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불타오르네(6)
“오구오구, 우리 환이 고마워써요?”
“고마워쪄요?”
“사람이, 쫌! 준이 형! 살려줘!”
“저 인간한테 뭘 바라냐.”
“제발, 좀…. 이러다 밑에 집에서 쫓아오겠어….”
가영 형이 시뻘게진 내 얼굴을 보더니 음흉하게 웃으며 다가와 날 들고 둥기둥기를 시전했다. 신난 힘찬이도 옆에서 가영 형을 따라 웃으며 가영 형에게 잡힌 내 몸을 쿡쿡쿡 찔러댔다.
내가 미쳐가지고! 이 인간들이 어떤 인간인데!
솔직한 마음을 전했던 5분 전의 나를 원망하며 키스 형과 준이 형에게 살려달라고 손을 뻗었다.
“우리 형 괴롭히지 마요!”
역시 내 새끼 밖에 없네!
하준 형과 이제 막 잠에서 깬 세빈이, 키스 형까지 달려들어 겨우 가영 형과 찬이를 나에게서 떼어낼 수 있었다.
기진 맥진한 나는 결국 카펫 위에 널브러졌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가영 형은 무언가 떠오르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키스 형의 다리를 툭툭 쳤다.
“야, 저, 그 뭐야.”
“아직도 한글 못 뗐어? 왜 이렇게 버벅대.”
“이놈 새끼 말하는 꼬락서니 하고는.”
“형은 양심이 없냐, 아까 자기가 한 건 생각 못 하고.”
아무래도 여기 오기 전에 둘이 한바탕하고 왔나 보다.
키스 형이 평소보다 조금 더 틱틱거리는 걸로 봐서는 가영 형이 키스 형한테 뭔가 잘못한 것 같은데.
세비 형, 왜 오늘 안 오셨어요….
하준 형도 말릴 사람도 없는데 여기서 둘이 투닥거리면 큰일 나겠다 싶어서, 급하게 세비 형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세비 형은 오늘 다른 일 있어요?”
“몸이 좀 안 좋아서 우리끼리 온다고 했어.”
“어? 세비 형 어디 아파요?”
“감기 걸렸어, 그놈.”
“에어컨 밑에서 자지 말라니까 말은 또 드럽게 안 들어요.”
“아….”
아직 날이 많이 덥다 보니 에어컨을 틀어놓고 생활하는 게 일상이었다.
아무래도 냉방병이나 감기에 걸린 것 같은데 몸에 좋은 거라도 하나 선물해드려야겠네.
“약은 챙겨드리고 나온 거죠?”
“야, 말도 마라, 그거 때문에 한바탕했다니까.”
그 뒤로 이어진 가영 형의 설명 덕에 왜 키스 형의 말투가 곱지 못했는지 알만 해졌다.
세비 형이 감기에 걸려서 골골대는 걸 보고, 배 달인 게 감기에 좋다는 걸 찾아본 가영 형이 키스 형을 굴렸다.
병원에 데려가는 게 좋지 않겠냐는 키스 형의 말을 안 듣고 정성이 들어간 음식이 최고라면서 배랑 대추, 생강, 꿀을 사 오라고 시키더니 기어코 냄비 하나를 못쓰게 만들었다고.
“그… 배즙 만들어서 먹으면 감기에 좋긴 한데 냄비가 왜….”
“찜기에 물을 제대로 안 넣어 가지고 배가 냄비 바닥에 다 눌어붙고 난리도 아니었어.”
심지어 배 속을 파내고 재료 손질한 건 키스 형이었다고.
키스 형이 혹시 몰라 약을 사러 가는 사이 가영 형에게 물 넣고 잘 보고 있으라고 당부를 했지만, 고요한 숙소는 잠들기 딱 좋은 분위기여서 잠들었다고 했다.
“아이고….”
세빈이랑 경환 형을 잘 어르고 달래서 씻고 오라고 욕실로 들여보낸 하준 형은 키스 형의 설명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불 켜놓고 잠들면 어떡해요! 엄청 위험했잖아!”
“내 말이! 진짜 불이라도 났으면 어쩔뻔했어.”
의외로 힘찬이가 상식적인 이야기를 했고, 타는 속을 알아주는 우리가 있어서 그때의 분노가 되살아 난 건지 키스 형이 울분을 토했다.
약 먹고 잠들었던 세비 형이 잠결에 타는 냄새에 놀라 자리에서 뛰쳐나왔다고 했다. 후들거리는 몸으로 간신히 불을 끄자 키스 형이 집에 도착했고.
그리고 그때부터 키스 형과 가영 형은 서로 잘났다고 투닥거리기 시작했고, 세비 형은 머리 아파 죽겠으니 둘 다 꺼지라고 집 밖으로 내쫓았다고 했다.
“음, 그러니까 집에서 쫓겨났고 갈 데 없어서 저희 숙소 온 거라는 거죠?”
“에이, 그게 아니지. 바로 찾아오면 너희 피곤할까 봐 메시지만 보냈던 건데, 답이 없으니까 더 걱정되잖아.”
“그래서 나온 김에 차라리 회사로 가서 얼굴을 보자 한 거지.”
이럴 때는 둘이 쿵짝이 잘 맞는 게 더 신기한데.
가영 형과 키스 형의 모습을 지켜보던 하준 형이 찬이랑 나를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준이 형, 도대체 무슨 생각을….
“근데 지환이가 요리를 그렇게 잘한다며?”
“잘하는 게 아니라 먹을 수 있게 만드는 것뿐이에요.”
“김치볶음밥 잘하면 요리 잘하는 거지.”
“갑자기 세비 형이 불쌍해졌다….”
찬이가 옆에서 중얼거리다 가영 형의 응징을 받고 항복을 외치는 사이, 영빈 형까지 일어나며 다들 비교적 멀쩡한 모습으로 거실에 모였다.
“이사 안 했으면 다 같이 못 앉을 뻔했네.”
“이 더운 여름에 다닥다닥 붙어 앉을 뻔했지.”
타이밍 좋게 음식도 배달이 돼서 그 후로는 신나는 간식 시간이 되었다.
다행히 우리 애들은 음식을 가리는 게 없는 편이었고, 뭐든 잘 먹는 쪽이라 그저 피자와 치킨이라는 것에 만족하고 행복해했다.
하지만 가영 형과 키스 형은 치킨 순살이나 뼈냐부터 의견이 갈려서 평소 형들의 생활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세비 형, 짧은 시간이라도 제대로 쉬어요….
둘이 우리 숙소에 와 있는 지금 시간이야말로 세비 형이 안정을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때가 아닐까?
나는 세비 형이 최대한 푹 쉴 수 있도록 우리 숙소에 이 두 사고뭉치 형들을 잡아놔야겠다고 다짐했다.
그게 아픈 세비 형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가장 큰일인 것 같았다.
굳은 결심을 하는 내 손에 갑자기 닭 다리가 하나 쥐어졌다.
“뭐 하는데 정신 놓고 있어. 치느님을 앞에 두고.”
“아, 그냥 세비 형이 걱정돼서요.”
“약 먹이고 왔으니까 괜찮을 거야.”
덤덤하게 말하긴 했지만 키스 형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져 있었다. 이 형도 진짜 전형적인 츤데레라니까.
“그나저나 너희는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지금은 괜찮아 보여도 놀란 거 오래간다.”
“안 그래도 팀장님이 상담받으라고 해서 그러기로 했어요.”
“그런 얘기는 막 아무나한테 하면 안 된다.”
“형들이 아무나는 아니잖아요.”
“그래도 조심해야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런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을 테지만, 이 형님들은 달랐다.
우리 모두가 심적으로 꽤 의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라 스스럼없이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는 내용들을 하나둘 말로 꺼내기 시작했다.
물론 손에 피자나 치킨을 들고 있는 상태에서 하는 말이라 진지함과는 꽤 거리가 멀었지만, 뭐라고 하면 좋을까.
그래, 동네 깡패한테 돈을 뜯기고 나이 차가 엄청 많이 나는 제일 큰형들한테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것 같은 그런 모습이었다.
“준이 형! 다섯째 형이 내 닭 다리 뺏어갔어요!”
“영빈이 형, 그거 피망 들었어. 형 피망 안 먹잖아. 이거 먹어.”
“찬이가 다섯째면 환이가 넷째야? 환이가 생일 더 빠른가 보네.”
“하준이는 딱 첫째 삘이긴 해. 애들 챙기는 솜씨가 아주….”
“근데 준이 형 집에선 첫째 아니래요. 영빈 형이 첫째랬던가?”
“아무리 봐도 그 반대 아니냐?”
그 와중에도 내 새끼들의 수다는 끊이지 않았다.
억울한 건 억울한 거고 눈앞에서 먹을 걸 뺏기는 건 또 다르니까.
하준 형은 그런 애들을 챙기느라 바빴고, 나는 옆에서 끊임없이 궁금한 걸 물어보는 두 형님들을 상대해야 했다.
머리 아픈 게 싫을 때는 바쁜 게 최고라더니 그 말이 정답인 것 같았다. 너무 정신이 없었더니 아무 생각이 안 들었다.
“하, 하하…. 세비 형이 참 존경스럽네요.”
내 말의 뜻을 이해한 키스 형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근데요….”
“응, 세빈아. 왜.”
“데미갓은… 해체하게 될까요?”
조금 머뭇거리던 세빈이가 가영 형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세빈이 입에서 나온 데미갓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왁자지껄했던 거실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고요하게 변했다.
“해체했으면 좋겠어?”
“아뇨, 나쁜 건 그 둘이지, 그 외 다른 사람들은 억울할 것 같아서요. 그리고 억울한 게 생기면 원망의 대상이 필요하니까 또 저희를 물고 늘어지면 어떡하나 싶기도 해요.”
가영 형은 장난기를 거둔 담담한 얼굴로 세빈이를 향해 질문했다.
솔직히 남은 데미갓 멤버들과 우리가 굳이 서로 얽힐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저 우리 팀 두 맏형의 전 소속사일 뿐, 이제는 정말로 언래블과는 관련 없는 그룹이었다.
처음부터 망둥이와 개미핥기가 괜히 열등감 폭발해서 우리를 걸고넘어지다 결국 이 사달이 난 거니까.
아니, 정확히는 어차피 최태성이 저지른 무수히 많은 일들 때문에 언젠가는 결국 들통났을 일들이었다.
세빈이는 자신의 억울함이나 분노만큼, 데미갓이 우리에게 품었을 반감이 추후 언래블에 안 좋은 영향을 주면 어떡하나 싶어서 무서웠던 모양이었다.
“흐음. 어려운 이야기네. 솔직히 해체 안 할 것 같기는 해.”
“왜요? 남은 계약 때문에요?”
“그런 것도 크지. 계약 기간은 아직 많이 남았을 거고, 이런저런 것들이 많이 얽혀있겠지. 그런데 가장 크게 문제를 일으킨 멤버가 대표이사 아들이잖아. 그러니 멤버들의 주도권이 조금 커지는 선에서 그치겠지.”
“남은 멤버들끼리 뭉쳐서 회사를 나오거나 하는 건 어려울까요?”
“그건 조금 힘들 거야. 아마 그렇게 두느니 회사에서 활동을 계속 시킬걸. 계약해지도 보통 일이 아니고”
제논 엔터는 지금 활활 불타고 있는 재난의 한복판에 있을 터.
어떻게 수습이 될지는 알고 싶지도 않고 관심도 없지만, 최태성의 일로 터져 나온 대표에 대한 불신이 어쩌면 앞으로 회사 운영에 영향을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비빌 언덕이 없으면 오래 살아남기 힘들지만, 그렇다고 썩은 동아줄을 잡았다가 툭하고 끊어지기라도 하면 돌이킬 수 없어질 테니까.
“그래도 내 생각엔 걔네가 너희한테 굳이 해를 끼치려고 하진 않을 것 같아. 제논 엔터의 회사 입장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데미갓은?”
“왜요?”
“굳이 그런 위험을 무릅쓸 필요도 없고, 그렇게 한다고 해서 자기들한테 남는 게 없잖아.”
이해득실을 꼼꼼히 따지는 건 아직 어린 우리 애들의 입장에서는 조금 낯설고 먼 이야기인 것 같았다.
그나마 이미 다른 회사에서 안 좋은 꼴을 봐왔던 하준 형이나 영빈 형 정도가 씁쓸하게 웃으며 우리들을 바라봤다.
그 후로도 가영 형과 키스 형은 지인들을 통해 확인한 현재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나 여론 등을 간략하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회사에서 활동 지침을 정해줄 테니 되도록이면 그대로 따르라는 말을 남겼다.
지금은 이해 안 되고 회사가 왜 이렇게 하나 싶더라도, 조금 더 머리가 크면 차라리 회사가 시키는 대로 해서 다행이라는 말 나올 거라고.
그러면서 이런 말을 덧붙였다.
“불법적인 일이 아닌 이상, 이런 상황에서는 잘 되든 못되든 회사에서 시킨 대로 하면 너희에게는 어쨌든 일차적인 책임은 없으니까.”
대표님과의 친분을 생각하면 가영 형의 말이 조금 차가운 것처럼 느껴지긴 했지만 저게 현실이구나라는 생각에 쿵쿵거리던 심장이 조금 내려앉았다.
이런 것들을 깨닫고 이해하기까지 이 형들은 어떤 일들을 겪었을까.
문득, 새벽이라는 그룹이 만든 노래 말고, 이 형들이 겪었어야 했던 삶이 궁금해졌다.
“아 참, 한동안 절대 기사 보지 말고, 불가피하게 보더라도 댓글 내려보지 마라.”
“넵. 그러려고요. 핸드폰은 시계다 생각하고.”
익살스러운 힘찬이 대답에 가영 형이 기특하다며 어깨를 두드려줬다.
아니, 저건 두드린 게 아니라 부러트리려고 했던 것 같은데….
다행히도 찬이 어깨가 부러지기 전에 가영 형의 핸드폰이 울렸고, 이름을 확인한 가영 형은 그대로 우뚝 멈췄다.
“왜요?”
“세비야….”
최강자의 호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