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95)화 (95/456)

95. CHEER UP(3)

저택 안쪽의 공간이 밖에서 봤던 것보다 두세 배는 더 넓은 것 같았다.

겨우 퍼즐을 풀어서 문을 열면 이상한 곳으로 연결되고, 위로 가는지 아래로 가는지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방향 감각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아니, 제작진에 건축 천재라도 있어요? 무슨 안에 길이 다 이 모양이야!”

한참의 탈출 시도 끝에 예쁘게 차려입고 촬영하러 왔던 아이돌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저 먼지 구덩이에서 뒹굴고, 뒤에서 쫓아오는 무언가를 피해 달리고 구르다 남은 초췌한 고등학생 3명이 있을 뿐.

이런 상황이 익숙한 이영진과 류진호는 힘 빠진 웃음을 흘리며 눈밑이 퀭한 내 등을 두드렸다.

같이 고생을 하면 친해진다더니 그 말이 딱 맞는 것 같았다.

자꾸 뭐가 튀어나오고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음울한 핏자국이 난무하고 해골 마네킹을 서너 번쯤, 특수 분장으로 원래 형태를 알 수 없는 괴물을 열 마리쯤 보고 나니까 멤버들뿐만 아니라 이영진과 류진호에게도 동료애가 물씬 느껴졌다.

방금 전만 해도 이영진이 잡아주지 않았으면 무너지는 바닥과 함께 게임 아웃 될 뻔했다.

물론 저 바닥 밑에는 출연진들이 다치지 않도록 두툼한 매트리스가 깔려있을 테지만 아는 것과 실제로 겪는 건 큰 차이가 있었다.

새까맣게 칠해져서 보이지도 않는걸!

“하이고…. 니들 다 무사하냐?”

“아직 살아있어요….”

“곧 죽을 거 같긴 해요.”

“말 잘하는 거 보니까 아직 다 살아있네.”

밀가루 반죽처럼 말랑말랑하고 하얬던 우리 세빈이 얼굴에는 어디서 묻어온 건지 검댕이 잔뜩 묻어서 큰 눈만 껌벅거리고 있었다.

아까 벽난로 타고 위층으로 도망갈 때 묻었나 보다….

“김부혼지 김거진지가 아주 악독한 사람인 건 잘 알겠네요….”

“김악규 PD만큼 악독한 놈이지.”

아마 우리에겐 둘이 동일 인물일 테고.

수첩에 적힌 내용들로 보아 이 저택은 김부호라는 가상의 인물의 저택이었다.

불로불사를 꿈꾸는 사람답게 온갖 실험을 반복하느라 저택에는 괴물과 초자연적인 현상이 가득하다는 게 수첩에 적혀있었다.

처음에는 조심조심 퍼즐을 풀고 힌트를 찾아서 차근차근 출구를 탐색했건만, 시계 안에서 해골을 만나고, 그 해골이 쥔 열쇠로 또 다른 방의 문을 연 순간부터 고통의 시작이었다.

그 열쇠가 함정 방 열쇠일 줄 누가 알았겠어….

“그래도 얼마 안 남은 것 같죠?”

어디에 걸린 건지 셔츠 단추를 다 날려 먹어서 배가 훤히 보이는 힘찬이가 불쌍하게 쭈그려 앉아서 우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복근이 나오는 건 이렇게 불쌍한 모습 말고 무대에서였으면 훨씬 좋았을 텐데.

나는 꽤 많은 퍼즐을 풀어냈고. 세빈이는 특유의 눈썰미로 의심쩍거나 중요해 보이는 단서들을 잘 찾아왔다.

찬이는 말 그대로 탱커의 역할을 하면서 함정에 빠질뻔한 이영진과 류진호를 몇 번이나 구해주었다.

그 와중에 이미 이 프로를 여러 번 겪었던 두 사람의 활약도 눈부셨다.

이전에 당했던 함정들을 떠올리면서 구조상 함정이 있을 법한 지역을 꽤 잘 찾아주었다.

“늘 이렇게 탈출이 힘들어요?”

“왜 미궁 탈출이 제목인지 알 것 같아요…. 여기 진짜 미궁 같아.”

“새 시즌 시작하면서 힘을 줬다더니 아주 사람 말려 죽이려고 그래.”

“저번보다 더 힘든 것 같아.”

바로 직전에는 등산하는 기분으로 벽을 타고 넘었고, 이 공간으로 달리면서 바닥이 무너져 내려 제일 뒤에 있던 나는 바닥으로 떨어질 뻔했다.

바닥에 주저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숨을 돌리던 우리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새로 주어진 주변을 확인했다.

“근데, 우리 꼭 트레저 헌터 같아요. 재밌다.”

“찬아, 네가 재밌다면 다행이구나. 그러니 이제 저 벽을 좀 밀어볼래?”

어두컴컴한 네모난 공간. 우리가 넘어온 곳을 제외한 나머지 방향은 전부 벽으로 막혀있었다.

왔던 곳은 무너져 내려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

바닥에 해골과 쥐가 언뜻 보여서 소름 끼쳤다.

모형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그래도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성보다 감성의 생물인가 보다.

집에 가고 싶어….

어디서 흘러들어오는지 알 수 없는 빛으로 바닥만 조금 밝고 위로 갈수록 어두워져서, 여기가 건물의 어디쯤인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어디선가 세빈이가 주워줬던 볼펜과 처음 습득했던 수첩을 불빛이 스며들어오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 꺼내 들었다.

그동안 메모해두었던 내용과 수첩 안의 내용을 체크하며 여기가 어딘지 확인하고 출구를 찾는 게 내 역할이었다.

“앞뒤 분간이 힘들 만큼 깊은 어둠의 끝은 생의 마지막이 떠오르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잠시 마음을 다스리고 벽에 있는 유독 서늘한 손잡이를 누르면 마침내 눈 부신 빛을 만날 수 있었다.”

“벽에 손잡이라고 부를 만한 게 있다는 거지?”

“응. 벽면을 더듬으면서 다른 곳보다 차가운 곳이 있는지 찾아야 해.”

“지환이가 그 수첩 안 챙겨 왔으면 어떡할 뻔했냐, 진짜.”

수첩을 뒷주머니에 챙겨둔 덕에 꽤 쏠쏠하게 써먹고 있었다.

그 모습에 이영진은 평소 자기들은 그런 건 한번 쓰는 힌트인 줄 알고 내용만 보고 잘 안 챙긴다며 나를 칭찬했다.

역시 제작진이 두 사람의 성향을 파악하고 있다는 걸 느끼며 고개를 내저었다.

혹시 하고 챙기지 않았다면 더 많은 시간을 여기서 구르고 다녔겠지?

“배고파요….”

“나도….”

“전에는 막 먹을 것도 있던데 왜 이번엔 없을까요….”

힘없이 벽면을 더듬거리던 우리를 측은하게 바라보던 이영진이 바닥을 여기저기 짚어보다 말했다.

“무사히 탈출하면 내가 고기 쏜다.”

“오, 형 진짜요?”

“진호 너는 빼고, 인마.”

“와, 너무하네. 우리 인연이 그 정돕니까!”

“나보다 많이 버는 놈이 어디서 꼽사리를.”

“쳇.”

두 사람의 만담을 들으며 여유를 되찾은 우리는 탈출과 고기를 향한 집념으로 마침내 이상한 부분을 찾을 수 있었다.

“환아! 여기 이상해! 차가워!”

“찬아, 잘했어!”

찬이가 내 손을 가져다 대 준 위치는 확실히 주변보다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그 벽 주변을 세심하게 만져보던 세빈이가 말했다.

“손으로 더듬어보니까 손잡이? 같은 게 희미하게 새겨져 있긴 해요.”

“하, 진짜, 사람이냐, 제작진들?”

제작진들의 치밀함에 치를 떨던 류진호가 찬이랑 같이 손잡이 문양이 그려진 벽면을 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쿠궁하는 소리와 함께 벽의 한 부분이 밀리면서 끼익하는 낡은 철문 소리와 함께 한쪽 벽면 전체가 열렸다.

그곳에는 환한 빛 아래 깨끗하게 정리된 사무실이 있었고, 한쪽에 있는 책상 위에는 노트가 펼쳐져 있었다.

“저기!”

“악! 왜 또 해골이야!”

“이제 적응할 때도 되지 않았냐.”

노트로 다가가던 나를 툭툭 쳐서 뒤돌아보니 반대쪽 끝 침대 위에 곱게 누운 해골 모형이 있었다.

무방비하게 고개를 돌리다 식겁한 나는 이영진의 뒤로 숨었고, 그 모습에 류진호가 낄낄대며 비웃었다.

그 와중에 세빈이랑 힘찬이가 안전한 위치에 있는지 확인한 내가 스스로 대견했다.

이게 어디야, 우리 애들 안 버리고 잘 챙기고 있는데.

“저는 저 노트 내용 좀 확인할게요.”

“그럼 찬이랑 내가 저 해골이랑 침대 확인할게.”

“저랑 영진 형님이랑 둘러볼게요!”

이제는 각자 역할을 자연스럽게 배분했다.

두 형님들 말로는 이렇게까지 적응 빠르고 금방 친해진 사람은 우리가 두 번째라고 했다.

첫 번째가 시즌 1에서 전설을 찍은 여자 아이돌 그룹, 미리내의 파워보컬 예나였다고.

두 형님을 이끌고 미궁을 돌파하면서 국민 호감돌이 되었던 선배님이었다.

“실험은 실패였다. 이지를 잃은 김부호는 미쳐 날뛰기 시작했고, 나는 간신히 출구 직전까지 왔지만… 여기까지인 것 같다. 도망치면서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 다리가 부러져서 더는 움직이는 것도 무리다.”

내가 노트의 내용을 천천히 소리 내어 읽었다.

방안을 수색하고 있는 모든 일행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내용이 있을 수도 있어서, 들으면서 계속 찾아보란 액션이었다.

“어, 여기 해골 모형…! 진짜 오른쪽 다리가 부러져 있어요!”

“디테일 보소?”

“해골 밑에 열쇠가 있어요!”

힘찬이가 열쇠를 찾아냈고 이영진은 책장과 캐비닛 사이에 숨겨진 문이 있는 걸 확인했다.

“여기 열쇤가 보다!”

“진호야, 막 열고 그러지 마라!”

이영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류진호는 밝게 웃으며 열쇠 구멍에 열쇠를 꽂아 돌렸다.

그리고 다음 페이지를 확인한 나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거 함정…!”

“으악!”

“진호야!”

“형님!”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류진호는 문 뒤로 아무것도 없는 새까만 공간이라는 걸 뒤늦게 깨닫고 앞으로 고꾸라질뻔했다.

때마침 찬이가 몸을 날려 류진호의 팔을 잡지 않았다면, 이대로 탈출에 실패할 뻔했다.

“내가! 성급하게 움직이지 말라고! 몇 번 말하냐!”

“와씨, 막판에 탈락할 뻔했네. 힘찬아, 고맙다.”

“어휴, 진짜 깜짝 놀랐어요.”

“여기는… 마지막까지 긴장을 풀면 안 되는 곳이네요.”

류진호가 바닥에 주저앉아 한숨을 푹 내쉬었고 힘찬이가 놀랐을 류진호의 팔다리를 주물러줬다.

“어우, 형님 많이 놀라셨나 봐요. 팔 근육이 아직도 떨리네요.”

“와, 진짜 나 엄청 놀랬다. 순간 아찔하더라니까.”

찬이가 류진호를 다독이며 넉살 좋게 말을 걸었고 세빈이는 다른 의미로 놀랐던 이영진의 곁에 있었다.

“휴, 저 노트 다 읽을 때까지 다른 거 만지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그러게 말이다. 아니, 진짜 치사하지 않냐? 막판에 이런 함정을 넣어둘 건 뭐야.”

상황이 안정되자 나는 계속해서 노트를 읽었다.

“함정의 열쇠는 내가 숨겨두기로 했다. 그래야 더 이상 무고한 피해가 생기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열쇠가 해골 밑에 깔린 건가?”

“마지막에 와서야 그간의 실험에 대한 회의감과 죄책감이 몰려왔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으니, 여기서 이렇게 죽는 게 그들에 대한 내 마지막 속죄였다.”

“이 연구원 아저씨도 마지막엔 죄를 뉘우쳤네요.”

“지환이 완전 내레이션 같아. 목소리 듣기 좋다, 야.”

열심히 노트를 읽어주는 내 목소리 사이사이, 우리 애들과 두 형님의 대화가 튀어나왔다.

그 모습이 재밌어서 나도 모르게 조금 웃었다.

“이곳의 비상 탈출구는 책상의 서랍 뒤에 숨겨져 있다. 문을 열기 위해서는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하지만 여기까지 도망친 사람이라면 쉽게 풀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쉽게 보내주질 않네요….”

“이렇게 제작진 놈들이 악독하다니까?”

“나가는 길이 의심스러워도 흔들리지 말고 앞으로만 향한다면, 그 끝에는 이 저주받은 저택 밖으로 나가는 문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아, 나는 그동안 무슨 짓을 한 걸까. 마리, 그저 당신을 다시 한번 더 만나고 싶었던 것뿐인데….”

노트에 적힌 내용은 여기까지였다.

마지막 구절로 추측하건대 이 연구원은 불로불사에 관해 연구하면서 자신이 사랑한 마리라는 사람을 되살리는 방법도 함께 찾고자 했던 것 같았다.

“오, 정말 여기 문이 있어요! 근데 너무 작은데?”

“기어서 나가야 되나 보다. 관절에 안 좋은데….”

책상 밑에 있던 꽤 커다란 서랍을 치우자 정말 기어서 나가야 할 것 같은 작은 문이 나왔다.

그리고 그 문에는 세 자리 숫자를 입력해야 하는 자물쇠가 걸려있었다.

“이거 비밀번호는 어디서 찾아야 하지?”

“524일 거예요.”

“어? 열렸다!”

“어떻게 알았어?”

자물쇠가 딸깍하고 열리자 찬이가 신기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봤고, 어깨를 으쓱하고 대답해 주었다.

“수첩에 마리라는 사람 생일인 5월 24일에 꽃다발을 선물했다는 내용이 있었어.”

“어휴, 진짜 그 수첩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그렇게 우리는 무사히 밖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밖으로 나왔을 때, 사방에서 쏟아지는 환한 빛에 정신이 멍해졌다.

“탈출 성공!”

“와아!”

“성공했어요!”

제작진의 탈출 성공이라는 외침에 우리는 서로를 껴안고 방방 뛰었다.

그러고 나니 한동안 시간의 흐름도 못 느끼고 움직인 터라 긴장이 풀리자마자 힘이 쭉 빠졌다.

결국 바닥에 주저앉은 내 옆에 세빈이랑 찬이도 같이 주저앉아버렸다.

엉망인 꼴로 환히 웃고 있는 우리 옆으로 우진 형이 달려왔고, 여기저기 우리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괜찮아? 다친 데는 없지?”

“네! 멀쩡해요!”

“재밌었어!”

잠깐 숨을 돌린 우리는 우진 형이 건넨 수건으로 몸을 털어내고 물티슈로 얼굴을 대충 닦았다. 조금 있다가 옷을 싹 갈아입어야 할 것 같았지만 인사를 먼저 드려야 했다.

같이 탈출한 두 형님과 PD님, 조연출, 카메라 감독님 등등 사방에 보이는 모든 스태프들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고 한 바퀴 다 돌고 난 후에야 우리 차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을 수 있었다.

“우진 씨, 이런 친구들을 어디서 데려온 거야?”

“하핫, 저희 애들이 제법 열심히 잘하죠?”

“캐릭터 성도 강하고 리액션도 좋고. 걱정했는데 기우였어. 내가 아주 예감이 좋아. 딱, 예나가 나왔을 때도 이랬거든.”

“어휴, 정말 예나 씨 만큼만 인기몰이하면 아주 바랄 게 없죠.”

차 밖에서 김악규 PD가 흡족한 목소리로 우진 형에게 우리 칭찬을 하고 있었다. 티셔츠를 새로 꺼내 입던 우리는 서로 눈이 마주쳤고, 씩 웃었다.

“우리 잘한 거 같지?”

“가서 형들한테 자랑해도 되겠다.”

“안 그래도 단톡방에 메시지 장난 아니야.”

마저 옷을 챙겨 입은 우리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서로를 바라보며 소리 죽여 웃느라 바빴다.

배가 정말 미칠 듯이 고팠지만, 기분이 너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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