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 Butterfly(4)
영빈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웃으며 서로에게 장난치는 두 동생을 바라보았다.
우진이 그런 영빈에게 다가와 그의 어깨를 다독여주며 물었다.
“걱정되니?”
“조금요.”
“이번에는 저번이랑 좀 다를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주변을 바쁘게 오가는 스태프들이 가끔 눈이 마주칠 때마다 이전보다 조금 더 온기가 도는 시선을 보냈지만, 영빈은 잊지 않고 있었다.
처음 출연했을 때는 미팅 때와 달라진 프로그램 내용에 얼마나 당황했던지.
항의하는 우진 형을 귀찮은 듯 바라보던 조연출과 겁먹었던 세빈이, 울컥한 마음을 억지로 꾹꾹 누르던 찬이의 얼굴이 지금도 선명하다.
그사이 여러 가지 일들로 언래블의 인지도가 높아져 이슈가 될 것 같으니, 이제 와 재출연을 요청하는 쪽의 의도가 참으로 투명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에 일일이 감정을 소비하는 것보다 동생들을 추스르고 최대한 많은 분량을 뽑아내는 게 이득이었다.
영빈은 흐트러지는 자신의 마음을 다잡으며, 최대한 동생들이 많이 활약할 방법을 궁리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동일한 메인 재료로 서로 다른 요리를 만들어 내는 것을 주제로 삼는다고 했다. 그때만 특집의 개념으로 촬영 내용이 갑자기 바뀐 거라고, 별다른 사과 없이 그렇게 뭉개고 넘어갔다.
“힘찬아, 세빈아, 이리 와봐.”
“응? 형, 왜요?”
부르자마자 군말 없이 쪼르르 다가오는 세빈이, 타박타박 걸어오면서도 입을 쉬지 않는 힘찬이.
그렇게 종일 둘이 붙어서 장난치느라 바쁜 애들이었지만, 소소한 반응이 이렇게나 달랐다.
긴장되었던 마음은 말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동생들의 시선과 마주하는 순간 모두 눈 녹듯 사라지고 없었다.
“사전에 얘기했던 거 잘 기억하고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보자.”
“넵.”
영빈은 본격적인 촬영 시작 전, 잠시 대기하는 사이에 동생들에게 한 번 더 주의를 주며 오늘 어떻게 풀어나갈지를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오늘 메인 재료가 뭐라고 했었지?”
“돼지고기!”
“맞아. 찬이는 어떤 걸 주로 하기로 했었어?”
“채소 챙기는 거랑, 씻어서 준비하는 거.”
“세빈이는?”
“조미료 챙기는 거랑 빈이 형 옆에서 심부름하는 거요.”
“좋아. 둘 다 불 옆에 가거나 칼 쥐면 안 된다?”
다른 사람들이 봤으면 유치원생이냐고 놀려도 할 말이 없는 광경이었지만, 영빈의 얼굴은 진지했다.
그간의 둘이 해온 전적을 떠올려 본다면 이보다 더 자세하게 준비할 수 없는 게 걱정스러울 뿐이었다.
지난번 촬영 당시, 찬이가 채소를 썰어보겠다고 덤볐다가 칼이 미끄러졌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식은땀이 날 것 같았다.
둘이 숙소에서 고기 구울 준비 한다고 불을 낼 뻔한 건 또 어떻고.
한시도 방심하지 말자고 되새긴 영빈은 동생들에게 옆에서 얌전히 대기하라고 한 뒤 천천히 세트장을 훑어봤다.
지난번과 구조는 다르지 않았다.
가운데는 진행자 둘이 있을 공간이었고, 양옆으로 조리대가 준비되어 있었다.
조리대 사이 가운데 공간에는 다양한 음식 재료가 준비되어 있었다.
영빈은 자신이 예능에는 맞지 않는 캐릭터라고 생각했다.
찬이처럼 리액션이 훌륭한 편도 아니었고, 지환이나 하준처럼 입담이 좋은 편도 아니었다.
경환이나 세빈이는 엉뚱한 모습이 웃음 포인트가 되는 일이 많았지만, 영빈은 그 자리에서 굳는 편이라 되레 딱딱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이 요청한 인원은 이렇게 세 명이었으니, 자신이 동생들을 잘 챙겨서 무사히 돌아가는 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팀장님도 망해도 좋으니 그냥 다치지만 말고 오라고 했으니까.
여러 가지를 떠올리자 다행히 부담감은 많이 줄어들었다.
오늘 함께 출연할 게스트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지 좀처럼 촬영은 시작되지 않았다.
언제쯤 시작될까 하고 가끔 동생들을 말리며 대기하고 있던 그때, 우진 형이 다가왔다.
“이제 곧 시작한다네. 알고 있겠지만 다치지 않는 게 제일 중요해. 특히 둘은 영빈이 말 잘 듣고.”
“누가 들으면 우리가 맨날 사고만 치는 줄 알겠어요.”
“그럼 아니야?”
“아니, 맨날은 아니고… 가끔?”
우진 형의 잔소리에 볼멘 목소리를 내던 힘찬이는 형이 부리부리한 시선에 찔끔했다.
어색한 목소리로 엄지와 검지를 조금 벌리며 ‘요만큼?’하고 중얼거렸고, 옆에 있던 세빈이가 양심도 없냐며 벌어진 손가락 사이를 더 벌려놨다.
그사이 게스트가 도착한 건지 출입구 쪽부터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고, 죄송하다고 하는 소리가 언 듯 들려왔다.
“언래블 준비해주세요!”
“네네.”
미팅 때 함께 출연하는 게스트에 대해 물어봤지만, 섭외 일정이 꼬인 상태라 확실히 말해주기 어렵다는 답을 들었었다.
오늘 현장에 와서는 다른 게스트에 신경 쓸 겨를도 없었고.
살짝 들려왔던 목소리를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다는 생각은 했지만 정말로 아는 얼굴일 줄은 몰랐다.
“어? 히스 맞죠?”
“아, 안녕하세요. 민영 선배님, 세영 선배님.”
“이야, 안 그래도 한번 보고 싶었는데 여기서 보네.”
“에이, 우리 그때 편하게 형, 누나 이렇게 부르기로 했잖아요. 내 말이 맞지, 힘찬아.”
‘무사이’때 함께 출연했던 이들을 다시 만날 줄은 몰랐던 터라 영빈의 뒤에서 꼬물거리던 두 동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뵈어요.”
“넵. 맞아요! 그때 선배님 말고 형, 누나라고 부르라고 하셨어요! 저희한테 말 편하게 해주신다고도 하셨는데.”
“거봐, 애들은 다 기억한다니까? 이렇게 보니까 너무 반갑다!”
‘무사이’ 촬영 당시에도 둘은 나민수 형님만큼은 아니었지만, 박세날 PD와 꽤 편한 모습을 보였었다.
이미 많은 팬층을 거느린 두 배우는 현장 스태프들에게 꽤 편한 모습으로 인사하며, 진행자들에게도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새로운 드라마에 우연히 둘이 함께 출연하게 되어 홍보차 나왔다는 말을 귀띔해주며 다음에 한번 현장에 놀러 오라는 말도 덧붙였다.
생각해보면 촬영 당시 데미갓을 제외하면 언래블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출연진은 없었다. 제대로 된 프로그램의 첫 출연이었기에 그때 기억이 생생한 영빈은 예상치 못한 재회에 부드럽게 웃을 수 있었다.
다행히 오늘 촬영은 생각보다 힘들지 않을 것 같았다.
* * *
영빈은 촬영 시작 직전 힘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안일함을 한탄하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탱탱볼 같은 두 동생이 어떤 돌발 행동을 할지 모른다는 걸 잠시 잊은 게 문제였을까.
아니면 자신이 요리할 줄 안다는 게 문제였을까?
처음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되었다.
사전에 전달받은 대본을 숙지했기에 진행 자체도 막힘 없었고.
돼지고기를 메인으로 하는 음식을 만드는 게 오늘의 미션이었고, 두 팀으로 나누어 각자 자유롭게 음식을 만들며 대화를 나누는 게 전부였다.
미팅 당시에도 다들 경쟁 구도가 아니니 자유롭게 요리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일상적이고 편한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고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드라마 홍보가 주목적이어서 그런 게 아니었나 싶었다.
그저 양쪽에서 음식을 만들다 보니 편의상 팀을 나눈다고 했고, 두 배우는 새로 방영하는 드라마 명을 팀 이름으로 썼다. 언래블은 팀명을 썼고.
“아, 타달비 팀, 지금 언래블을 걱정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요.”
“저기 저거, 불 좀 줄여야 하지 않을까요?”
새로 방영하는 ‘타오름 달, 흐린 비’라는 드라마를 오프닝 새 열심히 홍보하면서도, 두 배우는 요리는 자신 없다며 웃었다.
두 진행자도 평범하게 염려 섞인 조언을 타달비 팀에 해주거나, 열심히 뽈뽈거리며 심부름하고 돌아다니는 두 동생에게 말을 걸었고.
힘찬이도 평소보다 얌전히 가져오라는 재료들을 잘 챙겨왔고, 세빈이도 서두르지 않아서 실수가 없었기에 영빈은 잠깐 안심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동생들이 하나둘씩 자잘한 실수를 하기 시작했고, 두 배우는 스리슬쩍 자기들 요리보다 힘찬이와 세빈이를 구경하기 바빴다.
본업을 할 때의 집중력은 어디 갔는지 조금 산만해진 동생들은 슬금슬금 세트장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주변을 치운다고 옆 팀에 가서 쓰레기를 줍고 다니질 않나.
재료를 정리한다고 대파와 채소들을 한 줄로 가지런히 늘어놓았을 때는 영빈도 차마 할 말이 없었다.
그걸 보고 예쁘게 잘 놨다고 김세영 배우가 둘을 칭찬할 때는 저 사람이 진심인가 싶었고.
슬프게도 두 눈 가득 진심이 흘러넘쳐서 영빈은 그 광경을 못 본 것으로 하기로 했다.
영빈은 아무리 그래도 요리 프로그램을 표방하고 있으니 무언가 음식을 내놓기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이미 요리는 없는 것 같았지만.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두 배우는 영빈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시작했고, 영빈은 그때부터 양쪽 요리 모두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들 딴에는 영빈의 분량을 많이 챙겨주고자 했던 마음인 것 같았지만 원래도 멀티가 안 되던 영빈은 혼이 나갈 것 같았다.
“내 몸은 한 갠데….”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양념 된 고기를 볶고 있는 영빈의 모습은 어쩐지 짠한 구석이 있었지만, 구경하는 입장에서는 꽤 재밌는 그림이었다.
처음 흘러가는 분위기에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던 PD도 차라리 이쪽이 더 그럴싸하다고 느낀 건지 별다른 제지 없이 촬영을 그대로 이어나갔다.
그러는 와중에도 세빈이는 양쪽 팀 모두의 심부름을 하다, 중간부터는 아예 고민영 배우에게 잡혀 영빈의 옆으로 오지 못하고 있었다.
“옳지, 이것도 먹을래? 힘찬이도 줄까?”
“자꾸 다 먹어버리면 뭐로 요리하려고 그러냐…. 민영아, 정신 차려라.”
“이거 이대로 끓이면 된다고 했어. 남은 거로 아가들 먹이는 건데 뭐.”
“이거 히스 형 주고 와도 돼요?”
민영 배우님은 세빈이 입에 고구마 조각을 넣어주고 있었고, 찬이는 옆에서 아기 새처럼 입을 벌리고 받아먹고 있었다.
그걸로 부족했는지 식자재 더미 속에서 군만두를 찾아내어 굽고 있었다. 애기들 배고파서 안 된다면서.
그러면서 영빈에게 자신이 다른 건 잘 못해도 만두는 잘 구우니 기대하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영빈은 제발 저들을 말려달라고 두 진행자에게 애처로운 눈빛을 보냈지만, 누구도 영빈의 눈빛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타달비에서도 두 분이 부부로 나온다고 했었죠?”
“네, 맞아요. 극 중에 예쁜 딸도 하나 있는데 우리 세빈이나 찬이 같이 귀여운 아들이면 한 명 더 있어도 좋을 뻔했어요.”
“아, 그건 세영 씨랑 상의해보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진행자들은 아예 음식에는 신경을 끄기로 한 건지 두 배우와 드라마 홍보에 여념이 없었다.
처음 타달비 팀은 돼지고기 김치찜을 시도했고, 영빈은 이전 지환이 했던 콩불을 할까 하다 힘찬이를 한번 보고 포기했다.
콩나물 손질을 맡겼다가는 또 머리와 꼬리를 전부 뜯어낼 것 같았다.
돼지고기 두루치기로 메뉴를 선회한 후, 비교적 간단한 요리였기에 계란찜을 함께 내놓을 생각을 했다.
그래도 영빈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힘찬이가 칼질한다고 채소를 조져놓지도 않았고, 세빈이가 밀가루를 뒤집어쓰지도 않았으니까 이것만 해도 어딘가 싶었다.
한 세트장에서 두 가지 장르의 촬영이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무시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저쪽은 토크쇼, 이쪽은 요리.
자신은 카메라에 별로 잡히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배우들이 두 동생을 붙잡고 있으니 둘은 앵글에 잘 잡히겠거니 하며 음식을 만드는 것에만 집중했다.
어차피 풀로 찍어서 적당히 편집할 테니 빨리 끝내고 그저 편히 쉴 수 있는 숙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어라?”
“어디서 타는 냄새 나는 것 같은데요?”
하지만 세상은 영빈의 소원을 들어줄 마음이 없었는지 세트장에 갑자기 탄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 진원지는 배우들의 김치찜 냄비였다.
“아이고, 물이 부족했네. 이거 어떡해.”
“다 탔어요? 이거 탄 부분만 들어내고 다시 끓이면 되지 않을까요?”
언래블 몫의 음식을 끝내고 보온을 위해 뚜껑을 덮던 영빈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네 쌍의 눈동자에 흠칫하고 어깨를 떨었다.
갑자기 토크쇼가 요리 프로그램으로 바뀌었다.
“…제가 봐 드릴까요?”
“우리 히스 없었으면 어쩔 뻔했니! 고마워.”
영빈은 지금 이 순간 간절히 지환이가 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