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 외전 - 곁에
유난히 일찍 눈이 떠졌다 싶었더니 어김없이 옆에 세빈이가 들러붙어 있었다.
작은 한숨을 내쉰 영빈은 누가 물에 던져넣지 않는 이상 잘 깨지 않는 걸 알면서도 평소처럼 조심스럽게 세빈이를 떼어냈다.
막내인 세빈이는 종종 자기 방이 아닌 영빈의 방에 와서 자는 경우가 있었다.
평소에도 그렇게 으르렁대더니 같은 방에 있는 힘찬이는 잠결에도 거부하는 건가….
그래놓고 눈뜨면 자기가 왜 여기 있냐고 어리둥절한 표정이니 말해 무엇하리.
아직도 불안감 때문에 사람을 찾는 건가 싶어 그냥 두는 편이지만, 가끔은 도망가고 싶었다.
세빈이는 유난히 잠버릇이 좋지 못했고, 자신은 잠잘 때 예민한 편이었으니까.
이제 막 눈을 떠서 그런지 뻑뻑한 눈두덩을 꾹꾹 누르고 씻고 나온 영빈은 적막한 공기가 감도는 주방과 거실을 바라보았다.
멤버들이 이 공간에 북적거릴 때의 모습이 잠시 눈앞에 보인 것 같아 웃었다.
여전히 각자의 본가에서 명절을 보내기는 힘들었기에, 적어도 연휴 중 하루는 멤버들과 함께 보내고 있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어느 순간부터 다들 자연스럽게 그러고 있었다.
‘명절엔 가족과 시간을 보내야지’라며 장난스럽게 웃던 동생들 얼굴이 떠올라 영빈은 심장 한쪽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언래블은 서로에게 이미 가족이었다.
간단하게라도 멤버들이 먹을 만한 걸 준비할까 하고 냉장고를 뒤적이는 사이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지환이가 걸어 나왔다.
“왜 벌써 일어났어, 조금 더 자.”
“오늘 같이 나가기로 했잖아요….”
졸려서 웅얼거리면서도 간신히 문장을 끝맺는 게 지환이답다는 생각을 하며, 영빈은 지환이를 끌어다 소파에 눕혔다.
언래블이 많은 사랑을 받게 되면서 숙소를 다시 한번 옮겼다.
보안과 관련된 문제도 있었지만, 슬슬 각자 방을 쓰는 게 좋지 않겠냐고 준이가 회사에 건의하면서 결정된 이사였다.
아무래도 각자 사생활이나 생활 패턴 때문에 신경 쓰이는 경우가 있어서 그런 것 같았지만, 멤버들은 ‘굳이?’라는 반응을 보였고.
지금 생각하면 정말 굳이 각자 방을 나눈 것 같았다.
툭하면 서로 방에 가서 잠들고, 숙소가 복층으로 바뀌면서 왔다 갔다 하기만 더 귀찮아졌다.
결국 얼마 전에는 힘찬이랑 세빈이가 자는 방을 합치고 남는 방은 드레스 룸으로 쓰겠다고 해서 가구를 재배치하느라 시끄러워지기도 했다.
이전 숙소에서 있었던 안 좋은 일이 그보다 더 큰 좋은 일들로 돌아왔지만, 모두의 마음속 밑바닥에는 아직 눌어붙은 검댕처럼 손톱만 한 게 남아있었다.
그래서인지 이사할 때 누구도 아쉽다고 말하지 않았었고.
꼭 이사하면 거실에 푹신하고 좋은 소파를 놓을 거라고 지환이가 다짐하길래 그런가 보다 했는데 확실히 괜찮은 것 같았다.
주로 세빈이나 힘찬이가 누워서 자고 있긴 했지만.
유독 조용한 새벽 시간이어서인지 함께 부대끼며 보내온 시간이 하나, 둘 떠올라 자꾸 웃음이 나왔다.
연휴는 그나마 서울에 사람이 가장 적은 시기였다.
덕분에 멤버들은 많은 사람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연휴 첫날 외출을 즐기곤 했다.
평소에는 다 같이 걷기 힘든 한강 변이나 청계천에 가보기도 하고, 한적한 밤거리를 구경 다니기도 했다.
워낙 인원이 많은 터라 몰려다니면 눈에 띄어서 어쩔 수 없었지만, 지금은 명절 때마다 있는 이런 외출을 다들 즐기고 있었다.
냉장고에는 각자 집에서 보내주신 명절 음식도 가득했고, 간간이 지환이가 위캠을 보고 따라 한 실험적인 반찬들도 있었다.
나중에 음식점이라도 차리고 싶은 건지 자꾸 무언가 만들어 멤버들에게 먹였고, 이게 또 맛이 있던 터라 덕분에 배달 음식을 크게 줄었다.
힘찬이가 늘 밥을 먹을 때마다 푸념하는 것도 이해는 갔다.
우리가 독립하지 않는 이유 중에 지환이 밥이 가진 지분이 꽤 클 거라는 말.
보통 서로 생활 패턴이 다르면 밥을 거르거나 따로 시켜 먹는 경우가 많다던데,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는 숙소에서도 하루 한 끼는 꼭 함께 밥을 먹었다.
하준이 처음부터 강조해온 숙소는 우리 집이라는 말과 지환의 밥은 같이 먹어야 한다는 말이 멤버들을 세뇌해둔 탓이리라.
이제는 밥상이 아닌 하얀 식탁에 반찬을 꺼내놓게 되었지만, 애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잘 뛰어놀고 장난기 많았고, 솔직하고 착했다.
가끔 좀 모자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앞일을 생각 안 하고 장난을 쳐서 문제지만, 나쁜 건 아니니까.
“일어났어?”
“어. 아, 괜히 아침부터 움직이자고 했나.”
잠이 모자란 건지 영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는 하준이 어슬렁거리며 나타났고, 그때 지환이도 깼는지 소파에서 꿈지럭거렸다.
“다음에는 밤으로 약속 잡아요, 우리.”
“가능하면 그렇게 하자….”
팀에서 가장 바쁜 둘이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중얼거리면서도 2층으로 올라가는 걸 보며 영빈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이제 잘 일어나지 않는 세 명을 깨워서 식탁에 앉혀야 했다.
있던 반찬으로 밥을 먹고 씻고 모이자 그럭저럭 다들 사람 몰골이 되었다.
“오늘 운전은 세빈이가 한다고?”
“네! 나만 믿어요.”
“다 보험 넣었지? 목숨은 하나야.”
“아오, 진짜!”
“야, 그래도 내가 형이다?”
“형처럼 굴던가!”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리는 힘찬이와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는 세빈이.
세빈이는 20살이 되자마자 면허를 따더니 어딘가 갈 때면 꼭 자기가 운전을 하고 싶다고 졸라왔다.
“일단 가자. 더 늦으면 또 제대로 구경도 못 하고 나올라.”
“그래, 일단 가자.”
하준과 지환이 갈라놓자, 경환이 아쉽다는 눈을 했다.
둘이 투닥거리기 시작하면 늘 중간에서 기름 붓고 부채질해서 판이 커지게 하는 게 경환이었다.
첫인상이랑 달라도 한참 달랐지.
힘찬이를 질질 끌다시피 해서 문을 나서는 지환이 모습에 눌러쓴 모자를 다시 한번 만지던 영빈도 숙소 안을 한번 둘러보고 나섰다.
하준은 마지막으로 나오면서 빠진 건 없는지 한 번 더 체크했고.
그렇게 막내가 운전하는 차에 타서 도착한 곳은 강원도 인제였다.
가까운 곳에 바다를 보러 가자던 힘찬의 의견은 이제 다른 곳도 좀 가보자는 세빈이 의견에 묵살되었다.
거기에 늘 바다를 보러 갔으니 좀 걷는 건 어떻냐는 지환이 의견이 더해져 갑자기 등산하게 됐다.
꽤 멀기도 한 데다 동절기 입산 시간제한 때문에 새벽부터 부지런히 움직였고, 결국 예상보다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
“하, 등산이라니….”
“다 같이 투표로 정한 거잖아. 투덜거리지 마.”
“평소에 제일 운동 안 하는 네가 할 말이 아니잖아.”
힘찬이는 툴툴거리면서도 자기 몫의 가방을 야무지게 챙기더니 멤버들을 힐끔거리며 확인했다.
얼마 전 눈이 왔다더니 쌓인 눈이 아직 녹지 않아 입산 초입인데도 제법 예뻤다.
“운동화 다들 잘 묶었지? 꽤 올라가야 한다니까 조심하고.”
“형, 뭔가 벌칙 같은 기분이 드는데 기분 탓이야?”
“응. 기분 탓이야. 가자.”
그리고 산에 오르기 시작한 지 30분이나 흘렀을까.
영빈은 그때 지환이 보여준 사진만 보고 덜컥 좋다고 했던 그때의 자신을 원망했다.
몇 시간씩 안무 연습할 때도 이렇게까지 힘들지 않았는데 고작 30분 만에 숨이 가쁘고 힘들었다.
정작 자작나무 코스까지는 아직도 온 만큼 걸어야 했는데 과연 이게 잘한 결정인가.
지친 몸으로 기계적으로 발을 놀리던 영빈은 자신을 툭 치는 하준을 바라보았다.
“저기 봐봐. 예쁘지?”
“아….”
목표로 생각한 위만 보고 걷다 보니 주변 풍경에는 신경을 못 쓰고 있었다. 그저 빨리 저기 위에 올라가서 볼 거 보고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뿐.
하지만, 준이 덕에 멈춰서 바라본 풍경은 생각보다 더 아름다웠다.
겨울이다 보니 녹색은 거의 없었지만, 하얀 눈 덮인 산은 묘하게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예쁘네. 오길 잘했다.”
“그러게.”
“역시 사진이 다가 아니에요. 그렇죠?”
경환이, 힘찬이, 세빈이는 체력이 남아도는지 신나서 저만치 앞서고 있었지만, 영빈은 하준의 말대로 지금 풍경도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도 많지 않아서 늘 조심해왔던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
“너무 위만 보고 올라가면 지쳐. 주변에 구경도 하면서 산책한다 생각하고 설렁설렁 가는 거지.”
“어차피 시간 많이 남았잖아요. 뭐, 가다 힘들면 저희는 그냥 내려가도 되고요.”
아무렇지 않게 웃는 둘을 보고 있자니 영빈은 최근 자신을 괴롭히던 고민과 지금 이 등산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꽤 열심히 살아왔다.
연습생 시절부터 사방에는 적이 가득했고, 호시탐탐 뒤통수를 노리는 사람들은 더 많았다.
처음에는 우리가 인지도가 없어서 그러는 줄 알았다. 약하고 만만하니까 우리가 먹잇감으로 보이나보다 하면서.
하지만 인기가 생겨서 탑급 아이돌이라고 불리게 된 지금도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영빈은 아직 우리가 보인 실력이 부족해서인가, 자신의 노력이 부족해서 아직도 이렇게 괴롭히는 건가 하고 괴로웠다.
얼마나 더 해야 하는 건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고, 도대체 끝이 어디인지도 보이지 않아 슬럼프에 빠진 적도 많았다.
열심히 살아왔다고 늘 생각했는데 이것도 부족한 거면 도대체 얼마나 더 해야 하는지 억울한 마음에 혼자 울기도 했었다.
누군가에게 말하기도 부끄러웠던 고민이라 혼자만 속으로 삭이고 있던 일들이었는데, 둘은 마치 그걸 알고 있다는 듯 영빈을 다독였다.
물론 지금 이 등산에 힘들어하는 자신을 응원하느라 한 말일 수도 있지만, 어째서인지 자신의 고민을 알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이 남아도는 애들은 먼저 가라고 하고, 우리는 천천히 가자.”
“그래. 그냥 구경하면서 천천히 가도 되겠다.”
“제법 운치 있지 않아요? 이런 게 아니면 벌칙 말고 우리가 등산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지환이는 평소에도 움직이는 걸 싫어해 숙소에서도 늘 소파에 늘어져 있거나 러그 위에 엎어져 있던 애라는 게 그제야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그런 애가 등산을 제안한 것도 이상했다.
지금도 모자란 숨 때문인지 찬바람 때문인지 양 볼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냥 다른 모든 것을 다 떠나서 영빈은 새삼스럽게 멤버들이 고마웠고,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늘 동생들에게는 혼자 고민하지 말고 다 같이 이야기하자고 해놓고 정작 자신은 그러지 않으면서 멤버들에게 걱정을 끼치고 있었다.
고맙고 미안한, 복잡해진 마음에 그저 웃었더니 지환이가 버릇처럼 따라 웃었다.
착하고 멋있는 내 친구, 내 동생들.
함께 보낸 긴 시간 내내 그들은 항상 한결같았고, 그게 영빈에게는 커다란 위안이 되어주었다.
그렇게 셋이서 천천히 최근 작업, 지나온 추억을 조그맣게 이야기하며 올라가자 어느샌가 눈앞에 새하얀 세상이 펼쳐졌다.
“이제 왔어요? 왜 이렇게 늦게 와!”
“진짜 예쁘죠? 우리 사진 찍어요!”
“나는 너처럼 체력이 남아돌지 않는다고….”
먼저 도착했던 망아지 같은 동생들은 그사이 눈이라도 만진 건지 드러난 손이 빨개져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환이가 한숨을 푹 내쉬며 가방에서 핫팩을 꺼냈다.
“장관이네, 진짜.”
“오길 잘했다.”
하얗게 부서지는 숨 사이로 보이는 곧게 자란 하얀 자작나무 숲은 그간의 고민도, 힘들었던 등산도 잊게 하기 충분했다.
그사이 팬들에게 보여줄 거라고 열심히 사진을 찍어대는 지환이를 잡아 온 경환이가 단체 사진 찍자고 이리저리 흩어진 멤버들을 모아왔다.
도대체가 얌전히 있는 법이 없는 힘찬이나 세빈이도 단체 사진 찍자고 부르니 뭉치던 눈을 던져버리고 쪼르르 달려오는 게 귀엽기도 했고.
“영빈 형, 괜찮아?”
“응. 좀 힘들었는데 한 번쯤 올 만하네.”
“두 번은 안 오고 싶다는 거지?”
“조용히 해.”
오늘 내 침대를 차지했던 막내가 걱정됐는지 옆구리를 쿡쿡 찔러대기에 피식 웃으며 그새 삐뚤어진 비니를 제대로 고쳐줬다.
“여기서 화보 찍으면 쩔겠다.”
“야, 말이 씨가 된다고 했어. 말도 꺼내지 마.”
등산이 싫다고 투덜거리던 힘찬이도 눈앞에 풍경이 꽤 마음에 드는지 연신 사방을 둘러보기 바빴다.
영빈은 연휴에 이게 무슨 고생인가 싶었던 처음 마음과 달리 제법 괜찮은 선택이었다는 걸 이제는 부정할 수 없었다.
“사진 찍었으니까 이제 내려가?”
“번갯불에 콩 구워 먹어? 좀 더 구경하다 가. 우리가 언제 또 다 같이 등산하겠어.”
그렇게 평소랑 다른 연휴를 보낸 우리는 꽤 만족하며 서울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는 경환이 운전을 했고, 영빈이 보조석에 앉았다.
올 때는 노래 틀고 신나있던 애들이 등산 후에는 전부 지쳤는지 잠들어 있었다.
내려오자마자 배고프다며 내내 검색하던 식당으로 달려갈 때부터 짐작하긴 했지만.
“어지간히 먹더니 잘 자네.”
“그래도 차라리 자는 게 조용하고 좋지 뭐.”
다 같이 놀러 갈 때면 주로 운전을 자처하던 경환이기에 미안한 마음에 어깨를 토닥거려주었다.
가끔 동생들이 보이는 훌쩍 자란듯한 모습이 이제는 낯설지 않았다.
영빈이 평소 다 같이 시간을 보낼 때처럼 웃자, 그제야 경환의 얼굴에도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나중에 봄이나 가을에도 예쁘겠다.”
“그건 일단 나중에 또 생각해보자….”
좋은 건 좋은 거지만, 등산은 조금 아닌 것 같았다.
여러모로 독특했던 올해 설을 영빈은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