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154)화 (154/456)

154. healing(2)

“어린 친구들이랑 촬영하는 게 아무래도 힘든데 오늘 촬영은 엄청 빨리 끝난 거라고 하더라고.”

“아, 진짜요? 다들 너무 얌전하고 착하던데.”

“그, 착하고 얌전해도 낯설면 힘들어하니까.”

“그렇긴 하죠. 처음에는 기영이랑 찬영이도 숨었으니까.”

“너희가 애들이랑 잘 어울려줘서 촬영 시간 확 단축됐다고 카메라 감독님이랑 PD님이랑 다 함박웃음 짓더라. 그래서 대본이고 뭐고 애드립으로라도 촬영 따라고 했다고.”

“도대체 어디서부터 찍고 있었어요?”

“첫 대면부터 이미 찍고 있었지, 뭘.”

쭈뼛거리던 동글동글한 머리통이 떠올랐다.

까딱거리며 사람들의 눈치를 보던 게 안쓰러웠지만, 눈높이를 맞추고 하준 형이 몇 마디 했더니 금방 밝게 웃던 아이들이었다.

악기를 쥔 손은 진지했고, 얼굴은 그 나이답지 않게 신중했었다.

그들은 이미 피아니스트였고 바이올리니스트였다.

훌륭한 연주가들이었고, 이미 한 사람의 음악인이었기에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연주하고 노래하면서 즐거웠다.

나희랑 세영이도 벌써부터 준비를 만만치 않게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솔직히 난 나희랑 세영이 나이 때 뭐 했는지 기억도 안 나. 근데 걔네는 벌써 꿈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거잖아?”

“맞아요. 엄청난 거지. 난 맨날 학원 가기 싫어서 땡땡이치고 엄마한테 혼난 거 같은데….”

라고 이제 18살인 힘찬이가 말했다.

너 인마 그거 끽해야 한 6년, 7년 전 아니냐…?

준이 형이야 그렇다고 쳐도 찬이가 저렇게 말하는 건 좀, 이라고 생각한 찰나에 우진 형이 찬이 어깨를 꾹 누르며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 가서 그렇게 말하지 마라, 진짜. 나이 먹은 사람들이 들으면 자기 놀리는 줄 알아.”

“아! 아파요! 쳇, 내가 아무리 그래도 다른 데 가서 그러겠어요?”

“….”

다른 멤버들의 시선이 꽂히자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는 찬이와 깊은 한숨을 내쉬는 영빈 형의 모습에 나도 남몰래 혀를 찼다.

“그, 셋이 나갔던 거 오늘 방송이지?”

“몇 시에요?

“곧 하겠는데? 숙소 가서 볼 거야?”

“시간 맞으면 숙소 가서 볼래요.”

낮에 스케줄을 끝내고 점심 이후에 시작한 촬영이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우리는 예정보다 빠른 퇴근을 할 수 있었다.

뭉그적대며 시간을 미뤄보려던 찬이랑 세빈이가 영빈이 눈치를 보긴 했지만 결국 전부 다 씻고 거실 바닥에 모였고, 준이 형이 TV를 켰다.

원래 숙소에는 TV가 없었는데 이사 기념으로 대표님이 선물해 주셨다.

“지환이 살려주세요 만큼 인상 깊은 게 나올 것 같다.”

“그, 신인 아이돌의 생존법 그거 이제 좀 그만….”

“내 생각엔 한참 갈 것 같아.”

아직도 미궁 탈출 오프닝 때 그 장면이 짤로 돌아다닌다고 했다.

그래서 인터뷰 때마다 인사처럼 듣는 이야기라 괴로웠다.

덕분에 인지도는 좀 생겼으니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려나.

정치인이나 연예인이나 사람들의 관심을 먹고 사는 관종들이라 뭐든 임팩트 있게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게 좋은 일인 건 알고 있다.

그리고 나쁜 일도 아니고 좋은 이미지면 더할 나위 없고.

하지만 그건 그거고 흑역사는 흑역사지, 하.

부디 오늘 방송에서 찬이가 나보다 더한 흑역사를 창출했기를 빌었다.

옹기종기 모여앉아 방송을 기다렸던 우리는 예쁘게 입고 웃는 멤버들의 모습에 각기 평을 내렸다.

“영빈 형, 인사하면서부터 눈동자 지진 난 거 봐.”

“그거야 찬이 네가 초장 인사부터 헛소리를 해서 그렇지.”

“내가 제일 정상이었던 거 같다.”

“세빈아, 너….”

찬이는 열심히 공부하고 왔다면서 수줍게 웃더니 앞에 놓여있는 감자로 저글링을 선보였다.

갑자기 자기소개하다 개인기를.

당황한 영빈 형의 눈동자는 갈피를 잃었고, 프로그램 진행자인 개그맨은 바닥을 구를 것처럼 웃고 있었다.

세빈이만 초연한 얼굴로 다섯째 형이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될까 봐 고삐를 잡기 위해 같이 나왔다는 말을 하고.

어느 정도 작가들이 대본을 짜준 대로 진행되는 내용이었지만, 그걸 각자의 방식으로 소화하는 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아무래도 방송국에서도 우리 세빈이 포지션을 형들을 아우르는 귀여운 막내 정도로 잡은 것 같았다.

그게 가장 흔하고 잘 먹히는 소재기도 했고.

“다 좋은데 평소 고삐를 잡고 있는 게 왜 나야? 준이 형이 아니라….”

“찬이는 보통 지환이가 관리하긴 하지.”

“그게 국룰 아냐?”

“아니, 이 사람들이 뭐라는 거야? 자료 화면은 왜 또 저거야!”

그나마 사람들이 알법한 멤버 이름을 언급하고 팀 인지도를 높이는 건 알겠는데, 하필이면 내 자료 화면에 그 생존법 짤을 가져다 놨다.

“예능인데 어쩌겠어. 그래도 덜 흔들린 짤이라 다행이네.”

덤덤한 목소리로 날 위로하는 준이 형의 얼굴은 이미 득도한 선인의 그것이었다.

멤버들이 본격적으로 음식을 만들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우리 얼굴은 미묘해졌다.

기본적으로 저 프로는 비교적 쉽고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요리를 알려주면서 적당히 웃기고 적당히 재밌는 컷을 만드는 게 기본 내용이었다.

한데 이번 영상에서는 우리 애들과 함께 나온 어떤 연예인이 각자 준비한 음식을 요리하고 네임드 셰프와 진행자가 그걸 평가하며 각각의 장단점을 짚어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왜 갑자기 내용이 바뀐 거야?”

“나도 몰라, 미팅 때랑도 내용이 달라져서 현장에서 우진 형이 고생했어.”

근데 여기서 중요한 건 바뀐 걸 우리만 몰랐다는 점이었다.

“진짜 거지 같네.”

“그래도 우리가 카메라는 더 받았을걸? 찬이랑 세빈이가 캐리하긴 했어.”

음식 퀄리티로 캐리하진 않았을 테니 그냥 평소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줬나 보다.

“뭐 만들었어요?”

“뇨끼로 간단한 파스타하고 알리고 포테이토.”

“그나마 찬이가 할 수 있는 게 있었네요.”

“너랑 전에 한번 애들 만들어 줬던 게 다행이었지, 뭐.”

영빈 형이 선택한 음식들은 감자랑 치즈, 버터가 들어가서 맛이 없을 수가 없는 조합의 치트키였다.

동생들에게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을 주면서 맛도 있는 음식을 찾기 위해 머리를 싸맸을 영빈 형의 고뇌가 느껴졌다.

“나도 옆에서 도왔는데!”

“그래, 마침 나오네.”

열심히 감자 껍질을 까고 있는 힘찬이 옆에서 영빈 형의 지휘에 따라 재료를 들고 나르는 세빈이 모습이 나왔다.

종종걸음으로 밀가루가 담긴 그릇을 들고 오는 모습이 깜찍했다.

그걸 들고 넘어지기 전까지는.

“…아이고.”

밀가루를 뒤집어쓴 아이돌이라. 보통은 벌칙으로 할 일을 혼자서도 척척 해내니 카메라 감독님들이 좋아했겠구나.

흔들리는 영빈 형의 눈동자와 들고 있던 감자를 내팽개치고 급하게 세빈이에게 팔을 뻗는 찬이 모습을 그 와중에도 절묘하게 잘 잡아낸 걸 보니, 감독님도 보통이 아닌 것 같았다.

급하게 달려와 세빈이가 다친 구석은 없는지 살피던 영빈 형은 밀가루 뒤집어쓰고 해맑게 웃는 막내 모습에 결국 해탈한 웃음을 보이고 있었다.

때마침 화면에는 ‘※의도된 상황이 아닌 점이 더 놀랍습니다.’ 따위의 예능용 자막이 나오고 있었다.

“우리, 음. 예능을 잘하는 건지 잘 못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뭐 분량은 확실하게 챙겼네.”

상대편 연예인은 적당한 입담으로 진행자와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나눴다. 아마도 요리를 따로 배운 것 같았다.

조미료를 쓰거나 음식을 데코하는 모습이 그냥 집에서 대충하던 모습이라기에는 잘 배운 느낌이 났다.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보니 나중에 저분이 음식점을 냈던 게 기억났다. 직접 조리사 자격증도 땄던 것 같은데.

하지만 화면에는 우리 애들 리액션이나 실수가 더 많이 나왔다.

영빈 형의 모습에 셰프가 신기해하면서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종종 옆에 쫓아와서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는 모습이 나왔다.

옆에서 우리 형이 칭찬받는다고 촐랑거리며 신나 하는 동생들 모습에 귀가 빨개진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그래도 갑자기 달라진 것치고는 괜찮게 나왔는데?”

“저거 애들 실수 많이 편집된 거야.”

“네?”

“감자 삶은 거 꺼내 보겠다고 찬이가 들고 가다 한번 엎고, 그거 세빈이가 붙잡으면서 거의 묘기를 부렸어. 위험해 보여서 뺀 거 같은데.”

생각보다 힘찬이랑 세빈이가 크게 실수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아 다들 고개를 갸웃거리자 영빈 형이 조용히 한마디 했다.

아크로바틱 배운 걸 그렇게 써먹을 줄 몰랐다고 중얼거리는 세빈이 모습에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 다치게 조심하랬잖아, 이것들아!”

“안 다쳤어!”

“다칠 뻔했잖아!”

찬이 멱살을 움켜쥐고 짤짤짤 흔들며 잔소리를 퍼붓자 세빈이는 뭐가 신나는지 꺄르르 웃고 있었고, 경환 형은 그런 세빈이를 붙잡아다 안마를 빙자한 고문을 행했다.

“으갸악!”

“몸은 아껴야지, 막둥아.”

“아파요! 아파!”

“평소에 잘 안 풀어 두니까 아프지.”

난장판이 따로 없는 거실 풍경에 두 맏형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스케줄 생각해서 일찍 자라, 제발.”

“피곤해서 먼저 누울래….”

정신이 피곤해져서 도망가는 게 뻔했지만, 이해 못 할 상황은 아니었기에 묵인해 줬다.

나랑 경환 형은 일단 두 놈을 응징하느라 바빴기에.

혼란스러운 밤이 지나고 상쾌한 기분으로 출근한 나는 우진 형이 보여준 화면에 조금 멍청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표정 관리, 표정 관리.

“이게 다 뭐예요?”

“알고 보니까 아가들이 인플루언서더라. 자기들 SNS에 같이 촬영한 내용이랑 너희 칭찬을 써서 올렸더니 반응이 바로 오더라.”

“어우….”

공식 팬클럽 창단을 준비하며 가입을 받고 있는 건 알고 있었다.

꽤 많은 숫자가 가입했다고 해서 놀란 게 어제였는데, 어제 방송을 본 아가들이 SNS에 우리 이름을 언급하고 사진을 올렸다고 실시간 검색어까지 타는 건 또 다른 종류의 놀라움이었다.

“근데 촬영한 거 언급해도 되는 거예요?”

“어어, 우리도 홍보 기사 보냈어. 방송국이랑은 얘기된 거야.”

“아하.”

옆에서 스포를 걱정하는 영빈 형의 말에 우진 형은 씩 웃었다.

자세한 내용이 아닌 이상 적당히 흥미를 끌기 위해 소문 좀 흘리는 거야 다들 하는 거라고.

“아참, 팬싸 일정 잡혔다. 공지 올라가기 전에 보내줄 테니까 너희도 체크하고.”

“아, 팀장님한테 얘기 들었어요.”

“으, 떨린다. 많이 안 오면 어떡하죠?”

칭얼거리는 찬이 투정에 우진 형이 피식 웃었다.

“너희는 생각보다 잘나가고 있는데, 어째 너희만 모르냐.”

약간의 질책이 섞인 말이었기에 찬이는 입술을 삐죽였고, 세빈이는 입술을 오물거렸다.

하준 형은 멤버들의 대부분 투정을 받아주지만, 인터넷에서 우리에 대해 찾아보거나 하는 것들은 엄하게 막는 편이었다.

괜히 기죽거나 악플에 상처받지 말고 차라리 눈을 감으라는 것이었지만, 덕분에 우리는 본인들 이야기를 잘 모르게 되었다.

애들이 준이 형 말은 팀장님이나 우진 형 말보다 믿고 따라서 가능한 일이긴 했지만.

팬들이 보내오는 팬레터에야 당연히 우리에 대한 사랑이 가득했기에 그것을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었다.

괜찮은 예능이나 프로그램에 나가고, 인터뷰가 있고, 잡지 촬영도 있었다.

좋은 소식은 회사를 통해 전해 들었고, 안 좋은 일들은 회사에서 대부분 잘랐다.

“준이 형이 인터넷 하지 말랬단 말이에요.”

“이제는 슬슬 봐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한데… 악플 무서우면 그냥 보지 마.”

나야 포잉이 나 대신 인터넷 공간을 누비고 다니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전해줘서 다른 멤버들보다는 조금 더 알고 있긴 했다.

우리가 올해 데뷔한 신인들 중에는 한 손에 들 정도로 성적이 괜찮다는 것도.

빠듯하긴 해도, 앨범을 하나 더 내고 지금 정도만 유지돼도 수많은 시상식에서 신인상 하나 정도는 기대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도 했다.

데뷔한 지 아직 얼마 안 됐고 망둥이 때문에 2주 가까이 외부와 차단되어 살았는데도 이 정도면 중박 이상이지. 아니, 대박에 가깝지 않나?

사실 내가 좋아했던 시절의 언래블은 앨범이 나오면 무조건 1위 후보였기에 처음 음원 성적이 어땠는지는 잘 몰랐다.

아는 거라곤 1위를 하기까지 시간이 제법 걸렸다는 것 정도.

정확히는 451일 걸렸었지.

덕분에 입덕하고 한동안 내 비밀번호는 0451이었다.

문득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1위 발표 때 오열하며 소감을 말하던 하준 형의 얼굴.

그 영상은 또 다른 내 눈물 버튼이었는데.

자연스레 내 옆에서 세빈이에게 무언가 말하고 있는 하준 형의 얼굴로 나도 모르게 시선이 갔다.

둘은 다른 사람이지만 같은 사람이고, 나에게는 앞으로도 ‘가장 동경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상념이 머릿속을 스쳤다.

“음, 근데 뭐 이것저것 생각할 시간이 있긴 한가 봐?”

“네?”

“컴백한 지 며칠 됐다고 벌써 마음이 널널해졌어?”

“그럴 리가요!”

컴백을 했든 뭘 했든 하루에 정해진 최소한의 연습 시간은 빼먹지 않는 우리였다.

당연히 스케줄을 관리하는 우진 형이 모를 리 없었지만,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있냐는 말로 우리를 채찍질하는 거였다.

우진 형은 우리가 사랑받는 걸 체감하면서 풀어질 것을 염려하는 것 같았지만, 우리 애들은 그 정도로 흐물흐물한 애들이 아니었다.

팬 사인회도, 패션쇼도, 다른 프로그램의 촬영과 리얼리티 촬영까지 할 일이 넘쳤다.

“자, 워킹 배우러 가라. 병아리들아.”

“그놈의 병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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