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 같은 곳에서(5)
그 뒤로 한참이나 멤버들의 지나친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물먹은 솜처럼 지쳐버렸다.
“이제 그만 자자, 좀!”
“신기하니까 그러지. 이야, 우리 중에도 드디어 배우님이 나오나요!”
지칠 줄 모르는 힘찬이는 두 손에 얼굴을 묻은 나를 놀리느라 여념이 없었고, 경환 형은 자꾸 씨암탉을 보듯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초롱초롱한 세빈이 시선은 또 어떻고.
그나마 다행인 건, 준이 형이 지나치게 들뜬 멤버들을 열심히 붙잡고 가라앉혀줬다는 거?
“공식적으로 발표 나기 전까지는 어디 가서 말하지 마. 진짜 마지막까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당연하죠! 우리 화니는 잘할 거지만!”
“말할 사람도 없는걸요.”
“제발 그만해….”
“이제 해산. 자야 내일 또 움직인다.”
준이 형은 아직 확정된 게 아니니 입조심 하라고 멤버들에게 몇 번이나 신신당부하며, 고생했다는 듯 내 어깨를 쓸어주었다.
역시 내 최애는 남달랐다.
진짜 형 아니었으면 내가 진작에 쟤를 매달았을 거야….
과도한 관심이 부담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근거 없이 잘할 거라고 믿어주는 멤버들이 고맙기도 했다.
물론 적당히 했으면 더 고마웠을 테지만.
흐느적거리는 걸음으로 정신없었던 오늘 하루를 끝내기 위해 푹신한 침대에 몸을 던졌다.
좋아하는 섬유 유연제 냄새와 푹신한 촉감 덕분에 온몸에 힘이 쭉 빠지고 녹아내릴 것 같은 상태가 돼버렸다.
가물가물해진 눈을 감고 이번에 도전하게 될 ‘임지웅’이라는 인물을 떠올렸다.
인물에 대한 설명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던 덕분에 인물 정보를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임지웅’을 떠올리기는 어려웠다.
정보는 단편적이었고, 몇 문장으로 사람의 삶을 정의하기는 힘드니까.
품 안에 누운 포잉의 보드라운 촉감을 즐기며 주어진 정보에 상상을 더해보았다.
한참 예민하고 복잡할 19살.
사람에게 차가운 태도를 보이는 탓에 친구도 없고,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그저 문제아 중 한 명인 소년.
외로움을 많이 타지만, 자존심이 강한 성격이라고 했으니 겉으로 티 내지 않았을 것.
매사에 관심 없는 듯한 메마른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면서도 사실은 누구보다 관심이 고팠을지 모른다.
보통 사람은 경험을 통해 학습하고 학습이 누적되면 경험하지 않아도 추측하게 된다.
임지웅의 태도 역시 앞서 경험하고 학습한 것들에서 기인했으리라.
그렇다면 임지웅이 사람에게 무관심해진 건, 관심이 고프고 필요하던 때 그에게 내밀어진 손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졸음이 몰려오는 동안에도 무의식적으로 내가 생각한 ‘임지웅‘을 머릿속에 만들어 갔다.
작가님이 설정한 ‘임지웅’은 내가 상상하는 그와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상상만으로 어떤 인물을 만들어 내는 건 제법 재미있는 일이었다.
까무룩 깊은 잠에 빠지기 직전, 나는 내면에 서늘하고 깊은 눈매를 지닌 ‘임지웅;’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김미연 선생님은 교육 첫날부터 움직임이나 대사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몇 가지를 설명하고 내 질문에 답변해준 뒤 따로 숙제를 내주셨다.
추천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그 내용으로 함께 이야기해보자고.
선생님은 내가 아이돌이기 때문에 일반인이나 연기 지망생들보다 훨씬 좋은 입장이라고 하셨다.
비단 인지도 때문만이 아니라, 카메라와 사람들의 시선에 이미 익숙해져 쉬이 겁먹지 않을 테니까.
많은 사람이 배우의 길을 포기하는 원인 중 하나가 그 시선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하셨다.
지금의 나는 카메라가 나를 찍고 모든 사람이 그걸 본다는 것이 생각보다 두려운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다행히 특성과 스킬의 효과로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지만,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다면 엄두조차 낼 수 없었을 것.
촬영장 내 수많은 시선도 마찬가지였다.
멤버들만 출연하는 언래블 스토리를 촬영할 때조차 우리를 도와줄 서포트 팀분들과 수많은 현장 스태프들이 함께했다.
촬영하는 내내 그들의 시선은 카메라 안, 혹은 카메라 밖의 우리를 향해있었다.
쏟아지는 시선 한가운데서 태연하게 움직이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선생님은 교육 첫날, 카메라와 시선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됐으니 기본 준비는 된 것이라며 웃으신 것이다.
그러면서 다양한 경험과 간접 체험이 없으면 제대로 된 연기를 해나갈 수 없다고 한마디 덧붙이는 걸 잊지 않으셨다.
“물론 내 생각이 100%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의 경험이 있고 그 과정에서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으니까. 나는 지환 군에게 김미연이라는 배우가 깨달았던 것들을 알려주는 거고.”
온화한 눈가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김미연 선생님의 눈동자는 따뜻한 커피가 생각나는 색이었다.
“배우는 사람들에게 꿈과 환상을 파는 직업이라고 하죠. 타인의 삶을 간접 경험하게 해주는 직업이라고도 하고요. 다 맞는 말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요.”
순간 온화하기만 했던 눈동자에 단호한 빛이 서렸다.
“하지만 그 이전에, 배우 역시 직업이라는 걸 잊으면 안 됩니다. 노동의 대가가 주어지는 만큼, 그에 맞는 책임감 또한 있어야 합니다.”
하나하나 무척이나 현실적인 말들이 날카롭게 날아와 박혔다.
그중 책임감이라는 단어는 유독 무겁게 다가와 내려앉았다.
‘나는 내 직업에 어떤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는가?’라는 질문이 머릿속에 깊이 자리 잡는 순간이었다.
“너무 어려워요, 선생님.”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과 함께 흘러나온 말.
그 말을 들은 선생님은 꾸짖거나 웃지 않으셨다.
그저, 조금 전보다 더 진지한 얼굴로 답을 해주셨을 뿐.
“어렵죠. 저도 늘 어렵다고 생각해요. 이 일을 한 지가 벌써 40년이 넘었는데도 말이죠. 어렵기 때문에 계속해서 배워야 하는 거예요.”
실제로도 김미연 선생님은 끊임없이 새로운 배역에 도전했고,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분이셨다.
나이를 한계로 두지 않았고, 더 다양한 배역에 도전할 수 있는 건 축복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하셨다.
선생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배우와 연기’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무척이나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그제야 나는 왜 팀장님이 수많은 분들 중 김미연 선생님을 모셔온 건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연기’라는 업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고 알아가기를 바라셨던 게 아닐까.
원래라면 딱딱하게 느껴졌을 이론적인 내용이지만, 선생님과 나누는 대화들로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었다.
워낙 많은 곳에서 러브콜이 오는 선생님이다 보니 이 교육을 언제까지 해주실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선생님을 통해 튼튼한 기초를 다진 후라면 괜찮을 거라고, 팀장님은 그렇게 판단했던 것 같았다.
이런 신뢰를 받는 이상 계속 투정을 부릴 수는 없는 노릇.
갈 길이 암담할 만큼 멀었지만, 왠지 이전처럼 마냥 겁나고 무섭기만 하지는 않았다.
* * *
“우리 화니, 오랜만이네!”
“왜 환이가 형네 환이야.”
“너는 왜 또 승질이냐!”
기존의 연습 시간을 쪼개서 연기 수업을 받다 보니 하루가 평소보다 배로 바빠져야 했다.
그렇다고 다른 연습을 놓을 수는 없었다.
나는 노래도, 춤도 아직 한참이나 부족했고, 배워야 할 것들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으니까.
그렇게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는 평소 같은 하루였는데, 그 일상이 느닷없이 찾아온 형님들 덕분에 와장창 깨져버렸다.
선생님과의 수업 후 메모해 두었던 것들을 들고 작업실로 향하는 길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새벽 형들과 진우 형의 모습에 반갑게 인사했던 것도 잠시.
어? 하는 사이에 가영 형과 진우 형에게 들리듯 옮겨진 뒤 낯선 차에 태워졌고, 키스 형에게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묻는 중이었다.
더군다나 아직 오늘 목표치 연습을 끝내지 못한 터라 마음이 불편했다.
“저 아직 연습이 남았는데….”
“괜찮아, 괜찮아. 내가 다 팀장님이랑 대표님한테 허락받았어!”
“아니, 형 도대체 지금….”
“하아…. 사람이랑 대화할 때 가운데 토막만 던지지 말랬잖아, 가영아.”
왜 눈앞에 새벽 형들과 진우 형이 있었는지, 지금 나는 어디를 가고 있는지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아지니 되려 말문이 막혔다.
얘들아! 나 납치당했다! 준이 형!
애타는 마음에 속으로 멤버들을 불러봤지만, 당연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멤버들도 없이 혼자 달랑 들려서 끌러 나온 참이라 근심, 걱정이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하필이면 포잉도 자리를 비운 상태였고.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릴 수는 없는 노릇이라,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세비 형을 붙들었다.
울상이 된 얼굴로 형을 바라보자 깊은 한숨을 내쉰 세비 형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가영 형을 나무랐다.
“에단 선생님이 네가 요새 연기를 배운다고 말씀하시길래 팀장님한테 너 데리고 외출해도 되는지 여쭤봤어. 마침 진우가 같이 뮤지컬 보러 가자고 해서 네게도 도움이 될까 싶었거든.”
“뮤지컬이요?”
뮤지컬.
이전 생에서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정신이 혼미했지만, 호의로 한 행동에 무어라 타박하기도 어려웠다.
멍하니 앉은 나를 보던 키스 형이 가영 형을 타박하기에 마음속으로는 더 해달라고 열심히 응원하긴 했지만.
일단은 회사에서도 허락했다고 하니 마음을 편히 먹기로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형들이니까.
“형이랑 친한 누나가 이번에 표를 보내주셨거든. 너도 보면 좋아할 거야.”
“저 뮤지컬은 처음이에요.”
걱정 가득했던 내 표정이 풀리자, 진우 형이 은근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백석 알지?”
“네. 알죠.”
“시인 백석이랑 자야의 이야기야. 제목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고.”
“어! 저 그 시는 알아요.”
시에 대해 아는 건 없었지만, 유명한 구절 몇 개는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눈이 내린다는 그 문장이 유난히 쓸쓸하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해서 잊히지 않았다.
하필이면 흰 당나귀가 울었다는 게 생소하기도 했고.
그렇게 대학로로 납치되어 가는 동안 진우 형과 세비 형에게 열심히 우쭈쭈받고 나니 괜히 웃음이 나왔다.
하여튼 이 형들은 진짜.
* * *
“그렇게 보내도 괜찮겠어요?”
우진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서류를 넘기고 있는 소현에게 다가가 물었다.
“왜? 걱정돼?”
“그냥요. 환이가 워낙 낯도 가리고 밖으로 안 나가는 애잖아요.”
지환은 우진에게도 유난히 더 많이 시선이 가는 멤버였다.
가끔은 마냥 애 같다가도 가끔은 세상 다 산 노인네처럼 구는, 엉뚱한 구석이 있는.
그런 우진의 마음을 짐작하기라도 한 듯 소현은 웃으며 가볍게 대꾸했다.
“환이는 더 많이 보고 배워야 해. 연기가 아니더라도, 곡을 쓰는 데도 경험은 도움이 될 테니까. 보호자도 확실히 붙어서 간 거라 너무 걱정 안 해도 돼, 우진아.”
“크흠… 아니, 뭐. 걱정한다기보다도….”
평소에는 솔직한 편인 우진이지만, 그걸 또 정곡으로 찔리면 부끄러워하곤 했다.
소현은 자기 담당 그룹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쏟는 우진이 꽤 마음에 들었기에 더 놀리지 않기로 했다.
우진은 삐지면 조금 오래 가기는 편이기도 했으니까.
“나는 애들 세계가 더 많이 넓어졌으면 좋겠어. 더 많이 경험해보고 배워서 더 높이 훨훨 날았으면 좋겠고. 개인 활동이 늘어나면서 그런 부분이 더 아쉽더라고.”
언래블 멤버들은 뭐든 열심히 하려고 했다.
하지만 단순히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소현은 여태까지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걸 채울 수 있도록 돕는 것도 회사의 몫.
“환이가 연기를 안 해도 좋아. 뭐, 경험 삼아 해보고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본업에 더 충실해지기도 할 거고.”
“어느 쪽이든 실이 될 건 없다는 뜻이네요.”
그동안 구른 세월이 있었던 덕분인지 우진은 이해가 빨랐다.
그런 우진을 기특하다는 듯 바라봐 준 소현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우진에게 내밀며 덧붙였다.
“우리는 해줄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서 서포트해주면 되는 거니까.”
“그렇죠.”
“자, 그럼 이제 가서 영빈이 좀 불러다 줄래?”
소현이 내민 종이의 겉면에는 영빈의 섭외 요청이 들어온 프로그램명이 적혀있었다.
‘밥 먹고 합시다.’
또 요리 프로그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