 향해 손가락 하트를 만들었다.
가끔은 포기하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롭다는 걸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온갖 금칠이 이어진 인터뷰가 끝나고 안내 요원의 손짓을 따라 무대를 내려가는 동안에도 등 뒤의 환호성은 끝나지 않았다.
이게 바로 별들의 축제구나.
뭉클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걸음을 옮기던 그때, 찬이가 슬쩍 내 옆에서 걸으며 속삭였다.
“너무 추워, 누나들 말 들을걸.”
“그러게. 춥긴 엄청 춥네. 우리 솜뭉치들은 어떡하냐….”
우리야 잠깐만 참으면 되지만, 긴 시간 저 자리에서 추위와 싸우며 기다려준 솜뭉치들이 너무 안쓰러웠다.
주머니에 있는 핫팩이라도 꺼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럴 수 없어서 더욱 안타까웠다.
레드 카펫은 대부분 수트 차림으로 입장하는 터라, 의상을 고를 때 희주 누나가 굉장히 신경을 썼었다.
레드카펫 입장 의상만으로도 수많은 뷰 수를 확보할 수 있는 터라 기자들의 카메라는 평소보다 매서웠다.
그런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아는 회사 분들이기에 그간 어찌나 고민을 하던지. 많은 고민과 몇 번의 회의 끝에 고른 것이 결국은 수트였다.
처음에는 코트를 활용하거나 도톰한 캐시미어 수트 등 보온을 신경 쓰려 했지만, 멤버들은 최대한 멋있는 복장을 외쳤다.
추위는 감수하겠다고 두 주먹을 불끈 쥐는 모습에 누나들은 어이없어하면서도 결국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멋진 의상을 들고 와주었다.
기본적으론 블랙이 베이스가 되는 수트로, 형 라인은 와인색으로 포인트를, 동생 라인은 남색으로 포인트를 주었다.
소매와 깃, 길이도 각기 달랐고 안에 입은 셔츠도 조금씩 모양이 달랐다.
준이 형은 수트의 정석이라는 느낌으로 단정한 셔츠에 와인색 넥타이를.
영빈 형은 기다린 목이 돋보일 수 있도록 과감하게 파인 셔츠에 레이스 초커로 포인트를 주었다.
오늘은 어쩔 수 없이 형 라인에 속해야 하는 경환 형은 하얀 목폴라에 폭이 좁은 와인색 머플러를 살짝 둘렀다.
찬이는 블랙 셔츠에 체크 보타이, 페도라로 특유의 장난기 가득한 분위기를 잘 살렸고 본인도 만족해하는 눈치였다.
반면 세빈이는 귀여운 건 싫다고 강력하게 어필한 결과 묘안석으로 포인트를 준 볼로타이로 타협을 봤다.
내 눈에는 처음 가희 누나가 골랐던 크라바트도 괜찮았지만, 지금도 무척 잘 어울렸다.
사실 제일 당황스러웠던 건 나였다.
내 몫으로 주어진 셔츠는 중세 시대 남자 귀족이 입을 것 같은 프릴과 레이스가 달린 나풀거리는 셔츠였다.
깃 부분이 없었고, 목은 넓게 파여 있었으며, 가슴 앞쪽을 끈으로 고정하는.
이 당황스러운 의상을 내 몫이라고 내밀 때 처음엔 장난인 줄 알았다.
거기다 초커 비슷하게 생긴 무언가도 주었는데 생전 처음 보는 생김새였다.
레이스로 섬세하게 장식되어 있었고, 리본 끈을 교차하여 목 앞쪽에 묶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목에 차고 나니 어딘지 모르게 코르셋 떠올리게 되는 디자인이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반항도 못 하고 그대로 옷을 입게 됐을 때 내 심정이란….
준이 형처럼 깔끔한 디자인을 원했던 나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지만, 세빈이처럼 바로 바꿔 달라고 말하지 못한 내 탓이었다.
내가 우리 누님들을 너무 얕본 모양이었다.
한편, 여유로운 척, 춥지 않은 척 잘도 포즈를 취하던 멤버들은 카메라가 사라지자마자 서로 찰싹 달라붙어 바로 주머니에 있던 핫팩을 꺼냈다.
이놈의 멋이 뭐라고.
멋 두 번 찾다가는 죄다 얼어 죽게 생겼다.
간신히 대기실에 도착한 우리에게 서포트 팀원분들이 달려와 휴대용 난로를 가져다주고 핫팩을 바꿔주는 등 한바탕 바쁘게 움직였다.
추운 것도 잊을 만큼 긴장했던 건 우리의 감각뿐이었는지, 멤버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하나같이 양 볼과 코끝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어떡하죠? 사진에도 빨갛게 나왔으면 안 되는데.”
“괜찮아, 빨개지기 전에 다 건졌을 거야. 아까 포즈도 그렇고 멘트도 그렇고 아주 잘했어.”
세빈이가 메이크업을 수정받으며 시름이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우진 형이 달래주었다.
“사진 떴어! 우와, 생각보다 더 괜찮네.”
“자기 입으로 괜찮다고 말하는 뻔뻔함, 정말 높이 산다, 힘찬아.”
“형도 봐봐, 우리 진짜 잘 나왔어!”
먼저 수정을 끝낸 찬이가 나와 멤버들을 향해 핸드폰을 내밀자 그곳에는 초면인 분들이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우리 아닌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