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 같은 곳에서(4)
팀장님의 목소리에 문이 열리며, 온화한 얼굴의 미부인이 들어왔다.
세상에, 저분이 갑자기 왜 나와!
회의실 안으로 들어온 분을 본 순간,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를 접어 인사드렸다.
“안녕하세요! 공지환 입니다!”
“선생님, 와주셔서 감사해요.”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나와 달리 소현 팀장님은 환한 얼굴로 달려가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안녕하세요, 김미연이라고 해요. 편히 앉아요.”
“네!”
나도 모르게 기합이 단단히 들어간 목소리로 답했고, 소현 팀장님은 선생님의 손을 붙잡아 자신의 옆으로 안내했다.
“소현이 너는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드니.”
“저야 늘 회사에서 뭉개느라 그렇죠, 뭐. 잘 지내셨어요?”
“별일 없이 지낸다. 쉴 때는 쉬어줘야지.”
또렷한 이목구비와 우아하게 정돈된 머리칼, 세련된 옷차림은 누가 봐도 배우나 모델을 떠올릴 정도였다.
아니, 대한민국에서 이분을 모르는 사람이 있나 싶기도 했지만.
분위기를 아우르는 포스에 눈만 꿈뻑거리는 사이, 팀장님과 선생님은 다정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도대체 우리 팀장님은 선생님과는 어떻게 아는 사이인 거야?
“아 참, 내 정신 좀 봐. 너는 도와달라고 불러놓고 나랑 수다 떨고 있으면 어떡해.”
“아, 맞네. 오랜만에 뵈어서 너무 들떴나 봐요.”
팀장님은 늘 경쾌하고 활달한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본인 특유의 카리스마를 잃지 않았다.
덕분에 때때로 같이 어울려 주실 때는 장난을 치기도 했지만, 상급자로서의 피드백을 건넬 때는 누구보다 엄하셨다.
그런 팀장님이 선생님 앞에서는 어리광을 부리듯 말하고 계시다니, 꽤 신기한 광경이었다.
“지환이 얘가 제가 말씀드렸던 그 애예요. 선생님이 조금 도와주셨으면 해서요.”
“훤칠하니 잘생겼네. 연기는 처음이라고 했지요?”
“네, 선생님. 그, 말씀 편히 해주세요.”
두 분의 대화에 넋을 놓고 있는데 갑자기 내게 화살이 돌아왔다.
언래블을 처음 마주했을 때는 ‘우와! 내 새끼들!’ 이런 기분을 느꼈고, 새벽 형들을 봤을 때는 ‘우와! 연예인이다!’라는 느낌을 받았다.
반면, 김미연 선생님을 뵌 지금은… 그저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머니가 성까지 붙여서 내 이름을 부를 때의 그 초조함이랄까.
포식자 앞에 선 초식 동물의 마음이랄까.
혼란에 빠진 내 두 눈동자가 지진 난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지만, 내 앞에 두 분은 누구보다 평화롭게 웃고 있었다.
사, 살려줘, 포잉…!
* * *
그 뒤로는 선생님의 질문에 답하고 움직이라는 대로 움직이는 등 한참 동안 그 자리를 지켜야 했다.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신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마지막 순간에 나쁘지는 않다는 평을 내리시더니 부드럽게 웃어주셨다.
하지만, 시종일관 부드럽게 웃고 계신 것과 별개로 대화 내내 평가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선이 마주할 때마다 날카롭게 빛나던 눈동자 덕분에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어찌나 긴장했던지 스킬을 써서 속마음을 확인해 볼 생각조차 못 했다.
선생님을 배웅한 후에야 스킬을 써볼 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지나버린 일.
“네가 골랐던 임지웅 역은 나도 추천해주고 싶었던 캐릭터야. 감독님이 만만치 않은데, 뭐. 선생님이 도와주시면 너도 금방 늘 테니까.”
“하, 하하…. 처음부터 허들이 너무 높아요, 팀장님.”
회사에서 적당한 연기 선생님을 붙여줄 거라는 건 예상했지만, 원로 배우인 김미연 선생님을 모시고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원래 기초를 배우는 게 제일 중요해. 마침 선생님도 쉬고 계신다고 했고.”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거리는 팀장님의 모습에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담스러웠다.
물론 상태창, 스킬 등 여러 시스템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 노력을 퍼부으면 보통 사람들보다 더 빠르게 능숙해질 터였다.
평생 음치였던 내가 지금은 그래도 무대에 설 수 있을 만큼 성장한 것처럼.
처음부터 이전 지환의 성장치가 주어진 데다가, 내 노력으로 계속해서 성장시킬 수 있다는 건 굉장한 메리트였다.
다만, 걱정스러운 점은 한 가지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내가 다른 분야에 도전해도 될까 하는 것이었다.
“뭐든 할 수 있을 때 경험해보는 거야. 기회가 언제나 찾아오는 건 아니니까.”
“네….”
아직도 갈팡질팡하는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팀장님이 어깨를 두드리며 다독여주셨다.
너에게 기회가 찾아온 거니까 잡으라고.
애써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고 팀장님이 내 쪽으로 밀어준 대본을 움켜잡았다.
“다음 주에 미팅이 있어. 그때 너도 같이 갈 거고. 감독님이랑 작가님이 보자고 하셨어. 따로 오디션을 보는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차라리 오디션에 도전했다가 떨어진 거면 포기라도 할 텐데 말이죠.”
“하하, 얼른 애들한테나 가.”
툴툴거리는 말을 못 들은 척 웃어넘긴 팀장님을 뒤로하고, 힘이 쭉 빠진 걸음으로 터벅터벅 연습실로 향했다.
역시 세상에 쉬운 일이 하나도 없었다.
* * *
분위기가 영 이상했다.
숙소 오기 전, 다음 음방 무대를 위해 합을 맞춰볼 때도 괜찮았다.
하지만 숙소에 도착해서 씻고 나오는 순간부터 멤버들의 시선이 온몸에 달라붙어 영 불편했다.
“휴….”
바닥에 엎어져 있다가 답답한 마음에 몸을 돌렸더니 옆에서 뭉그적대던 찬이가 움찔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평소라면 내 다리 위에 자기 다리를 올려놓고 낄낄거릴 애가 자꾸만 안절부절못하는 게 눈에 들어와서 마음이 불편해졌다.
‘포잉, 이거 기분 탓 아닌 것 같지?’
‘쟤네 시선으로 너 잡아먹을 것 같음.’
‘내 생각도 그래….’
가뜩이나 잔뜩 긴장하고 김미연 선생님과의 면담 아닌 면담을 진행하느라 진이 쪽 빠져있었는데, 오늘따라 멤버들 시선이 너무 부담스러웠다.
‘꿈 때문이겠지?’
‘그거 말고는 딱히 일이 없었지.’
바닥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멤버들을 아일랜드 식탁 위에서 구경하다, 포잉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하며 털을 고르기 시작했다.
슬쩍 눈동자만 굴려서 멤버들을 바라보자 자기들끼리 무언가 심각한 얼굴로 시선을 주고받고 있었다.
걱정돼서 그렇다는 건 알겠는데 분위기가 왜 이렇게 무겁지?
잠을 잘 못 자는 것 같아 걱정돼서 이런다고 보기에는 조금 과했다.
“지환아, 잠깐 앉아봐. 너희도.”
“넵.”
“응. 왜요?”
한참을 옆에서 꿈지럭거리던 세빈이까지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에 착 달라붙어 앉았다.
“내가 좋은 건 알겠는데 님들 좀 떨어지지…?”
세빈이가 붙어 있어 있는 거야 늘 있는 일이라 그러려니 했다.
나는 우리 막내의 걱정 인형이니까.
그런데 왜 저 찐빵 같은 놈까지 들러붙고 경환 형은 내 뒤에 자리를 잡는 걸까?
멤버들에게 포위된 나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일단은 얌전히 준이 형 앞에 앉았다.
“환아, 요새 뭐 힘든 일 있어?”
“네?”
“혹시 계속 잠을 잘 못 자거나 불안한 마음이 계속 들거나 그런 일이 있나 걱정돼서.”
준이 형이 이야기하는 동안 벽에 기대 있던 영빈 형까지 스륵 옆에 다가와 앉았다.
정면엔 준이 형, 등 뒤에는 경환 형. 왼쪽은 찬이가, 오른쪽엔 세빈이와 영빈 형.
갑자기 멤버들에게 포위당해 당황스러웠지만, 일단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간혹 악몽을 꾸기는 했는데 이젠 괜찮을 거예요.”
“음…. 지환아, 너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잠을 잘 못 잤었어. 혹시 알고 있니?”
“네?”
이건 또 처음 듣는 얘기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준이 형이 침착하게 형이나 멤버들이 마주했던 내 모습을 이야기 해주었다.
자다 우는 것도 몇 번이나 있었고, 심하게 가위에 눌리는 것처럼 끙끙거리는 날도 많았다고.
이후 몇 번이나 고민하는 듯 눈썹을 찡그리던 준이 형은 이사 오기 전의 숙소에서 있었던 일이라며 입을 열었다.
“최근에는 그런 모습 보인 적 없는데, 이사 오기 전에 우리 연습생 때 쓰던 숙소 있잖아.”
“네.”
좁은 방에 나란히 놓인 이층 침대, 쌓여있는 옷더미와 불안과 기대를 먹고 자란 멤버들, 그리고 지환이와 나.
“기간 중간쯤부터든가? 너 자다 거실에 나와서 우두커니 앉아있다 들어가고 그랬어.”
“네? 제가요?”
처음 듣는 얘기에 나도 모르게 포잉을 바라봤지만 포잉은 묵묵부답이었다.
“한참 동안 그러다 교통사고 난 이후부터는 또 괜찮아졌는데 그 후부터는 가위에 눌리는 것 같더라고.”
“아….”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거실을 헤매고 다녔을까.
형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너무 아파왔다.
지환이가 몽유병을 앓았던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봤던 멤버들이라면, 그 후에 내가 보인 모습에 더 걱정했을 것 같아 고맙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했다.
“음, 형들이랑 너희가 걱정하는 건 알겠는데, 일단 좀 정리를 할게요.”
이대로 두면 오해가 어디까지 커질지 알 수 없어 일단은 멤버들을 진정시켜야 할 것 같았다.
세빈이랑 찬이는 벌써 양쪽에서 내 팔을 붙들고 있었다.
아니, 내가 뭐 어디 도망가냐?
둘을 떼어내려다 포기한 내가 어깨를 축 늘어트리자, 시종일관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던 준이 형과 영빈 형이 피식 웃었다.
“내가 자다 깨서 그러고 다니는 건 진짜 몰랐고, 이제는 안 그러니까 그건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처음에 화장실 가려고 나왔다가 귀신인 줄 알고 얼마나 놀란 줄 알아?”
“어어, 그래. 귀신이어도 우리 찬이 보면 도망갔을 텐데 말이지.”
“아오, 진짜 너는!”
“쉿. 일단 환이 얘기 듣자.”
툴툴거리는 찬이 입은 다행히 경환 형이 막아줬고, 덕분에 무거웠던 분위기는 한결 더 풀렸다.
“그, 알다시피 부모님을… 내가 볼 수 없는 그런 상황이잖아요. 그동안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좀 있었고.”
차마 내 입으로 그쪽 세계에서 살아계신 부모님을 죽었다고 할 수가 없어서 어물쩍 돌려 말했지만 멤버들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이렇게 우리 애들이 착하지, 으휴.
“우리가 막 고생하다가 1위 하니까 그동안 긴장했던 게 탁 풀렸나 봐요. 그동안이랑 다르게 엄청 좋은 얼굴로 나오셨거든요. 그래서 꿈에서 나도 모르게 두 분한테 어리광부리고 우리 이야기하고 그러다 보니까 좀 울었나 봐요.”
멤버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천천히 최대한 꿈을 풀어서 이야기했고, 맏형들부터 막둥이까지 모두가 진중한 얼굴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렇게 그날 꿈을 꾸고 나니까 마음속에 늘 무겁게 담겨 있던 무언가가 사라진 것 같아서 솔직히 저 되게 괜찮아졌어요.”
“어머님, 아버님이 우리 환이 엄청 기특해하셨겠네.”
“우리 얘기도 많이 했어?”
조용히 있던 영빈 형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건네왔다.
등 뒤에서 경환 형은 멤버들 얘기를 잘 해드렸는지 물어왔고.
“네. 엄청요. 자랑스러워하셨어요.”
확신에 찬 내 목소리에 맏형들의 어두웠던 얼굴이 조금 풀렸다.
그때, 옆에서 의심스럽다는 듯 찬이가 되물어왔다.
“정말 그게 다야?”
“응. 진짜 그게 단데.”
“근데 왜 밥을 남겼어?”
“밥?”
“혼자 뭐라 중얼거리기도 하고. 또 다른 고민이 있는 거 아냐?”
“네?”
자다 울어서 이렇게 걱정하나 했더니, 그것만 있었던 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조금 전까지는 걱정 가득했던 분위기가 갑자기 취조처럼 변했다.
사방에서 멤버들이 목격한, 평소와 달랐던 내 모습 이야기가 날아드는데 낯이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풉….’
‘포잉, 듣지 마. 가서 자….’
‘나는 신경 쓰지 말고 할 거 하셈. 아, 꿀잼.’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워가지고…!’
드라마 출연 제의 때문에 고민하느라 며칠 넋을 놓고 있었더니 멤버들은 그게 그 꿈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확실치 않아 말하지 않았던 건데 이렇게까지 오해가 커질 줄은 몰랐다.
“아니, 좀! 도대체 다들 어디서 그런 걸 본 거예요?”
“우리는 다 널 지켜보고 있어!”
“소름 돋으니까 그런 말 하지 말고!”
밥 먹다 한숨을 몇 번 쉬었는지, 평소에 안 먹는 반찬을 몇 번 집었는지를 왜 세고 있었던 건데?
자기들이 익히 알고 있던 모습이 아닌 건 전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건지, 멤버들이 줄줄 늘어놓는 이야기에 아연해서 말을 끊어버렸다.
“팀장님이 갑자기 드라마 출연 얘기하셔서 그런 거예요!”
“드라마?”
“하, 진짜….”
“환이가 연기를?”
최대한 나중에 말하려 했건만, 결국 내 입으로 실토해 버렸다.
드라마 얘기를 꺼내자마자 거실이 폭탄이 터진 것처럼 시끄러워졌다.
하아, 이럴까 봐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오늘은 긴 밤이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