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열대야(2)
지영은 오늘 새벽 자신이 차장에게 보냈던 연락을 떠올리며 슬며시 미소 지었다.
뒤늦게 뜬 음방 공지와 댓림픽. 지영은 지난번의 설움을 씻어내듯 댓림픽에 성공해서 사전녹화 현장에 올 수 있었다.
지난번 깜짝 팬미팅 때 우리 애들이 어떤 얼굴로 어떤 말을 했는지 아직도 기억이 선명했던 지영이었기에 이번 무대를 놓칠 수는 없었다.
미니 팬미팅 때 작은 환이랑 세빈이가 눈물 보였던 일도, 자기들이 모자라서 미안하다던 말도.
늘 멤버들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 모자라서 미안하다는 말이라 속이 상했다.
다행히 평소 근태관리를 잘해둔 덕에 늦은 밤 갑자기 심하게 아프다는 말로 손쉽게 연차를 거머쥘 수 있었다.
팬 사인회 응모조차 광탈해서 후기 글을 수도 없이 찾아봤다.
뺨에 토끼 스티커를 붙이고 부루퉁한 얼굴로 작은 환을 바라보던 세빈이 사진은 너무 귀여워서 한동안 핸드폰 배경 화면으로 저장해두기도 했다.
머리띠와 나비야는 진짜….
찬이랑 환이는 너무 귀여웠고, 거기에 히스 화음과 C.I의 랩이 곁들여지니 고급 버전의 나비야를 들은 것 같았다.
특히나 C.I이 즉석에서 붙인 랩은 충격이었다.
하지만 내 나비는 겨울이 돼도 돌아오지 않는다니.
동요에 그렇게 슬픈 랩을 하는 건 반칙이야….
팬들끼리는 그 돌아오지 못한 나비가 어떤 의미인지를 두고 수많은 의견들이 오가기도 했다.
초반부터 무슨 액땜을 그렇게 크게 하는지 자꾸 작은 환이 다쳤다는 소식이 들렸고, 다른 돌이 우리 애를 구타했다는 찌라시가 돌았다.
그때마다 회사의 대처가 너무 미적지근해서 화병이 날 것 같았다. 결국 함께 덕질하는 사람들과 항의 메일이랑 편지를 잔뜩 보내기도 했다.
그 와중에 우리 애들이 GIVE 앱에서 창백한 얼굴로 괜찮다고 웃는데….
그날 지영은 작은 핸드폰 화면을 붙잡고 한참 눈물을 닦아야 했다.
밥 많이 먹었다고 자기들 건강하다면서 웃던 모습에 울고, 글자가 잘 안 보인다고 갑자기 작은 환 얼굴이 가까이 와서 잘생김 과다로 웃었다.
이전보다 앱을 보는 사람도 늘었고, 하트 수도 빠르게 올라가서 우리 애들이 착실하게 커가고 있다는 것들이 뿌듯하기도 했다.
찬이랑 세빈이가 방송에 적응한 모습은 기특하기까지 했다.
엉뚱한 행동이나 말은 여전했지만.
예능도 찍은 데다 이젠 GIVE 앱도 자주 켜주는 편이었다. 새로 리얼리티도 시작해서 얼굴을 볼 기회가 부쩍 늘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직접 두 눈으로 보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지영 님! 저쪽에 애들 있대요!”
“헐! 대박!”
깜짝 팬 미팅 때 휴지를 나눠준 인연으로 친해진 지수 님과는 그 후로도 쭉 연락하며 함께 언래블에 대한 마음을 불태웠다.
심적으로 힘들었던 순간들도 이런 덕질 메이트들의 다독임으로 이겨낼 수 있었고, 드디어 오늘은 보답받는 날이었다.
지수 님을 쫓아갔더니 유리 벽 너머에서 동생 라인이 모여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세상에!
애들이 그사이 살이 빠진 건지 얼굴이 더 날카로워져서 잘생김이 심해졌지만, 마음은 안 좋았다.
밥 잘 먹고 있다면서 왜 살이 빠졌어!
오늘 무대 의상인지 교복을 입은 애들이 활짝 웃으면서 방방 뛰고 있었다.
유리 벽이 막고 있어 목소리가 전달되지 않을 텐데 찬이는 자꾸 뭐라고 우리한테 얘기하고 있었고, 세빈이가 한심한 눈으로 찬이를 툭툭 치더니 무어라 말을 했다.
그제야 찬이가 밥 먹는 시늉을 하며 밥 먹었냐고 물었고, 대부분의 솜뭉치들은 엑스를 그리거나 고개를 흔들며 먹지 못했다고 얘기했다.
그렇게 바디랭귀지로 이야기하는 찬이와 세빈이를 작은 환이가 뒤에서 기특하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작은 환이 또 저 표정 나왔다.”
“쟤는 자기가 귀여운 건 모르고 너무 멤버들 귀여워하지 않아요?”
“맞아요, 솔직히 팀 내에서 귀여운 걸로 따지면 세빈이랑 비슷하지 않나.”
주변 솜뭉치들과 수군거리며 키득거리자, 애들이 유리 벽에 물음표를 그렸다.
우리끼리 웃고 있었더니 왜 웃는지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얼마 후 뒤에서 화려한 머리 색을 한 두 명이 뛰어오더니 우리 애들한테 손을 흔들었다.
애들은 당황한 얼굴을 하더니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했고, 그 모습에 당황했는지 나중에 온 다른 돌로 보이는 사람들도 같이 허리를 굽혔다.
“쟤네 상견례 하는 거야, 뭐야. 귀여워죽겠네.”
“DCL인 것 같은데요? 아, 준이가 저기 리더랑 친군데!”
뭔가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신나게 하더니 금방 활짝 웃는다.
쑥스러웠는지 세빈이는 뺨이 조금 붉어졌고, DCL의 멤버가 찬이한테 어깨동무를 하자 찬이 얼굴이 더 환해졌다.
어느새 블리들도 솜뭉치들 조금 옆에 모여들었고, 유리 벽 하나를 두고 행복한 얼굴로 서로를 보고 있는 우리가 있었다.
아주 잠깐 시간이 지난 것 같았는데 맏형들이 등장했고, 그 순간 모두가 탄식을 내뱉었다.
이 행복한 시간이 끝날 때가 왔다는 걸 모두 직감한 것이었다.
“애들 잡으러 왔구나….”
“리우랑 우리 준이 친하다는 거 리얼이었나 봐.”
오늘도 우리 하준이는 세상 꿀 떨어지는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별거 아닌 거에도 고마워하고 감동하는 애들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지?
DCL 분들이 가고 준이가 멤버들한테 뭐라고 했는지 세 명의 얼굴이 비 맞은 강아지처럼 축 처져 보였다. 다들 동생 라인들에게 왜냐고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우리를 못 볼 만큼 준이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작은 환이 핸드폰을 들고 유리 벽 앞에 쪼그려 앉더니 뭐라고 톡톡 손가락을 움직여 메시지를 입력하고 보여줬다.
[찬이랑 세빈이 숙소 가면 준이 형한테 죽을 준비 중]
“아! 우리한테 상황 알려주나 보다. 아, 애들 어떡해!”
돌아다니면 안 되는 거였나? 아까 로드가 같이 있던 거 같았는데.
하지만 웃고 있는 작은 환 얼굴을 보아하니 심각한 건 아닌 것 같았다.
우리가 메시지를 다 본 것 같자 동그란 머리가 잠시 핸드폰으로 향했고, 다시 길고 하얀 손가락이 톡톡 메시지를 입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무언가 고민하는 건지 손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유리 벽 너머에 다시 메시지가 보였다.
[우리가 더 잘할게요. 항상 고마워요 ♥]
“미쳤나 봐, 저 하트 때문에 고민한 거야?”
“어떡해, 작은 환 너무 스윗해!”
평소에 가장 좋은 말들을 고르듯 자신의 감상이나 마음을 전할 때면 어린 태가 남은 작은 환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지곤 했다.
한마디, 한마디를 얼마나 고민해서 고르는 건지 느릿하게 흘러나오는 말들은 언제나 상냥하고 다정해서 가슴에 쿡쿡 박힐 정도였다.
“얘들 간다!”
“가지 마, 얘들아!”
“무대 응원할게!”
“다치지 말고 조심해!”
들릴 리 없는 목소리가 마음이라도 전해지길 바라며 인사를 건네고 뒤돌아 걸어가는 멤버들의 등 뒤로 쏟아졌다.
그 짧은 거리를 몇 번이나 뒤돌아보며 아쉬워하는 내 새끼들을 보더니, 옆에 있던 지수의 눈가가 또 촉촉해졌다.
“어휴, 지수 님 자꾸 울어! 울지 마요.”
“우리 애들 왜 이렇게 맘씨가 곱죠? 저렇게 착한 애들을 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거야, 진짜!”
건네준 물티슈로 눈가를 톡톡 닦아낸 지수는 이름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누군지 분명한 그들을 향해 울분을 터트렸다.
역시 우리 애들은 우리가 지켜야 했다.
* * *
정윤은 밤을 꼬박 지새우고 이제야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앞길을 막아선 그들을 치우기 위해 기자들과 접촉한 탓에 오랜만에 죽어라 술을 부어야 했다.
기자들은 왜 그렇게 하나같이 전부 말술인지.
적당히 보조만 맞춰주고 수습해서 택시 태워 보내고 나면 진이 다 빠지곤 했다.
다행히 이리저리 쌓아둔 인맥 덕분에 그들은 과한 사례를 요구하지도 않았고, 그저 적당한 소스로 만족했다.
하지만 늘 이런 일이 벌어질 때면 정윤은 사건이 마무리되어도 입이 썼다.
이렇게 일을 벌이고 나면 죄지은 놈들만 자기 죗값을 받는 게 아니라 그런 쓰레기가 쓰레기인 줄 모르고 함께 있어야 했던 사람들까지 피해를 입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래서 되도록 이런 방법은 안 쓰고 싶었지만, 이번에는 그들이 선을 넘었다.
내가 손해를 보면서까지 다른 사람의 사정을 생각해 줄 수 있을 만큼 정윤은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도 더 커지지 않고 이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이라고, 그렇게 박정균 대표와 이야기도 끝낸 상황이었다.
팬들의 마음도 달래야 했고, 다음 앨범 작업도 조금 더 속도를 내야 했다.
애들 굿즈 만들 때 만들어둔 스티커를 팬들에게 전달해 줄 음료수에 붙인 건 아무래도 잘한 선택인 것 같았다.
이 회사가 디자인을 괜찮게 뽑는 것 같으니 다음 일을 맡겨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일단은 이 모든 것들을 소현 팀장에게 일임해 두었으니, 따뜻한 물로 몸을 좀 씻고 암막 커튼을 쳐둔 다음 푹신한 침대에 몸을 파묻고 싶었다.
상상만 해도 온몸이 노곤노곤해졌다.
앞으로는 부디 이런 더러운 놈들과 엮이지 않기를.
* * *
정말 한숨 푹 자고 일어난 포잉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이 핸드폰을 깔고 누워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쩐지 평소처럼 푹신한 감촉이 느껴지지 않아 불편하다고 생각했던 차였다.
오늘 방송이 있을 계약자가 걱정되어 방송국으로 쫓아 가볼까 하다 수신된 메시지를 확인하니 계약자의 메시지와 선배 요정의 메시지가 와있었다.
선배 요정의 메시지는 보나 마나 자신의 계약자 자랑일 게 뻔해서 무시하기로 했다.
포잉은 잠이 덜 깬 눈을 몇 번 깜박이고는 계약자의 메시지를 열었다. 자신은 보낸 적 없는 이모티콘이 채팅방에 떡하니 전송되어 있고, 계약자는 무슨 일 있냐고 물어왔다.
발톱을 하나 세워 핸드폰의 키패드를 하나씩 톡톡 눌렀다.
이런 걸 인간들은 독수리 타법이라고 했던가?
요정 전용으로 만들어진 통신 기기다 보니 이 정도로는 흠집도 나지 않았다.
다만, 공지환은 고양이인 내 몸으로 메시지를 보낸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던지 어떻게 보내냐고 꼬치꼬치 캐물어서 조금 귀찮았다.
[잠결에 잘못 보냄. 사고 안 쳤지?]
사고라는 말에 또 세상 억울하다는 듯 칭얼거릴 계약자를 생각하니 약간 기분이 좋아졌다.
예전에는 쓸데없는 장난만 치더니 이제는 이 몸을 제대로 된 요정으로 인식한 건지 이런저런 일들을 할 때나 곡을 만들 때도 조언을 구해왔다.
드디어 요정인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이해한 건가 싶어서 기특하게 여기던 차였다.
또, 그런 건 둘째 치더라도 계약자를 놀리는 건 제법 재미있는 일이었다.
아닌 척, 시큰둥한척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감정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성정 탓에 눈치를 많이 보는 걸 알고 있었기에 더욱.
같이 머무는 이 그룹의 인간들도 어느 정도는 공지환의 본 성격을 파악한 것 같았는데, 그 모든 사실을 당사자만 모르고 있다는 것도 조금 웃겼다.
앞발을 쭈욱 뻗어 스트레칭을 끝낸 포잉은 조금 더 고민하기로 했다.
계약자를 쫓아갈 것인지, 아니면 계약자가 올 때까지 조금 더 잘 것인지를.
고민과 함께 통신 기기 안에 있는 녹화 파일들을 무심한 눈으로 하나씩 넘겨보았다.
개미핥기와 그들의 매니저라는 인간이 타고 있던 차에서 뽑아낸 최근 한 달 치의 녹화 파일이었다.
이 파일 중 몇 개만 인터넷에 올려도 그들 모두가 두 번 다시 연예계에 발을 들이지 못하리라는 것을, 요정인 포잉조차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포잉은 이번 사건의 관련자들 모두가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하도록 자료를 인터넷에 뿌리려고 준비도 하고 있었다.
비록 정윤이라는 계약자 회사의 실장이 먼저 무슨 수를 써서 직접 나설 기회는 사라졌지만, 포잉은 이 파일들이 언젠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저장해두었다.
선하디선한 요정인 자신이 계약자를 잘못 만난 탓에 어느샌가 음모와 모략에 능해지는 것 같아 조금 슬퍼지기도 했다.
역시 오늘은 그냥 자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결정을 내린 포잉은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밖은 폭염일지라도 이 숙소 안은 적당히 서늘해서 잠자기 딱 좋은 온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