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너나 잘해(5)
홀로 남은 하준 형은 천천히 가면을 벗으며 또렷한 눈으로 객석을 응시했다.
헤매는 것도, 주저하는 것도 괜찮을 줄 알았다는 가사를 나지막이 읊조리며 다음 파트를 불러줄 경환 형의 손을 잡아 일으켰고, 경환 형이 거칠게 가면을 벗어던지며 자신의 파트를 받아 갔다.
중심에 서 있던 하준 형은 각자의 파트가 시작되어야 할 부분마다 한 명씩 손을 뻗어 멤버들을 일으켰고 새로운 사람이 무대에서 일어날 때마다 먼저 일어난 멤버들이 그 뒤를 받쳤다.
뮤직비디오에서 다 같이 만난 이후에서야 웃을 수 있었고, 그 후에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것처럼, 한 명씩 서로를 만나가는 과정을 표현하는 안무였다.
처음 우리가 무대를 했던 것과는 다른 시작이었지만, 이렇게 하면 우리가 전하려는 메시지가 조금 더 명확해지지 않을까 하면서 고심 끝에 안무를 조금 바꿨다.
다만, 나는 처음 그 파트에서 몸을 일으키며 한쪽으로 빠져 의자에 앉아야 했다.
춤을 전부 빼자니 너무 아쉬워서 앞에 인트로만이라도 들어가면 안 되겠냐고 팀장님을 졸라 간신히 얻어낸 파트였다.
의자에 앉은 나는 솜뭉치들과 간간이 눈을 맞추며 웃어주었고, 그들의 눈에 맺혀있는 안타까움을 알기에 괜찮다고 그저 고개를 끄덕여 주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영빈 형이 사람 관계의 상처를 애달픈 목소리로 원망하듯 노래하며 무대의 중앙에 무릎을 꿇고, 하준 형과 경환 형은 양쪽에서 영빈 형의 어깨를 잡아 뒤로 밀어낸다.
둘의 뒤에 있던 세빈이가 영빈 형의 등을 받쳐주며 반 바퀴 돌아 중앙에 나서 노래하는 동안 네 명의 멤버들은 일렬로 서서 순차적으로 품에서 가면을 꺼내 다시 쓰는 듯한 모션을 하다가, 마지막으로 세빈이가 자신의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장면을 만들어 냈다.
원래는 내가 받아줘야 했던 파트였다.
이후 아무런 스케줄이 없었다면 치료 시간이 더 걸리고 더 아파지는 한이 있어도 하게 해달라고 했겠지만, 당장 다음 주 중반부터 두 개의 프로그램 촬영을 시작해야 해서 더 욕심낼 수가 없었다.
“I'm OK. Are you all right?”
솜뭉치들과 멤버들이 내게 묻고
“이 말을 믿는 사람이 있었네.”
그 질문에 내가 답을 했다.
“I'm OK. Are you all right?”
그 후에는 내가 물었고,
“그래, 괜찮아. 아무것도 아닌 거니까.”
솜뭉치들과 멤버들이 답했다.
눈앞을 오가는 조명들과 응원법을 목청껏 따라 하는 솜뭉치들 모습에, 멤버들이 땀을 흘리며 무대 위를 뛰어다니면서도 눈을 마주칠 때마다 웃었다.
“괜찮지 않아도 되니까, 그냥 해볼게. 웃어볼게.”
찬이와 경환 형이 자기 파트를 소화해내며 하준 형을 중심으로 무대 한쪽 끝부분으로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내내 둘을 따라다니던 조명이 꺼지고 무대는 한층 더 어두워졌고,
“두려워서 눈물이 맺히겠지만 그래도 믿을게.”
세빈이와 영빈 형이 속삭이듯 작은 희망을 말하며 찬이 반대쪽 장막 뒤로 사라지면서 둘을 비추던 조명도 사라졌다.
“아무리 커다란 두려움이어도, 우리는 같이 있을 테니까.”
의자에 앉아있는 내가 노래를 부르는 사이 무대는 더 어두워졌고 내 파트가 끝남과 동시에 내가 앉아있던 자리의 조명도 꺼졌다.
처음처럼 홀로 무대 위에 서 있던 하준 형은 점점 줄어드는 조명 아래 우두커니 있다가 거의 조명이 꺼지는 시점에 한껏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사실… 괜찮지 않았었어.”
그와 동시에 조명이 모두 꺼졌고 조용히 하준 형도 무대에서 퇴장했다.
곡이 끝남과 함께 커다란 솜뭉치들의 함성이 무대 뒤에까지 들려서 다음 의상으로 갈아입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웃음이 나왔다.
“얘들아, 잘했다! 지환이 다음 곡부터는 절대 일어나지 말고!”
“네, 알았어요.”
무대에서 내려오자마자 스태프들이 달려와 내 다리를 살피고 보호대를 다시 한번 조이는 등 조치를 취하는 동안 대기 중이었던 서포트 팀의 메이크업과 헤어, 코디 담당하는 스태프분들이 달려와 다시 꽃단장을 해주셨다.
“힘찬아, 가만있어!”
“넵!”
그사이를 못 참고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힘찬이를 메이크업 담당자분이 쫓아가는 일, 자기 립밤이 없어졌다고 하준 형이 떠돌아 다니는 일 등 작은 해프닝이 있었지만, 다행히 금방 정리되었다.
그 후에 이어진 ‘어쩌면’과 ‘점멸’은 조금 쓸쓸한 느낌의 잔잔한 곡이어서 멤버들은 스탠딩 마이크로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나는 무대 한 쪽에 놓인 의자에 앉아있어야 했다.
모처럼 기쁜 마음으로 편하게 우리 팬들과 소통하고 즐길 수 있는 타이밍이었는데 그걸 다 망쳐놓은 망둥이 새끼를 향한 분노가 다시 한번 치밀어 올랐지만 꾹꾹 눌러 참으며 표정에 신경 썼다.
혹시라도 내 표정이 안 좋아지면 다친 다리 때문이라고 솜뭉치들이 오해하고 속상해할까 봐.
더불어 사진이라는 게 찍은 사람의 의도와 다르게 누군가는 악의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는 걸 이전 삶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모든 상황을 대처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최대한, 할 수 있는 만큼은 하고 싶었다.
‘점멸’까지 노래가 끝난 후 무대 위에 준비 되어 있던 생수를 마시는 멤버들 사이로 하준 형이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환하게 밝혀진 덕에 기뻐하는 솜뭉치들의 얼굴이 잘 보였고, 방금까지 망둥이를 향해 치솟았던 분노는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여러분, 이제 마지막 곡이에요.”
“안돼!”
“가지 마, 얘들아!”
“여러분들이 열심히 응원해 주시면 저희가 대표님을 꼬셔서 조금 더 시간을 끌어볼게요!”
“와아! 언래블 최고다!”
하준 형의 멘트에 마지막인 줄 알고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구르는 던 솜뭉치들은 여지를 남기는 듯 한 말에 더 큰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지금 부를 노래는 오늘 처음 선보이는 곡이에요.”
“지환이가 여러분들에게 꼭 선물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뼈대를 잡긴 했지만 결국 다 같이 도와줘서 만들었어요!”
경환 형과 찬이가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누는 사이 내가 한마디를 보탰고 새로운 곡의 발표라는 말에 잠시 조용했던 객석에서는 다시 환호성이 들려왔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요! 시작할게요!”
통통 튀는 듯한 앞부분의 전주가 끝나자 발랄한 멜로디와 함께 세빈이와 찬이가 앞으로 나가 안무라기보다는 율동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며 노래했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무서웠어.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내가 어떻게 말을 해야,
은하수가 잠들어 있는 네 눈동자가
더 찬란히 빛을 발할 수 있을지”
짧은 율동이 끝나자 무대 가운데 놓인 의자에 앉은 내 주위로 멤버들이 모여와 각자 객석을 향해 손가락으로 하트를 만드는가 하면 머리 위로 손을 들어 좌우로 흔들기도 했다.
“더없이 투명한 그 시선 안에 우리가 있는지,
너와 나 그래서 우리가 될 수 있는 건지.
The truth is I’m in a little bit of a funk.
그리고 이젠 비밀이 아냐, 네게 고백할 거니까.”
시원한 영빈 형의 고음과 함께, 모든 멤버들이 함께 솜뭉치들에게 외쳤다.
“여섯 송이 새하얀 백합을 들고,
부는 바람에 살랑이는 네 뒷모습을 보고 있어.
Can you please stay with me?
너와 내 눈이 마주치는 이 순간,
오직 진실만을 말하게 되는 마법.”
앞으로도 언제나 함께 있어달라는, 언래블이 솜뭉치에게 하는 요청, 약속, 그리고 기도.
비록 무대 위를 멤버들과 함께 뛰어다닐 수는 없었지만, 무대 뒤편 스크린에 출력되는 가사를 따라 부르는 솜뭉치들이 고마워서 활짝 웃을 수 있었다.
“우리 솜뭉치들 천잰가 봐!”
“잘한다!”
파트 사이사이 추임새까지 넣어가며 신나하는 멤버들 모습과 함께 노래는 마지막을 향해 달렸다.
“내 이름을 불러줘, 알고 있잖아.
내가 대답할게, 단 하나의 답을.
영원이 아닌 마지막을 말할게,
너는 처음부터 내 마지막이었어.”
신나고 통통 튀던 멜로디가 조금씩 잦아들자 멤버들은 한 단락씩 마음을 털어놓듯 속삭이며 마지막 구절을 고했다.
이윽고 모든 멜로디가 끝나자 솜뭉치들이 더 커다란 함성과 함께 우리 이름을 불러주었다. 멤버들도, 나도 마이크를 든 손을 내리며 객석을 향해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노래로 전했던 우리 질문을 솜뭉치들이 대답해 준 것 같아서 심장이 기분 좋게 두근거렸다.
“솜뭉치들아! 사랑해!”
“우리도 사랑해!”
흥에 겨웠는지 찬이가 객석을 향해 외치자, 기다렸다는 듯 대답이 흘러나왔고, 멤버들 모두가 내가 앉은 의자 옆으로 다가와 하준 형의 신호에 맞춰 커다란 하트를 만들었다.
가수는 무대로, 노래로 팬들이 보내주는 사랑에 보답해야 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
했었고, 오늘 아주 조금이지만 그 보답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아쉬워하며 다른 노래도 듣고 싶다는 몇몇 솜뭉치들의 목소리를 못 들은 척 웃었다.
이제 부를 곡은 솜뭉치들에게 깜짝 선물로 준비된 무대였으니까.
멤버들이 손을 흔들며 퇴장하는 척 무대 아래로 내려갔다가 걸치고 있던 재킷을 교복 느낌으로 커스텀 한 재킷으로 갈아입고 힘찬이 가 혼자 고개를 빼꼼 내밀고 외쳤다.
“끝난 줄 알았지!”
“꺄아아!”
“진짜 마지막 곡이에요!”
청량한 느낌과 풋풋한 느낌을 함께 주는 졸업식은 이미 공개되었던 곡이었기에 솜뭉치들도 곧잘 따라 불렀고, 노래 파트를 솜뭉치들과 주고받으며 부르다 보니 재밌는 일도 생겼다.
영빈 형과 내가 함께 질러야 하는 고음 파트에서는 솜뭉치들이 환호성만 지를 뿐 따라 부르지 않아서, 경환 형이 큰 소리로 물었다.
“왜 여기는 안 해요?”
“거긴 우리가 못해!”
“힘든 건 안 할 거야!”
“그런 게 어딨어!”
잘 묻어가고 흘릴 줄 아는 걸 보니 우리 솜뭉치들은 사회생활도 잘할 것 같았다.
즐기던 시간이 끝나자 무대 뒤에 의자가 멤버들 수만큼 더 놓였고, 모두 자리에 앉은 후에야 분위기가 진정됐다.
“여러분, 재밌었어요?”
하준 형 대신 영빈 형이 입을 열었고, 방금 전까지 뛰어다닌 탓에 빨갛게 열이 오른 멤버들에게 물을 나눠주었다.
“우리는 엄청 재밌었어요!”
“이대로 쭉 같이 놀고 싶다!”
아직 흥이 덜 가라앉은 세빈이랑 찬이가 말하자 착한 솜뭉치들은 그걸 또 환호성으로 받아줬다.
너무 받아줘 버릇하면 애들 버릇 나빠지는데.
잠시 머릿속에 엉뚱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까지 객석에서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던 포잉이 천천히 걸어 무대 위에 올라왔다.
솜뭉치들과 짧은 대화를 몇 번 주고받은 멤버들을 하준이 진정시키며 말했다.
“오늘 와준 솜뭉치들이 너무 고마워서 저희가 작은 선물을 준비했어요.”
“집에 갈 때 꼭 하나씩 받아 가야 돼요!”
“그리고 아까 뽑기로 질문하셨던 솜뭉치분들은 나가지 말고, 저희 스태프분들에게 잠시 모여주세요!”
한마디씩 거드는 멤버들 모습에 나도 의자에서 일어나 솜뭉치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오늘 와줘서 너무 고마워요! 우리 다음에 또 놀아요!”
우리가 준비했던 작은 축제의 첫날이 행복하게 끝나가는 순간이었다. 더불어 모두가 아쉬움을 담아 서로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남길 수 있었던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