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불타오르네(3)
하준이 소현의 허락하에 올린 글은 이러했다.
[쭌] 안녕하세요, 우리 솜뭉치들
여러분의 리더 하준입니다. (feat. 히스와 아이들)
회사 분들에게 우리 솜뭉치들이 많은 걱정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보다 빠르게 소식을 알려줬어야 했는데 이야기가 늦어서 미안해요.
언제, 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이후 회사의 공식 입장을 통해 최대한 상세히 알려드릴 거예요.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저희가 모두 무사하다는 걸 솜뭉치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서, 우리의 공간에 직접 글을 남겨요.
기사를 이미 접한 솜뭉치들도 있을 거고, 아직 확인하지 못한 솜뭉치들도 있을 거예요.
간략히 말씀드리면 늦은 새벽에 숙소로 사전 약속 없이 누군가 찾아왔고, 좋은 의도로 볼 수 없는 행동을 해서 멤버들이 조금 놀랐어요.
저희는 할 수 있는 대응을 했고 이후 진행에 대해서는 회사에서 공식 채널을 통해 여러분들에게 지속적으로 알려줄 예정이에요.
또한 저희를 위해 매니저 형이 밤새 함께 있어 주었고, 덕분에 안심하고 푹 잘 수 있었어요.
푹 자고 일어나서 신나게 고기반찬에 밥도 한가득 먹었고요.
(힘찬이는 밥 두 공기 먹었어요, 우리 찬이는 기회를 놓치지 않죠 ㅎ….)
우리 솜뭉치들,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요.
저희는 모두 무사히 안전하게 잘 있으니까, 이제 우리 솜뭉치들도 저희 걱정 말고 맛있는 것도 먹고 푹 쉬었으면 좋겠어요.
오늘 하루도 여느 때와 같이 평온하고 행복한 하루를 보내길 바라요.
늘 고맙고 사랑합니다.
- 뷰어들아 공카 확인함? 하준이가 글 올림 ㄱㄱㄱㄱ
ㄴ ㅇㅋ 고마워!
ㄴ 우리 애들 다정한 거 봐 ㅠㅠㅠㅠㅠ
ㄴ 진짜ㅠㅠ 자기들이 더 놀랐을 텐데 우리 걱정한다 ㅠㅠㅠ
ㄴ 미안하다고 하지 마ㅠㅠㅠㅠ 왜 미안하다고 해 ㅠㅠㅠ
- 참리더의 인성 인정합니다ㅠㅠㅠ 애들 옹기종기 모여서 하준이 글 쓰는 거 보고 있었겠지? 으앙 상상만 해도 졸귀자나 ㅠㅠ
ㄴ 아 ㅁㅊ 상상했다가 아파트 뿌셔따…ㅠ 심장에 해로워ㅠㅠㅠㅠ
ㄴ 옆에서 막 엄청 참견했겠지? 일케 써달라 저렇게 써달라 ㅋㅋㅋㅋ
ㄴ 우리 참리더 환장각ㅋㅋ큐
- 애들 글 말고 ON 엔터 공식 입장 아직 안 나왔지?
ㄴ ㅇㅇ 아직… 언제 올리려고 여태 ㅡㅡ
ㄴ 애들이 글 올렸는데도 아직 공식 입장 안 나온 거면 뭔가 얘기가 오가는 중인 거 같긴 한데 쌔하다.
ㄴ 정균찡 설마 애들 빌미로 장사하는 거면 진짜 사옥 뿌수러 간다
ㄴ 공식 나오기 전까진 어그로 ㄴㄴ 애들이 기다려달라고 했으니까 기다리자
세빈이의 요청으로 하준이 써서 올린 글은 다행히도 많은 솜뭉치들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카더라 같은 무분별한 기사들만 난무하던 가운데 가장 걱정되던 사람들이 직접 남겨준 글은 많은 솜뭉치들이 상황에 휘둘리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주었다.
또한 ON 엔터에서 공식 입장을 발표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많은 불만을 토로하던 이들도 마음을 조금 가라앉히고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언래블의 팬덤은 이렇게 한결 흥분을 가라앉히고 멤버들이 무사하니 상황을 지켜보자는 이야기로 큰 갈래가 나뉘었다면, 데미갓의 팬덤은 터지기 직전의 시한폭탄 같았다.
최태성은 데미갓의 이정으로 지내는 동안에는 본능에 가까운 연기력을 발휘했다.
덕분에 카메라 앞에서 본성을 잘 감추었고, 회사에서 만들어준 컨셉을 무리 없이 소화해냈다.
다만,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는 곳, 신경 써야 할 시선이 없는 곳에서는 본성을 마음껏 터트려왔기에 데미갓의 팬덤 내에서도 여러 종류의 소문이 돌았었다.
그리고 그 소문들 중 상당수가 사실로 드러나게 된 지금, 팬들은 분노를 넘어서 허망함까지 느낄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왕성한 활동을 자랑하던 여러 커뮤니티의 게시판과 개개인의 SNS에는 탈덕 인증글이 끝없이 올라왔고, 활활 타오르는 다른 집 불구경에 신난 어그로들이 넘쳐났다.
일부 어그로들과 관심 종자들은 카더라와 뇌내 망상을 적절히 섞은 글을 팩트인 것처럼 사방으로 뿌려댔고, 이제는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구분하는 것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반면 데미갓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았던 일부 팬들은 제논 엔터에 정확한 인과관계에 대해 문의했다.
하지만 제논 엔터는 팬들과 기자들을 비롯한 모든 곳에서의 요청에 묵묵부답으로 대응했다.
그런 회사의 모습이 수많은 팬들의 분노를 불러왔다.
문제가 있는 멤버들을 제명하고 그 외 멤버들은 어떻게 되는 건지, 제대로 된 케어가 들어갔는지, 상황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커져만 갔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포잉은 그저 숨을 한번, 크게 몰아쉬었다.
지환의 곁에서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보고 들으면서 사람이라는 생물에 대해 배워가고 있었다.
그전까지는 이해할 수 없었던 인간들의 감정이라는 것들에 대해 이제는 조금 알게 된 것 같았다.
포잉은 궁금했다.
몇몇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연예인이라는 직업의 사람들과 그 팬들의 마음이.
특히나 아이돌이라는 직업군에 속한 사람들과 그 팬들의 관계는 흥미롭기까지 했다.
세계를 구원할, 혹은 구원한 영웅에 대한 찬가는 비교적 쉽게 이해되었다.
죽을 뻔한 개인과 집단 혹은 세상을 살려준 사람이니까.
노래가 가진 힘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왔다.
종족 간의, 혹은 신분 사이의 한계를 뛰어넘게 만드는 뛰어난 음유시인들의 노래는 포잉도 경험을 했던 종류의 것이었다.
어떤 세계에서는 악기의 연주, 노래로 상대방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아이돌이라는 직업은 어느 분류에도 넣을 수가 없어서 계약자에게 양해를 구하면서 사람들의 감정을 살펴보기도 했다.
생각보다 더 많은 종류의 감정들이 뿜어져 나왔지만 가장 크게 보였던 것들은 충족감과 벅참이었다.
계약자인 지환에게는 정확히 말하지 않았던 내용이었지만, 요정이 중급으로 승격하려면 단순히 계약을 이행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인간의 감정에 대해 이해할 수 있어야 했다.
다만, 이런 내용을 계약자가 알게 된다면 자기 앞가림도 잘 못 하는 연약한 인간이 쓸데없는 오지랖을 부릴 것이 뻔했기에 말하지 않았다.
지환을 떠올린 포잉은 작게 혀를 차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상황을 지켜보느라 잠시 계약자를 홀로 두고 온 것이 못내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힘도 없는 주제에 무슨 행동력만 그렇게 넘치는지 자꾸만 위험한 자리만 찾아가는 것이 못마땅했다.
이번에도 위험한 짓을 할까 걱정되었던 포잉은 바로 경찰에 신고할 수 있도록 계약자를 깨워 위험을 경고하고, 집 안에 있으면 안전하다는 내용도 알려주었다.
하지만 그러한 포잉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계약자는 상황이 끝나기도 전에 밖으로 튀어 나갔다.
다행히 크게 위험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지켜보던 포잉은 심장이 콩알만 해졌고.
최대한 덜 당황하도록 찾아온 놈들의 정보를 일부만 건네주어서 그랬을까? 그놈들이 흉기를 갖고 있으니 절대 집 밖에 나가면 안 된다고 경고를 했어야 옳았나.
여러 경우의 수를 생각해보았지만 이건 그저 저 계약자 놈의 천성이 문제라는 결론에 도달할 뿐이었다.
타들어 가는 요정의 속을 계약자 놈만 모르는 안타까운 상황.
포잉은 결국 답답한 마음과 온갖 생각들은 잠시 한쪽으로 밀어냈다.
3주 된 아깽이보다 생존본능이 부족한 계약자를 챙기기 위해서는 24시간도 부족했으니.
* * *
‘포잉 어디 갔다 왔어?’
‘유능한 요정이라면 정보의 중요성을 알아야 함.’
‘오구오구, 정보 수집하러 외출하셨어요?’
하준 형이 공식 카페에 솜뭉치들에게 전하는 편지를 작성하는 동안, 우리는 하준 형의 주변을 둘러싸고 그가 한 글자 쓸 때마다 한마디씩 보태고 있었다.
이 말도 써달라, 저 말도 써달라 하는 짹짹이들 틈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들만 꿋꿋하게 적어 내리는 하준 형의 모습에 포잉은 감탄하는 것 같았다.
포잉이 은근히 하준 형을 좋아하는 것 같단 말이야.
일차로 완성된 내용에서 소현 팀장님의 지도하에 우리 의도가 곡해될 수 있는 표현을 수정했고, 언급하면 안 되는 말들을 삭제해나갔다.
소현 팀장님은 우리들에게 단어를 수정을 할 때마다 왜 표현을 바꾸는 게 좋은지 일일이 설명해 주셨다.
또한, 삭제하는 말들도 어떤 사유로 사용하지 않는 게 좋은지도 알려주셨다.
나중에 솜뭉치들에게 편지를 쓰더라도 최대한 오해 사지 않도록 알아두면 좋다는 말을 하면서.
최대한 미안한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마음을 남겼더니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꽤 많은 시간이 들었다.
“역시 민감한 일은 솔직하게 말해주는 것도 어렵네요.”
“대다수의 사람들은 우리 말을 굳이 꼬아서 나쁜 뜻으로 해석하지 않을 테지만, 일부 소수의 사람들은 눈곱만큼이라도 꼬리 잡을 건덕지가 없는지 눈에 불을 켜고 있잖아.”
그동안 팀장님은 이런 일들을 얼마나 많이 겪었던 걸까?
농담처럼 웃으면서 건네는 팀장님의 목소리는 한없이 가벼웠다.
하지만 가벼운 그 목소리에는, 사막의 모래알처럼 버석하고 까끌까끌한 무언가가 남아 있었다.
마치 내 입안에도 모래알이 남아 있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모든 점검이 끝난 후에야 하준 형의 손이 조심스럽게 등록 버튼을 눌렀다.
등록 버튼을 누르고 조금 후에 페이지를 새로고침 했더니 그 사이에 이미 댓글이 달리고 있었다.
“내가 이겼어!”
“와, 진짜 5초도 안 걸릴 줄은 몰랐는데.”
경환 형과 힘찬이는 그사이에 내기라도 한 것 같았다.
이 웬수들….
“둘이 또 뭐 했어.”
“5초 안에 댓글 달릴까 아니면 5초는 넘어야 달릴까.”
“아, 오늘은 댓글 먼저 달았을 수도 있겠네.”
“내용을 보는 게 먼저가 아니라?”
“유명한 선배님들은 공식 카페에 글을 올리면, 댓글 수 제한 때문에 팬들이 무조건 점이라도 하나 찍어서 댓글 먼저 달고 수정한대요.”
세빈이는 댓글의 수에 제한이 있다는 것 자체를 놀라워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에는 빠르게 늘어가는 솜뭉치들의 댓글 숫자를 새로고침하면서 관찰하고 있었다.
눈이 초롱초롱해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너희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렇게 될 거라고 말해주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건지 들으라는 듯이 한숨을 푹 쉬는 포잉의 모습에 마음은 곱게 접어 넣었다.
“으, 그냥 얼굴 보여주고 말로 해주고 싶다!”
“어쩔 수 없지.”
“솜뭉치들 완전 보고 싶기는 한데 혹시라도 말실수하면 큰일이니까.”
길쭉한 팔다리를 쭉쭉 뻗으면서 몸을 풀던 힘찬이는 GIVE 앱으로 솜뭉치들을 만나지 못하게 된 것이 못내 아쉬운지 중얼거렸다.
조금 풀이 죽어있는 힘찬이가 안쓰러웠던지 하준 형이 머리를 쓱쓱 문질러 헝클어준 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왜 일어나냐는 듯이 멤버들의 시선이 전부 자신에게 꽂히자, 하준 형도 조금 머쓱했는지 뺨을 긁적거렸다.
“형은 곡 만지러 갈란다.”
“오늘은 다 쉬는 거 아니었어요?”
“너희는 쉬고 있어.”
“그럼 나도 그냥 연습실 갈래.”
“뭐야, 다 연습하러 가면 나도 그냥 연습 갈래.”
너도나도 죄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런 우리를 지켜보던 소현 팀장님이 방긋 웃었다.
“너희 숙소 가라.”
그렇게 하준 형의 한마디 때문에 우리는 모두 회사에서 쫓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