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Wake up(5)
데미갓의 망둥이는 우리를 발견하자마자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 옆에 있던 개미핥기가 팔을 툭툭 치는 게 보였지만 망둥이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못마땅하긴 해도 그들이 우리보다 선배였기에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직각으로 숙이며 인사를 했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언래블입니다.”
“선배님들, 안녕하십니까!”
우리는 촬영에 들어가기 전 우진 형이 했던 말을 속으로 곱씹고 있었다.
“절대, 카메라 앞에서 건방진 모습 보이면 안 된다. 차라리 일방적으로 욕먹더라도 불쌍해 보이는 게 나아.”
내 생각도 그와 같았고 멤버들도 그걸 잘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진 형의 시선이 힘찬이에게 잠시 머물렀지만 찬이도 이미 한번 따끔하게 혼이 났기 때문에 사고 치지 말자는 말을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으니 별일은 없을 것 같았다.
우리가 데미갓에게 꾸벅 인사를 보냈지만 데미갓은 적당히 손만 흔들고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다른 사람들에게 꾸벅거리며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쟤네 지금 찍힌 듯.’
‘데미갓? 누구한테?’
‘나민수라는 저 개그맨.’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민수의 눈빛이 묘해졌지만 순식간에 지나가서 나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무려 요정 출신인 고양이가 함께하고 있었다.
촬영장을 둘러보고 다가온 포잉이 내가 놓친 것들을 체크하며 자잘한 정보를 전달해줘서 마음이 든든했다.
속마음을 들을 수 있는 스킬을 지금 써볼까 했지만 마음을 접었다.
차라리 마지막 즈음에 확인하는 게 더 많은 것들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번 사용하면 30분간은 지속되지만 이후 같은 상대에게는 3시간 동안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아끼기로 했다.
‘여기도 카메라 있지?’
‘응. 그리고 인터뷰할 때 좀 이상한 걸 묻던데.’
‘어떤 거?’
‘프로그램과 신청자의 연관성을 알겠냐고.’
‘그게 왜?’
언뜻 생각했을 때는 그럴 수 있지 않나 싶었다.
‘프로그램명이 이상하지 않냐는 질문을 하더라고.’
‘아….’
우리가 이상하게 생각했던 부분과 어느 정도는 일치했다.
경연 프로가 아니라고 하기에도 애매했고, 경연 프로라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이 부분은 고민을 조금 해봐야 할 것 같았다.
그사이 다른 출연진과 인사를 나눈 데미갓이 우리 옆쪽에 제공된 자리에 하나, 둘 앉기 시작했고 끝쪽에 앉아있던 세빈이가 조금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
“세빈아, 이쪽에 앉아.”
“아니, 형 괜찮아요.”
“아냐. 형이 선배님들이랑 얘기하고 싶어서 그래.”
쭈뼛거리던 세빈이를 안쪽에 있던 내 자리에 앉히고 내가 데미갓과 가까운 자리에 앉자 하준 형의 얼굴에 불안감이 스쳤다.
내가 무슨 짓을 할까 봐 마음을 졸이고 있는 것 같았기에 나는 아무 문제 없다는 듯이 싱긋 웃어줬다.
먼저 인터뷰를 간 김준현 선생님은 자리로 돌아오지 않았지만 나민수가 다음 차례로 불려갔다.
“우리가 불편한가 봐요.”
그때, 데미갓의 망둥이가 나에게 피식 웃으며 말을 걸었다.
“설마요. 아무래도 아이돌 직속 선배님이시잖아요. 그래서 막내가 많이 긴장한 것 같아서요.”
“아, 그쪽은 긴장 안 하고?”
“언래블 환이라고 합니다, 선배님.”
“그래, 말 놔도 되지?”
“네, 편히 하세요.”
옆자리의 나에게만 들릴 만큼 소곤거리는 목소리여서 멀리 카메라에서 잡히면 옆에 있는 후배와 사이좋게 대화 나누는 모습으로 보일 터.
주변의 다른 출연진들도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상황이라 소곤거리는 망둥이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바로 옆의 개미핥기나 우리 멤버들에게는 들릴 것 같았지만 다들 그저 웃고만 있었다.
여기는 촬영장이고 카메라가 돌아가는 것 정도는 알려주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으니까.
“세상 좋아졌어. 이런 애들도 방송 나오고. 얼마나 꽂았어?”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박 PD한테 얼마나 줬냐고.”
“회사에서 들은 말이 없는데요.”
하준 형과 영빈 형을 못 잡아먹어서 으르렁대던 놈이었지만, 그들에게까지 들리게 말을 하면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듣게 되니 할 수 있는 건 고작 옆에 있는 나에게 시비 거는 것뿐.
“적당히 나대. 좆소기업에서 해봤자 얼마나 하겠냐마는.”
“나댄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뭐, 이 새끼가?”
발끈한 망둥이의 목소리 톤이 아주 조금 올라간 그때, 배우 김세영과 여진우가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아이돌끼리만 뭉치지 말고 우리도 좀 껴줘요.”
“맞아, 잘생긴 사람들끼리만 친해지지 말고!”
“와, 세영 배우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완전 기만인 거 알죠?”
“환아, 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어휴, 세영 배우님 앞에 서면 저는 개미죠….”
샤프한 인상의 김세영 배우님은 생김새보다 훨씬 서글서글한 성격으로 이미 다른 출연진들과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전형적인 꽃미남 타입인 그가 아이돌들을 잘생긴 사람들이라고 칭하니 이게 기만이 아니고 무엇이냐며 김진수가 툴툴거렸고, 여진우가 내게 말을 걸었다.
아까 잠깐 대화를 나누면서 우리와 별로 나이 차가 나지 않아 말을 편히 해달라고 했는데, 바로 받아주는 걸 보니 다행히 우리가 밉보이진 않은 것 같았다.
김세영 배우는 여태까지 맡은 배역이 모두 날카로운 이미지를 가진 사이코패스 살인마, 복수에 미친 경찰, 주군을 위해 목숨 바친 검객 같은 것들이어서 처음에는 선뜻 다가가기 힘들었다.
하지만 대화를 하다 보니 굉장히 유쾌한 사람이라 특히나 경환 형이 눈을 빛내며 호감을 표했던 사람이었다.
“자자, 어차피 우리 한동안은 자주 봐야 할 텐데 멤버들끼리 있지 말고 이리 좀 뭉쳐요.”
“맞아, 우리도 눈 호강 좀 합시다!”
“와, 옆에 있는 나는 눈에 보이지도 않죠?”
“어이쿠, 우리 배우님 질투하세요?”
가요계의 선배인 세진과 고민영까지 나서자 우리는 의자를 들고 자리를 옮겼고 이내 모든 출연진이 둥글게 앉아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데미갓이랑 언래블은 서로 따로 만난 적은 없어요?”
“저희 첫 음방 때 대기실에서 잠깐 뵌 적 있어요.”
“같은 연습생 출신인 하준이가 데뷔한다고 해서 얼굴 보러 갔었죠.”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구라를 친다고?
나는 표정 관리를 하느라 웃고 있었지만 사정을 뻔히 아는 포잉의 얼굴은 썩어들어갔다.
“오오, 의리?”
“하하, 다 같이 힘내서 잘 지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망둥이가 뛰면 꼴뚜기도 뛴다더니 망둥이가 헛소리를 하니 개미핥기도 헛소리를 한다.
그런데 의리냐고 묻는 김진수의 목소리는 어딘가 모르게 묘한 느낌이 들었다.
기분 탓일까?
“아, 그러고 보니 언래블은 연수 형 콘서트에 게스트로 나갔다면서?”
“선배님이 좋은 기회 주셔서….”
“에이, 연수 형이 얼마나 깐깐한 양반인데. 나도 콘서트 게스트 불러서 갔었는데 맞춘다고 죽을뻔했었어.”
“맞아, 연수 선배님이 후배 가르칠 때 얼마나 엄한데.”
“선배님들이 칭찬해 주시니까 저희가 너무 부끄럽네요.”
우리 착한 리더 하준 형은 다정하고 선량한 얼굴을 무기 삼아 부드럽게 웃으며 착실하게 대답하고 있었다.
우리 멤버들이야 하도 많이 시달려서 속지 않지만, 솜뭉치들과 다른 연예계 사람들이 저 얼굴에 얼마나 껌벅 죽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가영 씨도 언래블 좋게 본다던데?”
“맞아, 얼마 전에 키스 형이 인터뷰에서 환이 칭찬했던데. 이번에 새벽 앨범에 언래블이 피처링하지 않았어요?”
신생 그룹인 우리는 늘 관심에 목말랐다.
그럼에도 우리가 했던 일들이 같은 연예계 사람들 입에서 나오니 왠지 몇 배로 더 부끄러워졌다.
슬쩍 멤버들 얼굴을 보니 하나같이 수줍게 웃고 있었다.
“언래블이 여기저기 잘나가네요. 저희도 처음에 회사 선배님이 콘서트에 불러주셔서 엄청 열심히 하면서 신기해했거든요.”
“맞아, 데미갓도 레이즈 콘서트에 올라갔었죠?”
어떻게든 대화에 끼고 싶었던 건지, 우리를 자기들보다 아래로 보고 싶은 건지, 데미갓의 리더가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고 우리는 그저 허허 웃고 있었다.
하지만 레이즈는 여자 아이돌 그룹이었고, 그때 무대가 팬들에게 별로 반응이 좋지 않았던 것은 꽤 유명한 이야기였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이길 수 있다는 말은 만고불변의 진리이기 때문에 데미갓에 대해 포잉의 힘을 빌려 가며 끝없이 정보를 수집하고 준비해두었다.
거기다 가요계에서 이미 완벽하게 자리를 잡고 여러 가수들에게 선배님 소리를 듣는 하연수의 칭찬과 어느 정도 대중적인 인지도만 갖춘 레이즈라는 그룹의 콘서트는 비교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데미갓 이번에 광고 들어간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선배님들한테 말씀드리긴 부끄러운데….”
“에이, 부끄럽긴. 다 잘되고 하니까 광고도 들어가고 하는 거지.”
부끄럽다면서 우리를 보는 눈에는 우월감이 가득했다.
뭐 사정이 어찌 되었든 간에 그만큼 팔릴 거라고 예상되니까 광고도 들어오는 걸 테지.
그 소식에 우리 막내는 한숨을 폭 내쉬면서 중얼거렸다.
“저희도 얼른 커서 여기 계신 선배님들처럼 광고도 해보고 싶어요.”
“언래블은 이제 시작이잖아요. 지금처럼만 쭉쭉 크면 금방 광고 찍고 하겠죠.”
“맞아, 지금도 벌써 여기저기서 이름 들리는데 무슨 걱정이야.”
옛날부터 유난히 누나, 형들이 귀여워하고 챙겨주던 게 우리 세빈이었다.
세빈이랑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 인터뷰 때마다 세빈이 같은 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낯을 좀 가려서 사람이랑 잘 친해지지는 못하지만 한번 친해진 사람에게는 그렇게 잘하는 게 세빈이었다.
그래서 그 사실이 한편으로는 친해진 사람들에게는 묘한 우월감을 주기도 했다.
느그 집엔 이런 동생 없지? 뭐 이런 느낌일까?
벌써부터 그 효과가 나타나는 건지 처음부터 친근하게 대해준 김진수도, 여진우도 세빈이의 투정 아닌 투정에 웃으며 토닥거려주었다.
“세진 씨, 인터뷰요!”
“네에~.”
그렇게 세진까지 자리를 비우자 김세영이 중얼거렸다.
“이상하네, 왜 인터뷰 끝난 사람들이 돌아오질 않죠?”
“그러게요. 여기 외에 다른 대기실이 또 있나?”
“오늘 인터뷰로 스케줄 끝은 아닐 텐데.”
모두가 모여 있는 자리이다 보니 데미갓은 좀처럼 우리에게 공격을 넣을 수가 없었다.
은근한 말투로 우리를 자기보다 아래 취급하는 것 정도야 관대하게 웃으면서 넘어갈 수 있었고, 수위 조절을 잘못하면 이 자리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찍히기 때문에 조심하는 눈치였다.
그렇게 하나둘 인터뷰로 불려가 돌아오질 않자, 찝찝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던 나는 포잉에게 인터뷰 후 다들 어디로 가는지 체크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잠시 후 포잉 덕분에 박세날 PD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왜 다 떨어트려 놓는 거지? 친근해 보이는 장면을 따려는 건가?’
박 PD는 사연 신청자들을 불러서 각자 대기실에서 인터뷰가 끝난 출연진들과 만나게끔 해두었다.
그리고 사연에 대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게 했고, 그 모습을 대기실에 있는 카메라가 찍고 있었다.
포잉이 전해준 바로는 우리처럼 신청자를 따로 만났던 출연자는 나민수뿐인 것 같았고, 다들 이제야 자세한 사정을 듣고 무대 연출 이야기를 나눈다고 했다.
워낙 스케줄이 바쁜 사람들이다 보니 따로 만나진 못하고 매니저나 회사에서 대신 전화해서 상황을 듣는 정도였던 것 같다고.
‘그럼 우리는 시간 번 거네? 이미 대화는 다 나눴잖아.’
‘어떻게 보면 그렇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진우가 우리를 조금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더니 이내 웃는 얼굴로 데미갓과 우리를 향해 말했다.
“아마 다른 분들은 인터뷰 끝나고 따로 모여 있는 것 같아요. 방송국에서 어떤 장난 칠지 모르니까 조심해요.”
윙크까지 하며 우리에게 손을 흔들고 스태프의 안내를 받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참 좋은 사람이다 싶었다.
“이제 지켜줄 사람이 없어서 어떡하냐.”
“하, 좀 적당히 해.”
데미갓과 언래블만 남자 망둥이는 이때다 싶어서 주둥이를 털기 시작했다.
여진우의 발언이 신경 쓰였는지 여전히 웃으면서 우리에게만 들리게 작게 중얼거려서 주변에 있던 스태프들에게는 들리지 않았을 테지만.
망둥이, 그러니까 최태성의 행동에 조금 짜증이 났는지 데미갓의 리더인 김범욱이 한마디 했다.
“여기 진짜 다 대선배님들이야. 잡음 안 나게 하라고.”
“야, 김범욱.”
우리한테 뭐라도 할 것처럼 굴더니 지들끼리 싸우고 있고 팀 아주 잘 돌아간다 싶어 하준 형을 봤다.
하준 형은 그런 데미갓의 모습에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웃어? 데뷔하니까 네가 뭐라도 된 것 같아?”
“어떻게 선배님은 하나도 안 변했나 싶어서 웃음이 나오네요.”
우리 리더가 멤버들이 무서워하는 그 얼굴로 웃으면서 다정하게 속삭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