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141)화 (141/456)

141. 나로 말할 것 같으면(4)

사각거리는 소리에 적응하고, 이 소리가 조금은 좋아졌을 때. 문득 떠오른 생각을 노트에 적어 넣었다.

[내 발버둥을 가엽다는 듯 보는 네게,

나는 가련한 사냥감이 되어 자비를 빌어

차라리 내 숨을 끝장내줘,

목줄을 벗는 법도 잊은 채 울부짖는 내가 가엽다면.]

그러다 문득 지금 내 나이와 함께 멤버들의 나이를 떠올렸다.

서른에 가깝던 내가 이런 노래를 부른다면 모를까 18살의 나와 16살의 세빈이가 이런 노래를 부르면 어울리기나 할까.

어우, 그건 좀 오반데.

잠시 상상했던 나는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황급히 버렸다.

처음부터 성장이라는 대전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가자고 했던 게, 멤버들의 성장과 함께 그룹의 성장을 같이 끌어올리자는 마음 때문이었으니까.

무리해서 굳이 멤버들과 어울리지 않는 노래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언젠가 우리에게도 가슴 시린 이야기가 필요해질 때, 감정에 휘둘려 바보 같은 사람이 되어버리는 순간이 올 때를 위해.

생각난 글을 모아두다 보면 언젠가는 쓸 데가 있다는 에단 쌤의 조언을 떠올리며 일단 내버려 두기로 했다.

“티저 우리도 볼까?”

“…그럴까?”

오늘 공개될 폭풍전야의 뮤직비디오의 티저는 사실 우리도 보질 못했다.

최종 버전의 뮤직비디오는 우리도 모두 참여한 자리에서 확인했지만, 티저는 확인할 틈이 없었다.

일주일 남은 컴백을 위해 연습량은 더 늘어났고, 개인 작업은 전부 나중으로 미뤄졌다.

최종 버전의 뮤직비디오를 봤던 우리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놀랐었다.

영상 편집의 위대함을 느꼈달까?

I'm OK 때는 찍으면서 최종 영상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상상했던 것 이상이어서 더 신기했다.

영빈 형의 발언에 거실에 각자 편한 자세로 널브러져서 쉬고 있던 멤버들이 슬금슬금 준이 형 옆으로 모였다.

입 밖으로 말은 안 꺼냈을 뿐, 다들 무어라 댓글이 달릴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었다.

다만, 회사에서 우리가 악플에 스트레스받을 것을 우려해 처음부터 기사나 사람들의 반응을 보지 말라고 여러 번 강조했기에 늘 호기심을 눌렀을 뿐.

어쩌면 이 중에 찬이라든가, 힘찬이라든가, 최힘찬은 찾아봤을지도 모르겠다.

“회사엔 비밀이다? 팀장님한테 혼날 수도 있어.”

“흐흐, 당연하죠.”

“특히 찬이랑 세빈이.”

“이렇게 신뢰가 무너지고….”

“니가 양심이 있으면 지난 삶을 되새겨보고 말해라.”

“하하, 양심이 뭐죠?”

콕 집어서 둘에게 주의를 주는 준이 형의 모습에 나도, 경환 형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 둘이 사실 제일 걱정이긴 하지.

한숨을 푹 내쉰 준이 형은 영빈 형에게 밥 먹을 때 쓰던 밥상을 가져오라고 부탁했고, 노트북은 어느새 우리 공식 채널을 띄우고 있었다.

준이 형의 옆에는 영빈 형이 앉았고, 영빈 형의 무릎에는 세빈이가 앉아있었다.

경환 형은 찬이를 포박하듯 뒤에서 붙잡고 앉아있었고, 나는 준이 형 등에 기대서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빈이나 찬이가 마우스를 못 건드리게 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빈이 형과 경환 형이 내보이는 사이, 준이 형이 영상의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전체적으로 어두컴컴한 분위기에서 흘러간 영상은 영화의 예고편 같은 느낌을 줘서 지켜보는 동안 우리 중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티저 영상에서는 폭풍전야의 노래가 배경음처럼 흘러나오고 있었고, 우리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최대한 감정을 끌어올리고자 우리가 뭐라고 했었는지는 솜뭉치들이 모르는 게 가장 좋을 테니까.

저 모래사장에서 내가 외친 말을 솜뭉치들이 알면… 어휴, 안되지.

“워… 이게 이렇게 되네.”

“저거 진짜 바다에 빠진 거였어?”

“응. 우리 둘 다 수영할 줄 알기도 했고, 안전 요원도 대기 중이었으니까.”

단체로 움직여서 찍는 신들도 있었지만, 각자 촬영하는 파트가 꽤 많았다.

“아, 그럼 이 장면이 그… 거기랑 연결되겠네?”

“그럴 듯? 여기랑 저기랑 연결된 거 아냐?”

멤버들은 각자 촬영했던 장면과 먼저 봤었던 뮤직비디오를 떠올리며 화면의 여기저기를 콕콕 집어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하준 형은 들떠있는 동생들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스크롤을 천천히 내렸다.

티저 영상의 조회 수도 좋아요의 수도 빠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그보다 더 궁금했던 댓글을 앞에 두고 준이 형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잠깐만 보고 자는 거다?”

“네!”

“당연하져. 내일도 빡세게 움직여야 하니까.”

“진짜 대답은 늘 이렇게 잘하지.”

옆으로 슬쩍 바라본 준이 형의 얼굴에도 호기심이 잔뜩 드러나 있었지만, 정작 스스로는 모르는 것 같아서 조금 웃었다.

* * *

이구역솜뭉치

- 뭐야..... 얘들아, 왜 영화 찍고 왔어...?

안괜찮아

- 미쳤나봐ㅠㅠㅠㅠㅠㅠㅠ 이게 티저라고? 온엔터 지갑 괜찮아?

IM fluffy

- I think it's a pity that you still don't know ‘Unavel’.

[내 생각엔 아직도 ‘Unavel’을 모른다는 건 불쌍한 일인 것 같아.]

John

- You know some songs can only be felt in your heart? …this song is a path for me..

[어떤 노래들은 마음속으로만 느낄 수 있다는 거 알지? ...이 노래는 나에게 하나의 길이야.]

회개합니다

- 우리 애들을 의심한 나약한 나 자신을 매우 친다ㅠ 늘 상상 이상이야... 짜릿해.....

満月

- ここはどこ?何番目の地球だ?どうしてフルバージョンがまだないの!

[여긴 어디야? 몇 번째 지구지? 왜 풀버전이 아직도 없어!]

짜란다짜란다

- 풀버전 주세요.... 제가 숨넘어갈 것 같으니까 빨리..ㅠ

세빈아 누나야

- 우심방 좌심실이 요동쳐서 지금 심정지 올 것 같은 데 그래서 뮤비 풀버전은 어디쯤 와있죠?ㅠㅠㅠㅠ

쓱 하고 몇 개의 댓글을 확인한 우리는 입꼬리가 춤추는 것을 막지 못했다.

“큼… 생각보다 더 좋아하는 것 같지?”

“댓글은 여기까지만 보는 게 좋을 거 같다.”

“형, 입꼬리 내리고 말해요…. 아주 귀에 걸리겠네.”

“세빈아, 그렇게 남 말할 때가 아냐.”

지금은 당장 공개된 상황이라 기다리고 있던 우리 솜뭉치들이 댓글을 달아서 좋은 이야기만 있는 걸지도 모른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누군가는 우리에게 악의에 찬 말들을 던질지도 모르고.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간의 고생은 생각도 안 날 만큼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나도 멤버들도 두근거리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였다.

“자자, 늦었다.”

“아, 쪼금만 더 보고 자면 안 돼요?”

“응. 안돼. 내일도 엄청 많이 움직여야 하는데 지금 안자면 내일 피곤해서 못 버텨.”

“힝….”

세빈이는 얼굴에서 열이 날 정도로 기뻤는지 웬일로 하준 형에게 칭얼거리고 있었다.

이제 막 시작하는 우리가 마음이 풀어질까 염려한 탓인지, 준이 형은 단호한 몸짓으로 한 명 한 명 일으켜서 방으로 밀어 넣었다.

“잘 자, 얘들아.”

“굿잠!”

“아침에 제발 재깍재깍 일어나고.”

“빠잉~.”

“잘 자요!”

축 늘어진 세빈이의 뒷모습이 조금 안쓰럽긴 했지만, 준이 형 말이 틀린 게 아니라 멤버들에게도 잘 자라고 인사를 건넸다.

이불 속에서 꼼지락대고 있던 포잉은 평소보다 들뜬 얼굴로 들어온 나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왜 웃어?’

‘그렇게 좋나 싶어서.’

‘좋지, 그럼. 내 편이 이렇게 많다는 건데.’

‘그래. 계약자야, 쑥쑥 크고 사랑 많이 받자.’

‘웬일로 포잉이 좋게 말하지? 포잉 아닌 거 아냐?’

‘너는 좋은 말을 해줘도!’

모처럼 포잉과 장난치다 잠든 그 날밤은 다행히 꿈도 꾸지 않고 푹 잘 수 있었다.

* * *

다음날 회사에 도착한 우리를 반긴 건 뜻밖의 인물이었다.

“얘들아, 오랜만이다!”

“엇, 민수 형님!”

“그래, 찬이는 여전하구나.”

“민수 형만 보이고 나는 안 보이냐?”

“어, 영진 형님이다!”

“오오냐.”

활짝 웃으면서 손을 흔드는 개그맨 나민수와 이영진이었다.

나민수는 무사이에서 같이 경연하느라 연이 있었고, 이영진은 미궁 탈출에서 함께 했던 사람이었다.

그 후로 가끔 연락은 드려도 만난 적은 없었기에 갑자기 회사에서 얼굴을 마주하게 되니 반가움보다 의아함이 더 컸다.

“자자,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들어가서 이야기 나누시죠.”

한 발 뒤에 있던 소현 팀장님이 나서서 사람들을 이끌고 회의실로 들어갈 때까지 우리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지울 수 없었다.

“우리가 왜 여기 있는지 궁금하지?”

“아, 넵…. 혹시 저희 회사로 오시는 거예요?”

“하하, 그건 아니고. 왜 옮겼으면 좋겠냐?”

“에이, 형님들이 있으면 든든하고 좋아서 그러죠.”

촬영 내내 우리를 잘 챙겨주던 친절한 사람들이라 반가운 마음도 컸지만, 회사에서 볼 일은 사실 거의 없었다.

이 사람들이 우리 회사로 이직하는 거면 모를까.

하지만 내 기억이 맞다면 ON 엔터가 희극인들을 회사에 모으는 일은 없었다.

무언가 또 바뀐 걸까?

“그건 내가 설명할게.”

다행히 소현 팀장님이 적절히 대화를 끊어주셨고, 우리는 자세를 바로 했다.

“아… 그러니까 회사 대표로 회의차 오신 거였네요. 에이, 저희 보고 싶어서 오신 줄 알았잖아요!”

“이놈아, 이 늙고 병든 형이 와야겠냐? 너희가 오면 내가 어? 소고기도 사주고!”

“저 형 또 저런다, 얘들아, 영진 형이 말하는 건 신경 안 써도 된다.”

이영진과 나민수는 같은 소속사 소속이었고, 그쪽에는 희극인들만 소속되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번에 소속사 차원에서 초록우산 재단과 함께 아이들을 돕기 위한 캠페인을 기획하고 있다는 말로 천천히 설명이 시작되었다.

ON 엔터의 배우들과 우리 언래블도 동참해 줄 수 있는지 서신을 통해 문의했었다고.

우리 대표님은 회사 차원에서는 함께 하는 건 가능하지만 배우들과 우리의 참여는 당사자의 허락이 필요하다고 선을 그으셨다고 했다.

그래서 직접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는 쪽이 더 좋을 것 같다며 우리와도 접점이 있는 두 분이 함께 오셨다고.

두 분은 우리에게 컴백 일정을 고려하고 잘 생각한 후에 답을 해달라고 했다.

한 번만 하고 끝날 캠페인이 아니기 때문에 이번에 아니더라도 언제든 좋은 마음이 있으면 함께 하자고.

그 말을 남기고 다른 배우분들과도 이야기를 나눠보고 오겠다며 자리를 피해주셨다.

“저희야 좋은 일 할 수 있는 거면 좋죠. 근데 저희가 도움이 될까요?”

“초록우산이면 어린 친구들 돕는 곳 맞죠? 저도 찬성.”

“맞아, 다 좋은데 저희가 뭘 할 수 있어요?”

우리와 팀장님만 남게 되자 멤버들은 한마디씩 보태기 시작했고, 그런 모습을 주의 깊게 관찰하던 팀장님이 입을 열었다.

“이번에 화연대 의류학과 학생들이 주최하는 패션쇼와 협력하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오간 모양이야. 너희에게는 거기 모델을 해줄 수 있냐는 이야기가 있었어. 이런 기부 행사 같은 것들은 인지도나 친밀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니까. ”

“모델이요? 저희가요?”

“그게 하루 이틀 만에 가능한 일이 아니지 않아요?”

“너희한테 전문 모델들의 워킹을 기대하는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다른 건 둘째치고 모델이라는 말에 기겁한 멤버들이 걱정을 쏟아냈다.

그 모습에 웃으면서 손사래를 치는 팀장님의 얼굴 위로 다른 근심 걱정은 보이지 않았기에, 멤버들은 하나씩 궁금한 점들을 늘어놓았다.

“한정된 예산으로 무대를 꾸미고 기부로 연결될 수 있도록 해야 해서 다양한 방법을 고민 중인 모양이야. 여러 이야기가 오가는 중인데 아직 조금 더 얘기를 해봐야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돕고 싶어요.”

“조금이라도 손을 보탤 수 있다면 좋죠.”

“하지만 컴백 일정에 지장이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솔직히 남을 돕는 것도 좋지만 전 컴백이 더 중요하니까.”

우리끼리 있는 자리였기에 편한 이야기가 오고 갔다.

힘든 사람을 돕는 건 좋지만, 내 몫도 못 하면서 남을 돕고 싶지 않다는 게 멤버들과 내 생각이었다.

이기적이라고 해도 별수 없었다.

난 내 멤버들과 내 팬들이 더 중요하니까.

다행히 내가 무어라 말하기 전에 준이 형이 먼저 이야기했고, 팀장님도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확정되면 다시 이야기해줄게. 일단 너희는 연습 가야지.”

“넵.”

얼떨결에 회의실까지 끌려왔던 우리가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자, 먼저 나서서 회의실 문을 열었던 팀장님이 갑자기 생각난 듯 고개를 돌렸다.

“아 참, 티저는 어땠어?”

“완전 쩔었어요!”

“야!”

팀장님의 낚시에 역시나 찬이가 파닥파닥 낚여버렸다. 하하….

뻣뻣하게 굳어있는 우리를 향해 ‘봤구나.’라고 중얼거리던 팀장님이 짓궂게 웃더니 손을 흔들고 사무실 쪽으로 사라졌다.

“어느 입이 이렇게 가볍냐….”

“아니, 너무 자연스럽게 물어보셔가지고… 잘모태써요.”

경환 형이 음산한 목소리로 묻자 찔끔한 찬이가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다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부디 팀장님의 응징이 없길 기도하자.”

“팀장님이 그냥 넘어가 준 적이 있었던가요….”

“…조용해.”

큰 잘못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종종 하지 말라는 것들을 어기는 경우에는 연습의 강도나 운동의 강도가 올라가거나, 정말 맛없는 건강 주스 같은 것들을 선물이라고 들고 오셔서 곤란했다.

부디 제발 무사히 지나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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