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116)화 (116/456)

116. 밤 편지(4)

노랗고 파랗고 빨간 것들이 비산하고 있었다.

갈색도, 초록색도 있었다. 온갖 색을 사방으로 흩뿌려놓은 것처럼, 색색의 작은 덩어리가 하얀 공간에 끝도 없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몽글몽글하게 생긴 것들이 민들레 씨앗 같기도 했고 빛 덩어리 같기도 했다.

그중에 유난히 짙은 푸른색의 덩어리가 두둥실 내 주변을 떠다녔다.

짙은 남색과 은은하게 맴도는 보랏빛이 우주를 바라보는 것 같아서 포잉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문득 포잉에게 보여주면 좋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양손을 조심스럽게 뻗어서 감싸 쥐었다.

조금 따뜻한 것 같기도 했고 시원한 느낌이 드는 것도 같았다.

살짝 감싸 쥐었던 손을 열었더니 포로롱 소리가 날 것처럼 흔들거리던 빛 덩어리가 다시 허공에 두둥실 떠다녔다.

“앗….”

다시 잡으려고 손을 뻗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귓가에 나직이 속삭이는 것 같기도 했고, 웃음소리 같기도 했다. 소리가 온통 뒤섞여 귓가에서 윙윙거리자 뇌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어지러운 느낌을 참으려고 미간을 찡그렸다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껌벅거리자 현기증이 느껴지면서 몸이 훅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지환아? 일어났어?”

“아….”

빙글빙글 도는 것 같던 현기증이 가시자 낯선 천장과 익숙한 얼굴이 함께 보였다.

아, 아까 병원에서 잠들었지.

꿈꿨나?

조금 이상한 꿈이라는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런 거 같아요.”

“몸은 어때?’

“조금… 어지러운 것 같아요.”

“천천히 일어나. 몸 확 움직이지 말고.”

“어, 환이 깼다.”

내가 제일 마지막에 눈을 뜬 것 같았다.

조금 창백해진 세빈이와 찬이가 입에 아이스크림을 물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타민도 같이 맞았으니까 오늘 하루 푹 쉬면 내일은 괜찮을 거라고 하셨어.”

“오늘도 쉬어요?”

“그러면 그 몸으로 뭐 하려고.”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소현 팀장님이 이온 음료를 내밀었다.

멋쩍게 웃는 내 앞으로 팀장님이 다가와 볼을 쿡쿡 찌르면서 잔소리를 시작했다.

“너어는 말로는 내 새끼라고 하면서 말은 하나도 안 들어, 아주 그냥 혼구멍이 나려고.”

“에이, 제가 언제요! 저만큼 팀장님 말 잘 듣고 잘 따르는 사람이 어딨다고.”

“입술에 침이나 발라라, 이것아. 제발 딴 거 하지 말고 오늘은 숙소에서 먹고 자고만 해. 인터넷도 하지 말고 그냥 푹 쉬라고!”

“저희 방송 반응은 어때요?”

“이봐 이봐, 내가 방금 쉬라고 했는데 바로 물어보는 거.”

우리 때문에 팀장님도 계속 바빴을 텐데 잠도 제대로 못 잤는지 눈 밑이 퀭했다.

나 말고 팀장님이 여기 누워서 링거 맞아야 할 거 같은데…. 옆에 있는 우진 형도 얼굴이 썩 좋지는 않았다.

쫄랑거리며 주변을 맴돌던 멤버들이 슬금슬금 다가오더니 하준 형과 내 침대를 둘러쌌다.

“너 괜찮아?”

“너야말로 괜찮아? 얼굴이 창백해.”

쭙쭙거리며 쭈쭈바를 물고 있던 찬이가 내가 누워있던 침대에 걸터앉더니 괜찮냐고 물었다.

이놈은 거울도 안 보나, 자기 얼굴색이 얼마나 안 좋은지 모르는 걸까?

다리를 툭툭 치자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던 찬이는 피식거리고 있는 경환 형한테 볼멘 목소리로 불만을 토로했다.

“얘는 맨날 이런다니까. 정작 자기 꼴이 어떤지도 모르고.”

“그러게. 화장실 가서 거울이나 보고 와.”

어라, 그럼 다 몰골이 비슷하다는 얘기려나.

뒷머리를 긁적거리다 하준 형을 바라봤다.

평소처럼 투닥거리는 우리 모습에 편안히 웃고 있어서, 왜인지 모르지만 조금 빠르게 두근거리던 심장이 평소의 리듬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다 정신 차렸으면 숙소로 돌아가자. 가서 너희 밥도 좀 먹이고 할 얘기도 있고.”

“으아…. 평소보다 더 잤는데도 몸이 엄청 늘어지네요.”

콘 아이스크림 하나를 다 먹은 세빈이는 아쉽다는 듯 미련이 남은 등으로 쓰레기를 주섬주섬 챙겨서 버리기 시작했다.

찬이도 쭈쭈바 입구를 질겅거리다 영빈 형에게 등짝을 얻어맞고 결국 버렸다.

빨대도 씹더니 저거 이제 별걸 다 씹네. 어휴.

우진 형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숙소에 도착해서 다들 멍하니 거실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 모습에 혀를 차던 우진 형은 어딘가로 전화를 하며 우리 이불과 매트리스 커버를 하나씩 벗기기 시작했다.

방에 낯선 인기척이 느껴지자 자고 있던 포잉이 화들짝 놀라서 내 쪽으로 다가왔다.

우진 형한테 도와준다고 나섰다가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라며 혼나서 얌전히 거실에서 인형을 품에 안고 있었다.

“저거 다 빨면 오늘 우리 뭐 덮고 자요?”

“건조까지 해서 가져다주실 거야.”

“어우, 좋은 세상이네요.”

그래도 조금 아쉬웠다.

나는 빨래가 햇볕에 빳빳하게 마른 냄새와 섬유 유연제가 어우러지는, 그 냄새가 좋았다.

특히 이불을 햇볕에 바짝 마르면 그날은 이불에서 내내 좋은 냄새가 나서 기분이 좋았다.

건조기로 말리는 이불에는 그런 냄새가 안 나겠지?

우진 형이 움직이는 걸 옹기종기 모여앉아 구경하는 사이 팀장님이 커다란 봉투를 두 개나 들고 들어왔다.

“점심은 죽 먹고 저녁엔 고기 구워 먹어. 당면 넣은 불고기도 사 왔으니까 반찬으로 먹고.”

“어! 불고기!”

“죽 먹어야 돼요? 죽은 금방 배고파서 싫은데….”

방금까지 구석에 찌그러져서 불쌍한 척하던 우리 애들은 밥 얘기에 금방 신이 나서 한마디씩 했다.

밥 먹는 게 이렇게 좋은 애들인데 다이어트 하려니 힘들지….

그사이 우진 형은 연락받고 온 분에게 우리 이불과 매트리스 커버를 넘겼다. 6명이라 봉투도 한가득이었다. 혼자 들고 가시기 힘들지 않냐고 세빈이가 걱정스럽게 쳐다보자, 바로 아래 차가 있어서 괜찮다며 웃으셨다.

우리 막내는 마음씨가 곱기도 하지….

찡한 마음이 들어 세빈이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자 동그란 눈이 조금 커지더니 배시시 웃는다. 이렇게 예쁘고 착하고 바르게만 자라라.

키는 그만 컸으면 좋겠고.

영빈 형이 우리 둘을 끌고 자리에 앉혔다.

상에는 다양한 죽과 불고기가 한가득 차려져 있었고, 겉절이도 있었다.

“근데 이렇게 자극적인 거 먹을 거면 굳이 죽을 먹는 이유가 없지 않아요?”

“기분이지, 어차피 너희 위가 약해진 것도 아니고 밥 먹어도 괜찮아. 근데 이왕이면 소화 더 잘되라고 죽 사 온 거야.”

“팀장님 엉터리야….”

웬일로 찬이가 날카롭게 음식의 구성을 지적했지만, 팀장님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힘찬이 따라 조그맣게 중얼거리던 세빈이가 팀장님과 시선이 마주치자 움찔하더니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다 같이 죽을 양껏 먹고 부른 배를 통통 두드리며 만족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내일은 GIVE 앱 켜서 솜뭉치들이랑 얘기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응. 너희 무사하다고 얼굴 보여주는 것도 좋을 거고. 장소 빌렸으니까 언래블 스토리도 촬영해야지.”

“드디어!”

“그러니까 오늘은 진짜 푹 쉬고 새벽이라도 괜찮으니까 누가 아프거나 하면 바로 연락해.”

애들은 금방 들뜬 얼굴이 돼서 시시덕거리기 바빴다.

그래도 의도치 않게 이틀이나 쉬어버려서 괜히 몸이 굳는 것 같고 불안해하고 있었다.

모르긴 해도 힘찬이 머릿속에서는 온갖 음모론들이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을 게 뻔했다.

겉으로 티를 안 내려고 해서 그렇지 우리 중에 하준 형 다음으로 걱정이 많은 건 찬이가 아닐까?

적당히 분위기가 좋아지자 팀장님은 자세를 바로하고 앉아서 우리를 바라봤고, 우리도 편하게 앉아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회사 사람들과 우리는 평소에는 편하게 서로 대하고 이야기하게 되었지만…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서로에게 무례하게 굴지 않는다고 대표님이 이야기했었다.

그래서 중요한 이야기나 진지한 논의가 필요한 일을 이야기할 때는 최대한 바른 자세로 서로를 대하려고 노력했다.

허리를 바로 세우고 자세를 잡는 멤버들 모습을 지켜보던 팀장님의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우리 애들을 기특하다는 눈으로 보고 있어서 내가 다 뿌듯해지는 기분이었다.

“먼저, 앨범에 곡을 넣고 싶으면 이번 주 안으로 A&R 팀장님께 메일로 보내드리면 될 거야. 그리고 모인 곡들은 블라인드 테스트해서 가려낼 거야. 물론 너희도 참여할 거고.”

“윽….”

곡을 준비하던 하준 형과 경환 형의 입에서는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사이 촬영분은 예정대로 방송하기로 했어. 결국 데미갓은 통편집하기로 확정됐다. 다음 주 토요일로 첫방 날짜도 잡혔으니까 그 부분은 너무 걱정하지 말고.”

“넵!”

씩씩하게 대답하는 찬이 모습에 뒤에서 지켜보던 우진 형이 웃었다. 밥 먹더니 살아난 찬이가 어이없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미궁 탈출은 생각보다 정말 좋은 반응이 있었어. 회사에서 푼 기사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도 준비한 건지 당시에 실시간 검색어에 지환이랑 너희도 올라갔었거든.”

“헐. 실검이요? 진짜로?”

“대박…. 그런 날이 오긴 오는구나.”

“아, 까비…. 그걸 직접 못 봤네.”

“캡처해 둔 거 있으니까 나중에 보여줄게. 대표님이 직접 보내주신 거야.”

푸근한 인상인 만큼 한 덩치 하는 대표님이 조그만 핸드폰을 들고 직접 캡처하는 모습은 왠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입이 조금 마른 건지 큼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던 팀장님은 우진 형이 밀어주는 생수를 받아서 벌컥벌컥 마셨다.

“휴, 그리고 회사는 제논 엔터와는 싸우지 않기로 했어.”

“….”

방금까지 훈훈했던 숙소 거실 한복판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영빈 형의 팔에 힘이 들어갔는지 하준 형이 살짝 잡아 눌렀고, 경환 형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최태성은 이미 불구속 입건 상태고 조사가 진행 중이야. 회사 법무팀 말로는 복역하게 될 확률이 높다고 해. 흉기를 소지했고, 악의적으로 벌인 일인 게 드러났으니까. 하지만, 그 처벌 대상을 확대하고 우리가 공개적으로 그들을 저격하면 너희가 더 위험해질 수도 있어.”

“저희가 왜요? 저희는 잘못한 게 없잖아요.”

고저 없는 목소리로 팀장님에게 의문을 표하는 경환 형의 목소리가 조금 낯설었다.

“너희가 잘못한 게 없지만 그 팬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직접적으로 우리가 칼을 휘두르려고 하면 제논 엔터도 곱게 물러나지 않을 거야.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아.”

냉정한 얼굴로 말하는 팀장님의 얼굴에 세빈이는 조금 충격받은 얼굴이 되었다. 우리 앞에서 직접적으로 이해득실을 따지며 이야기한다는 게 아직은 적응되지 않는 것 같았다.

“제가 생각했을 때도 망둥이 하나라도 제대로 치우고 저희가 얻을 수 있는 거 다 얻으면 그게 나을 거 같아요.”

“형!”

“세빈아, 이건 일이야. 감정적으로 모든 게 해결되지는 않아.

그리고 모든 팬들이 좋은 사람인 건 아냐. 사생들처럼.”

난 사생이 팬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망상에 빠진 스토커들일 뿐이다.

그들이 무서운 건 아무리 대비를 해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튀어나올지 모르는 건데, 혹시라도 데미갓의 팬들 중 정말 미친 사람이 있다면?

“우리 중에 아무도 안 다쳤잖아. 우진 형도 무사하고.”

“그래도!”

“그래도는 없어. 이걸 계속 질질 끌고 가면 어느 방송에서 우리를 불러줘? 음반 활동은? 우리 솜뭉치들은 솜뭉치들대로 데미갓 팬들이랑 머리채 잡고 싸우느라 난장판일 텐데?”

“지환이 말이 맞는 것 같다. 우선순위를 잘 생각해. 음악 하고 싶다고 아이돌 된 거잖아.”

세빈이와 힘찬이는 상처받은 눈으로 나와 하준 형을 바라봤다. 둘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감정적으로 대해서 좋을 게 없다.

지지부진한 싸움 끝에 얻을 것도 없었고 상처만 남을 거라면 굳이?

우리끼리 이야기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팀장님은 모두 입을 다물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나 포근했던 거실 공기가 지금은 피부를 찌르는 것처럼 따끔거리고, 먼짓덩어리가 목구멍에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회사 입장은 그래. 서운한 마음이 들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각자 여러 생각이 들 수 있다고 생각해. 너희는 아직 갈 길이 멀었고, 굳이 그 길에 일을 더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우리는 이만 갈 테니까 푹 쉬고 나머지 이야기는 내일 회사에서 하자.”

우진 형과 팀장님은 한마디씩 남기고 숙소를 나섰고, 여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던 경환 형과 하준 형,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세빈이와 힘찬이는 조금 멍한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다 그들 앞에 앉은 영빈 형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닫힌 문 너머로 영빈 형이 무어라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힘이 쭉 빠져서 침대에 걸터앉아 방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애들이 아직 머릿속이 꽃밭이라 그래. 금방 이해할 거야.”

“네?”

“그러니까 다 괜찮다고. 더 자, 환아.”

경환이 형이 하는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멍청하게 되물었고, 형은 투박한 손길로 나를 눕히더니 여벌 이불을 꺼내 덮어줬다.

눈만 깜박이며 형을 바라보자, 형은 내 머리를 헝클어주었다. 왜인지 모르게 코끝이 시큰거리는 거 같아서 이불을 뒤집어썼다.

애들한테 현실을 알려준다는 명목으로 상처를 준 것 같았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상처는 고스란히 나에게도 되돌아온 것 같았다.

언래블을 지키고 꽃길을 깔아주고 싶었는데 내가 개입하면서 더 엉망이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까지 나를 좀먹고 있었다.

그런데 경환 형이 다 괜찮다고 하니까 형은 모르는 문제일 텐데도 괜히 울컥하고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입술을 깨물었다.

이불 안에는 꿈에서 봤던 짙은 남색과 보라색이 어우러진 우주 같은 포잉의 눈동자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계약자야, 네가 잘못한 게 아니야. 그저 이해하는 시간이 필요한 거다.’

‘응.’

‘저 곰 같은 인간 말처럼 다 괜찮으니까 한숨 자자. 자고 일어나면 또 괜찮을 거다.’

‘겨울잠 자는 곰도 아니고 오늘은 계속 잠만 자네.’

‘뭐 어때.’

정말 사는 건 쉬운 게 하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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