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 BOOMERANG(3)
휴이와 내가 소곤거리자 자기들끼리 신나게 이야기하던 우리 애들과 DCL 멤버들이 슬금슬금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그 서울 쇼에서 처음 트러블 있었던 게 사실 우리거든.”
“어? 진짜?”
자신들끼리 나누던 이야기가 진지해졌는지, 마침 맏형들이 우진 형에게 말하고 대기실을 나갔다. 이때다 싶었는지 나와 휴이를 넷이 둥글게 막고 앉았다.
“저기, 너희 좀 부담스럽거든?”
“아냐, 괜찮아. 부담 갖지 마.”
“아니, 내가 부담스럽다잖아….”
우리 애들도 아닌 다른 팀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건 아직 여러모로 불편했다.
그래서 좀 떨어지라고 말했건만 누가 힘찬이 친구 아니라고 할까 봐 레노도 자인도 말을 들어 먹지를 않았다.
이것들을 때릴 수도 없고 정말….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된 건데. 얘기 좀 해봐.”
찬이가 자인은 닦달하자 방 안에 아직 있던 서포트 팀분들의 눈치를 보던 휴이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처음에 의상에 착오가 있었는지 리우 형의 의상과 그 사람의 의상이 뒤바뀌었고, 되찾아오는 과정에서 괜히 시비가 걸렸다고.
하필이면 무대 라인도 같은 히어로 쪽이었던 터라 그 후로 마주할 때마다 곱지 못한 눈빛을 보냈고, 우리 욕을 했던 인터뷰에서 DCL에 대한 흉도 봤다고.
“아… 진짜 진상이네.”
“찬아, 말조심하랬지.”
“알았어, 알았어.”
찬이가 너무 날 것의 감정을 툭 내뱉기에 한 소리했더니,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여유롭게 늘어지며 손을 휘적였다.
밖에서는 말을 잘 안 하는 애라 괜찮겠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다만, 이런 우리 모습에 DCL은 다른 느낌을 받았는지 다들 얼굴이 한결 풀렸다.
“?”
“왜 그런 눈으로 봐요?”
나와 세빈이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자 서로 눈빛을 주고받던 DCL 멤버 중 휴이가 피식 웃더니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냥 엄청 다르다 싶어서.”
“뭐가?”
“그냥 이것저것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선명한 부러움이 담겨있었다.
여전히 우리 애들이 이해 못 하겠다는 듯 눈을 깜빡거리자 자인이 답했다.
“우리는 그 일로 회사에서 엄청나게 깨졌거든. 대표님이 리우 형 불러다 이미지 깎아 먹지 말라고 막 뭐라 그랬어.”
“너희가 잘못한 것도 아니잖아.”
“그러게. 근데 그냥 우리가 인지도 없으니까 알아서 숙이래.”
“근데 우리도 귀가 있잖아. 다른 데 출연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너희에 대해 하는 말 들었거든.”
여전히 찬이나 세빈이는 이해 안 된다는 얼굴이었지만, 나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DCL이나 우리나 이유 없이 욕먹는 거야 별다를 게 없었다.
우리야 작정하고 달려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뿐이지, DCL이라고 악플이 안 달릴 리는 없었으니까.
게다가 우리에 대해 비아냥거리던 배우에 대해 회사에서는 우리가 신경 쓸 일 없을 거라고, 단호하게 우리 잘못이 아니라고 해주었다.
하지만 DCL은 그저 약자인 너희가 알아서 잘 사렸어야 한다는 대답을 들었고.
회사 내부의 내밀한 일을 다른 곳에서 다 알지는 못하더라도, 이후 대처가 확연히 다른 것을 다른 사람들이라고 못 느꼈을까.
어리다고 눈치가 없는 건 아니었고, 분위기를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나는 얼굴이 일그러지려는 걸 억지로 참고 휴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목마르다. 뭐 뽑으러 가자.”
“니가 사냐?”
“어. 형이 얼마 전에 정산받았거든.”
“미친, 근데 음료수로 때우냐?”
은연중 우리 눈치를 보던 넷에게 음료수를 물어본 나는 우진 형에게 바로 근처 자판기에 음료를 뽑으러 간다고 말하고 휴이를 끌고 나왔다.
“뭐 마실래?”
“고맙다.”
“됐어. 나중에 진짜 밥 먹자.”
여기서 더 다른 말을 하는 건 휴이 자존심을 상하게 할 것 같아 부러 더 무신경한 척 장난을 걸며 음료수를 뽑았다.
아직 이전 생의 나이를 잊지 못해서일까, 또래의 친구들도 어린 동생들로만 보였다.
어린 나이의 애들이 어른들의 눈치를 보며 잘못하지 않은 일들로 속이 썩어들었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무언가 해줄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자, 받아.”
“어우, 인원수가 많으니까 한번 마실 것도 한 짐이네.”
“그러니까 말야. 형들은 없으니까 대충 뽑자.”
그저 타는 속에 달달한 음료수라도 부을 수 있게 한 캔 뽑아서 건네주는 것뿐.
멀지 않은 길을 나란히 음료수를 품에 안고 걷던 휴이는 대기실 문 앞에 붙은 우리 이름을 말없이 잠시 바라보다 웃었다.
“질투 날 때도 있긴 한데 그래도 난 니가 좀 좋은 것 같아.”
“좋은 것 같아는 뭐야.”
실없이 웃던 우리는 안에서 들어가자마자 한바탕 저들끼리 전쟁을 치르는 동생들 때문에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동생이라는 것들은 전생에 나랑 어떤 악연이….
아, 난 전생에 얘네 팬이었지 참.
인생이 이렇게 무상하다고 생각하며 세빈이를 괴롭히는 찬이와 자인을 떼어냈다.
그렇게 수다를 떨기도 하고, 리허설도 무사히 끝낸 우리는 평소보다 긴 대기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멍하니 있는 시간이 길어지니 머릿속에는 자연스럽게 온갖 생각들이 몽실몽실 떠올랐고.
처음에는 이왕 다시 살 수 있게 된 거, 덕질이나 실컷 하면서 언래블 잘되는 거 구경해야지 싶었다.
전생에서는 나이만 그만큼 먹었지, 그동안 허송세월하느라 막연히 흘려보낸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중요한 것도 소중한 것도 간절한 것도 없었던 삶. 내 가족이나 언래블을 제외하면 나를 구성하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는 왜 그걸 몰랐을까.’
‘뭐가?’
‘전생에 너무… 내가 대충 살았다 싶어서.’
‘그게 나쁜 건 아니지 않음?’
‘왜?’
길어진 대기시간에 멤버들은 잠깐 졸기도 하고 연습을 하기도 했다. 누구는 핸드폰 게임에 열을 올리기도 했고.
나는 아까 DCL과의 만남 이후 무언가 머릿속이 복잡해져서 자는 척 복잡한 머릿속을 풀어내려 생각에 빠져있었다.
그런 내 마음을 짐작하기라도 한 듯 한탄 같은 내 중얼거림에 포잉이 답했다.
‘대충 살면 안 되는 이유는 뭔데?’
‘어, 글쎄. 그래도 이왕 사는 거 열심히 살면 좋지 않을까?’
‘뭐가 좋은데?’
포잉 특유의 뚱한 목소리가 내 생각에 착실히 대답해주면서 소파에 누워있는 내 옆구리를 뜨끈뜨끈하게 만들어줬다.
‘열심히 살든 대충 살든 자기만 만족하면 되는 거 아님?’
‘대충 살아도 만족이 되나?’
‘가능하지. 넌 대충 살았다고 하지만 어쨌든 덕질은 열심히 했잖아. 그러다가도 만족 못 해서 나를 불러냈고.’
포잉과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기분이 또 이상해졌다.
덕질만 열심히 했지, 하지만 삶에 열심이었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그렇다고 만족했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었고.
‘열심히든 대충이든 본인이 만족하면 그만임. 계약자 놈아, 너는 선후 관계를 또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응?’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가짐과 각오의 차이라고 본다.’
가끔 뜬구름 잡는 것 같은 대답을 할 때마다 포잉이 요정 같아 보이긴 하는데, 중요한 건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널 봐. 처음에는 그냥 언래블 서포트만 신경 쓰느라 사방에 민폐를 끼쳤지. 기억남?’
‘민폐까지야….’
포잉의 날카로운 말을 모른 척하려 했지만, 짧게 혀 차는 소리에 입을 다물기로 했다.
처음에는 그냥 언래블이 1위하고 많이 사랑받고 잘나가는 걸 도우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내가 뭐라도 된 것처럼 자꾸 사건 사고를 벌일 뻔했고.
우진 형과 준이 형이 나를 붙잡고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그마저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난 여전히 날뛰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 후 주변의 도움이 있었기에 일상에 적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연습도, 곡을 만들고 가사를 붙이는 것도 생각보다 훨씬 어렵지만 재밌었고 이제는 회의 시간이 기다려지는 날도 있었다.
반년이 조금 넘는 시간.
나는 꽤 열심히 살았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 일도 있었고 스스로 칭찬해주고 싶을 만큼 잘한 일도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들도 서서히 변해갔다.
솜뭉치에서 서포터로, 그리고 다시 언래블의 멤버로 변했고, 소중한 것들은 늘어만 갔다.
지금에 와서 포잉이 너 이전 삶으로 다시 보내줄게, 갈래? 하고 묻는다면 솔직히 선뜻 갈래! 하고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여전히 그쪽의 가족들이 보고 싶고 그리웠지만, 지금의 삶에서 내가 이루어낸 것들이 너무 눈부셨고, 행복했다.
우리 애들, 멤버들과 함께 계단을 하나씩 만들어가는 과정이 고되지만 뿌듯했고, 무대 위에서 나를, 우리를 응원해주는 팬들을 보고 있노라면 심장이 뭉클했다.
이 사람들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고, 내가 그랬던 것처럼 언래블이 그들의 자랑이고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너무 어려워, 포잉.’
‘원래 세상에는 쉬운 것이 없다, 계약자 놈아.’
깊은 한숨을 삼키며 중구난방으로 엉켜있는 생각을 덮어버렸다.
그렇게 내가 깊은 생각에 빠진 사이 게임에 열중하던 찬이가 중얼거렸다.
“우리 무대 없어진 거 아냐? 왜 이렇게 안 부르지.”
본래 순위가 낮고 연차가 안 된 그룹일수록 방송 초반에 나온다. 인기 있는 그룹일수록 후반부에 나오고.
이전이라면 이미 불렸을 텐데 아직 대기하라는 말이 없어서 찬이가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눈을 뜰까 어쩔까 고민하던 나를 눈치챈 건지, 포잉은 한 바퀴 둘러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소파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그렇게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 우리를 부르는 조연출님의 호출에 후다닥 다시 한번 메이크업과 의상을 점검한 우리는 종종걸음으로 무대로 향했다.
주의 사항을 다시 한번 체크하고 마이크가 잘 달려있는지까지 확인한 우리는 아까부터 싱글벙글한 우진 형을 힐끔 바라보고는 소곤거렸다.
“우진 형 이상하지?”
“응. 뭔가 있는 것 같아. 뭐지?”
“괜히 불안하게 왜 말을 안 해주는 거야.”
무언가 숨기는 느낌이 폴폴 풍겼지만, 슬쩍 떠봐도 말해주지 않으니 알 수가 없었다.
여전히 바쁘게 오가는 스태프들과 다른 그룹 분들에게 인사하고 잠시 서 있는 사이, 우리 차례가 되었다.
방금 무대를 끝내고 내려온 선배 그룹에 인사도 예쁘게 잘한 우리는 이동하라는 스태프분들의 지시에 따라 걸음을 옮겼다.
신나는 곡이 뒤로 가는 게 낫다는 이야기에 첫 곡은 ‘Pluto’였다.
쓸쓸한 느낌의 영상을 쓰는 게 어떻냐는 회의 내용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가사와 멜로디가 주는 쓸쓸함이 있으니 더 잘 살릴 수 있을 것 같다며.
그때 영빈 형이, 팬들이 우리 응원에 사용했던 우주와 명왕성 이미지처럼 우주 한복판에 있는 것 같은 영상이 더 좋지 않냐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 의견이 받아들여져, 우리는 이 무대에서 밤하늘의 별처럼 서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어두운 탓에 서로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전처럼 두렵거나 걱정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문득 난 언래블로서, 그리고 공지환으로서 앞으로 뭘 하고 싶은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눈앞은 여전히 어둠에 잠겨있는 무대였지만, 이 무대 위에도 아래에도 언제나 내게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렇게 하루하루가 바쁘고 소중한 삶이 주어졌으니 무언가 제대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찾아왔다.
내가 언래블의 미래만 떠올리는 게 아니라 우리의 미래와 나의 미래를 함께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게 이상할 정도로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내 기분과는 별개로 전주는 흘러나왔고, 새까만 무대 위로 시리도록 푸른 빛의 영상이 우리를 감싸 안았다.
그 빛 너머에는 나에게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해준 언래블과 포잉이 있었고, 새로운 삶을 더 소중히 여길 수 있게 해준 팬들이 있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아직 안무 순서상 내가 어두운 곳에 있어야 한다는 게.
밝은 곳에 있었다면, 나도 모르게 고인 눈물이 보였을 테니까.
‘잘하고 와라, 계약자야.’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포잉이 평소보다 조금 더 다정한 목소리로 응원을 보태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