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우연이 아니야(5)
“지환아, 어제 덕분에 잘 먹었다!”
“에이, 뭘요. 늘 감사합니다!”
“크, 우리 애들이 참 착해.”
공돈으로 치킨 한번 돌렸을 뿐인데 회사 내의 직원분들이 우리 멤버들을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아직 정산도 못 받은 신인들.
가능성은 있는데 더 잘 클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그룹.
잘 되는 것 같은데 확 붙지는 않고, 그래도 벌써부터 코어 팬층이 모이는 것 같아서 잘만 하면 크게 성공할 것 같은 아이돌.
회사 내에서 우리를 따라붙는 꼬리표는 늘 미묘했다.
덕분에 무사이 미팅을 통해 얻은 미션을 상의할 때도 번번이 적당히 대꾸해 주는 대답만 들었었다.
물론 그때 회사가 한번 크게 뒤집힐 뻔했다는 건 나중에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 처지가 조금 애매한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치킨을 한번 돌렸더니 고만고만했던 직원들의 시선에 조금씩이지만 호의가 깃들었다.
“우리 지환이가 기특한 일을 했다며?”
“대표님, 안녕하세요! 이왕이면 다 같이 맛있는 거 먹어야죠.”
“그래, 기특하네. 잘했다. 어차피 이제 다 한 식구니까 서로 잘 지내는 게 좋지. 사무실 직원들이 서포트 잘 해줘야 너희도 밖에서 활동에 전념할 테고.”
이제 다 한 식구라는 말이 묘하게 가슴에 남았다.
한 식구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은 모두 쳐냈다고 자동 번역돼서 들리는 것 같달까.
외부 일정이 없을 때는 단체로 춤과 보컬, 체력 단련을 하고 그 외 시간은 각자 상황에 맞는 레슨을 받거나 곡 작업을 했다.
곡 작업에 신경을 더 쓰고 싶었던 나는 버릇처럼 5작업실로 찾아왔고 그곳에 뜬금없이 대표님이 온 건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커피 보내준 건 잘 마셨다. 곡 작업은 잘 돼가?”
“별말씀을요. 음… 열심히 하고 있는데 잘 모르겠어요.”
각 실에는 치킨을 쐈지만 대표님과 실장님들한테는 따로 커피 쿠폰을 사서 보냈다. 치킨도 물론 갔고.
사회생활 잘해야 앞으로 우리 언래블을 더 빵빵하게 지원해 주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마음이었지만, 원래 사람은 받으면 괜히 신경 쓰여서 주고 싶기도 하고 그러니까.
“소현 팀장한테 들었는데 작업실을 꾸미고 싶어 한다고.”
“아, 넵. 장비는 저렴한 걸로 제가 어떻게든 꾸려볼 수 있는데 장소가….”
“흐음. 제대로 해보고 싶은 거냐?”
대표님의 눈에는 호기심이 반짝였다.
골칫덩어리였는데 호기롭게 데뷔할 거라고 하던 놈이 느닷없이 곡도 한 곡 팔았다.
거기다 그룹 활동에도 꽤 열심히 하고 있어서 평이 나쁘지 않다는 소리도 전부 대표님 귀에 들어갔을 터.
“네. 제대로 하고 싶어서 프로듀싱도 차근차근 배우고 있어요.”
“에단도 꽤 좋은 평을 내렸던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하죠. 선생님께는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평가받는다는 건 늘 목이 바짝바짝 마르고 손, 발끝이 파르르 떨리는 일이지만, 아이돌이 되기로 한 이상 늘 평가받는 입장이 되어야 했다.
이런 긴장도 익숙해져야 한다는 소리였다.
“아주 좋은 장비로 꾸려주기는 힘들다. 알지?”
“작업실로 쓸만한 곳만 주셔도 감지덕지죠.”
“인마, 그래도 내 체면이 있지. 어떻게 빈방만 덜렁 주냐.”
꿀밤을 매길 것처럼 손을 드는 대표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잔뜩 묻어났다.
“준비해두라고 정윤 실장님한테 얘기해둘 테니까 완성되기 전까지는 비어있는 작업실 쓰고.”
“넵! 감사합니다!”
“잘 못한다 싶으면 뺏을 거다. 알지?”
“헤헤, 그럼요. 잘해야죠.”
“고생한다. 치료 꼭 잘 받고.”
앞으로 더 많은 곡을 만들고 더 많은 실적을 쌓아야 주어질 줄 알았던 내 작업실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방싯방싯 웃으며 대표님께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하자 되려 날 부축해서 의자에 앉혀주셨다.
다친 다리 쪽으로 시선이 가는 것을 보아하니 걱정하셨던 모양이었다.
항상 가까이에서 우리를 챙겨주는 우진 형이나 소현 팀장님과 달리 대표님은 내가 따로 만날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보니 내게는 마냥 어렵고 멀기만 한 사람이었다.
새벽 형들과의 모습을 보면 좋은 사람인 것 같았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으니까.
그랬던 대표님이 직접 찾아와 걱정하고 챙겨주는 모습에 괜히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대표님이 어깨를 토닥여주고 사라진 후, 나는 다시 모니터에 시선을 던졌다.
어제 잠깐 떠올랐던 생각들을 잊어버리지 않으려 저장해 뒀던 메모를 불러오고 다시 한번 앨범을 틀어놓고 우리가 전하려 했던 이야기를 곱씹었다.
이야기의 흐름을 떠올리며 생각나는 대로 휘갈겨 적기 시작했다.
가영 형이 이런 작업을 스케치한다고 했던 것 같았는데.
가장 두려웠던 건 사람, 관계, 그리고 그 안에서의 감정들과 편견.
그게 확장되면서 막막한 미래가 두려웠고 맨몸으로 부딪혀야 할 세상이 두려웠다.
지켜주는 울타리가 없었던 우리가 서로의 울타리가 되어서 우리만의 낙원을 찾으려 했지만 결국 한계(가면)에 부딪히고 더 크게 무너지게 된다.
그 후에 찾아오는 건 허탈함과 분노.
대체 왜 나한테 이러는 거냐고 허공에 외치고 욕하고 발버둥 치고 울면서 주변에 물건을 부수는 게 고작인 발악.
내가 이번에 만들어보고 싶은 건 이런 발악이었다.
틈나는 대로 포잉의 도움을 받아 요정족의 기계를 이용해서 가상의 공간에서 곡을 만들고 부수고를 반복했던 게 꽤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 공간에서 만든 것들을 밖으로 꺼내오는 건 지금 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지만, 이미 한번 만들었던 것들은 내 머릿속에 남아있어서 괜찮았다.
전체적인 사운드는 낮고 묵직하게, 보컬 라인이 들어가야 할 멜로디는 애절하게 진행될 것을 생각하며 손을 놀렸다. 오디오 인터페이스를 통해 여러 번 소리를 반복해서 듣기도 하고 마이크로 허밍을 넣어 느낌을 살려보기도 했다.
멜로디만 입힌 부분과 대충이라도 목소리가 들어가는 부분의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 똑똑
“네.”
“얼마나 집중을 하면 몇 번을 두드려야 알아듣냐.”
“아, 그랬어요?”
한참을 집중하고 있었던 탓에 노크하는 소리도 못 들었던 모양이었다.
조금 뻘쭘해져서 들어온 하준 형에게 어설프게 웃어 보이자 형이 머리를 헝클었다.
“팀장님한테 들었다. 대표님이 작업실 해준다고 하셨다며?”
“넵. 설레 죽겠어요. 으하하”
“이상하게 웃지 말고 인마.”
난 원래 내 공간, 내 것에 많이 집착하는 편이어서 5작업실이 익숙하다고는 했지만 늘 남의 것을 빌려 쓰는 기분이라 불편함이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내 공간을 만들어 준다고 하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지.
“팀장님이 티저 만든 거 확인하자고 오라고 하셨어.”
“아아, 이거 저장만 하고 같이 가요.”
“안 그래도 너 데려가려고 왔다.”
아직까지는 조심하는 편이 좋다는 의사 선생님의 소견 탓인지 혼자 어느 정도 걸을 수 있었지만 늘 멤버들이나 우진 형이 이동할 때면 쫓아와서 부축해 주곤 했다.
열심히 만지던 파일을 저장해 두고 하준 형에게 부축받아서 회의실에 도착하자 먼저 도착한 멤버들이 손을 흔들어 반겨주었다.
“누가 보면 며칠 떨어졌다 만난 줄 알겠네.”
“그러게 말이에요. 에휴, 이놈의 인간들.”
정작 그렇게 말하는 소현 팀장님의 얼굴에는 멤버들이 기특해 죽겠다는 미소가 매달려 있었지만 웃으면서 맞장구를 쳐주고 넘겼다.
“자, 원래는 홍보 겸 티저 영상을 직접 찍으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까 그건 물 건너갔잖아. 그래서 얘기가 나온 게 원래 첫 화 방송할 때 앞에 넣으려고 했던 짧은 애니메이션이 있거든. 반응이 괜찮으면 이걸 캐릭터 상품화해도 좋을 거라는 의견도 있고.”
회의실에 설치된 빔프로젝터에 노트북을 연결하면서 팀장님의 설명이 이어졌고, 한번 확인해보라는 말과 함께 동영상 파일 하나가 재생되었다.
검은색 배경 화면에 Unravel story라는 문구가 깜박이듯 나타나더니 점차 화면이 밝아지면서 문구는 그대로 녹아들 듯 사라졌다.
이윽고 나타난 건 평범한 주방의 풍경.
그리고 검은색 웍 쪽으로 초점이 맞춰진다 싶더니 그 안에서 작은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어?”
“뭐야, 저게 누구야?”
2D 게임 캐릭터 같은 게 통하고 튀어나오더니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동글동글한 연한 갈색의 눈과 밝은 갈색의 머리카락이 약간 곱슬거렸고, 꾹 다문 입매가 진지했다.
이윽고 주변에 아무도 없다고 판단했는지 활짝 웃는 양 뺨에는 보조개가 움푹 들어갔다.
“…저거 하준 형 미니미야?”
“하준 형 치고는 너무 귀엽지 않아?”
“하준 형 치고는 뭐냐.”
우리끼리 웅성대든 말든 화면 속 미니미는 휘파람을 불었고, 이윽고 사방에서 꼬물거리며 비슷한 미니미들이 튀어나왔다.
눈꼬리가 조금 올라가고 양쪽 쌍커풀이 다른 저 회색 머리 미니미는 나인 것 같았다.
“세상에…. 지환이가 귀여워 보이는 날이 오다니.”
내 옆의 힘찬이가 세상 무너지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길래 테이블 밑으로 다리를 툭 걷어찼다.
“윽.”
끙끙거리는 찬이를 무시하고 화면을 계속 바라보자, 이번엔 백발에 가깝게 색을 뺀 힘찬이의 머리카락과 같은 색을 가진 미니미가 무언가를 끙끙거리며 끌고 나왔다.
자기 몸통보다 두세 배쯤은 커다란 감자였다.
날카로운 눈매와 흑발을 한, 영빈 형을 닮은 미니미가 젓가락을 들고 왔는데, 미니미가 들고 있다 보니 젓가락이라기보다는 장대 높이 뛰기에 쓸 것 같은 크기였다.
“저걸로 뭐 하려고 저러지?”
옆에서 흥미로운 듯 눈을 반짝거리며, 세빈이가 영상에 집중한 상태로 중얼거렸다.
이윽고 영빈 형의 미니미가 힘찬이 미니미랑 같이 감자에 젓가락을 열심히 꽂더니 냄비와 냄비 사이에 솜씨 좋게 젓가락을 걸쳤다.
곧이어 콩콩하는 소리와 함께 짧게 친 머리에 코가 오뚝한 경환 형의 미니미가 감자 껍질 벗길 때 쓰는 칼을 끌고 와서는 감자에 툭하고 걸쳤다.
“저걸 어떻게 벗기려고….”
영상에 푹 빠진 모양인지 영빈 형이 중얼거리자 그 말을 듣기라도 한 건지 영빈 형과 하준 형의 미니미가 젓가락을 양쪽에서 잡고 고정시켰고, 세빈이와 찬이 미니미가 젓가락을 타고 감자 위에 올라갔다.
둘이 폴짝폴짝 뛰면서 감자를 굴리면 내 미니미와 경환 형의 미니미가 감자 칼을 요리조리 움직여서 껍질을 벗겨내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엇?”
그러다 아차 하는 사이 찬이 미니미가 미끌하더니 감자 껍질이 쌓여있는 무더기에 톡 떨어졌고, 그 모습을 본 다른 미니미들이 키득거리며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웃기 바빴다.
“와, 누가 만든 건지 모르지만 찬이 캐릭터 잘 구상하셨다….”
“우진이가 너희 성격을 작가님한테 잘 전달했지 뭐.”
우리 모습이 웃겼는지 팔짱을 낀 채로 느긋한 얼굴을 한 팀장님이 대답해 주셨다.
화면에 있는 미니미들은 찬이가 떨어진 직후 웃어서 삐진 건지 서로에게 감자 껍질을 던지면서 투닥거리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덜컹하는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란 미니미들이 후다닥 감자 껍질을 밑에 있던 쓰레기통으로 밀어내고 껍질을 벗기던 감자를 굴려서 도망가는 한편, 사용했던 도구를 낑낑거리며 숨기고 있었다.
여러 주방 도구 사이에 후다닥 숨고 나니 누군가 나타나 주방을 둘러보다 다시 주방 밖으로 사라졌고, 그제야 미니미들이 주방 도구들 사이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더니 씩 웃으며 화면에는 다시 한번 Unravel story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와, 이런 건 언제 만드셨대요?”
“리얼리티 얘기 나왔을 때부터 이미 구상하고 있던 거야. 캐릭터 상품은 잘 만들기만 하면 꽤 인기를 끌 수 있으니까.”
다들 만들어진 애니메이션 영상이 마음에 들었는지 들떠서 한마디씩 떠들기 시작했고 금세 회의실은 시끌벅적해졌다.
“우리 애들 안 같아서 귀여워.”
“그거 칭찬이야, 욕이야?”
“되게 잘 만들었어요. 멤버들 특징을 잘 잡았네요?”
“다른 버전도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멤버들이 한마디씩 던진 의견들을 간간이 메모하던 팀장님은 우리 반응이 매우 긍정적인 걸 확인하자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다른 용도로 쓰려던 건데 홍보 티저로 써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기뻐하는 팀장님 얼굴을 보아하니 팀장님이 의견을 제시했던 건인 것 같았다.
“솜뭉치들도 엄청 좋아할 것 같은데요?”
“근데 이거만 딱 나오면 아쉽긴 할 것 같아요. 다른 영상은 없는지 궁금할 거 같고.”
“반응 봐서 좋으면 나중에 추가로 제작할 건데 아직까지는 무리고.”
이제는 이전에 내가 알던 세계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는 언래블이었지만, 나는 이 모든 것들이 기꺼웠다.
더 많이 고민하고 더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 회사도 멤버들도 노력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잘 됐으면 좋겠어요.”
기분이 좋아진 나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