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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157)화 (157/456)

157. healing(5)

지금의 삶을 시작하게 된지도 벌써 반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한 번의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였고, 현재의 삶을 이해하고 사랑하기로 했다.

하지만 머릿속에 남아 있는 이전 생의 기억은 나를 자유롭게 놔두지 않았다.

내가 겪지 못한 ‘지환’의 과거 일들은 여전히 나에겐 타인의 것에 가까워 버거웠다.

그래서일까?

큰아버지라고 연락 온 사람의 메시지에 아무 감흥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이.

누님 [그냥 차단해]

[그럼 누나한테 연락할 거 아냐]

누님 [난 이미 차단했지.]

아무튼 맺고 끊는 게 참 칼 같은 사람이었다.

기억을 모두 뒤져봐도 누나의 반응이 과하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지환이의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고 누나가 하나 남은 동생을 챙기며 아등바등 살아갈 때, 외가에서는 여러 방면으로 도와주려 했었다.

반면 친가의 어른들은 부모님의 목숨값과 남겨진 유산을 탐내며 장례식장 한구석에서 우는 것밖에 할 수 없었던 무력한 지환이를 꼬드겼다.

다행히 누나와 외삼촌들이 잘 수습했지만, 그 뒤로는 친가와는 연을 끊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결국 다시 연락이 온 것도 뻔한 이유였다.

그때도 지금도 참 뻔한 사람들이라 새삼스럽지도 않았고, 더군다나 나랑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 외엔 아무 감흥도 없었다.

이제 이런 이야기는 너무 흔해서 기사로도 써먹지 못할 이야기가 돼버린 세상이니까.

약간의 찝찝함을 남긴 채 핸드폰을 대충 치웠다.

지금은 이런 영양가 없는 일에 시간을 쓰는 게 아까웠다.

“지환아!”

“네, 가요!”

오늘은 광고주님들과의 미팅 날이었다.

의견 조율 때 우리 측 인원과 광고를 제시한 허니비 측이 전쟁 같은 시간을 보냈다고 우진 형이 넌지시 이야기해 줬었다.

신인이라는 점 때문에 광고비를 최대한 깎으려는 광고주와, 첫 광고부터 너무 금액이 떨어지면 나중에 몸값에 지장이 생긴다며 최대한 열심히 올리는 회사 측의 딜.

결국 이리저리 협상한 결과 최소 금액을 맞추는 대신 일정분의 영양제를 초록우산 재단에 언래블의 이름으로 기부하는 것으로 합의를 끝냈다.

인연이 전혀 없는 곳보다는 패션쇼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는 곳을 통하는 게 서로 더 좋을 것 터.

큰 금액을 받기 힘든 것은 회사의 사정이나 우리의 인지도를 고려하면 당연한 일이라, 차라리 미담을 남기는 게 좋겠다는 대표님의 의견이었다.

팀장님이 우리에게 다른 의견이 있는지 물어보셨지만, 우리 역시 아무리 고민해도 대표님의 의견이 가장 합리적인 것 같았다. 하준 형이 대표로 의견을 전달했었다.

그렇게 협상은 마무리됐고, 우리는 최대한 예쁜 옷을 입고 얼굴에 화장품도 착착 바르고 허니비 본사로 향했다.

“어떡하지? 우리 실물 보고 마음에 안 들어 하시면 어떡해?”

“이미 협상 끝났는데 무슨 헛소리예요!”

“누가 찬이 입 좀 막아라, 쟤 왜 초 치고 있냐.”

“찬아, 그냥 회사 갈 때까지 입 열지 마….”

긴장감이 극에 달했는지 찬이는 불안한 듯 눈을 굴리며 경환 형과 세빈이를 붙잡고 망상의 끝을 달리고 있었다.

실질적인 협의는 모두 끝났고, 오늘 이 자리는 도장 찍는 겸 우리를 보고 싶다는 이야기에 마련된 자리였다.

직장인의 정석 같은, 정장을 차려입은 분이 나와서 우리를 안내해 주셨고, 정윤 실장님과 그분이 서로 덕담을 나누는 사이 우리는 쫄래쫄래 그 뒤를 따라 걸었다.

긴장이 안 되는 게 아니라, 다들 현실감이 없는 쪽에 더 가까웠다.

광고라니, 광고라니!

그저 조금이라도 더 잘 먹으면 키가 클까 싶어서, 몸이 덜 축나지 않을까 싶어서 기억을 더듬어 샀던 것뿐이었는데.

이런 상태로 입을 열었다가 무슨 헛소리를 할지 감당이 안 돼서 그냥 입을 닫고 있었다.

누나한테 광고 찍는다고 보낼까 말까 백번 정도 썼다 지웠다 결국 말하지 못했다.

혹시라도 일이 틀어지면 쪽팔릴 것 같아서.

그럴 리 없다고 이성이 이야기했지만, 언제나 그랬듯 내 몸은 이성의 말을 듣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앞만 보고 걷다 보니 불투명한 유리문 앞에 섰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소싯적 제법 인기 있었을 것 같은 중년의 멋을 간직한 분이 우리를 향해 서글서글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허니비 대표 강여운입니다.”

드디어 모든 인원이 회의실에서 마주했다.

주로 대표님이 우리에게 질문하고 우리가 거기에 대답하는 가벼운 느낌의 자리였다.

대표님은 내 편지를 직접 보기 위해 공식 카페에도 가입했다고 하셔서 멤버들이 당황하긴 했지만.

멤버들의 얼굴이 빨개지는 걸 보니, 솜뭉치들에게 예쁜 모습을 보여주려고 그동안 이것저것 올렸던 것들을 떠올린 것 같았다.

대표라는 자리가 보통 바쁜 게 아닐 테니 그 글을 전부 확인하진 않았을 거라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내가 나이를 먹은 건지 요새 노래는 잘 모르는데, 언래블 친구들 노래는 몇 개 잘 듣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광고주님이 스트리밍까지 해준다고 하니 우리 목소리는 절로 쩌렁쩌렁해졌다.

그전까지는 정석적인 광고를 간혹 하는 정도였지만, 이번 판매량을 보고 새로운 시장을 본 것 같다고 하셨다.

다양한 시장의 개척에 큰 흥미가 생겼다는 말에 문득 현장에서 일하는 분들이 고달파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시원시원하게 서류에 도장을 쿡 찍는 모습에 옆에서 경환 형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뭔가 ‘중년의 간지란 이런 거다’라는 걸 본 것 같아.”

“얼굴이 개연성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에요….”

세빈이의 속삭임에 영빈 형이 움찔하며 둘의 허벅지를 꾸욱 힘줘 눌렀다.

제발 둘 다 입 좀 다물라는 의미였다.

진행될 광고의 내용과 이후 스케줄은 담당자를 통해 의견 교환이 될 테니, 우리도 의견이 있으면 언제든 이야기해달라는 말을 끝으로 최종 회의가 끝났다.

“약소하지만 직접 와준 언래블에게 선물을 챙겨봤습니다.”

“엇, 감사합니다!”

“지환 군이 우리 제품을 먹고 있다는 걸 알았는데 그냥 넘어갈 수가 있어야지요, 하하. 아, 아쉽지만 아직 홍삼 스틱 제품은 없어서 준비 못 했습니다.”

“하, 하하….”

설마, ‘살려주세요’ 짤도 보신 걸까…?

약소한 선물이라고 하셨는데 박스를 내오셨다.

멤버들이 먹을 만한 영양제를 챙겼다며 박스째로 차에 실어주시는 걸 멍하니 바라보다가, 우리는 황급히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전했다.

대표님들은 다 이렇게 통이 큰 걸까?

“…저거 다른 분들한테 나눠드려도 돼요?”

“아무래도 너희가 다 먹기엔 좀 많지.”

“조금 있다 진우 형이랑 새벽 형들 만나니까 좀 드리면 좋지 않을까 해서요.”

“그래, 쇼핑백 챙겨줄게.”

어떤 건지 열어봐야 알겠지만 주변에 홍보 겸 나눠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잔뜩 긴장하고 있었던 탓에 어깨며 허리가 뻐근했는지 멤버들이 온몸을 주무르며 입을 열었다.

“진짜 우리가 광고를 찍는 날이 온다, 야…. 이거 꿈 아니지?”

“우리도 이제 진짜 연예인이야!”

“하, 앞으로 더 광고 빵빵하게 찍어야 하는데 벌써부터 이러면 어떡해요.”

들떠서 종알거리는 형들 앞에서 우리 막둥이가 센척해 봤지만, 잔뜩 흥분해서 빨개진 얼굴로 말하는 건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너 얼굴 터질 것 같은 건 알고 있어?”

“아니, 이건 더워서!”

“구차한 변명입니다.”

“우리 막내가 사춘기가 왔나, 왜 쿨병에 걸렸지?”

“16살 먹은 동생한테 그러고 싶냐!”

“응, 나 18살이라 괜찮아.”

“익!”

느물거리는 찬이와 경환 형의 공격에 결국 파스스 부서진 세빈이는 삐진 것 같았다. 이어폰을 빼 드는 걸 보니.

저럴 땐 건드리지 않는 게 상책이니 시선을 돌려주기로 했다.

직접적으로 인기를 체감할 일이 생긴 탓일까.

다들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게 훤히 보이는 만큼 차 안은 후끈한 열기로 가득했다.

운전석과 보조석에 앉은 우진 형과 정윤 실장님이 룸 미러를 통해 우리 모습을 힐끔거렸는데, 입꼬리가 계속 움찔거리는 게 창문을 통해 보였다.

손편지에서 시작된 영양제 소동이 이렇게까지 됐다는 걸 솜뭉치들이 알면 얼마나 기뻐할까.

그렇게 들뜬 기분 그대로 다음 미팅 장소에 도착한 우리는 먼저 와있던 진우 형에게 인사를 건넸다.

“형, 오랜만!”

“아이쿠 세빈아, 넌 왜 점점 힘이 세지냐.”

진우 형은 세빈이를 친동생 같다며 귀여워했고, 세빈이도 그런 진우 형을 잘 따랐다.

다만, 차 안에서 멤버들한테 놀림당했던 세빈이가 드디어 자기 편이 되어 줄 사람을 만났다는 게 너무 기뻤는지 온몸으로 달려든 게 문제였다.

폴짝 뛰다시피 해서 진우 형을 껴안은 탓에 진우 형은 휘청거리며 겨우 세빈이를 받아주었다. 진우 형의 얼굴이 순간 핼쑥해졌다.

저 형도 그렇게 체격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

“와, 강세빈! 너 우리한테는 그렇게 반갑게 인사한 적 없잖아!”

“형이 세빈이 놀리는 걸 지금의 절반만 했어도 세빈이가 형을 반가워할걸?”

“언제 왔어요? 진우 형만 와있는 줄 알았더니.”

“방금. 우리 내리니까 너희 들어가고 있더라.”

싱글벙글한 얼굴로 멤버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가영 형도, 참 고생이 많았다며 내 어깨를 두드려주던 키스 형도 멤버들과 친근한 인사를 주고받았다.

“지환이 너 허리 괜찮냐?”

“말도 마요, 그날 파스 붙이고 잤어요….”

“그래, 안 그래도 그럴 것 같더라니.”

작게 혀를 찬 세비 형은 찬이를 괴롭히고 있는 가영 형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이 마치 철부지 아들내미를 바라보는 엄마 같아서, 위로의 마음을 담아 형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이번 언래블 스토리를 촬영할 때, 새벽 형들이 깜짝 게스트 느낌으로 출연해서 도와줬었다.

스케줄이 있진 않을까 하고 걱정했었는데, 타이밍 좋게 하던 작업이 막혀서 며칠 쉬던 중이라며 흔쾌히 승낙해 주었다.

팀을 나눠 몇 가지 게임을 진행했는데, 눈 가리고 상대방을 찾는 게임을 하기 전까지는 나도, 멤버들도, 형들도 모두 즐거워하고 있었다.

너무 방심했던 걸까?

눈을 가리는 술래가 가영 형 차례가 됐을 때, 운 나쁘게도 형에게 붙들린 나는 험한 꼴을 당했다.

애당초 가영 형을 놀린 건 키스 형이었건만 왜 나를….

잘 도망 다니던 나는 경환 형의 훼방으로 결국 가영 형의 손에 잡히고 말았고, 형은 나를 둘러매고 이리저리 흔들어 댔다.

덕분에 난 행사장의 풍선 인형처럼 허공을 허우적거렸고.

“게임하다 멀미가 생길 줄은 몰랐지.”

“이게 다 내가 지환이를 아껴서 그런 거야.”

“참신한 개ㅅ… 아 욕하면 안 되지.”

“덕분에 분량은 빵빵하게 뽑았잖아.”

“어차피 우리만 나오는 영상인데요!”

인간의 존엄성이 이렇게도 망가질 수 있구나를 절실히 느끼며 형에게 놔달라고 사정했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여태까지 쌓아온 우정에 파삭하고 금이 가는 것 같은 이 마음을 이 형은 알고 있을까.

사람들에게 나눠준다고 쇼핑백에 잘 나눠 들고 왔던 영양제에도 생각이 미쳤다.

이렇게 건장한 형한테 굳이 영양제를 줄 필요가 있을까…?

여태까지의 일들을 떠올려 보건대, 더 건강해지라고 챙겨줘도 어차피 그 몸으로 나를 괴롭히는 데 쓸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친 억측은 아닌 것 같았다.

우리끼리 격렬한 인사를 나누는 사이 방송국 사람들도 하나둘 도착했다.

“다들 반갑습니다, 드디어 모였네요.”

방금 전까지 야생의 그것처럼 시끄러웠던 우리는 누가 그랬냐는 듯 점잖게 인사를 나눴고, 이어진 PD님과 작가님들의 프로그램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설명을 진지하게 듣고 있던 세비 형이 결국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그, 야생에서 헤매는 걸 보통 힐링이라고 하진 않을 것 같은데요.”

“어휴, 텐트랑 취사도구 다 챙겨줄 건데요, 뭐. 처음 계획에 비하면 엄청 편해졌어요.”

“맞아요, 2박 3일 그냥 야영 가서 푹 쉬다 온다고 생각하면 돼요.”

순간 이대로 자리를 박차고 집에 가고 싶어졌다.

PD님이고 작가님이고 왜 자꾸 우리를 무인도에 처박으려고 하시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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