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열대야(3)
“수고하셨습니다!”
“오늘 언래블 덕에 너무 재밌었어요!”
“저희가 더 감사하죠. 함께 해서 너무 좋았어요!”
사녹도, 본무대도 문제없이 모두 잘 끝냈다.
다만 기존의 간단한 율동 같은 안무 대신에 몇 가지 안무를 추가했었는데, 그 부분에서 헷갈린 건지 센터였던 영빈 형이 혼자 다른 춤을 췄을 뿐.
“영빈 형은 제영 쌤한테 불려갈 거 같지?”
“어휴, 1:1 레슨 개빡신데 우리 형님 괜찮으려나 몰라.”
“너희 그만해….”
그나마 다른 사람들 보기에는 센터여서 다른 동작을 한 걸로 보일 수도 있다는 점이 유일한 위안이랄까.
나와 힘찬이가 영빈 형을 두고 시시덕거리자 한껏 눈썹이 축 늘어진 영빈 형이 우리 목을 툭툭 치고 지나갔다.
그것만 빼면 모든 면에서 괜찮았던 무대였고 배우님들도 실수 없이 자신의 동선을 잘 찾아가 주었다.
“아, 다 같이 인터뷰 있으니까 메이크업 지우지 말고! 바로 이동할 거야.”
“저희만요?”
“배우님들도 같이 가실 거야.”
우리가 아까 놀던 사이에 이야기가 오간 건지 무대 외에 없었던 인터뷰가 추가로 생겼다.
문득 첫 데뷔 무대에서 인터뷰를 진행해 주신 골든 아워의 단우 님이 생각났다.
그동안 형님들한테 먼저 연락을 안 했다는 게 떠오르면서 괜히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인터뷰 끝나면 형님들한테 안부 인사드려야겠다.
워낙 다사다난했던 터라 먼저 괜찮냐고 연락들을 해주셨는데, 정작 내가 바쁘다고 그 후로 따로 연락들을 못 드렸다.
이러다 미움 사면 큰일인데.
두 명의 MC가 우리 옆에 앉고, 배우님들까지 총 8명인 우리가 2줄로 나눠 앉았다.
인터뷰는 무난하게 흘러갔다.
사석에서도 친하냐는 둥 드라마는 챙겨보고 있냐는 둥 미리 건네받은 대본에 있던 질문들.
우리를 겨냥한 질문들은 대부분 하준 형이 답했다.
간간이 답변하기 쉬운 질문들은 다른 멤버들에게 마이크를 넘겨 멤버들 분량을 챙기기도 하면서.
“졸업식을 만들 때 에단 씨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인터뷰하신 걸 본 적 있는데요.”
“아, 네. 맞아요. 선생님께서 정말 많은 가르침을 주셨어요.”
“최근 에단 씨가 다른 인터뷰에서 환 씨를 자신의 제자 같은 사람이라고 지칭하셨는데 혹시 보셨나요?”
처음 받았던 대본에 없는 질문이었다.
문득 질문하는 MC를 바라보니, 눈에는 미약하게나마 적대감이 숨어있었다.
뭐지?
“네, 물론 그날 바로 에단 선생님께 연락드렸죠. 너무 감사하다고. 앞으로도 많은 가르침 부탁드린다고 말씀드렸어요.”
“하하, 두 분이 사이가 정말 좋은가 보네요! 졸업식은 그러면 에단 씨의 손을 거친 곡이나 다름없겠네요.”
이유를 알 수 없는 적대감이었지만 교묘하게 내 공을 깎고 선생님의 공을 높이면서 언래블에 흠집을 내고 싶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사실 졸업식 자체가 에단 선생님 곡인걸?
“네. 에단 선생님이 조언만 해주신 게 아니라 정말 많은 부분에서 함께 해주셨어요. 덕분에 에단 선생님 곡을 사랑해 주셨던 분들이라면 더 즐겁게 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더 찔러보고 싶어 하는 게 눈에 보였지만, 함께 하는 MC, 우리 쪽 매니저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걸 눈치챘는지 딱 그 정도까지였다.
난 선생님의 공이 크다고 말할 수 있어서 더 좋았다.
일부 나쁜 사람들처럼 다 된 밥에 숟가락만 살짝 얹어가는 거라고 씹는 댓글도 많이 봐서 이제 괜찮고.
그리고 그것들이 내 입장에서는 사실이었으니까.
몇 가지 질문들이 더 오가고 인터뷰가 끝나자, 같이 MC를 맡았던 제시가 나에게 질문했던 제니스의 진우에게 화를 내는 모습이 슬쩍 보였다.
“가자. 저거 제대로 편집 안 하면 회사에서 항의할 거야. 어디서 분탕질을 치려고.”
“어우, 우진 형 그렇게 말하면 무섭잖아요.”
“이 녀석아, 사람 좋게 그렇게 웃기만 할래!”
“맞아! 환이 너는 좀 화도 내고 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 같아.”
“그런 거라면 지현이랑 하루만 같이 일정하면 금방 배울 텐데.”
“최다겸 씨,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어이쿠, 난 도망가야겠다. 나중에 보자!”
“야! 너 거기 안 서?!”
다가와서 우리에게 한마디씩 건네던 드라마 팀 배우님들도 불만 어린 표정으로 진우를 쏘아보았다.
“무대를 했다는 게 중요한 거죠, 뭐. 일단 빨리 쉬고 싶어요.”
“그래, 돌아가자.”
영빈 형이 내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멤버들도 음방 쪽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우리 측 스태프들과 함께 이동 준비를 했다.
퇴근길 아직까지 남아있던 솜뭉치들에게 짧게나마 인사를 해주고 흐물흐물한 상태로 회사에 도착했다.
우리 몰골이 가여워서였을까, 아니면 내일 더한 일정이 기다리고 있어서일까.
팀장님은 오늘은 일단 숙소 가서 쉬어도 된다는 말을 해주셨고, 우리는 예의상 거절조차 하지 않고 집으로 달려갔다.
역시 집에서 쉬는 게 최고지.
이유 모를 피로감에 힘들었던 우리는 대충 지웠던 메이크업을 한 번 더 지우고, 각자 편한 자세로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 아까 환이한테 시비 건 사람 있잖아.”
“그 진운가… 그 사람 말하는 거지?”
“어. 내가 좀 찾아봤는데 에단 쌤한테 곡 의뢰했다가 까였었대.”
경환 형 등짝에 머리를 올려놓고 온몸에 힘을 쭉 뺀 상태로 늘어져 있던 탓에, 형이 말 할 때마다 몸통을 타고 울림이 느껴졌다.
이 형 목소리가 왠지 신난 것 같은데.
경환 형의 말에 힘찬이가 흥미진진한 눈을 하고 꿈지럭거리면서 경환 형 옆으로 기어 왔다.
아닌척하고 있지만 하준 형과 영빈 형도 귀가 움찔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영빈 형 다리를 베고 누워있던 세빈이도 관심이 동했는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선 경환 형을 재촉했다.
“왜 까였는데요? 자세하게 좀 말해줘 봐요.”
“대충 찾아본 거긴 한데, 평소에 작곡에 관심이 많다고? 하면서 에단 쌤을 존경한다고 몇 번 인터뷰했나 봐.”
“완전 공개 프러포즈네….”
“에단 쌤 질색하셨겠다.”
그동안 우리는 에단 선생님에게 다양한 조언을 구했고, 선생님은 흔쾌히 우리에게 여러 도움을 주셨다.
거기다 같은 회사에서 지내다 보니 사내 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는 일이 자주 있었다. 들쭉날쭉한 우리 식사 시간과 선생님의 식사 시간이 꽤 겹치는 편이었다.
그러다 한 번은 너무 늦게 드시는 게 아니냐고 여쭈어봤는데, 번잡스러운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일부러 기다렸다 나온다고 하셨었다.
입만 산 인간들을 극도로 혐오한다는 것도 이런저런 대화 중에 알게 되었고.
“저렇게 수 쓸 게 아니라, 직접 찾아가서 가르쳐달라고 했으면 받아주셨을 텐데.”
“싹이 보였으면 직접 찾아가지 않아도 받아주셨을걸.”
“지환이는 지금 자기가 싹이 있는 사람이라고 저러는 거지?”
“아니, 얘기가 왜 또 나로 튀어?”
정말 한시도 방심할 수 없게 만드는 이놈의 인간들.
힘찬이가 나를 걸고넘어지기에 그놈 뒤통수에 쿠션을 던져주자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더니 조용해졌다.
“어우, 이제 지환이 무서워서 쟤한테 못 덤비겠어.”
“제가 어떻게 우리 형님들한테 찬이한테 하듯이 하겠어요.”
“너 저번에 웃으면서 경환이 등짝 때렸잖아. 경환이 그거 멍들었더라.”
“에헤이, 좋아서 등짝 팡팡 한 거죠.”
하준 형이 너스레를 떨자 영빈 형이 옛날 일을 끄집어내기에 웃음으로 뭉갰다.
여기서 밀리면 또 한동안 형들한테 시달려야 하는걸.
“하여튼 뭐 그 뒤로 같이 어떤 프로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 그때도 에단 쌤한테 곡 작업같이 하고 싶다느니 자기 차기 앨범에 선생님을 초대하고 싶다느니 했대.”
“와… 되게 거머리 같네요?”
“응. 에단 쌤이 그만큼 히트곡이 많으니까 뭐, 이해는 가는데. 그때 에단 쌤이 딱 잘라서 거절했다네.”
“역시 우리 에단 쌤은 단호했다.”
참 재미있게도, 우리를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들 중 평소 인상이 부드러워 보이는 선생님들은 굉장히 단호한 성격이었다.
엄할 것 같은 선생님들은 되려 우리가 찡찡거리면 받아주시는 편이었고.
“근데 경환 형, 언제 그렇게 자세하게 찾아봤대요?”
“조금만 뒤지면 금방 나와.”
“우리 얘기는 찾아보지 마라. 괜히 머릿속만 복잡해진다.”
“경험담?”
“묵비권을 행사하겠음.”
방송에 출연하면서 모든 사람과 사이좋게 지내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놓고 적대적인 데미갓과 다른 타입의 사람을 만나니 이건 이것 나름 신선했다.
“아, 우리 그냥 거실에서 자면 안 돼요?”
“우리 방은 좀 더운데.”
“대신 일찍 자. 나랑 지환이는 아침 일찍부터 움직이니까.”
늘 에어컨 빵빵한 실내에서만 있다 보니 지금이 한여름이라는 걸 가끔 잊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방문을 닫으면 더워서 잠을 잘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나마 바람이 잘 통하는 우리 방이나 하준 형이랑 찬이 방은 괜찮은데, 딱 방문이 출입문 쪽을 향하는 영빈 형과 세빈이 방은 더워서 자주 깬다고.
널브러져 있는 멤버들 모습을 못마땅한 듯 바라보던 포잉은 자신은 이 난장판에서 잘 자신이 없다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포잉은 평소에도 내가 과하게 들러붙으면 귀찮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게다가 여태까지 지켜본 바로는 사람이 가까이 오는 걸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직접 만지고 볼 수 있는 건 나뿐이라지만, 다른 사람이 포잉의 몸을 통과하는 게 포잉에게도 그다지 유쾌한 기분은 아닌 것 같았다.
각자 방에서 베개나 쿠션, 이불을 챙겨온 멤버들이 적당히 자리 잡고 누웠다.
“왠지 수련회 온 것 같지 않아요?”
“처음도 아니면서 뭘.”
“그래도 다 같이 자니까 좋아서 그러죠.”
초롱초롱한 세빈이 눈빛을 보아하니 바로 잠들기는 그른 것 같았다.
불을 끄고 어두워진 거실 안에서 한결 더 풀어진 멤버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일 트랙리스트 확정이랑 녹음 말고 또 뭐 있었지?”
“나랑 세빈이는 제영 쌤이랑 안무 맞춰봐야 해.”
“아, 그건 잘 돼가?”
“생각보다 더 어려워요….”
대기실에서 둘이서 뭘 자꾸 적고 있나 했더니, 어제 얘기했던 그 안무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던 모양이었다.
“그, 희주 누나가 팀장님이랑 얘기하는 거 슬쩍 들었는데… 우리 다이어트 빡실 것 같더라….”
“벌써부터 눈물 날 것 같네.”
“분노가 주제인 만큼 좀 날카로운 인상을 만드는 게 좋지 않겠냐고 그러더라고.”
“희주 누나가 그랬어? 와씨, 누나 완전 배신이야!”
생각해보면 그동안 꽤 잘 먹은 편인데도 애들 얼굴에 살이 빠진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너무 많은 일이 있었던 탓인지 하나같이 포동포동했던 뺨이 지금은 전부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다이어트는 다이어트지. 제길.
“오늘 솜뭉치들이랑 만났는데 엄청 미안하더라.”
“왜?”
“우리는 시원한 건물 안에 있는데 솜뭉치들은 밖에 있어야 했잖아.”
“나중에 안쪽으로 입장하긴 했을 텐데 그래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지….”
솜뭉치들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나중에는 편하게 줄 서라고 접이식 의자라도 사서 나눠주는 건 어떻냐는 얘기까지 나왔다.
공간이 좁을 테니 모두 앉는 건 무리라고 말해주었지만, 어디서 이상한 아이디어 상품까지 찾아온 힘찬이가 이런 걸 굿즈로 나눠주면 어떻겠냐는 말을 해서 결국 하준 형이 손으로 입을 막아버렸다.
“공식 팬클럽 창단은 언제쯤 하려나.”
“이번 앨범 발매하면 하지 않을까요?”
“언급만 있고 아직 제대로 내용은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솜뭉치라고 부르고는 있지만 아직 공식 팬클럽 창단식을 하지 않았기에, 우리는 빨리 다 같이 창단식을 하고 우리만의 축제를 벌이고 싶었다.
“아, 아까 지환이 뭐라고 한 거야?”
“비밀. 솜뭉치들하고 나만의 비밀이에요.”
“어차피 조금만 찾아보면 다 나오거든?”
“그럼 찾아보시던가!”
회사로 복귀하는 길에 라디오에서 열대야로 잠들지 못하는 날들이 많아진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하지만 우리들은 더위가 아닌 수다로 결국 그날 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다.
수많은 여름날 중 하루가 그렇게 별일 없이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