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153)화 (153/456)

153. healing(1)

컴백 무대는 만족스러웠다.

다행히 누구도 실수하지 않고 리허설과 본무대를 끝냈고, 박세날 PD와 방송국이 꽤 신경을 써준 덕분에 불도 쏘고 효과도 빵빵하게 넣어줬다.

데뷔 무대 때 무대를 온전히 회삿돈으로 치러냈던 것에 비하면 굉장한 발전이었다.

솜뭉치들은 이전보다 훨씬 많아져 왈칵 눈물이 쏟아질 뻔했지만, 가뜩이나 우는 모습을 몇 번 보였던 탓에 입술을 꾹 깨물고 참았다.

폭풍전야에서 다 같이 공중으로 몸을 띄워 바닥으로 내리찍는 듯한 안무를 할 때, 인이어를 뚫고 들어오는 함성 소리에 키스 형의 말이 떠올랐다.

무대에 서면 설수록 중독된다고.

그 함성을 한번 듣고 짜릿함을 느낀 사람이라면 무대를 떠날 수 없다는 말을 했었다.

그 당시에는 몇 번 안 되는 무대를 떠올리며 그럴 수도 있겠다고 말을 했는데, 그날 확실히 느꼈다.

이래서 중독된다고 말한 거구나, 하고.

그날 일정을 마친 우리는 거실 바닥에 발라당 누워서 그때 회사가 왜 그런 선택을 해야 했는지 이제는 이해가 된다고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가 감내할 고통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염원했던 무대가 주어졌고, 더 많은 곳에서 러브콜이 왔다.

이후 조치로 몇 번의 상담을 진행했지만 사실 아직도 이게 무슨 소용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멤버들과 이야기를 나눠볼까 하다가도, 잘 모르는 내가 개입했다가 멤버들의 치료에 나쁜 영향을 줄까 싶어 넣어두었다.

대신, 이리저리 찾아보다 책을 한 권 샀다.

하드 커버의 많이 두껍진 않은 책이었는데, 사실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겠다.

실제 대학 강의에서 사용하는 책이라고 해서 샀는데 잘못 산 것 같기도 하고.

여러 번 읽어보면 뭔가 얻는 게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얄팍한 마음이었다.

그사이 영빈 형은 세빈이와 찬이를 데리고 미팅 잡혔던 요리 프로그램에 다녀왔다.

다녀온 날 형의 얼굴이 반쪽이 된 것만 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이 가서 이런저런 것을 계속 물어봤는데, 그날 저녁 막내 둘은 쏟아지는 우리의 질문에 빽 소리를 지르고 도망갔다.

“난 안될 것 같아…. 저 둘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핼쑥한 영빈 형의 한마디에 깊은 한숨을 내쉰 하준 형이 나중에 방송되는 걸 꼭 보겠다며 영빈 형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이놈 자식들,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한편 경환 형은 음악방송 리허설 도중 올해 데뷔한 다른 그룹 멤버와 번호를 교환해서 우리를 놀라게 했다.

나중에 누구냐고, 왜 번호 교환했냐고 물어보니 ‘럴러바이’라는 그룹에서 랩을 하는 친구라고 했다.

예전에 인디 시절부터 알고 지내다 연락이 끊겼었는데 우연히 마주치게 됐다고.

“경환 형도 친구가 있었어?”

“이놈 새끼가?”

물론 찬이는 쓸데없이 입을 털다가 거실 바닥에서 경환 형에게 암바가 걸려 응징당했다.

발버둥 치는 모습이 꽤 가관이라 사진까지 찍어서 고이 보관해두었다. 나중에 까불면 공개한다고 협박해야겠다 생각하면서.

“얘들아, 준비됐지?”

“넵!”

그리고 오늘, 우리는 팀장님과 우진 형, 석환 형과 고심 끝에 골랐던 프로그램을 촬영하기 위해 세트장에 왔다.

“어서 와요, 저번 미팅 때 봤죠?”

“안녕하세요, 언래블입니다.”

푸근한 얼굴에 안경을 고쳐 쓴 PD가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우리가 선택한 프로그램 중 하나인 ‘아이 콘택트(Eye contact)’였다.

재능 있는 어린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프로그램이었고, 그때그때 주제에 맞게 어린 친구들과 그 분야의 인물들을 섭외했다.

“미팅 때 얘기한 것처럼 오늘은 음악에 재능 있는 친구들과 아이돌을 꿈꾸는 친구들이 나올 거예요.”

“네. 대본 숙지했습니다.”

“하하, 대본도 중요하지만 애드립 넣어도 괜찮으니 너무 긴장하지 말고 잘해봅시다.”

주로 어린 친구들을 대상으로 하다 보니 대본이 무의미하다는 말을 하며 눈을 찡긋했다.

큰 흐름은 있지만 알아서 잘해야 한다는 것 같았다.

어린 친구들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이었지만, 주 시청자들은 이 친구들 부모님 대의 연령층이었다.

그다음으로 많은 시청자층은 귀엽고 재능 있는 친구들의 모습에 힐링 받는 20~30대의 여성들.

팀장님이 추천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준이 형과 영빈 형은 아이들을 좋아해서 망설임 없이 선택했지만, 아이들과 어울려본 적이 없는 나는 조금 난감하긴 했다.

“아, 마침 저기 오네요.”

PD님의 손짓에 초등학교 고학년인 듯한 여자아이와 남자아이, 저학년인 듯한 남자아이 둘이 긴장이 역력한 얼굴로 다가왔다.

여자아이는 긴 머리를 반 묶음 해서 단정하게 고정시켰고, 눈매가 동글동글해서 조금 순해 보였다.

옆에 있던 남자아이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눈에는 미약한 흥분이 담겨 있었다.

”자, 이쪽은 언래블이라고 오늘 함께 촬영할 아이돌 그룹이에요. 미리 말해줬었죠?”

“안녕하세요, 김나희입니다.”

“안녕하세요… 박세영입니다.”

앞에 서서 먼저 인사하는 형아, 누나의 뒤에 어린 친구 둘이 숨어 고개만 빼꼼 내밀고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제일 어려 보이는 두 어린 친구들이 아마 음악에 재능이 있다는 친구들인 것 같았다.

“어머, 애들이 많이 긴장했나 봐요. 아까까진 안 그랬는데.”

보호자인지 관계자인지 모를 사람이 아이들을 달래는 듯했지만, 익숙지 않은 공간이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앞에 선 두 친구들도 긴장한 듯 보였지만,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초롱초롱한 게 한결 나아 보였다.

그때, 하준 형이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아 등 뒤에서 눈만 내놓고 둘에게 눈을 맞추며 부드럽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민하준이라고 해요. 이야기 듣고 많이 보고 싶었어요.”

“…기영이라고 해요.”

“찬영이에요.”

“나희, 세영이, 기영이, 찬영이. 다들 이름이 예쁘네. 엄마가 지어주셨어요?”

웅얼거리는 듯 작은 목소리로 대답한 둘의 모습에 달래려던 사람이 살짝 뒤로 물러났다.

눈높이를 맞추며 다정하게 말하는 하준 형의 모습에 경계심이 조금 누그러든 건지, 쭈뼛거리며 앞으로 나온 기영이라는 친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할아버지가 지어주셨어요….”

“저는 외할아버지가요.”

“나도….”

“나는 엄마가 지어줬어요. 크게 복 받아 뛰어난 사람이 되라는 뜻이래요.”

한마디씩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조금씩 풀어지는 아이들의 모습에 영빈 형도, 경환 형도 나도, 모두가 바닥에 털썩 앉아 아이들을 바라봤다.

확실히 낯선 장소에 왔는데 커다랗고 시커먼 남자애들이 둘러싸고 쳐다보면 무서울 것 같기도 했다.

방송을 하겠다고 오긴 했지만, 출연 자체가 자신이 원한 건지 어른들의 의지인지 알기 어려우니까.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던 포잉은 평소처럼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나를 지켜봤다.

그동안 아이들의 모습을 볼 기회가 별로 없었던 포잉이기에 호기심을 느낀 것 같았다.

그사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긴장이 풀렸는지 아이들은 얼굴에 웃음을 띠기 시작했고, PD님이 슬쩍 뒤로 다가와 눈짓을 했다.

“우리 저기 푹신한 데 앉아서 이야기할까요?”

“누가 먼저 가는지 나랑 내기할래?”

“형은 다리도 훨씬 기니까 안 돼요!”

“형이 3초 기다려준다.”

준이 형이 아이들에게 세트장의 가운데 준비된 소파로 이동하자고 제의하자 그사이 애들과 친해진 찬이가 대뜸 내기를 제안했다.

아무래도 정신연령이 비슷해서 그런가 금방 친해진 것 같은데.

아직 짧은 다리를 열심히 놀린 애들과 정말 3초 뒤에 뛰어간 찬이.

승부는 당연히 찬이의 승리로 끝났지만, 남자애들 셋은 뭐가 그리 신나는지 웃고 있었다.

준이 형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나희는 뺨이 붉어진 게 아무래도 형이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저런….

둥글게 모여앉은 우리는 몇 가지 이야기를 더 나누며 아이들이 부담스러워하지 않게끔 분위기를 풀어 갔고, 언제부터 찍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카메라가 돌고 있었다.

“우리가 친구들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자세히는 못 들었어요. 아이돌에 관심 있다는 친구들이 누군지 알려줄 수 있어요?”

“저랑 세영이요.”

“그럼 악기를 잘 다룬다고 한 게 기영이랑 찬영이에요?”

“피아노 좋아해요….”

예상대로 고학년인 둘이 아이돌이 되고 싶다는 친구들이었고, 수줍음이 많은 기영이가 피아노를 잘 치는 것 같았다.

“그럼 찬영이는 어떤 걸 좋아해요?”

“바이올린이요. 재밌어요.”

평소에 악기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이렇게 어린아이들이 악기를 잘 다룬다는 말에 감탄했다.

“나도 피아노 좋아해요. 최근에 열심히 배우고는 있는데 아직 잘하진 못하고.”

“난 기타 배우고 있는데 정말 어렵더라.”

영빈 형이 피아노를 칠 수 있다고 하자, 조그만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대답하던 기영이의 눈이 반짝거렸다.

“나희랑 세영이는 왜 아이돌이 되고 싶어요?”

“노래하는 게 좋고, 사람들 앞에서 부르는 게 좋아요.”

“멋있기도 하고, 노래하는 것도 좋아해서요.”

어린 친구들의 장래 희망을 연예인이나 아이돌, 스트리머가 차지한 건 이미 꽤 오래전부터라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 보는 건 또 다른 의미로 신기한 기분이었다.

“우리도 데뷔한 지는 얼마 안 됐지만, 그래도 알고 있는 건 말해줄게요.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봐요.”

“연습생 생활이 엄청 힘들다고 하는데 진짜예요?”

상냥한 얼굴로 부드러운 분위기를 유지하는 하준 형과 싱글벙글한 얼굴로 장난을 치는 찬이, 세빈이 모습에 아이들도 제법 편한 얼굴이 되었다.

대화를 하며 자연스럽게 노래를 불러보겠냐는 말을 끌어낸 하준 형이 영빈 형에게 눈짓했다.

영빈 형이 세트장 한가운데 놓인 피아노 앞에 앉아 기영이에게 손짓했다.

“누나랑 형이 노래 부를 수 있게 기영이랑 형이 피아노 쳐줄까?”

“그러면 찬영이가 바이올린 켜고, 형이 기타 치자.”

“형이 기타를 배운지 얼마 안 돼서 잘 못 할 텐데 웃으면 안 된다?”

사실 찬이는 꽤 오래전부터 기타를 배우고 있었고, 세빈이는 최근에 배우기 시작했지만 느는 속도가 빠르다고 했다.

“나희랑 세영이가 혹시 잘 부르는 노래가 있으면 알려줄래요?”

“lulu님이 부른 ‘이별’이라는 노랜데요….”

수줍은 듯 말하는 둘의 모습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 노래를 알아요?”

“저는 엄마가 이 노래를 자주 들어서….”

“세영이랑 부르려고 저도 듣고 연습했어요.”

생각보다 야무지게 준비한 듯해서 나도 모르게 웃었다.

무조건 된다, 안 된다로 미래를 말해줄 수는 없지만, 방송에 나올 생각을 할 만큼 노력하고 있다면 그들의 꿈을 가볍게만 치부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저 이별이라는 노래는 솜뭉치들에게 커버송으로 들려줬던 노래였기에 왠지 감회가 새로웠다.

“자, 그러면 우리 잠깐 나눠서 노래 부를 사람, 연주할 사람 따로 연습을 좀 해볼까요?”

하준 형이 쾌활한 어조로 말하자 모두가 말 잘 듣는 아이들처럼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얘들아, 너희가 평소에도 그랬으면 하준 형의 한숨이 절반으로 줄었을 텐데….

차마 말로 하지 못한 이야기를 삼키며 하준 형을 바라보자 다 이해한다는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러다 저 형이 득도해서 승천할까 봐 조금 무서워졌다.

바이올린을 들고 조율하는 찬영이 모습이 꽤 진지했고, 그 옆에서 가져온 기타 줄을 만지며 조율하는 찬이와 세빈이 얼굴에도 장난기가 사라져 있었다.

기영이와 앉아 스태프가 가져다준 악보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영빈 형의 얼굴은 한껏 풀어져서 녹을 것 같았다.

영빈 형이 어린애들을 귀여워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저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다.

“영빈아, 이리 와봐.”

“아, 잠깐만.”

나와 영빈 형이 나희와 세영이, 둘의 노래를 듣고 가르쳐 주기로 했기에 기영이는 하준 형이 챙겨야 했다.

나중에 연주에 들어갈 때는 같이 치겠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맞춰보고 연습하는 게 필요하니까.

기영이가 영빈 형을 마음에 들어 했기에 낯설어하면 어떡하나 했는데, 하준 형은 어떤 마법을 부린 건지 활짝 웃는 기영이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동글동글한 바가지형으로 자른 기영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준이 형의 손길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우리가 누구를 가르칠만한 실력은 안 되지만, 그래도 나희랑 세영이 보다 조금 더 많이 연습을 했으니까 알려줄 수 있는 것들이 있을 거야.”

“네! 많이 알려주세요.”

눈동자를 빛내는 아이들의 모습에 영빈 형의 입가가 한없이 허물어졌다.

아이들이 한없이 어렵기만 했던 나조차도 웃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그 후 이어진 연주와 노래 모두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시간이었다.

천재 소리를 들을 만큼 아이들의 피아노와 바이올린 연주 솜씨가 뛰어났고, 아이들의 노래도 생각보다 꽤 많이 연습한 티가 났다.

즐겁게 촬영한 시간이 끝나고 헤어질 시간이 되자, 그사이 정이 듬뿍 든 건지 기영이와 찬영이는 울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에 찬이와 세빈이도 눈물을 찔끔 흘리며 아이들을 꼭 끌어안아 주었다.

한편, 준이 형은 나희와 세영이에게 언제든 아이돌에 대해 궁금한 점이나 고민이 생기면 연락하라며 연락처를 적어주었다.

“다음에 다 같이 맛있는 거 먹자.”

“꼭이요!”

“또 봐요, 형아들!”

아쉬움을 뒤로하고 PD님과 스태프분들께도 감사 인사를 나눈 우리는 활짝 웃으며 배웅해 주는 PD님 모습에 안도했다.

적어도 우리가 촬영을 망치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돌아오는 차 안에서 PD님이 그토록 인자한 모습을 보여준 이유를 우진 형에게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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