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233)화 (233/456)

233. IDEA(9)

무대 위에만 서면, 모든 상념들이 깨끗하게 날아가 버리는 것 같았다.

1위 후보, 판매량, 실수하면 어떡하지? 등등….

방금까지 머릿속에 한가득했던 모든 생각이 무대를 오르는 계단 바로 아래, 멤버들과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부터 희미해진다.

툭 하고 계단에 구두가 내딛는 소리가 귀를 울리고 새까만 무대가 익숙해질 때면 망막 가득 빛이 쏟아져 내리고 우리도 눈을 뜬다.

방금까지 달달 떨면서 매달려 칭얼대던 막내 라인도, 쩔쩔매면서 동생들을 달래기 바빴던 형들도 눈빛이 변했다.

어쩐지 회사에서 ‘Confusion’이랑 ‘Pluto’의 편곡 버전으로 무대를 하자고 하더니.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흘려보냈던 우진 형과 팀장님의 표정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독종 스킬을 쓰면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집중력이 극한에 가깝게 끌어당겨지는 것 같은, 그런 느낌?

대형에 맞춰 서서 마이크를 붙잡은 손이 떨리지 않게 다른 손으로 꽉 쥐는 찬이가 보였다.

평소라면 제대로 보일 리 없는 모습인데.

어쿠스틱 버전의 ‘Confusion’이 아닌 펑키한 느낌의 전주가 먼저 흘러나오고 노랫소리에 맞춰 모였다 흩어지는 멤버들.

서로 등을 맞댄 원에서 조금씩 사방으로 흩어지는 멤버들 모습은 꽃 한 송이에서 떨어져 흩날리는 꽃잎 같았다.

움직임에 따라 함께 펄럭이는 옷자락, 진지한 눈으로 전체 모습을 쫓는 멤버들의 시선.

평소보다 더 긴장했던 멤버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자기 파트를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절대로 지지 않겠다는 듯, 기합이 단단히 들어간 영빈 형의 모습에 덩달아 목이 타고 입술이 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슬쩍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이다 한껏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는 솜뭉치들과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친 순간 장난기가 치솟아 살짝 윙크해주고 그대로 다음 대형을 향해 몸을 돌렸다.

활짝 피어난 꽃 같은 세빈이가 대형의 중심에서 절도 있는 몸짓으로 찬이와 서로 마주 보며 춤을 추고 있었다.

대칭되는 안무를 흔들림 없이 완성해내는 둘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다시 살아난 후 처음 겪었던 그 날들이 떠오른다.

연습할 때는 그렇게 둘이 눈만 마주쳐도 입가를 씰룩거리고 웃던 녀석들이 지금은 저렇게나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통통 튀는 듯한 멜로디를 따라 자주 바뀌는 대형을 쫓느라 우리 발은 쉴 틈이 없었고, 멤버들 머리카락을 타고 땀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겨우 ‘Confusion’이 끝나자 ‘Pluto’로 넘어가는 사이 솜뭉치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중간중간 들려온 응원법과 환호들은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멀게 들렸었는데, 이제야 내 정신도 몸에 적응한 건지 소리가 제대로 들려왔다.

격렬한 안무 덕분에 숨이 모자라서 그랬을까?

조금 전까지 무의식의 영역에서 헤엄치다 이제야 현실로 돌아온 것 같았다.

쨍한 빛의 조명들이 사라지고 무대 위에는 ‘Pluto’ 특유의 드넓고 황량한 느낌의 우주가 배경으로 펼쳐졌다.

방금 전의 뜨거운 열기가 한 꺼풀 가라앉으면서 따뜻한 느낌으로 남았고, 덕분에 시린 배경 속에서도 우리는 포근하게 웃을 수 있었다.

처음, 편곡된 곡을 들었을 때는 조금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우리가 넣었던 여러 마음 중 분노가 많이 빠진 듯한 느낌이라 당황하기도 했고.

하지만 여러 의견을 종합한 결과 분노는 이전 곡들로 충분한 것 같다며, 차라리 서글픈 마음을 살리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셨다.

수많은 톤으로 바꿔가며 맞춰본 우리는 결국 그 의견을 이해했고, 이름을 빼앗기고 버려진 슬픔을 담기 위해 애썼다.

[네가 이름을 붙여줬고, 난 빛을 찾았어.

I'm just here]

보랏빛과 푸른 빛이 감도는 무대 위에는 차가운 안개가 우리 발을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우리 이름을 외치는 팬들의 목소리를 감추진 못했고, 우리 얼굴에 희미하게 떠오른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난 여기에 있었을 뿐인데.

I just stayed still.

그래, 난 그저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

우리뿐만 아니라 이제는 많은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Pluto’를 부른다.

그리고 난 그저 여기에 있을 뿐이고, 그건 다른 사람의 동의가 필요한 일이 아니라고 외치고 있었다.

우리와 같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자신을 아프게 했던 사람들에게.

생각했던 것보다 커다란 물결에 겁먹기도 했었고, 우리가 정말 잘하고 있는 건지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나도, 멤버들도 아직 미성숙했다.

많은 것들을 배워가는 중이라 우리의 모자란 모습이 더 큰 실망을 주는 건 아닐까 하기도 했다.

그때 영빈 형이 말했다.

우리와 함께 그분들도 각자가 더 배워가고 자라는 중일 거라고.

그래서 아팠던 만큼 더 크게 될 거라, 챌린지에도 참여하면서 소중한 자신의 이름을 말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고 했다.

경환 형의 랩처럼 우린 겁도 많았고 걱정도 많은 사람들이라 주저할 때도 있었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솜뭉치들이 보내주는 애정 가득한 시선 안에서 우리는 당당해지기로 했다.

누군가의 팬이라고 했을 때, 적어도 언래블이 누구야? 하는 말은 들어도 언래블의 팬임이 부끄럽지 않도록.

그런 다짐을 했던 후여서일까.

‘Confusion’ 때와 같은 격렬한 안무는 없지만, 부드럽게 흘러나오는 멜로디를 따라 무대 위에서 우리는 한 명, 한 명 모두가 별처럼 우뚝 섰다.

우리가 당신의 별이에요.

당신이 우리의 빛이 되어 주세요.

영상의 끝부분 반짝이는 별 무리 위에 동글동글한 글자로 흘러나온 문구.

환하게 웃는 내 팬들의 모습에 평소보다 조금 더 뿌듯한 기분을 느끼며 무대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전부는 아닐지라도 우리 마음이 전해진 것 같아서 무대 아래 내려온 멤버들 얼굴은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와, 우리 솜뭉치들 엄청 많았다. ”

“리허설 때 봤는데도 이렇게 많으니까 막 낯설어요.”

급히 땀을 닦아내고 메이크업을 수정하는 동안에도 멤버들은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조잘거렸다.

곧이어 1위 발표를 앞두고 있었기에 무대로 올라야 했다.

하지만, 이렇게 입이라도 조잘거리면서 긴장을 덜어내려 애쓰고 있다는 걸 알기에 서포트 팀 모두가 흐뭇한 얼굴로 우리를 다독여주었다.

“얘들아, 진짜 표정 관리 잘해야 된다. 알지? 되든 안 되든 무조건 우리는 신나게 박수치고 내려오는 거야.”

“그럼요! 이제 그런 건 말 안 해줘도 알아요!”

“어쭈, 또또 쪼그만 게 다 큰 척한다.”

준이 형은 초조한 얼굴로 멤버들에게 다시 한번 신신당부 했고, 세빈이는 과하게 업된 몸짓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경환 형은 비교적 침착해 보였기에, 희게 질린 얼굴의 영빈 형 곁에 다가가 손을 한번 꾹 잡았다 놨다.

“얘들아, 가야 된다.”

“네!”

우진 형의 부름에 각자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우리는 일제히 짜기라도 한 것처럼 멈춰서 서로를 바라봤다.

“와, 진짜 오늘 역대급으로 못생겼다.”

“헐! 디스 쩌네?”

“우리 형들은 오늘도 참 잘생겼네요. 세빈이는 귀… 아! 아파, 세빈아!”

너무 긴장한 탓에 이상한 표정을 하고 있는 멤버들에게 내가 한마디씩 툭툭 던지자 그제야 다들 얼굴 근육이 풀린 것처럼 웃었다.

세빈이한테는 귀엽다고 했다가 얻어맞았지만.

겨우 상태를 수습하고 무대에 올랐더니 무수한 시선이 우리 등에 날카롭게 콕콕 박혀왔다.

호감도 질투도 어느 것 하나 가볍지 않은 감정들이었다.

무대 아래서야 아무렇지 않은 척 멤버들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장난쳤지만, 실제 올라온 후에는 내 정신이 날아갈 것 같았다.

오늘 본무대 때만 스킬을 쓰고 그 외 시간에는 쓰지 않았는데도 과부하가 걸리는 것 같았다.

“이번 주 1위는…!”

그때 들려오는 두 MC의 목소리, 터지는 폭죽, 입을 다물지 못하는 두 맏형의 얼굴과 준이 형 손에 쥐어지는 마이크.

이 모든 순간이 한 컷, 한 컷 잘린 필름처럼 눈앞에 휙휙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손을 바들바들 떨던 세빈이와 찬이가 양쪽에서 나를 붙잡고 있었던 덕에 쓰러지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해야 할까.

‘계약자야, 정신 안 차리냐!’

‘어?’

‘지환아, 카메라! 마이크!’

의식이 날아가기 직전 머릿속을 울린 포잉의 목소리 덕분에 간신히 정신을 잡고, 고개를 돌리니 영빈 형이 울면서 준이 형 등 뒤에 숨어있었다.

“언래블 축하해요!”

“축하합니다!”

“고생 많았어요!”

사방에서 쏟아지는 축하 인사와 꽃다발, 그리고 휘청이는 날 잡아준 경환 형의 손.

“어이쿠, 환 군이 많이 놀랐나 봐요. 앵콜 무대 할 수 있겠어요?”

장난스럽게 웃으며 꽃다발을 안겨주는 MC의 목소리에 그제야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옆에 있던 세빈이는 이미 엉엉 울면서 찬이를 껴안고 있었고, 의외로 찬이는 울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정신이 나가 있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인 것 같았다.

마이크를 쥔 준이 형은 회사 식구들과 팬들에게 한없이 고맙고 감사하다고 그렇게 말하다 입술을 꾹 깨물었고, 그런 형 곁에 다가가 손을 꽉 쥐었다.

이 사고뭉치들 리더로 지내면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물기가 잔뜩 어른거리는 눈동자가 무수한 이야기를 건네고 있었지만, 지금 해야 할 말은 한가지 뿐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멤버들이 서로의 손을 꽉 쥐었고, 그렇게 우리는 무대 아래와 카메라를 통해 우리를 지켜봐 준 모든 팬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언래블 이었습니다!”

“솜뭉치들, 고맙고, 사랑해요!”

* * *

“쯧, 잘생긴 얼굴들이 우느라 다 엉망이네.”

“좋으면서 괜히 그러신다.”

“좋긴 뭐가 좋아. 당연히 1위 할 줄 알았는데 뭐.”

기죽은 강아지들마냥 주춤거리며 무대에 올라온 멤버들이 앞줄에 서자 회의실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감정이 요동쳤다.

탈도 많고 말도 많았던 데뷔였고, 여태까지 참 조용한 날 없이 흘러왔다.

처음부터 확 치고 나갈 거라는 기대는 안 했지만, 매해 데뷔했다가 망하는 무수한 아이돌 그룹을 생각했을 때 언래블은 기대 이상을 보여줬다.

팬들의 집결력도 구매력도 회사의 기대 이상이었고, 멤버들은 어리바리해 보였던 것과 달리 방송에서는 꽤 다부진 모습을 보여줬다.

박정균 대표는 여러 반대 의견을 뿌리치고 언래블 프로젝트를 이끌어온 만큼, 모니터에 보이는 멤버들 모습에 유독 눈가가 붉었다.

“거, 저렇게 울어가지고 와서 밥이나 제대로 먹을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고기 사준다고 하면 울면서도 먹을 애들이에요. 걱정 마세요.”

“큼, 먹다 체할까 봐 그러지.”

1위를 하든 안 하든 고기를 사줄 거라고 했던 박 대표는 괜히 툴툴거리며 카드를 꺼내 정윤 실장에게 쓱 밀어주었다.

“애들한테 눈치 보지 말고 먹고 싶은 거 다 먹으라고 해요. 오늘 아니면 또 언제 먹겠어.”

금방이라도 시큰거리는 눈가에서 눈물이 흐를 것 같아서, 박정균 대표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피식 웃던 정윤 실장은 카드를 소현 팀장에게 넘기며 대표를 따라 일어섰다.

“애들 오면 잘했다고 칭찬 좀 해주세요. 우리 애들은 칭찬해 줘야 더 쑥쑥 크니까.”

농담처럼 웃으며 말을 남긴 정윤 실장은 박정균 대표를 보좌해 회의실을 나섰다.

화면 가득 흘러넘치는 꽃가루와 이제 다 운 건지 신나서 무대를 폴짝거리고 뛰어다니는 멤버들.

앵콜 곡을 울면서도 음 이탈 없이 부르는 영빈의 모습에 소현은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평소에 연습을 빡세게 시키긴 했지만 저런 모습을 보자고 그런 건 아니었는데.

“자, 그럼 저는 애들 데리고 회식하러 갑니다. 다들 내일 봬요.”

소현은 지금 당장 멤버들을 보러 달려가고 싶었다.

기특한 내 새끼들, 하고 칭찬도 해주고 싶었고.

소현은 모처럼 함박웃음을 지으며 회의실을 나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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