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지금 널 찾아가고 있어(5)
“저번 촬영이 꽤 만족스러워서 오늘도 기대하겠습니다.”
“저희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저번보다 한결 부드러워진 사진작가님의 멘트에 소현의 입꼬리가 한껏 올라가 환히 웃었다.
“사전에 고지해 주신 것보다 멤버들 개개인이 꽤 능숙하던데, 따로 연습시키셨나요?”
“아, 아뇨. 기본적인 표정 연기나 자세 정도에 강습을 받기는 했지만 연기 수업을 정규로 받진 않아요. 저희 애들이 많이 노력했나 봅니다.”
좀처럼 칭찬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에, 소현은 계약을 주도하면서도 몇 번이나 멤버들이 연기에 익숙지 않다는 말로 넌지시 멤버들의 상태를 전했다.
그런 애들이다 보니 작가님 정도는 돼야 자칫 무겁게만 느껴질 수도 있는 이 컨셉의 촬영을 잘 이끌어 주실 것 같다면서.
그렇게 열심히 미리 밑밥을 깔아둔 덕도 있겠지만, 솔직히 직접 보기에도 ‘열심히 노력했구나’라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모두가 많이 좋아졌다.
거기에 칭찬에 박하다는 사람이 자기 팀 애들을 칭찬하는데 어느 누가 싫어할까.
소현은 내심 아이들의 성장이 뿌듯해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온갖 소동이 다 있었지만 그래도 굳건히 버텨주고 있어서 늘 고마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함께 드는 아이들이었다.
상담이 시작되었지만 아직까지는 소현이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없었다.
아이들이 위험하다고 판단하거나 심각한 상황이 올 것 같은 경우에는 대처를 위해 내용을 공유하기로 했다. 하지만 상담 선생님은 처음부터 상담 내용이 외부 유출되는 점을 염려하여 내키지 않아 했다.
처음에는 내담자와의 상담을 외부에 공유할 수 없다는 입장이 강경했다. 하지만 아이들을 위해서 회사가 알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보호자와 당사자의 권리 위임장까지 만들어 설득한 결과 상담을 맡아주기로 했다.
몇 군데 다른 상담소와도 컨택이 진행되었지만, 소현이 먼저 이야기를 나눠보고 추천을 받기도 하면서 꽤 많은 곳이 걸러지고 난 후 겨우 찾아낸 곳이라 꼭 마음에 들었다.
아이들을 가장 잘 파악해야 할 자신이 그 내용을 알지 못하니 불안감도 있었지만, 알지 않아도 될 만큼 아이들이 심각하지 않다는 것으로 마음을 달랬다.
언래블은 처음 촬영 때도 카메라를 겁내는 애들은 없었다.
다만 찬이의 모습이 많이 어설펐던 터라 걱정했는데, 오늘 들은 이야기들로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역시 자신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고 다시 한번 확신이 들기도 했고.
지난 촬영 때는 다른 일을 하느라 우진과 석환을 보내 아이들을 챙기게끔 했지만, 역시 직접 보는 게 가장 마음이 놓였다.
저번 촬영은 ‘폭풍전야’의 컨셉 포토였다면 오늘은 ‘Confusion’ 차례였다.
서로 극명히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하나의 주제를 노래하다보니 촬영도 각각 곡에 맞게 따로 진행하기로 했다.
원래는 두 가지 모두 스튜디오에서 몇몇 조형물을 설치해서 촬영하려 했었다.
다만, 작가님이 세트장 촬영이 멤버들에게도 훨씬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내놓은 터라 약간 문제가 있었지만.
예산과 일정의 문제로 몇 번의 회의가 있었고, 그 사이 Confusion의 뮤직비디오 촬영에 사용될 세트장이 완성되어 현장 촬영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그동안 몇 가지 안 좋은 일들이 있었지만, 어쩐지 이번 앨범은 느껴지는 감이 좋았다.
차마 부정이라도 탈까 싶어 입 밖으로는 꺼내지 않았지만, 완성된 세트장을 둘러보는 소현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나고 있었다.
* * *
“으갸갸아….”
“어이구, 죽는다. 죽어.”
“온몸이 뻐근해 죽겠는데 어떡해요….”
“그러게 평소에 운동을 좀 해.”
차를 타고 이동할 때면 멀미 탓에 내내 기절할 듯이 잠들어 버리곤 했다.
그러다 보니 목적지에 도착하면 늘 온몸이 쑤시고 뻐근해서, 조금 더 편안하게 잠들 수 있는 것들을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좀 힘들어도 차를 많이 타고 이동한다는 건 그만큼 우리 스케줄이 많아진다는 소리니까, 그편이 더 좋겠지.
경환 형의 타박이 있었지만, 운동은 힘들기만 하고 보람은 없어서 입술만 삐죽거렸다.
형이야 운동을 하면 몸이 탄탄해지니까 그렇겠지만, 자신은 트레이너 쌤도 의아해할 정도로 근육이 잘 안 붙는 것을 어쩌리.
“얘들아, 준비해야지.”
“네엥….”
“지환이 완전 좀비네, 좀비야.”
“아직 그 정도는 아니거든요?”
“얼른 준비해야 빨리 끝난다!”
“네네!”
틈날 때마다 우리끼리 투닥거리고 수다 떠는 탓에, 마음이 조급했던 희주 누나가 직접 쫓아와서 우리를 끌고 들어갔다.
“그래도 오늘은 옷 같은 옷이라 다행이다….”
“등짝이 무사해서 다행이죠?”
“내 순결을 지켜줘라.”
한쪽에 마련된 대기실에서 옷을 갈아입는 중에도 우리 입은 멈추지 않았다.
지난번 등 절반이 뜯겨 나간 옷이 나름대로 충격이었는지, 등판이 제대로 붙은 옷을 든 경환 형의 얼굴이 밝았다.
“앞판이 안 뜯긴 게 어디야.”
“그러다 방송 불가 판정받는다?”
“한쪽만 가리면 안 걸릴걸요?”
“아니, 왜 다 내 옷만 가지고 그래?”
희희낙락한 얼굴로 자신의 의상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경환 형을 그냥 두기 아쉬웠는지, 준이 형이 한마디 보탰더니 찬이가 말을 더했다.
아주 그냥, 건수 하나 물면 이 인간들….
오늘 의상은 스포티한 느낌이었다.
경환 형은 붉은색의 헐렁한 티였고, 네이비색이 포인트로 한 줄 가운데 들어가 있었다. 등판에는 뭔가 영어로 커다랗게 적혀있는데 무슨 뜻인진 모르겠다.
난 흰 티에 네이비색 조끼가 주어졌고, 찬이 옷은 검은색에 호랑이가 그려져 있었는데 소매 한쪽에는 흰 줄이 그어져 있었다.
“이번엔 옷이 전부 크네.”
“무럭무럭 자라면 안 클 거야.”
“누나!”
내가 옷을 들고 중얼거리는 걸 들었는지, 가희 누나가 지나가면서 아픈 데를 찌르고 갔다.
비명 같은 내 외침에 세빈이가 힐끔 보고는 웃었다.
이렇게 형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는구나….
분명히 같은 걸 먹고 같이 움직이는데 세빈이는 벌써 나랑 키가 비슷했다. 전부 성장긴데 나만 키가 안 자라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주 미어진다.
시무룩해진 내가 터덜터덜 희주 누나 앞에 앉았더니, 세팅이 끝난 준이 형이 위로해 주고 싶었던 건지 슬며시 말을 걸었다.
“괜찮아. 천천히 크는 사람도 있잖아.”
“나도 180 넘고 싶은데….”
“너무 무리해서 춤추면 키가 안 자란다더라.”
그리고 그 타이밍에 제일 춤을 열심히 추는 찬이가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누나, 이거 바지 짧은데요?”
“너 또 키 컸어?!”
“어, 글쎄요? 이거 그냥 접을까?”
그리고 나와 희주 누나, 하준 형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설마 이대로 키가 멈추는 건 아니겠지?
심란한 시간이 흐르고 꽃단장을 마친 우리가 대기실 밖으로 나오자 팀장님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우리를 반겼다.
“내 새끼들, 오늘따라 인물이 더 훤하네!”
“아, 쫌 팀장님! 그거 하지 마요. 부끄러워.”
“부끄럽긴! 잘생긴 거 잘생겼다고 하는데 누가 뭐라 해.”
“그게 부끄럽다고요!”
결국 반바지로 대처한 찬이가 구시렁거리며 걸어 나오자, 팀장님은 기특하다는 듯 찬이 등짝을 두드려댔고, 찬이는 질색하며 탈주를 시도했다.
물론 늘 시도만 하고 실패했기에 우리는 그 광경을 흐뭇한 얼굴로 구경했다.
나만 아니면 되는걸.
“와, 세트장 엄청 크네요.”
“크기만 따지면 섬이 더 클걸?”
“그치만 섬은 그냥 섬이고 이건 만든 거잖아요.”
동글동글한 세빈이 눈이 반짝거리며 빛나기 시작하자, 찬이를 놔준 팀장님이 세빈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러면서도 내심 뿌듯했는지 입가에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거대한 공터에는 사선으로 나뉜 듯한 벽이 세워져 있었고, 한쪽은 검은색, 한쪽은 은은한 베이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사전에 전달받았던 내용을 다시 한번 머릿속으로 정리를 하며 내가 움직여야 할 동선을 떠올렸다.
“결과물이 어떻게 나올지 진짜 궁금해지긴 하네요.”
“그치? 나도 엄청 궁금해. 기대도 되고.”
“저희가 잘해야겠네요?”
“너희는 항상 잘해주고 있지.”
따뜻함이 담긴 팀장님의 미소에 나도, 세빈이도 쑥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거대한 세트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2번째 타이틀을 위한 사진 촬영이 시작되었다.
* * *
예나는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오늘은 어떤 영상이 뜰까 기다리며 이전 영상을 다시 복습했다.
작은 환이 이별이라는 곡을 부르는 모습에 옆에 있던 휴지를 끌어안고 울었고, 찬이랑 세빈이가 춤을 만드는 모습에 쥐고 있던 연필을 부러트릴 뻔했다.
늘 장난꾸러기 같았던 찬이나 마냥 애기 같았던 세빈인데 자기 본업에 몰두하는 모습은 이미 프로였다. 예나는 그들이 흘리는 땀이 너무 고마웠다.
그리고 그 이후 보였던 다음 앨범의 힌트인 짧은 영상은 심장을 조마조마하게 만들었다.
화면에 보이는 배 안에 우리 애들이 타고 있을 것 같은데 저렇게 위험하게 촬영을 해도 되는 건가 싶은 마음이 울컥 치밀었었다. 하지만 설마 애들이 타고 있었겠냐는 의견들이 더 많았기에 그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물, 작은 배와 사방을 짐작할 수도 없게 만드는 안개는 공포영화의 시작 장면 같았다.
그다음 영상은 첫 앨범 때 등장했던 가면들이었다.
우리 애들이 로브를 입은 게 아닐까 하는 추측도 있었다.
I'm OK 때 멤버들이 가면을 쓰고 나와 벗는 장면이 있었기에 그쪽이 조금 더 신빙성이 있었다.
그렇다면 가면을 쓴 나와 가면을 쓰지 않은 나의 싸움이 되는 건가?
뮤비와 안무의 내용을 연결해서 뜻을 유추하는 것도 꽤 쏠쏠한 재미를 주었기에 해석 영상을 찾아보기도 하며 영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떴다!”
그리고 어김없이 날아든 TLL 알림에 서둘러 접속해서는 올라온 영상을 눌렀다.
다른 영상들과 달리 이번 영상은 하준이 직접 촬영한 것 같았다.
“준이다, 우리 준이!”
한참 작업 중이었는지 약간 어둑한 작업실 의자에 앉아있던 하준이 평소보다 조금 피곤해 보이는 눈으로 카메라 렌즈 너머로 예나와 눈을 맞춰왔다.
다른 말 없이 눈웃음을 짓던 하준은 손을 들어 살짝 흔들더니 종이 한 장을 불쑥 들어 올렸다.
그 종이에는 하준의 성격처럼 단정하고 몽글한 느낌의 글씨체로 이렇게 적혀있었다.
[우리는 종종 관습이나 규범, 분위기라는 것들 때문에 가슴에 차오르는 분노를 애써 삼켜야 했습니다.
이것들이 반복되어 무기력해지는 것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날들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당연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당연히 여기고 포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래블은 또 다른 우리인 솜뭉치들이 자신을 잃지 않기를 바라고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바라볼 수 있길 바라며 이 곡을 준비했습니다.
우리에겐 솜뭉치들이 가장 귀한 사람이라는 걸 잊지 말아 주세요.]
솜뭉치들이 충분히 읽을 동안 종이를 들고 있던 하준이 종이를 내리고 무언가를 조작했다. 창백한 빛을 뿌리던 모니터의 빛이 약해지고, 하준이 어딘가에 카메라를 고정시키는 듯 부스럭거렸다.
그 후 화면에 남은 것은 피아노 건반과 자잘한 흉터가 보이는 하준의 손가락이었다.
직접 피아노를 쳐주려는 건가 하는 기대감에 들떴던 예나는 하준의 손가락에 흉터가 안쓰러워졌다.
무슨 일 때문에 생긴 흉터인지 알 수 없었지만, 저렇게 흉이 남으려면 평범한 이유는 아닐 것 같아서 마음이 더 아렸다.
그러나 곧 이어진 통통 튀는 듯한 멜로디가 경쾌하고 신나서, 예나는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책상을 톡톡 두들기며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전체 곡을 들려줄 생각은 아니었는지 짧게 끝난 연주 후 하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만나요, 솜뭉치들.”
그리고 보인 것은 일전 애들이 보여줬던 손가락으로 만든 작은 하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