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94)화 (94/456)

94. CHEER UP(2)

세 명의 멤버가 미궁 탈출의 촬영으로 혼이 쏙 빠질 것 같은 시간을 보내는 동안, 하준과 영빈, 경환은 무사이 때 진행할 무대를 준비하며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무언가 임팩트를 주고 싶다는 멤버들의 이야기를 들은 회사 사람들은 대사 없이 진행되는 무성극과 그림자 연극을 접목해 하나의 새로운 극으로 표현해보라 조언해주었다.

덕분에 하준과 경환은 무성극을 도와주실 극단 분들을 통해 직접 극에 참여하기로 하고 연습에 몰두하고 있었다.

영빈은 그림자로 표현되는 장면에서 쓰일 곡을 고르며 직원들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하준과 경환은 극이 끝난 후 부르기 위해 만든 곡도 계속해서 듣고 연습에 몰두했다.

아이돌 그룹에서 이런 시도가 얼마나 먹힐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멤버들이 해보고 싶다고 의견을 냈다는 것 자체로 소현 팀장은 만족하기로 했다.

김준현이나 세진, 김진수의 연륜과 실력에 비하면 아직 멤버들의 경험이 많이 부족했고, 연기로는 전문 배우들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화려한 퍼포먼스로 분위기를 만들기에는 언래블이 선택한 이야기의 내용이 맞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히 박세날 PD가 계획서에 긍정적인 모습을 표했고, 중간중간 연습 과정을 담기 위해 방송국 카메라가 왔다 가기도 했다.

“잘 돼가요?”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애들이 열심히 하는 걸 보니 보기 좋네요.”

“미궁 탈출 쪽은 별다른 얘기 없고?”

“네. 우진이가 따라갔는데 지환이랑 세빈이가 똘똘한 모습을 보이고 있대요.”

소현 팀장 옆에 선 정윤 실장은 몇 가지를 더 묻더니 소현 팀장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우리 애들 잘하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요.”

“네, 그럼요. 우리 애들인데.”

시선이 마주치자 살포시 웃어 보인 둘의 얼굴에는 언래블에 대한 신뢰가 담겨있었다.

한 가지, 두 사람이 예상하지 못한 게 있다면 본인들의 생각보다 지환이가 훨씬 더 겁이 많다는 것이었다.

* * *

“세빈이가 관찰력이 좋네!”

“세빈아, 잘했어!”

“운이 좋았어요.”

류진호와 찬이가 세빈이를 칭찬하자 목덜미가 붉어지면서 부끄러워하던 세빈이는 아무렇지 않은 척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어두워서 안 보이겠거니 했지만, 안타깝게도 들어간 방이 환해서 목덜미가 빨개진 세빈이 뒷모습이 모두에게 보였다.

“여기는… 뭔가 약물 같은 걸 만들던 곳 같죠?”

커다란 테이블 위에는 알 수 없는 숫자와 기호, 모형들이 그려져 있는 종이가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고, 한쪽에는 다양한 비커와 삼각 플라스크 등 실험실에 있을 법한 것들이 놓여 있었다.

수첩을 뒷주머니에 꽂은 나는 한쪽에 세워진 칠판을 관찰하기 시작했고, 찬이는 창문들이 모두 잠겨있는 걸 확인하더니 벽면을 가득 채운 책들을 바라보았다.

“보통 이렇게 책 많은 데는 비밀 공간 같은 거 숨겨놓고 그러지 않아?”

“그게 가장 흔한 클리셰긴 한데….”

찬이가 나에게 물어서 대꾸는 해주었지만 내 신경은 온통 칠판에 적힌 다양한 메모들에 쏠려 있었다.

찬이 말에 혹한 류진호는 둘이 의기투합이라도 했는지 책장의 책을 이리저리 뺐다가 집어넣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고, 어딘가 모르게 기시감이 느껴진 나는 칠판 앞에서 생각에 잠겼다.

“영주산에 서불이 다녀간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봉래산의 다른 말은 금강산으로….”

스토리 전개상 불로초에 대한 설화를 중간 메모해둔 것으로 보이는 칠판에는 어쩐지 의미를 알 수 없는 숫자들이 적혀있었고, 수첩에도 같은 숫자가 한 페이지에 적혀있었지만… 머리만 아파지고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맥거핀인가?”

“맥거핀이 뭐예요?”

“뭔가 그럴싸하게 의심 가게끔 만들어놨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속임수를 말하는 거야. 히치콕 감독이 고안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세빈이의 물음에 답해주며 칠판에서 시선을 돌려 방안을 둘러보니 둘은 아직도 책을 빼느라 여념이 없었고, 이영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플라스크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책상 서랍은 모두 잠겨있는데 이유 없이 잠가놓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어딘가에 열쇠가 있거나 무언가 해야 열리는 거겠지?”

“지환아, 이리 와봐.”

“네!”

어느새 편하게 대해주는 이영진의 곁으로 다가갔더니 그가 책상에 새겨진 그림들을 가리켰다.

“아까 문에도 이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잖아. 근데 여기에 또 이게 새겨져 있다는 건 뭔가 숨겨진 게 있다는 소리 아닐까?”

“책장은 아무래도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책을 다 빼봤는데 비밀 방 같은 게 안 나오네.”

류진호도 이영진의 옆으로 오더니 책상에 새겨진 그림들과 비커를 유심히 보더니 하나를 들어 올려 바닥을 살폈다.

“이것 봐, 내 이럴 줄 알았어!”

“뭔데, 왜?”

“여기 밑에 똑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어!”

류진호의 외침에 우리는 모두 테이블에 달려들어 모든 물건의 바닥을 확인했다. 그러나 그림이 그려진 것들만 모아서 한쪽으로 빼놓은 이후, 추리가 더는 진행되지 않고 다시 막혔다.

우리가 책상 위를 뒤지는 동안 책장을 유심히 지켜보던 세빈이는 책들의 제목을 중얼거리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빠지는 듯하더니, 급하게 몇 권의 책을 빼기 시작했다.

“어?”

그리고 마지막 책을 빼내는 순간, 책장이 옆으로 밀리면서 숨겨진 공간이 드러났다.

“헐.”

“이건 또 무슨….”

찬이와 류진호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책장을 바라보자 세빈이가 천진한 목소리로 설명을 덧붙였다.

“저기 책들 보면 대부분이 양장본인데 일부만 페이퍼백 형태더라고요. 고풍스러워 보이는 이 저택이랑은 어울리지 않아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양장본은 알겠는데 페이퍼백은 또 뭐야….”

골치가 아프다는 듯 중얼거리는 찬이에게 책 표지의 차이라고 짧게 설명을 해준 나는 잠깐 책장을 바라보고 일행의 뒤를 따라 숨겨진 방에 들어갔다.

그 안에는 커다란 괘종시계가 놓여 있었고, 고장 난 건지 시간은 멈춰있었다.

낡은 종이들이 수북하게 바닥에 쌓여 있었고, 군데군데 핏자국처럼 검붉은 무언가가 말라붙어 있어서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아, 밖에 그게 여기에 쓰는 거네.”

이영진이 이제야 알았다는 듯 탄성을 지르며 찬이를 끌고 방 밖의 테이블에서 그림이 그려져 있던 플라스크들을 들고 들어와 방 안쪽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이거, 그 무게 맞추는 그거잖아?”

“이런 거는 쉽지. 이건 우리가 할게. 힘찬이도 우리랑 같이하자.”

고맙게도 이영진이 찬이를 챙기면서 분량을 뽑게 해주려는 것 같았다.

사실 포잉을 구슬리면 진작에 가장 빠른 탈출로를 찾아서 여기를 나갈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면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상황이 될 것 같아 도움을 구하지 않았다.

“형, 그… 기분 탓인 거 같긴 한데요….”

“응? 세빈아, 왜?”

꺼림칙하지만 어떤 단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종이들을 뒤적거리던 나에게 세빈이가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왠지 모르겠는데 저 시계에서 시선이 느껴지지 않아요…?”

“어…? 세빈아, 기분 탓이야…. 하하.”

듣지 않아도 되었을 무언가를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형이 되어서 동생에게 기죽은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내가 들어도 내 웃음소리는 참 공허했다.

“형이 시계 확인할게.”

“같이 가요!”

이영진과 류진호, 찬이는 무언가 만지느라 바빠 보여서 나와 세빈이가 손을 꼭 잡고 문제의 괘종시계 앞으로 다가갔다.

“시계 앞면에는 보통 추가 달려있는데, 이거는 서랍처럼 잠겨있네. 하하….”

다른 말로는 ‘이거 열어야 할 것 같은데 열고 싶지 않아.’

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럽게 시계 앞면의 손잡이를 잡아당겨 보았지만, 다행히 잠겨있었다.

“형, 밑에도 잠겨있어요.”

“이거 그거 같은데.”

비밀 공간 밖의 책장을 스쳐 지나가듯 봤던 것을 떠올리며, 나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페이퍼백을 빼고 난 빈자리와 책 커버들의 색이 미묘한 느낌을 주길래 뭘까 했더니… 이걸 말하는 것 같았다.

빈자리가 시계의 시침과 분침처럼 어떤 방향을 나타내고 있었고, 그 시간은 ‘6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내 예감이 저 문을 열면 무언가 튀어나올 것 같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열지 않을 수도 없었다.

“됐다!”

“열쇠 찾았어!”

3명이 분주히 움직이던 테이블 쪽에서도 무언가 성과가 있었는지 열쇠를 들고 왔고, 세빈이가 방금 발견한 것들을 설명했다.

“내가 열까?”

“…그럴래?”

결국 나는 힘찬이에게 시곗바늘을 맞추는 일을 미루고 뒤쪽으로 슬금슬금 도망갔다.

“맞출게요?”

“응!”

“찬이 용감하다!”

“멋있다! 남자네!”

힘찬이 뒤에 겁쟁이 3명이 뭉쳐서 응원하는 모습이 매우 서글펐지만 어쩔 수 없었다.

뭐라도 튀어나오면 소리 지르고 도망갈 것 같았는걸.

힘찬이가 바늘을 돌려 시간을 맞춘 그 순간 딸각 소리가 들려왔고, 찬이가 긴장한 채 시계 아랫부분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갑자기 전체 불이 깜박거리기 시작하더니 문이 활짝 열리자마자 모든 조명이 꺼졌다.

“으악! 뭐야!”

“부, 불! 왜 꺼지는 건데!”

불이 꺼지자마자 이영진과 류진호, 나는 소리를 지르며 호들갑을 떨었고, 그 사이로 힘찬이의 힘 빠진 목소리가 들렸다.

“와씨, 놀라라….”

하나도 안 놀란 거 같은데?

“밖에서 손전등 본 거 같아요. 제가 가져올게요!”

“안 보여서 위험해!”

이영진의 팔을 구명줄처럼 꼭 붙잡고 있던 내가 소중한 우리 막내에게 소리쳤지만, 괜찮다고 손을 팔랑이던 세빈이는 휘적휘적 잘도 걸어갔다.

처음에는 갑자기 불이 꺼져서 너무 놀랐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니 이 어둠에도 익숙해져서 대략 형태는 구분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크흠, 우리만 놀란 것 같네.”

“그러게요….”

“그래도 언래블에도 우리 과가 있어서 다행이네.”

의도치 않게 두 고정과 동질감을 느끼게 된 나는 허공을 더듬어가며 힘찬이로 추측되는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찬아, 혼자 거기 있지 말고 이리 와.”

“응? 나 여기 있는데?”

방금 나는 앞쪽에서 어떤 셔츠 자락을 잡았는데, 찬이 목소리는 뒤에서 들려왔다.

“어…? 그럼 이건 누구 옷….”

손을 덜덜 떨면서 차마 옷자락을 놓지 못하고 일행 쪽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타이밍 좋게 손전등을 찾아온 세빈이가 나를 비췄다.

그리고 내 앞에는 낡고 해진 옷을 입은 새하얀 해골이 입을 벌린 채로 덜컹거리고 있었다.

“…!”

“으아악!”

“김악규 이 새끼야!!”

비명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옷자락을 쥔 채로 굳어있는 나를 곱게 떼어 내준 건 힘찬이었다.

사람이 많이 놀라면 비명도 안 나온다던데, 나는 오늘 그 사실을 실감했다. 그저 선 채로 기절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나 자신을 칭찬해 줘야 할 것 같았다.

세빈이랑 힘찬이가 나서서 스위치를 찾고 불을 켜는 동안 찐한 동료애가 생긴 두 MC와 나는 해골과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주저앉아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내가 나가기만 하면 김악규 이놈 자식, 진짜 가만 안 둘 거야.”

“형님, 참으세요…. 집에서 한별이가 기다립니다.”

“한별아, 아빠가 이렇게 돈 번다!”

이영진은 PD를 향한 진한 원망을 드러내며 울 것처럼 중얼거렸고, 류진호는 그런 이영진을 달래며 집에서 기다리는 딸내미를 떠올리라고 다독였다.

가장의 회한이 담긴 외침에 근거 없는 동질감으로 가슴이 뭉클했다.

내가 언래블 때문에…!

우리 셋이 바닥에 쪼그려서 호흡을 가다듬는 사이, 세빈이랑 찬이는 해골 모형을 뒤적거리며 증거가 될만한 것들을 수집하고 있었다.

“언래블은 참… 용감하구만….”

“저희 애들이 좀….”

“지환이 너 빼고.”

“아, 형님….”

다른 건 모르겠지만 이 인원 중에서 내가 제일 쫄보에 하찮은 이미지로 굳어질 것 같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이미지, 그냥 그거 버리자. 무사히 탈출하는 게 더 중요하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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