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117)화 (117/456)

117. 밤 편지(5)

영빈은 망연자실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세빈이와 힘찬이 모습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감정적으로는 자신도 제논 엔터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했지만, 정신을 조금만 가다듬고 생각하면 사건이 이대로 마무리되는 게 낫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이쪽 물이 덜 든 세빈이와 힘찬이는 납득하기 힘들었던 것 같았다.

가뜩이나 아침부터 아팠던 애들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얼굴이 더 희멀게서 당장 눕혀야 할 것 같았다.

“얘들아, 조금 더 쉬어야지. 너희 아직 얼굴색이 안 좋아.”

“형, 지환이는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는 거야? 쟤는 당사자잖아. 난 그때만 생각하면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세빈이와 힘찬이에게는 지환이가 다쳤던 일, 그리고 그들이 집 앞까지 찾아와 멤버를 해치려고 했던 일이 너무 크게 남아있었다.

악의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람을 좀먹는 가장 큰 독이라고, 영빈은 길길이 날뛰는 동생들 모습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활기차고 환했던 동생들의 얼굴에 본 적 없는 분노가 드러나 있었다.

“회사는 우리를 보호해야 하는 곳 아니에요? 우리 팔아먹으려면…!”

“그만해. 아무리 화나도 막말하는 거 아냐.”

“사실이잖아요. 회사는 언래블을 세상에 파는 거고 저희는 저희 재능을 파는 거고. 그러려면 제대로 보호해야죠.”

“세빈아, 너까지 왜 그러냐.”

힘찬이는 그렇다 쳐도 세빈이가 이렇게까지 사납게 말하는 건 처음이라 영빈은 머리가 아파 오는 것 같았다.

“형도 이대로 묻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그럼 우리는 우리끼리 회사에 말할게요.”

“말하면 뭐가 달라질 것 같아?”

욱하는 마음에 휩싸여 말하는 둘을 보고 있자니 영빈도 슬슬 화가 올라왔다.

영빈은 그간 거쳐온 몇 개의 회사에서 차마 동생들한테는 말할 수 없는 더러운 모습도 많이 보았다.

그런 것들에 비하면 ON 엔터는 신뢰할 수 있는 곳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지내왔었다.

이번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말해보지도 않고 그냥 숙이는 거랑 도망치는 거랑 뭐가 달라요.”

“최힘찬, 너 계속 막말할 거면 방에 들어가서 차라리 자라.”

“우리가 이대로 회사에서 하란 대로 하면 나중에 비슷한 문제가 생겼을 때 또 우리 멤버들이 다치고도 그냥 넘어가야 되잖아요. 우린 그럼 계속 아파도 참아야 해요?”

힘찬이랑 세빈이의 분노가 자신의 이득 때문이 아니라는 게 기특하다고 해야 할지, 단편적인 부분만 생각하는 것에 머릿속이 꽃밭이라고 해야 할지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때, 하준과 경환이 방문을 열고 셋이 있는 곳으로 다가와 털썩 주저앉았다.

“환이는?”

“다시 재웠어요. 잠든 거 보고 나왔어.”

“잘했어. 걔 너무 무리했어.”

“….”

영빈의 물음에 경환이 답하자 하준이 경환을 칭찬했다.

그 모습을 우두커니 지켜보던 둘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가는 형들의 모습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하나씩 하자. 힘찬아, 얘기해봐.”

하준은 상황을 정리할 필요를 느껴, 한껏 처진 짙은 밤색의 눈동자가 억울한 듯 파르르 떨리는 걸 지켜보았다.

“망둥이 걔는 감옥 가는 거 알겠는데, 걔가 속해있던 소속사에서 왜 책임을 안 지는지 이해가 안 가요. 저번에 지환이 다쳤을 때 실장님이 그쪽이랑 계약했다고 했잖아요. 우리 안 괴롭힌다고.”

회사 간의 계약이 있었는데도 왜 우리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지 억울했다.

“우리가 열심히 하면 된다면서요! 근데 열심히 했는데 왜….”

형들이 늘 입버릇처럼 했던 말들.

우리만 각자 자리에서 열심히 하면 찬란히 빛나는 별이 될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고 연습에 몰두했던 아이들이었다.

힘찬이가 감정이 격해져서 소리쳤지만, 지환이가 잠들었다는 걸 인식했는지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눈이 붉어질 만큼 화가 난 상황에서도 멤버를 생각하는 모습에 하준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저는 솔직히 최태성 하나 감옥 간다고 해서 그쪽에서 얌전해질지 모르겠어요. 그 맨날 같이 붙어 다니던 그 사람은 따로 처벌받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의외로 힘찬이보다 세빈이가 불만스럽고 불합리하다고 느낀 부분들을 따져왔다.

“회사 간의 계약도 지키지 않는 곳인데 이후에 그 그룹이든 그쪽 팬이든 저희한테 해코지하면, 그러다 또 누군가 다치면은요? 적어도 더 자세한 계약 내용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고 봐요. 당장은 아무것도 못 해도.”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영빈은 입술을 앙다물고 있는 세빈이 머리에 손을 툭 올렸다.

“무서운 거 알아, 세빈아.”

“…누가 무섭대요?”

“나도 무서워.”

“….”

“누가 또 다치면 어떡하지, 만약 이번처럼 운이 좋질 못해서, 카메라가 잡아주지 못하는 곳에서 다치면 그땐 꼼짝없이 다 덮어쓸 텐데. 외압이 들어와서 우리 방송 못 나가면 어떡하지, 미친놈들이 또 찾아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하지? 칼이라도 들고 있으면, 지환이가 또 망아지처럼 뛰쳐나가면 그땐 정말 어떡하지.”

한탄하듯 중얼거리는 영빈의 목소리에는 그동안 혼자 속 썩어왔을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너희를 지켜야 하는데 그게 형인데 참 쉽지가 않네.”

동생들 앞에서 한 번도 꺼낸 적 없었던 영빈의 속마음이었다.

그 모습에 언제나 다정하게 휘어졌던 하준의 눈매가 울컥 치민 감정을 참느라 무참히 일그러졌다.

그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던 힘찬, 세빈, 경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맏형 둘은 울컥 올라왔던 감정을 꾹꾹 눌러 삼켰다.

“지환이가 다치고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모습이 속상한 거 알아. 여기 앉아있는 사람들 다 그럴걸.”

사고 이후 지환이 이전과 다르다는 건 다들 말하지 않을 뿐 느끼고 있었다.

지환이가 멤버들을 이제 막 태어난 강아지 대하듯 사방을 경계하고 먼저 나서서 지키려고 드는 것도 그사이 익숙해진 일들 중 하나였다.

오죽하면 힘찬이는 솜뭉치들이 작은 환 개조설이라는 걸 이야기한다며 형들에게 이거 사실이지 않을까 하면서 헛소리를 하다 맞기도 했다.

회사가 다 알아서 이겨줄 거라고, 그렇게 어쩌면 참 속 편하게 생각했던 어린 두 동생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하준이 입을 열었다.

“제논 엔터랑 싸움을 시작하면 명분은 우리한테 있어도 기레기들이 날뛰기 시작하겠지? 아마 우리가 기억도 안 나는 과거일까지 다 끄집어내서 대중들한테 들이밀 거야. 물론 데미갓도 그렇게 되겠지.”

하준의 목소리는 무미건조하게 느껴졌다.

분노도 한탄도 담겨있지 않은, 그저 사실만을 열거하는 특유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벌어질 수 있는 끔찍한 경우의 수들을 하나씩 짚어주었다.

“대중은 잠깐 관심을 가질지도 몰라. 하지만 그런 관심은 결국 ‘쟤네는 허구한 날 지들끼리 치고받네’, ‘쟤네는 웬 듣보야?’부터 시작해서 부정적인 방향까지 치달을 거고. 심심한 어그로꾼이나 악플러들은 신나서 선동과 날조를 하겠지. 그 얘기가 너희 가족들한테도 갈 거고.”

가족이라는 단어에 힘찬의 손끝이 움찔하고 떨렸다.

“법정 싸움은 지지부진하고 길어지겠지. 몇 년씩 걸리는 것도 있다니까. 처음엔 사람들이 우리 편을 들어줘도… 그 싸움이 끝났을 때 누가 우리 이름이나 기억할까.”

“그리고 무엇보다 솜뭉치들이 그 긴 시간을 모두 버텨줄까. 데미갓 팬들과 끊임없이 싸워야 할 거고, 주변 사람들한테 누구 좋아한다고 말하기도 힘들 것 같은데.”

하준과 영빈의 이야기가 끝나자 한껏 날이 서 있던 힘찬과 세빈이 풀이 죽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둘도 전혀 몰라서 그랬던 건 아니었다.

그저 너무 억울했다.

지환이가 다쳤고, 첫 팬 사인회에서 같이 무대를 못하게 되었다. 힘찬은 지환이가 억울해하며 혼자 서러운 눈물을 떨구는 것도 보았다.

멤버들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장난치고 다 괜찮다는 듯 낄낄거리고 웃었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걸 모두 알았다.

위험하다는 것도 알겠다. 극단적으로 변하기 가장 좋은 관계가 아이돌과 팬의 관계라는 말도 심심치 않게 들어봤다.

“왜 우리가 피해잔데 우리가 참아야 해요….”

“우리가 약자라 그래. ”

“약자 하기 싫어요, 형. 너무 억울해요.”

“형도 싫어. 그러니까 우리가 빨리 크자. 우리끼리 서로 지킬 수 있게.”

세빈이는 너무 억울하고 답답해서 눈물이 나왔다.

잘못하지 않았는데 쉬쉬하고 넘어가야 하는 것도 싫었고, 소중한 사람이 다쳤는데 어떤 것들이 더 이익인지를 따져야 하는 현실도 싫었다.

하지만 가장 답답한 건 그게 현실이라고 세빈이한테 말했던 사람이 가장 큰 피해자였고, 무슨 일이 생기면 항상 먼저 나서던 사람들이라는 거였다.

정작 화를 내고 억울하다고 말하는 자신은 늘 형들에게 보호받는 입장이었고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세빈이가 서럽게 울기 시작하자 옆에서 입술을 물어뜯던 힘찬이도 눈물을 뚝뚝 떨궜다.

하준과 영빈의 속도 말이 아니었다.

동생들한테 현실과 타협하라고 다그친 셈이 되어 버려서 자신에 대한 혐오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아무리 동생들 앞이라고 강한척한다고 한들 이들도 고작 20살이었다.

보통의 20살이었다면 대학 생활을 즐기거나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할 나이.

“지환이 일어나서 너희 보면 깜짝 놀라겠다.”

“그 정도예요?”

“응. 눈이 아주….”

한동안 훌쩍이던 둘은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눈과 얼굴에 혀를 찬 영빈은 냉동실에서 아이스팩을 꺼내다 하나씩 쥐여주었다.

“조금 있다가 지환이 일어나면 미안하다고 사과해. 알았지?”

“네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리끼린 이야기 먼저 하자. 서운하면 그때그때 바로 말하고.”

“응….”

“팀장님이나 우진 형같이 회사 분들한테도 너무 날 세우고 말하지 말고. 경환이 너도.”

“노력할게요.”

“이야기를 다 들어보고 상황을 파악하고 나서 화를 내도 늦지 않은 거니까….”

풀이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둘의 모습이 안쓰러워서 지켜보는 형들의 입장에서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가끔 폭주하는 경환에게 외부에서는 조금 더 말을 조심하라고 덧붙이며, 하준이 피로로 가득한 얼굴을 비볐다.

잘 못 자는 지환을 신경 쓰느라 하준도 제대로 못 잔 지 오래되었고, 일찍 일어나서 동생들을 챙기느라 더더욱 수면 시간이 모자랐다.

“우리 일단 한숨 자자. 자고 일어나서 밥도 좀 먹고 하자.”

누구보다 핼쑥한 얼굴의 하준을 등 떠밀어 방으로 보낸 영빈은 거실에 쪼그려 앉아있는 둘과 경환을 돌아봤지만, 잠이 안 온다는 말에 결국 혼자 방으로 몸을 돌렸다.

맏형들이 방으로 돌아서자 시무룩한 표정으로 애꿎은 인형을 괴롭히던 힘찬이 모습에 경환이 말을 꺼냈다.

“저녁을 우리끼리 준비해볼까?”

“우리끼리요? 괜찮을까? 불내면 어떡해요….”

“그냥 고기 굽는 거니까 밥하고 상추 씻고 뭐 그런 준비는 우리도 할 수 있잖아.”

“그치, 평소에도 잔심부름은 우리가 했잖아.”

괜히 미안해서 기죽어있는 것보다는 뭐라도 직접 해서 노력이 가상하다는 평이라도 받으면 조금 낫지 않을까… 생각한 경환의 아이디어였다.

거창한 걸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한숨 자고 일어났을 때 멤버들이 웃도록 해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원래 싸우고 난 후에는 같이 밥 먹으면서 푸는 거야.”

“우린 싸운 건 아니잖아요.”

“대놓고 싸운 것보다 지금 상황이 낫다고 생각해?”

툴툴거리며 싸운 거 아니라고 항변하는 세빈에게 경환이 대꾸하자, 다들 금세 또 시무룩해졌다.

“다 같이 맛있는 거 먹으면 말하는 것도 한결 편할 거야.”

“아무래도 그렇겠죠?”

“우리끼리 정말 괜찮을까?”

불안해하는 힘찬이를 세빈이가 달래더니 어디서 구한 건지 앞치마까지 꺼내왔다.

“이런 건 어디서 난 거야?”

“리얼리티 찍을 때 입으면 좋을 거 같아서 샀는데 오늘 개시해요!”

둘이 금방 회복해서 냉장고를 부산스럽게 뒤지고 있었다.

뒤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경환은 도대체 둘 중 누가 형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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