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 같은 곳에서(2)
온종일 멤버들의 알 수 없는 감시를 받던 나는 오후 늦은 시간이 돼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지환아, 요새 고민이 있거나 혹시 힘든 일이 있으면 말해줬으면 좋겠어.”
“네?”
어리둥절한 눈으로 팀장님을 바라보자, 옆에서 진지한 얼굴을 한 실장님이 말을 덧붙였다.
“최근에 혹시 악플이나 인터넷 기사 같은 거 찾아본 건 아니지?”
“네. 보면 마음이 안 좋을 것 같아서 안 봤죠. 저 별일 없는데….”
처음에는 혹시 나도 모르게 문제가 될만한 무언가가 있었나 싶어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하지만 딱히 무언가 잘못한 기억이 없어서, 두 분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 말고는 딱히 다른 액션을 취하기 어려웠다.
그런 내 모습에 두 분은 시선을 주고받더니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종종 악몽을 꾼다는 멤버들 이야기가 있었어. 어제는 특히 조금 더 심했던 것 같고.”
“혹시 힘든 게 있다면… 별 도움이 안 될지도 모르지만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지환아.”
“아….”
지난밤, 꿈뿐만 아니라 현실의 나도 울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걸 멤버 중 누군가가 보았고.
그래서 오늘 하루 종일 멤버들의 시선이 평소보다 더 뜨거웠던 거구나 싶어서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분명히 자기들은 티 내지 않는다고 조심했을 게 뻔했다.
그런데도 이상하다는 걸 바로 알아챌 만큼 세상 투명한 내 새끼들.
고맙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계속 모른 척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멤버들을 대하는 건 애들의 상태를 봐가면서 적당히 넘길 수 있지만, 지금 당장 문제는 눈앞의 두 분이었다.
곧이곧대로 말하기도 어려운 문제라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런 내 모습에 무언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건지 팀장님의 얼굴에는 수심이 깊어졌다.
“음,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런데 이제 괜찮아요.”
“우리가 너희를 걱정하는 건 당연한 거야, 지환아. 그러니까 숨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상담도 계속해서 진행 중이다 보니 두 분의 걱정이 더 커진 것 같아 고마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동시에 치밀었다.
어느 기획사가 이렇게까지 멤버들 하나하나 신경 써주나 싶기도 했고.
두 분은 괜찮다는 말을 전혀 믿지 않는 것 같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망설이던 그때, 포잉의 조언이 들려왔다.
‘그냥 가족 꿈을 꿨다고, 오래 마음에 담고 있던 부담을 덜었다고 하는 게 어떰? 적당히 진실과 거짓을 섞으면 되잖아.’
설명할 수 없는 내용에 막막했던 나는 포잉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이전 지환의 상황을 멋대로 쓰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차피 그것조차 이제는 내가 안고 가야 할 몫이니까.
“그동안 가족에 대한 꿈을 종종 꿨었어요. 아무래도 제가 마음의 짐? 같은 게 조금 있었던 것 같아요.”
“응. 힘든 꿈을 꿨구나, 우리 지환이가.”
“사실 깨고 나면 잘 기억이 안 나요. 그냥 가족이 나왔고 슬픈 꿈이었구나…. 그 정도였거든요. 그런데 어제는 조금 달랐어요.”
“어떤 꿈이었길래 그렇게 많이 울었어.”
제대로 이야기하는 건 아니지만,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내 전 가족에 관해 이야기하려니 입이 마르는 것 같았다.
“어제는 여러모로 저희한테 뜻깊은 날이었잖아요? 그래서 그런가… 가족들한테 자랑하는 꿈이었어요. 다들 잘했다고 칭찬해 주셨고요.”
이전 같았으면 이 말을 꺼내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눈물을 참느라 힘들었을 텐데.
어젯밤 이후로 마음을 많이 털어낼 수 있었던 걸까?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조금은 웃는 얼굴로 말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그곳에서도 저를 좀 기특하게 여겨주시지 않을까요?”
“기특하고말고. 우리 지환이만 한 애가 없지.”
“여러 의미로 저 같은 애가 없죠.”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지지 않았으면 해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두 분에게 말했다.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신 건지 팀장님은 더 울컥한 듯 잠긴 목소리로 대답해주셨다.
그런 팀장님에게 정윤 실장님의 시선이 잠깐 닿았다가 금방 내게로 돌아왔다.
실장님은 마음을 알기가 힘들다고 늘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평소랑 달리 실장님이 어떤 마음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분 모두 나를 바라보는 시선 안에는 안타까움과 기특함이 이리저리 뒤섞여 있었다.
“소현 팀, 우리 지환이가 이렇게 잘 컸네. 그렇죠?”
“그러니까요. 처음에는 힘찬이처럼 사고뭉치 같더니만.”
“에이, 그건 심했다. 찬이보단 제가 낫죠.”
“내 눈엔 그놈이 그놈 같았거든.”
“와, 저 서운하려고 그래요.”
“하여튼 너희는 찬이 같다고만 하면 아주 난리야, 난리.”
오늘도 힘찬이를 대화에 넣자 다들 웃을 수 있었다.
우리 찬이가 이렇게 팀에 없어선 안 될 존재라니까.
두 분의 걱정이 무엇인지 알았기에 되도록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꿈에 관해 이야기했다.
아마, 어제 그런 꿈을 꾼 후가 아니었다면 두 분이 이런 자리를 마련했을 때 지금처럼 웃으면서 말하기는 어려웠을 것 같았다.
복잡한 생각을 잠시 머리 한쪽으로 밀어두고 두 분을 안심시키니, 적당히 무마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이야기가 마무리되나 하던 차.
안심한 듯 웃던 팀장님이 몇 뭉치의 종이를 내 쪽으로 밀어주었다.
“자, 그럼 이제는 일 얘기를 조금 해볼까?”
“일이요?”
“응. 네가 해줬으면 좋겠다고 회사로 들어온 일들이야.”
얌전히 내 쪽으로 밀어진 종이 뭉치를 받아서 제일 위의 내용을 확인하다 당황하고 말았다.
“어… 팀장님 이거 다 드라마네요?”
“응. 너한테 제의 들어온 역할들 다 체크해놨으니까 보기 편할 거야.”
“제가 연기는 조금….”
지금 하는 아이돌조차 버겁다고 느끼던 터라 연기까지는 무리라고 생각했다.
무대에서의 표정 연기와 드라마에서의 연기는 전혀 다르니까.
내가 해본 연기라고는 뮤직비디오에서 뛰어다니던 것과 저번 광고에서 서류만 뒤적이던 게 전부였다.
“알아. 네가 많이 걱정하고 있다는 거. 하지만 지환아, 넌 네 생각보다 연기에 소질이 있는 것 같아. 자기감정을 감추고 맡은 역에 몰두할 수 있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거든.”
부담스러워하는 게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던 건지 팀장님이 빙그레 웃으며 뮤직비디오 촬영 당시의 일화들을 이야기하셨다.
별다른 NG 없이 물에 뛰어드는 씬을 잘 넘겼던 일, 패션쇼에서 표정 연기, 데뷔 앨범의 뮤직비디오 촬영 당시의 일 등.
그 모든 것들도 결국은 다 연기라며 내게 재능이 있다고 전하는 소현 팀장님의 얼굴에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상태창에 선명하게 나타난 연기 항목의 숫자를 보고 있었다.
보컬이 108이었지만 연기는 21.
100이 넘는 숫자를 나타내는 보컬조차도 내 마음에 차지 않았다.
종종 영빈 형과 합을 맞출 때마다 밀리는 게 너무 분명하게 느껴져서 분해질 만큼.
그런 내가 저 정도의 숫자로 욕먹지 않고 연기를 할 수 있을까?
망설이는 내 모습에 실장님이 달래듯 말을 이었다.
“예전에 그렇게 벽을 치던 네가 사실은 부끄럼쟁이였을 뿐인 것처럼, 우리가 알지 못하는 더 많은 매력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해. 너나 다른 애들도 전부 다.”
실장님은 나도 멤버들도 이제 막 피어나는 중이라 자신도 알지 못하는 능력들이나 관심사가 있을 거라고 천천히 설명해주었다.
“그러니 더 다양한 방면에서 시도해보고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우리가 할 일이고. 시도해보고 경험해 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것들도 많으니까.”
소현 팀장님과는 다른 의미로 확신을 가진 실장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얇디얇은 내 귀가 팔랑거렸다.
‘포잉, 어떡하지…?’
‘너무 눈에 보이는 숫자만 믿지 마셈. 어차피 저건 대략적인 수치고 그저 보정 효과일 뿐임. 사람의 가능성은 고작 숫자에 좌우될 만한 그런 게 아님.’
평소라면 조금 귀찮은 듯 툴툴거렸을 포잉이 웬일로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주었다.
눈앞에 보이는 숫자에 현혹되지 말라는 말이 이상할 만큼 크게 와닿았다.
“그러면 대본을 조금 읽어봐도 괜찮을까요? 바로 말씀드리기는 조금….”
“그럼, 당연하지. 전부 다 읽어보고 다시 이야기하자.”
“잘 생각했다, 지환아.”
무언가 속은 듯한 느낌도 들었지만, 마냥 싫다고 피하기만 하는 것도 무리였을 거라고, 그렇게 자신을 납득시켰다.
두 분은 몇 뭉치의 대본을 내 앞으로 밀어주며 만족스러운 듯한 얼굴이 되었고, 반면 나는 아리송한 얼굴이 되었다.
대본들을 들고 터덜터덜 작업실로 가던 길,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포잉에게 물었다.
‘나 좀 속은 것 같은데, 그… 두 분이 나한테 약을 팔진 않겠지…?’
내 어깨에 매달려 축 늘어져 있던 포잉은 ‘하….’하는 한숨을 내쉬더니 앞발로 어깨를 몇 번 툭툭 건드렸다.
‘넌 절대 길거리에 혼자 다니지 마셈.’
‘왜?’
‘길가다 사이비들한테 잡히면 어느 순간 거기서 같이 홍보하고 있을 것 같으니까.’
‘내가 그 정도는 아니거든?’
‘퍽이나.’
포잉이 생각한 것만큼 쉬운 사람이 아니었기에 자존심이 상했지만, 이걸 증명할 방법이 없다는 게 더 안타까웠다.
‘진짜, 포잉 너는….’
‘발밑이나 잘 보고 걸어. 한눈팔지 말고.’
투덜대려던 내 입을 막아버린 포잉은 뭐가 그리 만족스러운지 꼬리를 살랑거리며 등 뒤를 툭툭 건드렸다.
진짜, 귀여우니까 봐준다.
개인 연습 시간이었기에 마음 편히 작업실에 틀어박힐 수 있었고, 덕분에 대본을 꼼꼼히 확인할 수 있었다.
아직 확정되지 않은 일들이다 보니 멤버들에게는 보이고 싶지 않았다.
특히 힘찬이라든가, 최찐빵이라든가, 찬이라든가.
나보다 더 호들갑 떨면서 난리 칠 게 뻔한 몇 명의 멤버들이 떠오르고, 자기가 더 좋아하면서 눈을 빛낼 세빈이가 떠올랐다.
어떤 걸 한들 멤버들이 싫어할까, 하는 근거 없는 자신감마저 차올랐지만, 포잉과 눈이 마주친 순간 조용히 입이 다물어졌다.
고개를 흔들어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내며 대본을 집어 들었다.
제의 들어온 역할이 형광펜으로 표시가 되어 있어서 알기 쉬웠다.
다만, 제대로 이야기를 이해해야 역할에 대해서도 알 수 있을 것 같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기로 했다.
무심코 손에 쥔 대본의 제목을 확인한 순간, 어디선가 본듯한 느낌에 미간을 찌푸렸다.
“어, 이거….”
포잉이 왜 그러냐는 듯 바라보았다.
나는 머릿속을 한참이나 뒤적거린 끝에야 전생에 들어본 적 있는 드라마라는 걸 깨달았다.
‘내가 들어볼 정도면 크게 문제가 있었거나 엄청 잘됐거나 둘 중 하난데.’
‘둘 중에 어느 쪽인지 잘 구분해야지. 잘못 출연했다가 망하면 큰일임.’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지만 포잉은 내가 하는 말을 모두 이해했고, 덩달아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좀 가물가물해서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아. 다른 것도 이름부터 확인해야겠다.’
‘너는 기억력이 어떻게 된 게….’
‘원래 자주 안 쓰면 잊어버린댔어. 내 탓 아냐!’
인간에 대한 신뢰가 없는 듯한 포잉과 그걸 항변하는 나.
‘포잉, 지금 너 뭐 검색해보는 거야?’
‘기억력에 좋은 음식이 뭐가 있는지 보고 있음.’
‘그 정도는 아니라니까!’
내 말을 언제나처럼 귓등으로 듣던 포잉은 끝내 기억력에 좋다는 영양제와 음식을 찾아서 냥톡으로 링크를 보내왔다.
‘지금부터라도 잘 챙기셈. 나중에 고생하지 말고.’
‘하… 진짜.’
포잉의 이런 대접도 슬펐지만, 이 쓸쓸하고 속이 아픈 듯한 느낌을 어디다 하소연할 곳도 없다는 게 가장 슬펐다.
포잉과 말싸움을 하느니 찬이랑 대거리하는 게 더 쉽다고 생각하며 대본을 모두 가지런히 놓았다.
각 대본 겉장에 적힌 제목을 확인한 나는 바로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거다.’
‘?’
가장 밑에 깔려있던 대본의 제목을 본 순간, 만일 연기를 하게 된다면 여기에 도전하는 게 가장 좋겠다 생각하며 씩 웃었다.
‘이 드라마, 진짜 유명했어. 논란이 조금 있긴 했는데… 그걸 다 엎을 만큼 빵 터졌다고 해야 하나?’
‘논란 있는 거면 피하고 안전한 거 하는 게 낫지 않음?’
‘나중에 출연진 중에 몇 명한테 찌라시 같은 게 좀 돌았는데, 내가 알기로는 그게 다 거짓으로 밝혀지거든.’
‘네 기억력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어머니와 누나가 드라마를 보면서 매일 같이 이야기해 줬던 터라, 이 드라마에 관한 기억이 꽤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몇 가지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지만, 그래도….
두근거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역할을 확인한 나는 그 대본을 품에 소중히 안았다.
여태 고생했으니, 이왕 새로운 도전을 하는 거 꿀 빨면 좋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