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74)화 (74/456)

74. 만만하니(3)

- 지환아, 통화 가능하니?

정윤 실장님이었다.

냉큼 전화를 받았더니 내 상황을 묻는 말이 들렸다.

잠시 주변을 둘러본 후 손으로 핸드폰을 가리켰더니 다들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아무래도 다른 회사 사람 전화를 듣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형들도 나도 서로에게서 최대한 멀어졌다.

구석에 자리 잡은 나는 저린 다리를 의자에 올려놓고 주물렀다.

“네, 실장님. 무슨 일이세요?”

짧지만 깊은 한숨 소리가 스쳐 지나가고 실장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 상황은 대충 정리가 되어 가는데 네 의견이 듣고 싶어서. 일단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건 지환이 너니까.

칼 같은 일 처리로 유명하다고는 하지만, 실장님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었던 건 이런 부분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아직 신생 그룹이니 회사에 이득이 되는 쪽으로 이야기를 풀었어도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억울해도 7년 계약 끝난 후에 재계약 안 하는 정도나 됐겠지.

“저는 팀이나 회사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면 다 상관없어요. 어차피 제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애들도 아니고.”

- 그래도 네 일이니 얘기 들어보는 게 낫지 않겠어?

“괜찮아요. 저는 실장님을 믿으니까요.”

- …쪼그만 게 입만 살아가지고.

“누가 저한테 물에 빠지면 입만 뜰 거라던데요?”

- 얼씨구, 말 안 해도 알겠네. 애들 회사로 보내주면 되지?

“넵. 이야기는 다 나누셨어요?”

- 아냐, 조금 더 있어야 할 거야. 아마 한 한 시간 정도 더 걸릴 것 같아. 돌아가서 보자.

“네. 조심히 오세요.”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옆에 내려놓자, 반대쪽 구석에서 나만 지켜보던 시커먼 형님들이 우르르 다가왔다.

어우, 이건 이거 나름대로 무섭네.

“그렇게 우르르 오니까 무섭잖아요.”

“야, 이렇게 잘생긴 형아들이 왜 무서워?”

“…아, 갑자기 다리가 쑤시는 것 같다.”

“이게?”

가영 형과 내 헛소리를 듣고 있던 진우 형이 키스 형에게 물었다.

“저 둘은 늘 저래요?”

“응. 그냥 그러려니 해.”

“전 지환이가 되게 어른스럽고 차분한 그런 앤 줄 알았어요.”

“그런 애가 어떻게 연예인, 그것도 아이돌을 하겠어.”

“왜, 그 바른 생활 아이돌 그런 거 있잖아요. 무단횡단 절대 안 할 것 같은 아이돌 이런 거요.”

도대체 내 이미지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퍼지고 있는 건지 심각한 고찰이 필요한 것 같았다.

“저 무단횡단은 안 해요. 교통사고 무서워서.”

“저 봐, 쟤 은근 저렇게 사람 미안하게 만들어서 입 다물게 한다니까?”

투덜거리면서도 날 부축해서 테이블 옆에 의자로 옮겨주는 가영 형에게 히죽 웃어 보였다가, 소름 돋는다고 등짝을 얻어맞았다.

웃어도 난리야, 쳇.

“회사에서 잘 처리했대?”

“오시면 정확한 얘기를 들어봐야죠. 정윤 실장님이야 뭐 일 처리 꼼꼼하기로 유명하시잖아요.”

“근데 걔 그 누구야, 이정? 걔가 제논 엔터 이사 아들이라던데. 그래서 말 많았잖아.”

“이정? 그게 누구예요?”

“왜, 네 옆에 앉았던 걔 있잖아. 본명은 기억 안 나.”

“아, 망둥ㅇ… 아.”

무심코 멤버들 앞에서 부르던 걸 그대로 말해버렸는데, 내 말을 들은 형들의 얼굴이 참 가관이었다.

“망둥이? 망나니?”

“아냐, 망둥이였어. 그 물고기지, 그거?”

“어? 이건가 본데. 말 듣고 나니까 진짜 닮았어.”

진우 형, 세비형, 키스 형은 내가 무심코 내뱉은 별명을 듣고 그럴듯하다며 자기들끼리 호들갑을 떨고 있었고, 가영 형은 이미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이고, 두야. 내 입이 방정이야.

이 자리에 힘찬이가 없다는 게 그렇게 다행일 수가 없었다.

아마 있었으면 나에게 손가락질을 했겠지.

“전 형들을 믿지만, 진짜 이건 비밀이에요.”

“어디 가서 말 안 해. 걱정 마.”

“가영 형 입은 우리가 잘 막을게.”

무척이나 듬직한 세비 형과 키스 형의 발언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웃다 사레들려서 캑캑대는 가영 형은 애써 외면하기로 했다.

“잘못 퍼지면 저 진짜 매장당해요. 아시죠?”

“걱정 마. 우리가 그 정도도 모르려고.”

“그런데 요새는 작업 안 하냐?”

겨우 웃음을 멈춘 가영 형의 질문에 머리를 긁적이던 나는, 부축해달라는 말과 함께 작업실로 향했다.

“거의 손 못 댔는데 최근에 하나 만들었어요. 좀처럼 잘 안되더라고요.”

“한번 들어보자.”

가영 형이나 키스 형, 세비 형은 이미 몇 번이나 작업에 도움을 받았고 이미 익숙해진 사람들이었지만, 아직 많이 친해지지 못한 진우 형 앞에서 내 노래를 틀려니 왠지 부끄러웠다.

하지만 저렇게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으니 안 된다고 말할 수도 없고. 결국 노래를 재생시켰다.

왠지 평가 때만큼 긴장돼서 노래에 귀를 기울이는 형님들의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의외로 먼저 입을 연 건 진우 형이었다.

“팬 송은 원래 이렇게 다 간질간질하고 설레게 만들어?”

“오, 진우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꽤 괜찮게 나왔네.”

“네?”

키스 형의 말이 이해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리자 세비 형이 설명을 보태주었다.

“진우 쟤가 감이 좋아. 우리 타이틀 고르다 막히면 진우한테 물어본다.”

“헐…?”

“그 뭐야, 세렌디피티 알지?”

“그럼요. 그거 제 최애 곡 중 하나예요.”

“그 앨범 타이틀 고민하다 진우한테 들려줬는데 걔가 그거 골랐어.”

과장을 보태면 잘 선택한 타이틀곡은 그룹의 운명을 좌우하기도 한다.

그래서 모든 가수가 타이틀곡 선택에 고심하고, 매일같이 수많은 앨범이 쏟아져 나와도 결국 음원 순위 순위에 오르는 건 대부분 타이틀곡이다.

그런데 여기에 신의 손을 가진 분이 계시네?

나는 멋쩍게 웃고 있는 진우 형의 손을 양손으로 공손히 감싸며 말했다.

“진우 형, 우리 친하게 지내요!”

지극히 속물적인 내 발언에 진우 형은 헤드락을 걸며 허락해 주셨다.

“컥! 형! 저 환자에요, 환자!”

“다친 건 다리지, 네 입이 아니잖아?”

살려주세요….

한바탕 소동 후 형들이 들려준 귀한 감상을 잘 적어둔 나는 이번에 내가 참여했던 새벽의 새 앨범을 받았다.

3명의 형들이 정성껏 사인과 코멘트를 적어준 앨범이었다.

“오…. 이거 중고로 팔면 딱 걸리겠네요?”

“뭐 인마?”

“에헤이, 농담이죠. 하하”

수상쩍은 시선으로 나를 보던 가영 형을 애써 무시하며, 새삼스러운 마음이 들어 앨범의 표면을 쓰다듬었다.

우리 멤버들과 부른 노래가 아닌 다른 그룹과의 협업이어서 느낌이 또 새로웠다.

“나도 앨범 하나 사 오면 사인해 주나?”

“무슨 소리, 지금 당장 하나 드려야죠!”

진우 형의 장난스러운 발언에 나는 바로 우진 형에게 메시지를 보내 우리 앨범을 하나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전에 관계자들 준다고 멤버들이 사인해둔 앨범이 아직 남아있을 터.

“형, 고마워요.”

“고맙긴. 실장님 출발했다고 연락 왔어. 금방 오실 거야.”

“예압.”

앨범을 가져다준 우진 형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정중하게 인사하고 앨범만 주고 바로 나갔다.

전달받은 앨범 위, 내 사인이 있는 부분 아래에 코멘트를 적은 나는 그 부분을 가리고 진우 형에게 건넸다.

“부끄러우니까 나중에 집에 도착하시면 봐주세요.”

“알았어. 집에 가서 꼭 혼자 볼게.”

“그럼 우리는 슬슬 간다.”

“엇, 오신 김에 다른 애들도 보고 가시지.”

원래 전달하려던 서류도 전달했고 나에게 앨범도 줬으니 돌아가겠다는 키스 형을 붙들었지만, 작업하러 가봐야 하는데 생각보다 오래 있었단다.

“다른 애들 거 팔아먹지 말고 꼭 애들한테 줘라! 내가 물어볼 거야!”

“아, 진짜 형은 나를 뭘로 보고!”

가영 형은 마지막까지 나에게 앨범 팔아먹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며 하준 형에게 냥톡해서 물어볼 거라고 했다.

도대체 나를 뭐로 보고!

소란스럽던 사람들이 전부 나가고 나니 작업실이 휑했다.

무언가 허전함이 느껴졌지만 어차피 조금 있으면 멤버들이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머리를 흔들어 잡생각을 털어냈다.

언제부터 옆에 사람이 있는 게 익숙했다고 이런 허전함을 느끼는 건지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정신없이 지나온 반년 정도의 시간이 약 30여 년 아싸로 살았던 내 삶을 이렇게나 많이 바꿔놓았다.

이제 멤버들이 없는 숙소는 상상이 되지 않는다.

지금에 와서는 솜뭉치로 살았던 내 기억 속 언래블과 지금 내가 함께하고 있는 언래블이 서로 다른 궤도로 달리고 있었다.

더불어 그 안에 속해있는 사람들에 대한 감상도 아주 많은 부분에서 달라져 있었다.

무대에서 랩할 때는 그렇게 멋있으면서, 다정한 미소를 머금고 멤버들을 족칠 수 있는 우리 하준이 형.

치명 섹시 담당 멤버로 한없이 도도할 것 같은 외모를 가졌지만, 외로움도 많이 타고 낯도 많이 가리는 허당끼 가득한 귀여운 우리 영빈이 형.

과묵하고 듬직한 맏형 상이면서 사실은 막내로 자라서 장난기도 많고 웃음도 많은 경환이 형.

장난을 너무 좋아하는 사고뭉치지만, 춤에 한해서는 진심이고 가끔은 날카롭게 상황의 핵심을 파악할 줄 아는 우리 모지리 힘찬이.

낯가림도 심하고 철벽도 심하지만 친해지면 사람을 흐물거리게 할 만큼 애교 많은, 점점 형아들 다루는 법을 알아가는 귀여운 우리 막내, 세빈이.

멤버들을 생각하다 보니 저절로 입이 벌어지면서 웃음이 나왔다.

우리를 위한, 멤버들을 위한 곡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뭉클하고 흘러나와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완성될 때까지는 부끄러우니까 비밀로 해야겠다.

그렇게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퍼득 정신이 들었다.

핸드폰을 보니 부재중 전화며 메시지가 몇 개나 와 있어서 서둘러 작업하던 파일을 저장하고 연락 온 것들을 확인했다.

우진 형 [작업 중인 거 같아서 내가 애들 데리러 내려갔어. 보면 연락해 줘]

부재중 전화는 하준 형이랑 힘찬이었다.

[저 지금 봤어요.]

우진 형 [애들이랑 거기로 갈게. 거기 있어.]

[넵]

드디어 상황을 말해줄 사람들이 도착했다.

포잉이 먼저 올라오지 않은 건 의아했지만 만나서 물어보면 될 터라 가볍게 생각했다.

시끌벅적한 우리 애들의 부축을 받으며 우진 형의 인도 아래 숙소에 도착한 나는 포잉이 왜 오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내 요정님은 어쩐 일인지 침대 위에 뻗어서 잠들어 있었다.

무슨 일인지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자는 걸 깨우느니 일어나면 듣는 걸 택했다.

늘 그렇듯 거실에 모여앉은 우리는 각자 편한 자세로 바닥에 퍼졌고, 나는 답답했던 깁스를 풀어버렸다.

“야, 그거 풀어도 돼?”

“응. 어차피 많이 쓰지 말라고 고정해둔 거라.”

“그래도 하고 있는 게 낫지 않아요?”

“괜찮아. 우리 세빈이 형아 걱정했어요?”

걱정 가득한 눈으로 내 다리만 쳐다보던 세빈이를 껴안고 둥기둥기 해주자 이제는 익숙해진 얼굴에 체념이 가득했다.

이 형은 내가 무슨 말을 해도 필터링해서 듣겠지 하는 그런 생각이 훤히 보여서 볼을 쿡쿡 찔렀다.

“아 참, 새벽 형들이 왔었는데 이거 전해달랬어요. 준이 형은 가영 형한테 꼭 제가 앨범 전해줬다고 말해주세요.”

“넌 가영 형이랑 또 무슨 얘기를 했길래….”

요새 들어 하준 형이 나를 보는 시선이 찬이를 보는 것과 비슷해지는 것 같아 매우 억울했다. 억울해진 나는 오해를 사기 전에 아까 일을 재빨리 설명해 줬다.

“그나저나 어떻게 됐어요? 인터뷰는 뭐 물어봐요?”

“그거 궁금해서 어떻게 기다렸어?”

우리가 수다 떠는 동안 먼저 씻고 나온 영빈 형은 어이없다는 눈으로 나를 보며 한마디 했지만, 그런 사소한 일에 굴할 내가 아니었다.

“우리 멤버들 없으니까 허전해서 죽을뻔했죠, 뭐,”

“말이나 못 하면.”

사실 100%를 얘기했는데 믿지 않는 멤버들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이렇게 사람 사이의 신뢰가 땅에 떨어지고….”

“1절만 해, 인마.”

쿠션을 던지는 경환 형에게 웃어주며 형들의 입, 정확히는 하준 형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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