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Wake up(6)
그 순간 치민 짜증을 참지 못한 망둥이가 하준 형의 멱살을 움켜잡으려 손을 뻗었고, 데미갓의 다른 멤버들이 황급히 일어나 스태프들의 시야를 가리려 애썼다.
그 모습에 우리도 전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하준 형이 가만히 있으라는 눈빛을 보내 튀어 나갈뻔한 힘찬의 손목을 잡고 그 자리에서 멈췄다.
한 발자국 떨어질 줄 알았던 하준 형이 되려 망둥이 쪽으로 몸을 가까이 붙이자 당황한 망둥이가 하준 형의 어깨를 잡았다.
하준 형이 눈을 내리깔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형, 요새 연기 배워…?
“선배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돼요.”
“야!”
결국 참지 못한 망둥이가 낮게 윽박지르자 심상치 않은 기류를 읽은 스태프들이 달려왔다.
“데미갓, 언래블 뭐죠?”
“아무 일도 아닙니다.”
“소란 피우시면 안 됩니다?”
그들도 눈이 있기에 방금 상황을 확인했을 터.
하준 형과 우리가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자기들끼리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데미갓과 언래블은 무슨 일이 있다!
데미갓 멤버가 언래블 리더한테 뭔가 불만이 있나 보다!
늘 일찍 와서 허리 숙여 인사하던 언래블과 여기저기에서 잡음이 들리고 있는 데미갓은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하준 형의 인상은 참 선하기도 했다.
조금 분한 듯, 하지만 꾹 눌러 참는다는 듯 입술을 꾹 깨물고 자리에 돌아가 앉는 하준 형의 뒷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헀다.
금세 데미갓을 향하는 스태프들의 시선이 곱지 않아졌고 일부는 언래블을 조금 안됐다는 눈으로 보기까지 했으니 우리 모두 속으로 감탄했다.
이게 바로 언플이구나!
역시 우리 리더다! 이런 걸 보고 배워야겠구나!
나와 멤버들이 하준 형의 옆에 붙어서 어깨도 다독이고 손을 꼭 잡으며 괜찮다는 말을 흘렸고 하준 형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가까이 있는 우리는 모두 볼 수 있었다.
우리 참리더 님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것을.
데미갓의 멤버들만 불편한 표정이 되어 입을 꾹 다물고 있었고, 그 와중에도 망둥이의 표정은 볼만했다.
그런 모습에 그쪽 팀 리더는 더 속이 터지는지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스태프들이 다가와 우리 쪽으로 인터뷰 차례라고 알려주었다.
멀리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우진 형에게는 미안했지만, 하준 형이 알아서 하겠지 하는 마음도 있었다.
‘포잉, 카메라 있다는 그쪽에 가서 줌 좀 당겨줄 수 있어?’
‘왜?’
‘얘네 표정 썩는 거 좀 잘 담고 싶어서.’
어차피 카메라 감독님이 붙어서 찍는 것도 아니고 녹화 모드로 돌려서 적당한 위치에 놓고 알아서 찍히라고 두는 영상이라, 포잉이 가서 건드려도 찍힌 영상을 확인하지 않는 이상 모를 테니 괜찮을 것 같았다.
전체 인원이 보이도록 잡았을 테니 꽤 멀리서 잡혀 있을 테니, 데미갓이 조금 더 잘 보이게 조작하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안 해봤는데 해보겠음.’
‘포잉, 부탁해.’
고양이 솜방망이로 그런 섬세한 작업은 불가능하겠지만… 포잉은 요정이니까 되지 않을까?
“얘들아, 가자.”
“네….”
누가 봐도 시무룩한 힘찬과 세빈이, 굳은 표정의 형들.
주먹을 꾹 쥐고 어색하게 웃고 있는 나.
연기 굴욕 영상으로 모든 솜뭉치들의 웃음 버튼 역할을 했던 우리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연기 천재에 빙의라도 한 듯이 모두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놓고 우리 편을 드는 스태프들은 없었지만 분위기는 충분히 우리들에게 우호적으로 바뀌었다.
여론전에서도 얼굴이 이렇게 중요하다는 걸 하준 형을 통해 새삼 깨달았다.
비장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우리는 앉아있던 의자를 주섬주섬 원래 자리로 옮기기 시작했고, 그 모습에 어디선가 풋 하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웃지?
“혹시 의자 옮기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아까까진 아무 말씀 안 하셨는데….”
우리는 갑자기 걱정이 돼서 주변을 살피며 소곤거렸고, 그 모습이 어지간히 안 돼 보였는지 스태프 하나가 다가오더니 그냥 둬도 된다면서 인터뷰 장소로 안내를 자처했다.
그리고 그제야 여기저기에서 스태프들이 숨죽여 웃는 걸 발견했다.
우진 형을 바라봤더니 이마를 감싸 쥔 채로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혹시 저희 뭐 잘못했어요?”
참지 못한 힘찬이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고, 스태프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아니라고 손을 저었다.
“그냥, 언래블 멤버분들은 참 착하구나 해서요.”
“감사합니다….”
어쨌든 우리에게 칭찬을 해주었으니, 칭찬에 약한 우리 힘찬이랑 세빈이는 환하게 웃으며 씩씩하게 그 뒤를 따라갔다.
등 뒤에서 영빈 형의 작은 한숨이 들렸지만 모른척했다.
“가요, 형.”
“그래….”
경환 형, 영빈 형이 먼저 자리를 이동했고 나와 하준 형은 의자를 마저 원래대로 정리하고 데미갓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때, 휘청하는 느낌과 함께 하준 형의 목소리가 비명처럼 들렸다.
순식간에 세상이 빙글 뒤집혔다.
“환아!”
“어…?”
우당탕하는 소리가 꽤 크게 들렸고 정신을 차린 나는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갑자기 벌어진 일에 머리는 상황을 인식하지 못했고, 나는 얼빠진 소리를 내며 눈만 깜박거렸다.
“아….”
“지환아! 괜찮아?”
순식간에 우진 형과 앞서갔던 멤버들, 스태프들이 우르르 몰려들었고, 그제서야 바닥을 구르며 여기저기 부딪힌 온몸이 쑤셔오기 시작했다.
“형 붙잡고 일어나 봐. 괜찮아?”
“윽…. 발목이 잘못된 거 같은데요….”
출연진이 앉아있던 자리는 높지는 않지만 2개의 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는 그 위에서 무언가에 걸려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던 것.
‘포잉, 누구야?’
‘저 망둥이 새끼임! 미친!’
‘괜찮아, 흥분하지 말고.’
분명히 어디쯤 계단이 있는지도 인지하고 있었고, 심지어 내가 밟으려던 자리는 계단의 경계도 아니었다.
“지환아, 형이 조심조심 다니라고 했잖아! 죄송한데 병원에 좀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잠시만요, 박 PD님 모시고 올게요!”
소란은 가라앉지 않고 점점 커졌고, 나는 욱신거리는 몸을 추스르고 우진 형과 하준 형의 부축을 받아 힘찬이가 가져다준 의자에 앉았다.
“이게 무슨 일이야. 지환 군 괜찮아요?”
“박 PD님, 애가 제대로 못 걸어요.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허….”
데미갓은 아무 말 하지 않고 우리 쪽을 힐끔 바라봤지만 내 시선이 망둥이에게 고정된 걸 눈치챈 박세날 PD는 표정이 굳었다.
“지환 군, 혼자 넘어진 겁니까?”
“….”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PD님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의 얼굴이 와락 찌푸려졌다.
“데미갓.”
“가만히 있던 저희한테 왜 그러시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던 데미갓의 리더가 박세날 PD에게 대답하자 주변 스태프들이 욱하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보통 방송국 PD에 비하면 연예인들은 특히나 을의 입장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간혹 갑이 되기도 했는데, 회사에 로비할 돈이 아주 많거나 최정상급 연예인을 많이 데리고 있는 경우.
하지만 데미갓이 있는 곳이 돈이 많다고는 한다고 한들 퍼부어줄 만큼 많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이전에 포잉을 통해 들은 바에 의하면 이 프로에 한 자리 차지하기 위해 회사에서 방송국에 꽤 많이 투자했다고 했다.
제작비 지원의 형태로 지급되다 보니 박 PD도 마냥 그들을 쉽게만 대할 수도 없었지만, 방금 태도는 뻔히 보이는 상황이었던지라 꽤 기분이 상한 것 같아 보였다.
그리고 그때, 잠시 자리를 비웠던 데미갓의 매니저가 뛰어 들어왔고, 오자마자 PD에게 허리를 숙여 사과를 건넸다.
“급한 일이 있어서 잠시 자리를 비웠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만수야, 가서 카메라 가져와라. 예진이는 가서 다른 출연진들한테 상황 설명하고 잠시 대기해달라고 하고.”
박세날 PD의 지시에 스태프들은 다시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이제 와서 상황을 아직 파악하지 못한 데미갓의 매니저만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내 행동에 우리 멤버들과 우진 형은 데미갓이 무슨 짓을 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여깄습니다!”
박세날 PD가 만수라고 부른 사람이 두 대의 캠코더를 들고 왔고, 개미핥기의 표정은 살짝 굳었지만 그 외에 누구도 표정의 변화는 없었다. 망둥이도.
방송국 사람들이 출연진을 모아놓고 카메라도 돌리지 않았을 거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카메라를 확인한 박세날 PD의 얼굴은 어느 순간 와락 구겨졌고, 옆에 있던 스태프들의 얼굴에도 먹구름이 가득했다.
내가 넘어지기 전 망둥이가 하준 형을 핍박하는 것 같던 장면과 내가 넘어지는 장면 모두 확인한 것 같았다.
“우진 씨, 지환 군 병원 가는 건 잠시만 미뤄주실 수 있을까요?”
“오래 걸립니까? 혹시 뼈라도 잘못됐으면….”
“형, 근육이나 인대가 잠깐 어떻게 된 것 같아요. 뼈 부러진 거면 이미 팅팅 부었을 거예요.”
“너는 인마! 어휴, 내가 말을 말아야지. 당사자가 괜찮다고 하니 조금 기다리겠습니다.”
다행히 많이 부어오르진 않았다.
이전 삶에서 자주 넘어져 본 경험으로는 인대가 늘어난 게 아닐까 싶었다.
지금 박세날 PD와 무언가 담판을 지으면 앞으로 출연하는 동안 데미갓의 텃세에서 우리 멤버들과 나를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다못해 이야기만 끝나면 나를 제외한 멤버들이 인터뷰를 진행하고 나는 병원을 다녀오는 쪽으로 진행해도 괜찮았다.
“지환 군, 고마워요. 데미갓이랑 언래블이랑 매니저님들 각각 대기실 하나씩 내드려라, 만수야.”
그렇게 각각 다른 대기실을 배정받은 우리는 문이 닫히자마자 테이블에 축 늘어졌고, 우진 형은 잠시 주변을 살피며 카메라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이 그런 거죠?”
“아마. 내가 그 앞을 지났잖아.”
“아오, 진짜 우리한테 왜 그러냐!”
흥분한 세빈이랑 힘찬이는 씩씩거리고 있었고 형들은 표정이 굳어진 채로 우진 형을 바라봤다.
“후…. 이유는 가져다 붙이면 다 이유야. 그쪽에 멤버들이 하준이랑 영빈이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도 있다며.”
“그게 문제인 것 같은데요.”
“악! 깜짝이야!”
우진 형이 입을 여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박세날 PD가 갑자기 나타났고, 갑자기 발생한 돌발 상황에 안 그래도 머리 아파하던 우진 형은 기겁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이쿠, 많이 놀라셨어요?”
“아닙니다. 그런데 PD님 무슨 일로…?”
“흠,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대답드리기 전에 영상부터 확인하고 싶습니다. 지환이 넘어진 부분이요.”
순순히 화면을 내밀길래 우리도 뻬꼼 고개를 내밀어 우진 형에게 붙어 영상을 확인했다.
“이…!”
방송국 사람 앞이라 이만 악물었지만, 우진 형의 목소리에 분노가 가득했다.
포잉이 어떻게 조작을 한 건지, 망둥이가 다리를 꼬는 척하면서 내 앞쪽으로 발을 살짝 내미는 모습과, 망둥이와 개미핥기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나를 보면서 씩 웃는 장면이 선명하게 보였다.
둘이 고개를 조금 숙인 상태였기에 화면을 조금만 덜 당겼으면 표정이 안 보일 뻔했다.
‘포잉, 진짜 내 요정님이 최곤 거 같아.’
‘계약자 놈아, 원래 너는 나 없으면 안 되는 거야. 이거면 그 망둥이 놈을 보낼 수 있음?’
‘적어도 한동안은 대놓고 괴롭히지 못할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