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189)화 (189/456)

189. 싫다고 말해(2)

팬클럽 창단식 때 선보일 무대를 연습하던 우리는 실장님의 호출로 다시 회의실에 모여앉았다.

“우리 요새 회의실에 너무 자주 오는 것 같아….”

“옛날엔 여기 오는 게 무서웠는데.”

“나도. 꼭 혼날 거 같고.”

이제는 연습실만큼 익숙해진 공간이라 멤버들은 익숙하게 한쪽에 쌓여있는 A4 용지와 볼펜을 들고 앉았다.

어떤 이야기를 나누든지 모든 내용을 기억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멤버들은 대화를 나눌 때 메모하는 습관을 들이기 시작했고, 그런 멤버들을 위해 회사에서는 종이를 회의실마다 비치해주었다.

이렇듯 우리도 회사도 하루하루, 조금씩이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도우려 애쓰고 있었다.

만약에 언래블이, 내가 멤버들을 만난 회사가 ON 엔터가 아닌 제논이었다면 불가능했을 일들.

하준 형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찬이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영빈 형은 세빈이를 챙기고 있었다.

경환 형은 느긋한 얼굴로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얘들아, 왔어?”

“네엥!”

“찬이는 어째 날이 갈수록 애교가 늘어.”

“으하하! 다른 형들이 애교가 없으니 저라도 해야죠.”

준이 형에게 무언가 열심히 듣던 찬이가 팀장님을 반갑게 맞이하며 웃었다.

버릇처럼 사람을 마주할 때면 웃는 찬이지만, 그렇다고 그 미소가 늘 같지는 않았다.

어제 이야기가 조금은 찬이 마음을 후련하게 해줬던 걸까?

오늘따라 미소가 더 환해 보였다.

“오늘은 나 말고 실장님이 너희한테 직접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셨어. 너희 의견을 꼭 들어야 하는 일이거든.”

“악플러들이랑 연관된 이야기에요?”

“응.”

팀장님이 들어오고 의자를 바짝 당겨 앉은 우리는 버릇처럼 볼펜을 쥐었다.

손안에 구르는 볼펜의 감촉이 느슨했던 마음을 한 번 더 조여주었다.

“이후 이야기는 내가 할게요, 팀장님.”

그리고 다시 한번 회의실 문이 열리고 평소처럼 단정한 얼굴의 실장님이 들어왔다.

“여태까지 회사는 너희가 댓글이나 기사를 찾아보는 걸 반대했어. 이유는 알고 있지?”

“네. 악플에 대해서는 늘 말이 많으니까요.”

“그래. 그리고 너희가 정말 잘 따라줬다는 것도 알고 있어. 아마 너희가 우리 몰래 글을 찾아봤으면 티가 났을 거야.”

살짝 웃으며 농을 섞어 가볍게 말하는 실장님의 모습은 처음이라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팀장님은 그래도 가까운 사람이었지만, 실장님은 늘 바쁘셨고 앨범 준비 때나 큰일을 결정할 때만 만났기 때문에 조금 거리가 있었다.

차갑고 무서운 느낌이었던 인상이 미소를 조금 머금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다른 얼굴이 되었다.

“최근에는 의도적으로 악플이나 너희에 대한 악질적인 글을 반복적으로 퍼트리는 정황을 포착했어. 그리고 말했던 대로 회사는 고소를 준비 중이고.”

여기까지는 우리도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그런 악플이 판을 치게 된 게 그 배우의 기사가 돌고 난 후라는 것도.

“고소를 위해서는 너희의 위임장이 필요하고, 오늘은 너희가 정말 악플러들을 고소할 마음이 있는지 묻기 위해 자리를 만든 거야.”

“가족들에게는 말하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준이 형이 우리를 대신해 물었다. 가족에게 안 좋은 이야기가 전해지는 건 아무래도 걱정스러운 일이었으니까.

“너희 마음은 알지만, 미성년자인 멤버들도 있고 이런 일은 가족들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너희가 우리에게 연락처를 남겨준 보호자에게 연락할 예정이야.”

가족들에게 이런 내용이 전달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던지 전날 가정사를 이야기했던 멤버들의 얼굴이 조금 흐려졌다.

“그리고 너희에게 악플 내용을 보여주는 게 과연 옳은지에 대해 우리끼리도 많은 회의가 있었어. 지금도 회사 메일에는 팬분들이 주신 제보가 한가득 쌓여있거든.”

고소 가능한 내용을 추리면서 팀장님과 실장님은 그 내용을 모두 확인했다고 말할 때 실장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 바닥에서 오래 일한 실장님이 보기에도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내용이 엉망이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너희가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도록 계속 강제하기도 어려워. 결국 언젠가는 너희도 우연히라도 보게 될 거고. 그래서 회사는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너희가 아는 게 중요하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어.”

“어떤 사람이요?”

“응. 어떤 사람인지, 그런 말을 써 내리는 사람들이 어떤 얼굴의 인물들인지 너희가 실체를 아는 게 이겨내기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거기까지 말한 실장님은 들고 왔던 프린터 물을 우리에게 한 묶음씩 건네주셨다.

그리고 그 안에는 우리에 대해 어떤 사이트에서 어떤 논란이 있었는지, 그 내용은 무엇인지가 간략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미 전생을 통해 악플러와 무수히 싸워본 나야 괜찮았지만, 다른 멤버들이 걱정되어 슬쩍 얼굴을 살폈다.

내 걱정이 기우였는지 생각보다 멤버들은 맏형 준이 형부터 막내 세빈이까지 모두 진지한 얼굴로 내용을 확인하고 있었다.

무서워하거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언래블은 내 걱정보다 훨씬 더 단단하게 들어차서 착실하게 커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다시 종이로 시선을 돌리자 그 악플을 달았던 사람들에 대한 간단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몇 살인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왜 그런 글을 적었는지 등.

“회사는 악플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고수할 거라는 공지를 올리고 지금이라도 자신이 남겼던 악플을 삭제하고 반성문을 보낼 경우 고소하지 않을 거라는 입장문을 올려놨었어.”

우리가 받아본 서류는 그들의 반성문과 그들이 작성했던 댓글을 회사에서 정리한 파일이었던 셈이다.

“진짜 가지가지 하네요, 이 사람들.”

대충 다 훑은 나는 그들에 대한 경멸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나는 예전부터 악플러들을 범죄자라고 생각했다.

전생에서도 악플 때문에 세상을 떠난 수많은 사람의 기사를 접했었고,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봤었다.

사람이니까 질투할 수도 있고, 그냥 마음에 안 들 수도 있다. 싫어할 수도 있고.

그냥 마음속으로, 머릿속으로 혼자 생각하는 걸 누가 뭐라고 한담?

익명이라는 공간에서 자기를 숨기고 남을 괴롭히고 욕하는 데서 재미를 찾는 게 과연 제대로 된 사람일까.

“14살이면 중1 아니에요? 그냥 재밌어 보여서라니….”

“어린애들은 그래도 충동적으로 그랬구나, 하겠는데 우리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왜….”

“이 사람들이 막 그… 마약? 같은 걸 하거나 술에 만취해서 그런 건 아닌 거죠?”

악플 중에서도 순한 맛만 골라서 가져오신 게 뻔했다.

그런데도 확인하던 멤버들은 점차 눈살을 찌푸리고 한숨을 내쉴 만큼 내용이 가관이었다.

오죽하면 막내가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이 글을 쓴 게 아니냐고 물을까.

“안타깝게 모두 멀쩡한 상태에서 쓴 글들이고, 지금 커뮤니티와 SNS, 공개 채팅방에서 떠도는 이야기는 이보다 훨씬 심해.”

실장님은 잠시 말을 고르는 듯하더니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너희 가정사, 특히 몇 명의 멤버들에 대해서는 차마 입에 담기 힘든 말들을 쏟아낸 것들도 많고. 회사는 절대 선처 없이 무조건 법적인 절차를 밟았으면 좋겠어. 그래야 앞으로 이런 일이 줄어들 테니까.”

실제로 악플러들에게 고소장을 날리고 법정 공방을 이어가면, 일시적이긴 해도 악플이 줄어든다. 벌금이든 징역이든 살기 싫으니까.

“하지만 너희가 하기 싫다고 하면 고소는 진행되지 않을 거야. 어떻게 생각하는지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좋겠다.”

실장님은 시종일관 우리에게는 차분하고 분명한 어조로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어떤 순서를 밟는지, 이전에 회사에서 악플러와의 고소가 어떻게 진행되었었는지 등 실제 상황에 기반한 설명이 뒤를 이었다.

“전 고소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은 고소해서 그 사람들이 책임을 지게 했으면 좋겠어요.”

실장님의 이야기에 각자 생각에 빠졌던 멤버들 사이로 세빈이가 자기 의견을 먼저 꺼냈다.

평소에 자신의 의견을 좀처럼 강하게 주장하지 않는 세빈이었기에 팀장님도 놀란 눈치였다.

“자기가 한 말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 제가 본 것만 해도 어떻게 모르는 사람한테 저렇게 말할 수 있지? 싶은데 이것보다 더 심한 거는 상상이 안 돼요.”

형들한테는 늘 순하게 웃고 엉겨오던 착한 막내가 이 익명의 범죄자들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저도요. 잡을 수 있다면 다 잡아서 혼내주고 싶어요. 그냥 우리가 못해서 욕먹는 건 어쩔 수 없죠. 근데 그런 게 아니잖아요, 이 사람들은.”

그 뒤로 찬이도, 경환 형도 자기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회사 의견처럼 선처 없이, 벌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자기가 한 잘못한 걸 알게 해주고 싶다고.

“우리 애들이 겁 많고 마냥 착하기만 할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이네. 그래, 내 새끼들이라면 그래야지.”

그런 멤버들의 모습에 소현 팀장님은 흡족한 듯 웃고 있었고, 실장님은 아직 답하지 않은 두 맏형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안타깝기도 해요. 특히 어린 친구들이요. 그냥 다른 사람이 하니까 따라서 이렇게 하는 걸까 하는 생각도 조금 들고요. 하지만 고소에 대해서는 같은 생각이긴 해요.”

영빈 형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무조건적인 법적 처벌이 과연 옳은가, 의구심이 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너무 강하게 대응하면 부정적인 반응이 오지 않을까 걱정도 되고요. 너무 일이 커지는 건 아닐까 싶어서….”

그뿐만 아니라 이런 일들이 앞으로 언래블의 활동에 영향을 주거나 회사를 피곤하게 하지는 않을지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제가 전에 봤던 어떤 기사에, 악플러들이 울고 빌어서 봉사 활동 같은 거로 처벌을 대신했더니 또 똑같은 짓을 했다는 내용이 있었거든요.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 건 당연하고 사람이면 또 죄를 짓지 말아야죠.”

영빈 형의 말이 끝나고 여태까지 침묵을 지키던 하준 형은 단호한 목소리로 자기 생각을 말했다.

“저는… 정말 이게 과연 사람인가 싶어요.”

하준이 프린트물 중 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 위에는 다리를 다쳤던 나에 대한 조롱과 아예 다리를 못 쓰게 돼야 했다는 말들이 적혀있었다.

동일한 닉네임이 작성한 다른 게시물은 더욱 가관이었다. 가택 침입 건에 대한 기사를 본 건지, 자기였으면 다 칼로 어떻게 했을 거라며 잔인한 말을 서슴없이 적어놓기도 했다.

“저도 그 사람들이 제대로 벌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분노한 하준 형의 팔을 다독이며 마지막으로 내 입장을 말했다.

“그래, 너희 의지는 잘았어. 그럼 회사는 강경한 대응을 고수하도록 할게. 너희는 잘 모르겠지만, 실장님이 이런 일에는 전문이거든. 믿어도 좋아.”

자신만 믿으라며 자신감을 나타낸 실장님의 얼굴에 살벌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 모습에 팀장님이 장난기가 맴도는 목소리로 말했다.

“실장님이 그동안 법무팀이랑 아작낸 악플러들만 해도 회사 두 바퀴 반은 돌릴걸? 우리만 믿어, 얘들아.”

“우리 실장님 멋있다!”

“실장님, 팀장님이 최고예요!”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우리를 위해주는 모습에 우리도 호들갑을 떨며 실장님과 팀장님을 추켜세웠다.

“어쭈, 이 녀석들이? 좋아. 너희 오늘 저녁은 피자야.”

두 분을 둘러싸고 우와아! 하고 응원의 모습을 취하자, 정윤 실장님은 피식 웃더니 까만색 법카를 꺼내 우리에게 보였다.

“너희한테 시키라고 하면 또 적당히 싼 거 시킬 테니까 내가 골라줄게. 기대해도 좋아.”

“실장님, 저는요?”

“소현 팀이 애들이랑 피자 먹을 시간이 어딨어, 지금부터 나랑 제일 바빠야 하는데.”

실장님에게 투덜거리던 팀장님이 파일들을 회수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실장님도 몸을 일으켰다.

두 분을 배웅하기 위해서 자리에서 일어난 우리는 순간 멈칫했다.

회의실을 나서던 실장님이 몸을 돌려 우릴 향해 따뜻한 미소를 머금었기 때문이었다.

기특하다는 듯 웃는 건 본 적 있어도 이런 포근한 미소는 처음이었다.

“얘들아, 너희는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 그러니까 싫은 건 싫다고 말해도 괜찮아. 원래 애들은 어른이 보호하는 게 맞아.”

어느 때보다 커다란 울림을 주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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