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나로 말할 것 같으면(3)
글씨체 연습은 매일 한 시간씩 숙소 가기 직전에 하기로 했다.
더 많은 시간을 배정하기엔 글씨체 교정 외에도 컴백 준비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았으니까.
“그냥 집 가서 하면 안 됨?”
“집에서는 쉬어야 된다. 집에 일 가져가는 거 아냐.”
“역시 리다님이었다.”
숙소에서 편한 상태로 해도 되는 거 아니냐고 경환 형이 되물었지만, 준이 형은 단호했다.
저 멘트 예전에 누나가 했던 말이랑 똑같네. 설마 이 형도 인생 2회차는 아니겠지? 하하.
그것 외에도 타이틀곡 두 개의 안무를 외우고 연습하고, 곡을 연습하는 것만 해도 하루가 바삐 지나갔다.
우리가 바쁘게 지내는 만큼 회사 사람들도 바쁘게 움직였고, 드디어 컴백 날짜가 정해졌다.
8월 25일, 금요일이었다.
“처음 삼성홀 생각나?”
“나 진짜… 그날 우진 형이 말할 때 멍 때렸잖아.”
“우리 중에 누구도 제정신 아니었던 듯.”
이제는 제법 읽을 수 있는 글자를 쓰고 있는 우리 3명(나, 경환 형, 찬이)은 꾹꾹 눌러쓰느라 저린 팔을 주물렀다.
손에 힘을 좀 빼고 쓰라는데 그게 말처럼 쉬워야 말이지.
“폭풍 티저 영상 오늘 공개되고, 내일은 곡 리스트. 어제가 스틸컷이었지?”
“이상하게 블루스퀘어 때는 아침에 눈 뜨니까 메이크업 받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때는 우리가 제정신이 아니었잖아. 물론 지금도 좀 제정신 아닌 것 같긴 하다만.”
찬이는 자기도 모르게 연필 뒷부분을 씹어대다 내가 노려보자 화들짝 놀라 연필을 내려놨다.
“저거는 어떻게 해야 입에 못 먹는 걸 안 넣을까 몰라.”
“그래도 이제 빨대는 안 씹는다.”
“그래, 그건 잘했다. 연필도 씹지 마. 손도 물어뜯지 말고.”
“맞아. 그러니까 이거나 발라요.”
옆에서 핸드크림을 바르던 세빈이가 모두의 손에 핸드크림을 짜줬다.
혼자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빠진 준이 형, 넋 놓고 있던 찬이, 경환 형, 편지지를 고르고 있는 영빈 형, 그리고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던 나까지.
피부 좋을 때 관리하라며 우리한테 잔소리하는 게 요새 세빈이 낙이라고.
무언가 형들에게 잔소리를 할 수 있다는 게 재밌다고 하는데 차마 뭐라 할 수 없어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우리 중에 피부에 무언가를 제대로 챙겨 바르는 건 준이 형이나 세빈이 정도였으니까.
그나마 준이 형이 같은 방인 찬이 얼굴에도 챙겨 발라주고 있고, 영빈 형도 세빈이가 자꾸 얼굴에 뭘 바르라고 한다며 울상을 짓기도 했다.
“진짜 형들은 축복받은 거야. 얼굴에 트러블 안 나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아야 한다니까.”
“너도 뭐 잘 안 나잖아.”
“전 잠 못 자고 피곤하면 올라와요.”
요새 기타를 배우고 있다며 손에 물집 잡혀서 끙끙대던 것과는 또 달리 연필을 단정하게 쥔 손가락이 그 심성처럼 곧게 뻗어있었다.
잘 크고 있네, 우리 막둥이.
“얘들아, 1시다. 집에 가자.”
“아, 벌써요?”
열심히 공책의 한 페이지를 빼곡하게 채워가던 우리는 우진 형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일주일 정도 매일 꾸준히 연습한 덕에 단어나 짧은 문장으로 채워진 공책이 세 권째였다.
처음에는 하루에 서너 장 쓰는 것도 힘들었는데, 하다 보니 이것도 꽤 재밌는 것 같았다.
머리를 비우고 아무 생각 없이 단조로운 작업에 집중하는 게 이렇게 생각지 못한 효과를 가지고 올 줄은 몰랐는데.
찬이는 적어도 공책에 한 글자씩 채워 넣을 때만큼은 차분해졌다.
경환 형은 단어만 쓰는 건 지겹다며 하루의 소감을 적어 넣다가 개운해졌다고 했고.
나는 그냥 재밌었다.
항상 찌그러지던 ‘ㅇ’이 원만한 곡선을 그리는 게 눈에 보이니까.
“고작 일주일 만에 글자가 볼만해졌네. 집념이 강한 건지, 영상 효과가 좋은 건지.”
허탈하게 중얼거리는 우진 형에게 기쁜 얼굴로 공책을 불쑥 내밀며 찬이가 물었다.
“이제 해석 가능하겠죠?”
“무슨 말인지 알아볼 수 있는 게 어디냐, 진짜.”
거짓말로도 잘 쓴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이전처럼 급하게 써서 휘갈긴 것 같은 글자들은 아니었다.
앞으로 조금 더 시간을 들여 연습하면 더 보기 좋아질 것 같았다.
“나중에 캘리그래피 같은 것도 배워보고 싶다.”
“이번 활동 끝나면 한번 시도해봐. 뭐든 배우는 건 좋지.”
우진 형의 응원을 들으며 괜히 기분이 좋아져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언가를 배우는 데에 내 자신이 생각보다 흥미를 가진 듯했다.
이렇게 나 자신을 새삼스레 깨닫는 것도 즐거웠다.
멤버들도 나도 한결 가벼워진 손길로 방금까지 꾹꾹 눌러쓴 공책과 흩어진 필기구, 지우개를 챙겼다.
이제 컴백까지는 일주일 정도 남았다.
* * *
지혜는 영빈의 영상을 다시 돌려보며 자정에 공개될 티저 영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푸른빛이 도는 창백한 느낌의 무대에 영빈이 느린 걸음으로 등장한다.
단정한 흰 셔츠에 검은색 진을 입은 영빈의 얼굴이 유독 하얗게 보였다.
허밍으로 시작된 멜로디. 반주도 없는 공간에서 영빈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온화한 느낌의 목소리가 음률을 띠자 분위기가 순식간에 달라졌다.
차가워 보이던 공간이 얼음 녹듯 사르르 녹아버리는 것 같았다.
“간신히 힘을 내서, 그렇게 하루를 버텨내고.
그렇게 쌓인 하루가 벌써 몇 해가 되었죠.”
버틴다.
그 말만큼 지금 지혜의 일상을 나타내기에 적합한 말이 있을까.
처음 대학에 진학할 때만 해도 원대한 포부까지는 아니더라도 뚜렷한 꿈이 있었다.
병으로 반려묘를 가슴에 묻어야 했던 날부터 조금씩 다짐했던 수의사의 꿈은 생각보다 녹록지 않았다.
각오는 생각보다 견고하지 못했고, 충만했던 의지도 빛이 바래 가는 것 같았다.
실습을 거듭할수록 마음속 무언가가 마모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자신을 다그치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게 고작이었다.
문득 모니터 옆에 붙어 있는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무지개다리 너머에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을 반려묘 에디였다.
그때쯤 흘러나온 영빈의 목소리가 울렁이는 지혜의 심장을 천천히 다독이는 것 같았다.
“긴 시간 바스러진 감정의 조각이 몇 개나 남았던가,
어느새 눈물도 말라 흐르지 않는 난 정말 괜찮은 걸까.
수 없는 질문과 들리지 않는 답이 나를 괴롭게 만들어요.”
문득 흘러나오는 가사처럼 눈물이 말라버린 건가 싶어 눈가를 더듬었다.
품에 안겨 만족스러운 듯 골골거리던 에디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고, 굳게 다물렸던 입가에도 희미하지만 미소가 그려졌다.
힘들긴 했지만, 아직은 괜찮은 것 같았다.
“답은 알 수 없지만, 그냥 해보기로 해요.
늘 성공할 수는 없지만, 늘 실패했던 것도 아니니까.
오늘은 다른 생각 말고 그저 하고 싶은 것을 하기로 해요.”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던 팔다리에 조금 기운이 도는 것 같았다.
지치고 힘들수록 좋아하는 것들에서 얻는 위안이 절실했다. 우연히 한 프로그램에서 신청자들을 위해 노래하는 그들을 본 것은 행운이었다.
누군가의 팬이 되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던 지혜는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하나씩 익히고 있었다.
노래를 듣고, 뮤직비디오를 보고, 사진과 기사를 찾아보고.
처음에는 SNS에서 본 직캠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몰라서 검색 사이트에서 찾아보기도 했다.
줄임말들도 너무 어려웠지만 자주 보다 보니 익숙해졌다.
그리고 어느새 카메라 렌즈 너머로 솜뭉치라고 자신을 부르는 언래블의 모습이 흐뭇해질 만큼 푹 빠져버렸다.
일상의 위로와 위안이, 웃음과 눈물이 되어 주는 존재는 ‘에디’ 이후로 처음이어서 지혜는 처음으로 편지를 써보기로 했다.
친구들과도 편지보다 핸드폰으로 메시지를 주고받는 게 더 익숙한 시대에 살고 있었지만, 가끔은 이런 것도 좋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충동적으로 편지지를 사 들고 와버렸다.
무슨 말을 적어야 할까 고민하느라 연한 개나리색의 편지지에 아직 한 줄도 적지 못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마음을 담아 보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마음 가는 대로 해도 괜찮다고 속삭이는 영빈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고 있었다.
오늘 하루를 더 버틸 힘을 얻었다.
* * *
영상의 시작은 어둑한 바다 위였다.
어둠 속에 희미하게 일렁이는 파도와 그런 파도가 무너지면서 드러나는 하얀 거품이 곧 다가올 폭풍을 경고하고 있었다.
화면 위에 날카로운 글씨체로 ‘폭풍전야(暴風前夜)’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파도 거품처럼 녹아내렸다.
화면은 어느새 자욱한 안개로 덮인 섬 안에서 불안한 얼굴로 사방을 바라보는 세빈을 잡고 있었다.
얼굴에 선명한 말라붙은 눈물 자국이 안쓰러웠다.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옷차림을 한 세빈의 시선을 따라 화면이 돌아가자, 그런 세빈의 손을 꾹 잡고 있는 굳은 얼굴의 영빈이 있었다.
다른 손에 쥔 손전등을 세빈에게 넘긴 영빈은 주머니를 뒤져 반창고 하나를 꺼냈다.
영빈이 뛰다 긁힌 건지 뺨에 상처가 생긴 세빈의 얼굴에 캐릭터가 그려진 반창고를 붙이고 꾹 누르자, 따가웠던지 세빈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그 모습에 애써 웃는 영빈, 무언가 말하듯 입술을 벙긋거리는 세빈.
세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영빈은 뒤를 돌아 조금 먼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영빈의 시선에 담긴 것은 선명한 분노였다.
화면은 조금씩 영빈과 세빈에게서 멀어지며 깜박거렸다.
다시 화면이 선명해지자 지친 기색이 역력한 하준이 경환을 부축해서 걷는 모습이 나타났다.
어둑한 화면에서는 이제 비까지 내리고 있었다.
휘청거리는 경환의 얼굴은 희게 질려있었고, 하준은 몇 번이나 경환의 몸을 두드리며 무어라 소리쳤다.
겨우 경환을 끌고 동굴처럼 보이는 곳까지 도착한 하준의 얼굴은 매우 지쳐있었다.
잠든 것처럼 눈을 감고 있었던 경환의 입술이 무어라 중얼거리자, 하준이 화가 난 듯 옆에 있던 돌멩이를 동굴 밖으로 걷어찼다.
들이치는 비는 피할 수 있었지만, 더 이상 앞으로 나가는 건 무리일 것 같았다.
그때 하준의 시선이 갑자기 동굴 안쪽으로 던져졌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동굴 안쪽에서 갑자기 희미한 빛이 어른거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하준은 벽에 기대 눈을 감고 있던 경환과 동굴 안쪽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다 고민에 빠졌다.
신호가 제대로 잡히지 않는 것처럼 화면이 다시 지지직거리더니 낡은 배 위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검은 로브의 누군가를 보였다.
해변의 배 위에서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이 한없이 가벼운 무언가를 쥔 것처럼 누군가의 팔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멀리서 지환이 소리 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무어라 마구 외치며 달려오다 모래사장에서 넘어진 지환은 고개를 마구 내저으며 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모습을 비웃기라도 하듯 로브의 사람은 잡고 있던 누군가의 손목을 놔버렸고, 지환은 굳어버린 것처럼 손을 뻗은 그 모습 그대로 멈춰버렸다.
그렇게 의식을 잃은 듯 늘어져 있던 힘찬은 검은 로브의 사람에게 붙잡혀 바닷속으로 잡아먹혀들어갔다.
급히 다시 배를 향해 뛰어가던 지환을 비웃듯, 어느 순간 배도, 검은 로브의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힘찬을 삼킨 바다 위에 몇 번의 물거품이 올라왔을 뿐.
힘껏 달려 겨우 바다에 닿은 지환은 그대로 바다에 뛰어들었다.
다시 깜박이던 화면이 6개로 나뉘더니, 마치 CCTV로 지켜보는 것처럼 한 화면당 한 명의 멤버를 보여주다 점차 새까맣게 물들어갔다.
그리고 화면에 나타난 건 [0825, 20:00]라는 일련의 숫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