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만만하니(2)
이번에 다친 건 내 잘못이 아니어서인지 우진 형은 치료 내내 속상해했지만 저번처럼 우려 섞인 목소리를 내진 않았다.
“환아, 팀장님이 너 숙소로 돌아가서 쉬래.”
“엥? 저 인터뷰 안 해도 돼요?”
“응. 너 몸 여기저기에 멍들었을 거라고 오늘은 그냥 쉬래.”
“아…. 그럼 저 회사로 가면 안 돼요?”
“왜?”
나 대신 받아온 약봉지를 품에 안겨주던 우진 형의 얼굴에는 의아함이 서렸고 나는 뒷머리를 긁적거리다 조그맣게 대꾸했다.
“어차피 숙소가도 애들 없는데 그냥 회사에서 작업할래요.”
“너는 쉬라니까?”
“회사에서 애들 기다렸다가 같이 들어갈래요. 혼자 있음 외롭단 말이에요.”
쉬라는데 일하겠다는 나 같은 놈은 처음 본다며 투덜대던 우진 형은 결국 내 고집을 이기지 못하고 회사로 차를 돌렸다.
사실 외롭지는 않았지만, 멤버들은 어색하고 낯선 분위기에서 고생하고 있을 텐데 혼자 누워서 자고 싶지는 않았다.
시간 생긴 김에 팬 사인회 때 발표할 팬 송도 한 번 더 점검하고 새로운 곡도 만들어보고 싶었다.
좋은 노래를 만들고 더 많이 활동해서 인기가 생기면 앞으로 이런 이유 없는 멸시를 덜 받을 수 있겠지.
오랜만에 혼자 5 작업실에 들어선 나는 기분이 조금 묘했다.
처음에 실장님한테 잘못 걸려서 곡을 만들기 시작했고, 포잉의 도움으로 작곡의 틀을 잡았다.
작곡의 기초도 모르던 내가 혼자서도 이것저것 만지면서 곡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게 신기했다.
“아, 맞다. 연락해 줘야지.”
우진 형이 실장님과 팀장님께 연락을 했을 테니까, 기다리고 있을 멤버들에게 먼저 메시지를 보내주기로 했다.
우리 애들이 또 전전긍긍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슬며시 머릿속에 떠오르니 왠지 모르게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 나왔다.
[나 회사로 왔어. 끝나고 회사로 와요.]
[아, 인대가 늘어난 건데 약 먹고 조금만 조심하면 금방 낫는대.]
멤버들에게 먼저 연락을 하고 난 후에 정윤 실장님과 소현 팀장님에게도 연락을 해두었다.
그때, 핸드폰이 울었고 벌써 인터뷰가 끝났나 싶어 핸드폰을 열어보니 가영 형이었다.
가영 형 [지환아!!! 너 다쳤다며!!]
…이 형은 어떻게 아는 거지?
궁금증은 잠시 미뤄두고 일단은 답장을 하기 위해 키보드를 열었는데 가영 형에게 전화가 왔다.
- 지환아! 얼마나 다친 거야? 무사하냐!
- 아, 쫌!! 세비 형, 한가영 좀 치워봐!!
“가영 형? 옆에 키스 형이에요?”
무언가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가영 형의 목소리가 멀어지는가 싶더니 크게 숨을 내쉬는 소리와 함께 키스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에는 한없이 나른하고 느긋한 키스 형은 가영 형과 엮이면 성격이 180도 바뀌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새벽 멤버들의 모습이 저절로 상상되었다.
- 어어, 나 윤혁이. 한가영은 너무 시끄러워서 치웠어.
“하하…. 그런데 저 다친 거 어떻게 아셨어요? 병원 갔다가 방금 회사 왔는데 깜짝 놀랐어요.”
의아한 마음에 물어보자 키스 형의 답은 간단했다.
- 진우 만났지? 걔랑 나랑 좀 친한데 걔가 심각한 목소리로 전화해서 놀랐잖아.
“아….”
- 전해줄 것도 있고 한데 너 지금 회사야? 우리 근천데 잠깐 들려도 괜찮아?
“아, 네네. 제가 우진 형한테 물어볼게요.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아무래도 오늘 작업하기는 그른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좁디좁은 내 인맥 안에서 가장 우리를 생각해 주는 사람들이라 쑥스러움과 함께 또 심장이 간질거렸다.
키스 형과의 전화를 끊지 않은 상태로 우진 형에게 메시지를 보내자 금방 미확인 표시가 사라졌다.
[형, 새벽 형들이 잠깐 회사에 들려서 전해줄 게 있다고 하는데 괜찮아요?]
우진 형님 [아, 그래? 그 앨범 때문에 그런가 보다. 내가 나가볼게.]
[형, 고마워요!]
우진 형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하자 쉽게 허락하는 메시지를 보내왔고, 내가 마중을 나가긴 힘들 테니 우진 형이 로비로 나가겠다고 했다.
“키스 형, 저희 매니저 형 아시죠? 형이 로비로 마중 나가주신대요. 얼마나 걸리세요?”
- 우리 10분 이내에 도착해. 좀 이따 보자.
“넵. 좀 이따 봬요.”
통화가 끝나자마자 우진 형에게 10분 이내에 도착한다는 메시지를 보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머리를 식힐겸 팬 송 파일을 불러와 재생시킨 나는 그제야 복잡했던 방송국에서의 일들을 하나씩 머릿속에서 정리할 수 있었다.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일단 데미갓을 제외한 다른 출연진들과는 사이가 나쁘지 않다.
새벽 형들이나 이번에 함께 촬영한 효정 배우님이 우리 얘기를 좋게 해주신 덕을 봤다.
그러면서 새삼 연예계만큼 인맥 싸움이 심한 곳도 없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순식간에 매장당할 수 있다는 걸 다시 한번 머릿속에 꾹꾹 눌러 새기고 포잉이 들고 올 여러 소식을 기다렸다.
- 똑똑
“네, 누구세요?”
발바닥의 인대가 잘못되는 바람에 최대한 다리에 무리를 주지 않으려고 반깁스를 한 상태였다.
“지환아, 들어간다.”
“헐, 대표님?”
익숙한, 하지만 아직 친근하지 않은 목소리가 들리자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고 했다.
갑자기 힘을 준 것 때문에 다친 왼쪽 발바닥에 통증이 확 올라왔고, 그것 때문에 다리에 힘이 풀려서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그 바람에 의자가 밀리면서 쿵 소리가 났고 급히 문이 열리면서 당황한 표정의 대표님과 창피함에 물든 내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다쳤다고 해서 괜찮은지 보러 왔는데 안 괜찮아 보이네.”
“그, 방금 까진 괜찮았는데 일어나다 넘어졌어요….”
“…조심해서 빨리 나아야 하는데 더 안 좋아지면 어쩌려고.”
나를 부축해서 의자를 끌어다 앉혀주는 대표님의 행동은 매우 친절했지만, 감사한 것과 별개로 나는 그저 이 상황이 창피했다.
힘찬이도 아니고 내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오늘 방송국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다며.”
“저는 괜찮아요.”
“지환아, 그럴 때는 괜찮다는 말 말고 그놈들을 혼내달라고 해도 돼.”
푸근하게 웃으며 내 어깨에 손을 얹는 대표님의 얼굴이 따뜻했지만, 목소리엔 아직도 피로가 묻어났다.
“대표님은 괜찮으세요? 많이 피곤하신 것 같은데 식사랑 수면시간은 꼭 챙기세요.”
“이 녀석아, 나보다 네 몸부터 챙겨. 벌써 두 번째 다친 거잖아.”
역시 라디오에서 다쳤던 것도 대표님에게 이야기가 들어갔나 보다.
내가 우물쭈물하며 어색해하는 사이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우진 형의 목소리와 가영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엇, 대표님?”
“아저씨, 오랜만이에요!”
“이놈, 너는 우리 회사에 웬일이냐.”
방금까지 피곤해 보이던 목소리는 온데간데없고, 대표님이 활기차게 가영 형에게 말을 걸었다.
역시 아무나 회사를 이끄는 게 아니구나 싶어서 갑자기 대표님이 대단해 보였다.
“아저씨 보러 온 거 아니거든요? 우리 지환이 보러 왔거든요?”
“우리 지환이가 왜 너네 지환이냐.”
“대표님 그만하세요….”
하지만 그건 그거고 창피한 건 창피한 것.
투닥거리는 건 대표님과 가영 형인데 왜 창피함은 그 외 모든 사람의 몫일까.
필사적으로 도와달라는 눈빛을 키스 형과 세비 형에게 보냈다.
도저히 나로서는 이 둘의 유치한 다툼을 막을 수가 없었다.
“전해드릴 것도 있고, 지환이가 다쳤다길래 걱정되기도 해서 마침 근처라 직접 왔어요.”
내 눈빛을 읽었는지 세비 형이 웃으며 상황을 정리했고, 곧이어 세비 형 뒤에서 머리 하나가 빼꼼 올라와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여진우씨가 여기서 왜 나와요?
“엇, 진우 씨 아닙니까. 안녕하세요.”
“하하, 박정균 대표님 안녕하세요.”
“큼, 손님 앞에서 내가 추태를 부렸구만.”
“아닙니다, 엄청 친근한 모습이라 너무 보기 좋았어요.”
열심히 포장해 주는 진우 씨의 눈물 어린 노력 덕에 적당히 상황은 마무리되었고, 대표님은 우진 형을 붙들고 작업실 밖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여긴 너무 좁은데, 어….”
대표님이 우진 형을 데려간 덕분에 손님들을 세워두게 생긴 내가 어버버하는 사이 일전에 우리를 숙소로 데려다주었던 석환 씨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지환아? 대표님이 손님들이랑 편히 대화 나누라고 자리 마련해 주셨어요.”
“와, 진짜요? 감사합니다!”
다행히 우리 대표님은 다 뜻이 있었다.
석환 씨의 부축을 받아 아담한 휴게실로 안내된 나와 새벽 멤버들, 진우 씨는 짧은 시간 몰아친 폭풍에 잠시 어색한 시간을 보냈다.
정확히는 나와 진우 씨 사이에만 어색함이 흘렀지만.
“그런데 진우 씨 먼저 퇴근하신 거 아니었어요?”
“진우 씨라고 하니까 엄청 거리감 느껴져요. 그냥 키스 형한테 하듯이 형이라고 불러줄래요?”
“네, 진우 형. 그럼 형도 저한테 편하게 말해주세요.”
이렇게 운빨로 미래의 천만 배우님과 좋은 관계를 만들었다.
왠지 미래에 내 별명이 형 수집가, 이런 게 되지 않을까 하는 묘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러니까….”
진우 형의 설명은 이랬다.
인터뷰 끝난 후에 퇴근해도 된다는 스태프의 연락을 받았으나 이후 스케줄도 없었고 우리와 조금 더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촬영장에 남아있었다고.
그러다 진우 형을 담당하던 스태프가 안절부절못하자 진우 형의 매니저가 잘 구슬려서 이야기를 들었다 했다.
현장에서 작은 사고가 발생해 내가 다쳤고, 그 일 수습 때문에 오늘은 예정보다 일찍 끝냈다는 내용이었다고 했다.
“그럼 오늘 진우 형이 조기 퇴근한 건 제 덕이네요?”
“어? 이게 또 그렇게 되네. 나중에 내가 밥이라도 사야겠다.”
아직 젖살이 남아있긴 했지만 진우 형은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눈이 깊어서 시선을 잡는 얼굴이었다.
소위 꽃미남이라 불리는 그런 류의 미남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순하게도 보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 사람이 연기를 할 때면 늘 혼자 조명을 받는 것처럼 빛났던 것을 나는 기억했다.
과거 스크린을 통해서나 보았던 여진우라는 배우의 어린 모습을 이렇게 보게 된 것은 언래블을 만났을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 들었다.
“근데 어쩌다 다친 거야?”
“어, 그게….”
세비 형이 반깁스 한 내 다리를 보더니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물어왔고, 쪼르르 모두 실토하자니 말을 해도 되는 건지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그때, 진우 형이 한마디 툭 던졌다.
“데미갓이 그랬어?”
“데미갓? 걔네가 왜?”
“그건 모르겠는데 걔네 중에 왜 노래 못하는 애 있잖아요. 걔가 언래블 마음에 안 들어 하는 티를 팍팍 내던데요.”
“아셨어요?”
그들 딴에는 숨긴다고 숨겼는데 역시 우리보다 더 오래전부터 연예계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눈을 숨기는 건 어려운 일이었던 것 같다.
“내가 알 정도면 다른 분들도 다 눈치챘을 거야. 너희도 대충 눈치챈 거 아니었어?”
“하, 하하….”
내가 어색한 웃음으로 상황을 모면하려 얼버무리자 진우 형이 분위기를 설명했고, 가영 형은 펄펄 뛰며 화를 냈다.
“아니, 지들도 데뷔한 지 몇 년 안 된 놈들이 그따위로 굴어? 너희를 얼마나 만만하게 봤으면 그 지랄을 떨어!”
“형, 좀 진정해. 지환이가 잘못한 게 아니잖아.”
“아오, 이 순해 빠진 새끼들! 내가 언제 한번 날 잡고 건방진 놈들한테 복수하는 방법 알려준다!”
“형이 했던 미친 짓을 멀쩡한 얘네가 어떻게 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냉수 마시고 정신 차려.”
가영 형에게 옆에 있던 생수병을 던진 키스 형은 팔짱을 끼고 내 앞에 앉아 반깁스로 고정해둔 다리를 툭툭 쳤다.
“얌전히 당하고 있었던 건 아니지?”
“네. 저희도 저희 나름대로 할 건 했죠!”
내 대답을 들은 진우 형도 흥미로운 얼굴로 어떻게 했냐고 묻기에 씩 웃었다. 처음에는 하준 형이 한 것들을 약간만 얘기해야지 했지만, 결국 박세날 PD가 카메라를 보여줬던 것까지 전부 말해버렸다.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 보니 나도 모르게 어리광을 부린 셈이었다.
자꾸만 정신이 육체를 따라가는 통에 부끄럽기도 했지만, 괜히 마음이 든든하기도 했다.
“그래, 잘했어. 가만히 있으면 호구로 알아. 아주 나랑 한번 마주치기만 해라.”
“형은 제발 그냥 얌전히 있어. 일 키우지 말고.”
다혈질인 가영 형은 데미갓의 쪼잔한 행동을 못마땅해했고, 키스 형은 그런 가영 형을 정신 차리게 한다고 바빴다.
그리고 그때, 내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