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나로 말할 것 같으면(1)
세트장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벽, 그리고 미로처럼 꾸며져 있는 한쪽의 모습에 신기한 듯 기웃거리던 멤버들은 컨셉 포토 촬영에 임하면서부터 바짝 긴장하는 것 같았다.
언제, 어떻게 사고가 발생할지 알 수 없다는 걸 그동안 몸소 경험한 터라, 스스로 조심하자고 준이 형과 영빈 형이 돌아가면서 세뇌시켜둔 덕이었다.
두 맏형은 우리가 어지간히 못 미더웠는지, 절대 사고를 일으키면 안 된다며 세트장에서 절대 뛰지 말 것, 아무 데나 기웃거리지 말 것, 입조심할 것을 반복했다.
내가 봐도 우리 애들이 조금 걱정되기는 하지만, 난 억울했다.
억울한 마음에 포잉에게 툴툴거려봤지만 포잉도 내 편은 아니었다.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귀를 긁어대길래 얄미운 앞발을 콕콕콕 찔러서 복수를 해줬다.
내가 나서서 사고 친 적은 없는걸!
그중에서도 경환 형은 I'm OK 뮤직비디오 촬영 당시 자잘한 사고가 많았고, 출연자분 중 한 분이 다치는 사고까지 발생했어서 더 긴장하고 있었다.
컨셉 포토 촬영이 무사히 끝나고 긴장이 조금 풀린 건지, 이후 뮤직비디오 촬영을 위해 다시 방문했을 때는 이전보다 한결 세트장을 익숙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미 며칠째 보고 있는 풍경이라 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촬영진분들과 다른 스태프분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서 대기실에만 있던 우리는, 결국 답답함을 달래기 위해 촬영장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친해진 몇몇 스태프분들이 장비에 대해 설명도 해주시고, 어떻게 후작업이 진행될지도 이야기해 주셔서, 조심스럽게 기웃대던 처음과 다르게 우리의 활동 반경이 점점 넓어졌다.
경환 형이랑 찬이는 언제 촬영 감독님이랑 친해졌는지, 감독님이 스스럼없이 둘을 부르는 모습에 깜짝 놀라기도 했다.
그렇게 무사히 촬영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회사로 불려간 우리를 기다리는 건 에단 선생님과 가영 형이었다.
폭풍전야가 에단 쌤과 가영 형의 합작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번 녹음에는 가영 형이 오지 않아서 이대로 진행되나 했었다.
“형이 여기서 왜 나와….”
떨떠름한 내 얼굴을 보고 짐짓 서운하다는 듯 투덜거리는 가영 형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한가득했다.
피곤해질 것 같다는 예감에 구조 요청의 눈빛을 보냈지만, 에단 쌤은 크흠하는 헛기침과 함께 자리를 피해버리셨다.
선생님, 제가 제자라면서요…. 이렇게 절 버리시다니.
“최종 버전 나와서 쌤이랑 체크하려고 왔지. 지환이 너 이제 좀 컸다고 형들이랑 안 놀아주냐?”
“아아니, 무슨 만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놀아준다, 안 놀아준다 그래요.”
“형한테 팬이라고 좋다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연락도 안 하고!”
“단톡방에 식단 사진 올린 게 어젠데 무슨 소리예요!”
“율이랑만 놀고!”
형들이 우리 숙소 와서 놀아주고 간 게 한 달도 안 된 것 같은데 이 무슨….
“율이가 자기만 숙소 못 가봤다고 우리를 얼마나 갈군 줄 알아?”
“안 그래도 그날 바로 세비 형한테 연락 왔었는데, 형들이 얌전히 있다 갔냐고 묻던데요?”
“헐. 너 뭐라고 대답했어! 빨리 말해!”
“형 같으면 말하겠어요?”
뜨끔한 얼굴이 된 가영 형이 내 뒤를 쫓아다니며 무슨 얘기를 했는지 캐물었지만, 세비 형과의 돈독한 관계를 위해 노코멘트로 대응해 줬다.
우리가 해준 것도 없는데 언제나 발 벗고 나서주고 챙겨주는 새벽의 모든 형들이 고마웠지만, 그래도 세비 형이랑은 척지고 싶지 않다.
준이 형만큼 무서운 사람이 세비 형인걸.
다행히 폭풍전야(暴風前夜)도 Confusion도 최종 체크까지 무사히 마쳤고, 내일은 보너스 트랙의 최종 점검을 진행하기로 했다.
회사에서는 이미 앨범에 대한 떡밥을 조금씩 풀고 있었지만, 아직 앨범에 대해 확정적인 기사나 공지는 올리지 않았다고 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홍보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는 내가 무어라 말하기도 조심스러웠기에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다.
한편으로는 이전부터 우리 활동을 조금씩 촬영하길래 이게 다 어디에 쓰일까 했는데, 이렇게 홍보와 적절히 섞어가며 공개하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다.
그걸 그렇게 엮을 수도 있구나, 그런 느낌?
“아, 맞다. 전에 같이 하자고 했던 그 프로그램은 어떻게 됐어요?”
일전 새벽 형들이 왔을 때 이야기됐었던 섬으로의 여행 프로그램은 데미갓과 제논 엔터의 폭탄 덕분에 론칭이 미뤄진다는 이야기를 전해 받았었다.
대중들에게 오픈하지는 않았지만, 망둥이 때문에 내가 다친 것도, 그 망둥이가 미쳐서 날뛰다 우리 숙소에 침입한 것도 방송가의 어지간한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일부 연예계에 관심 없는 사람들은 그렇다 쳐도, 알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 아는 일이라, 우리를 새 프로에 넣는 것 자체를 고심한다고 전해 들었다.
회사에서도 우리가 일단은 새 앨범에 집중하면서 상담받는 쪽을 더 권하기도 했고.
현직 아이돌 멤버의 폭행과 가택침입, 소속사의 횡령 문제는 꽤 큰 기삿거리라 우리는 외부 활동을 최대한 줄이고 우리 앨범에만 정신을 쏟고 있었다.
데미갓과 함께 출연했던 ‘무사이’는 데미갓이 나온 씬이 모조리 편집돼서 방송되기도 했다.
실제로 방송분을 모니터링했던 우리들은 편집된 내용을 보면서 신기해하기도 했다.
어떻게 그렇게 절묘하게 다 잘랐는지 방송 중에는 데미갓 멤버, 특히나 그 둘의 목소리와 모습이 일절 보이지 않았다.
데미갓은 간신히 사연 신청자들과의 무대에만 나왔는데, 그나마도 신청자들과 문제가 없는 멤버들 모습만 나왔다.
이 무대마저도 날아갈 뻔했지만 사연 신청자들의 모습까지 잘라내는 건 프로그램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셈이니 이 정도 선에서 타협한 것 같다는 이야기를 팀장님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아무래도 프로그램 자체가 좀 바뀔 것 같더라고. PD님이 신세 한탄을 하더라. 나중에 다른 소식 들으면 나도 알려줄게.”
“그놈들은 참… 없어져서도 이렇게 민폐네요.”
“애당초 그런 놈들을 데뷔시킨 게 미친 짓이야.”
냉소적인 얼굴로 제논 엔터를 욕하던 가영 형이 저 멀리 하준 형에게 손짓했다.
“아, 준아!”
“네, 형.”
“이리 와봐!”
우리 앞에서는 언제나 든든한 리더지만, 다른 형들 앞에선 우리처럼 순한 동생이 되는 준이 형. 이런 준이 형의 모습이 늘 새로웠다.
우리처럼 순한 동생이라는 부분에서 포잉은 코웃음을 쳤지만, 난 당당했다.
왜, 뭐? 나 정도면 아주 이상적인 동생이지.
갸웃거리면서 쪼르르 다가오는 준이 형 모습에 비실비실 흘러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삼키고 있는데, 그걸 또 봤는지 준이 형의 눈꼬리가 올라가는 것 같아 입을 꾹 다물었다.
“라디오 계속하고 있지?”
“네. 안 그래도 명준 형이 새벽은 게스트 출연 안 하냐고 작가 누나랑 얘기하던데.”
“어어. 안 그래도 몇 군데서 연락 왔는데 이왕이면 너 있는 게 우리도 편해서.”
한동안 쉬었던 라디오를 다시 출연하기 시작한 준이 형은, 이제는 명준 형이 사정이 있는 날 대신 라디오를 진행할 정도로 자기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게 바로 인맥?”
“인맥은 무슨. 아, 지환아. 시영 쌤이 찾는다.”
“…지환이 없어요.”
“되도 않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가봐.”
이제 좀 쉬나 했더니 곧바로 보컬 트레이너 쌤의 호출이라니.
괜히 형 옆에서 깐족거리다 더 크게 한 방 먹은 기분이었다.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두 형을 지나 보컬 연습실에 도착하자, 그 자리에는 누렇게 뜬 얼굴이 된 찬이와 세빈이가 있었다.
“어우, 꿈에 나올까 무섭네. 니네 얼굴이 왜 이래.”
“살려줘….”
“시영 쌤 오늘 기합이 너무 심하게 들어갔어요….”
이들의 모습이 내 미래라는 걸 직감한 순간 등 뒤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리고 그 순간 싸한 기분에 휩싸였다.
공포영화에서 등 뒤의 귀신이나 크리쳐를 왜 그림자로 표현하는지 몸소 깨닫게 되었다.
이거 너무 무서워….
“지환이 왔구나, 저번에 말한 건 고쳤지?”
“시, 시영 쌤. 살려주세요….”
중저음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렇게까지 무서울 수 있다는 걸 이렇게 깨닫게 되는 하루였다.
그렇게 시간은 또 쏜살같이 흘러서 한밤중이 되었다.
최근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고 촬영과 연습을 병행한 터라, 웬일로 오늘은 조금 일찍 자라고 팀장님이 등을 떠밀었다. 덕분에 1시에 모두가 씻고 거실 바닥에 들러붙을 수 있었다.
“내일 회의 때 무슨 얘기 한다고 했지?”
“홍보 관련된 거랑… 아, 우리 컴백 무대.”
“또 뭐 있지 않았어요?”
최근에 과하게 몸을 움직인 탓인지 다리가 붓는 찬이와 나는 쿠션을 산처럼 쌓아 다리를 올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세빈이가 찬이 다리 위에 발을 슬쩍 올렸다가 영빈 형한테 끌려갔다.
몸 푸는 건 방해하면 안 된다면서.
그렇게 얌전히 잡혀가나 했더니, 세빈이가 결국 영빈 형 다리를 베개 삼아 드러누웠다. 영빈 형은 이제는 체념한 얼굴이었다.
우리 애들은 왜 이렇게 뭉쳐있는 걸 좋아하지?
경환 형은 평소처럼 방바닥에 찹쌀떡처럼 찰싹 들러붙어 있었고, 준이 형은 허리에 쿠션을 받치고 벽에 기대 있었다.
아무래도 컴백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인지 다들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럴 때일수록 서로 의견을 모아야 한다는 준이 형 말에 따라 평소 같은 일상을 유지했다.
자기 전에 오늘 했던 일과 내일의 일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날그날 우리가 느꼈던 감정이나 고민을 다 같이 나누는 것.
오늘 최종 녹음본을 체크하면서 느낀 감정들, 타이틀곡 안무 중에 어떤 동작이 어떻게 힘들었는지, 뮤비 촬영 때는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 등… 각자가 하루 종일 가지고 있었던 감정들과 궁금한 것들을 가감 없이 풀어내며 서로의 행동이나 말을 오해하지 않도록.
처음에는 생각한 것과 전해진 의도가 달라져 종종 말다툼이 생기기도 했고, 괜히 말했다가 다툴 것 같다고 말을 아끼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이렇게 대화하는 게 익숙해져서 기절할 것 같은 상태가 아니면 꼭 이야기를 나누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잠시 대화가 끊기고 편안한 정적이 내려앉아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던 차에, 오늘 내내 조용했던 영빈 형이 입을 열었다.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해봤는데?”
“우리 이번 음원 공개되는 날, 솜뭉치들한테 손편지 써서 올리는 건 어떨까 싶어.”
“손편지요?”
영빈 형은 평소에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만큼 이렇게 의견을 말할 때 그 말에 담긴 생각의 깊이가 나와 비교되지 않을 만큼 깊었고.
준이 형은 영빈 형의 이런 모습이 지나치게 걱정이 많은 거라고 투덜거리긴 했지만.
“이번에 졸업식 무대 했던 날 기억나?”
“네. 그날 솜뭉치들 엄청 더웠을 텐데….”
그날 솜뭉치들이랑 제일 오랜 시간을 보냈던 나와 세빈이, 경환 형, 찬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영빈 형이 천천히 자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노래랑 무대로 보답하는 건 정말 가장 기본이라서 무언가 더 해줄 수 있는 게 뭘까 하고 고민을 해봤거든.”
이 말을 우리에게 전하기까지도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문득 새삼스럽게 내가 사랑한 언래블에서 든든한 기둥이 되어 주었던 영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의 언래블은 내게 달조차 뜨지 않은 날의 등대 같았다면, 지금의 언래블은 함께 노를 저어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배와 같았다.
“물질적인 무언가를 주기에는 너무 한정적이잖아. 다 같이 치킨이라도 뜯으면서 놀고 싶은데 사실 무리고.”
“그렇지.”
“적어도 우리가 얼마나 우리 팬들을 아끼고 있는지 가장 진심에 가깝게 보여줄 수 있는 게 손편지인 것 같더라고.”
조금 쑥스러워 보이는 영빈 형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세빈이가 손을 들고 외쳤다.
“전 좋아요!”
“편지 쓰는 건 나도 찬성. 내일 팀장님한테 말할게.”
“나도 좋은데 지환이는 큰일 났네?”
뜬금없이 나?
“나 왜?”
“네가 쓰면 솜뭉치들이 못 알아볼 거 아냐.”
“너만 하겠냐.”
또 실실 웃으면서 장난을 거는 찬이를 옆으로 쑥 밀어버리자 머리 위에서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지환아.”
“?”
“우리 환이, 글자 연습할까?”
“준이 형…?”
내 인생 첫 사인을 받아 갔던 최애님이 나를 바라보며 인자하게 웃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일부터 글자 연습까지 하게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