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So What(5)
언래블이 곡을 고르고 합을 맞추는 동안 푸른 음악 노트 작가진의 짜증은 하늘을 치솟고 있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신인이 사고 쳐서 대본을 갈아치워야 하는 상황이 되니 절로 짜증이 울컥울컥 올라왔다.
“우리 누님들이 고생이 많네요.”
“어휴, 말도 마. 무슨 깡으로 그런 애들을 데뷔시킨 거야.”
“쭌… 너무 힘들어.”
이명준, 그러니까 골든아워의 리더 하겸은 라디오에서만큼은 자신을 이명준이라는 개인의 인물로 소개했다.
그 덕에 청취자들에게 쭌디라는 별명을 얻었고, 자연스럽게 방송국 내에서는 쭌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이미 4년째 라디오 DJ 자리를 굳건하게 지켜오고 있는 명준은 익숙하게 작가진을 달래고 들고 온 커피를 나눠주었다.
“그나저나 다행히 다른 그룹 섭외가 됐네요?”
“원래 2주 정도 후에 출연하기로 했던 신인 애들이 있어서 거기 팀장님이랑 딜했지.”
“신인 누구요?”
“언래블이라고 어제 데뷔한 애들이야.”
“아하, 그래서 제가 이름을 몰랐던 거네요.”
어지간한 그룹은 한 번씩 다 봤다고 생각한 명준의 입장에서도 모르는 그룹이었다. 명준은 한동안 너무 공부를 안 했나 싶었다가 어제 데뷔한 그룹이란 설명을 듣고 안도했다.
“그럼 저는 그 친구들 정보 좀 보고 있을게요.”
명준이 신인 그룹을 위한 코너를 만들었던 이유는 단순했다.
10대에 데뷔해서 신인의 설움을 꽤 독하게 겪어본 명준은 가능성 있는 후배들에게 이름이라도 언급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
명준에게 가장 서글펐던 시절은 열심히 홍보를 해도 불러주는 곳이 없어서 멤버들과 연습실에서만 있어야 했던 날들이었다.
“이번 친구들은 좀 제대로 됐으면 좋겠는데.”
노트북으로 언래블을 검색해보는 명준의 시선이 진지해졌다.
* * *
“아으으….”
“그러게 왜 거기서 까불어가지고.”
“내가 한 대 맞을 줄 알았다.
“그래도 풀 스윙은 너무했잖아요!”
GIVE 앱에서 장난치느라 앵글 밖에 나가기 바빴던 힘찬은 결국 하준에게 등짝을 얻어맞았다.
이번엔 풀 스윙이었으니 등짝이 꽤 오래 따끔거릴 터.
하준은 가끔 멤버들이 지나치게 장난을 치거나 투닥거릴 때면, 등짝을 찰지게 때리며 응징을 가했다.
팬들과의 첫 소통 방송이었던 탓에 괘씸죄가 추가되어 강도가 평소보다 쪼금 더 올라간 것 같지만… 덕분에 라디오에서는 덜 까불겠지.
아마도….
곡을 정해 미리 전달하고 이동하면서, 출발 직전 전달받은 대본을 점검했다.
라이브 곡 1, 팀 소개, 자기소개, 데뷔 소감, 연습생 시절 에피소드, 앞으로의 포부, 그리고 생방송 중 들어오는 질문 몇 개, 라이브 곡 2.
진행 순서는 이미 나왔고, 답변은 대략적인 가이드 라인만 잡혀있는 상태였다.
“우리가 드디어 회사 분들 말고 다른 연예인들도 만나는구나….”
“하겸 선배님이면 소년 가장의 표본이었지?”
“혼자 나간 예능에서 캐리해서 그룹 인지도까지 높인 걸로 유명했지.”
“지금은 프로듀서로도 꽤 유명하시잖아.”
이전처럼 팀장님과 매니저 형 차에 나눠 탄 게 아니라 회사에서 내준 벤에 다 같이 타고 있었는데, 이것 또한 꽤 낯설었다.
“얘들아, 라디오 가서는 되도록 본명 불러. 하겸 씨가 라디오에 애착이 큰 데다 거기 일은 그룹과 좀 분리하고 싶어 하니까.”
운전하던 매니저 형이 우리의 첫 라디오 출연을 위한 꿀팁들을 아낌없이 제공하고 있었다.
가자마자 PD님, 작가님들뿐만 아니라 방송국 모든 분들에게 그냥 인사를 다 하라고 신신당부하더니, 말조심하라며 자신이 보고 듣고 겪은 것들을 알려주었다.
방송국에 가면 그 거대한 피라미드의 제일 아래층이 우리 자리가 된다는 걸 다시 한번 실감했다.
긴장한 힘찬이는 말이 없어졌고, 세빈이는 옆에 있던 내 손을 잡았다.
다행인 건 우리 맏형들이 키가 커서 그 뒤에 서니까 우리가 잘 가려졌다는 것?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인사하면서 가다 보니 시간이 꽤 걸렸다.
마주친 사람이 많지 않은 것에 감사하며 겨우 목적지 도착.
“어, 안녕하세요! 선배님!”
“아, 언래블이에요?”
도착해서 가장 먼저 만난 건 이명준이었다.
보이자마자 내가 먼저 인사하자 멤버들도 따라 했고 이명준이 우리에게 먼저 악수를 청해왔다.
“되게 파이팅 넘치는 친구들이네요. 딱 보니까 비글미도 넘치겠고.”
“하하, 저희 애들이 장난을 좀 좋아하는데 나쁜 애들은 아닙니다.”
매니저 형의 실드 아닌 실드를 지켜보며 멤버들의 눈은 다시 초롱초롱해졌다.
다른 연예인들을 볼 때마다 눈이 저렇게 빛난다. 언제쯤 너희도 연예인이라는 걸 자각할래…?
이전 생 언래블의 선배미 뿜뿜 장면들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지금 병아리 같은 언래블의 모습이 마냥 귀여웠다.
“이 친구가 멤버들 사이를 중재한다던 환 씨죠?”
“아, 네. 제가 언래블의 중재 담당 환입니다.”
씩 웃는 얼굴로 물어오는데, 나도 모르게 활짝 웃고 있었다.
그러자 뒤에서 수군거리는 힘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쟤 웃는 거 봐. 우리한테만 맨날 근엄한 척하고.”
“그건 형이 자꾸 날뛰니까.”
“흠흠.”
듣다 못한 내가 헛기침을 해서 두 중생의 입은 막았지만 눈앞의 사람의 웃음은 막지 못했다.
“풋. 아, 왜 중재 담당인지 알 것 같아요. 언래블 안녕하세요. 이쪽이 리더 하준 씨죠? 리더로서 이런 멤버가 하나 있으면 좋지 않아요?”
“안녕하세요, 선배님! 하하…. 그렇다고 할까요?”
그렇게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하면 누가 믿어, 준아? 응?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여러 이야기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명준은 우리를 PD님과 작가분들, 음향 엔지니어분들에게 소개해 주었다.
원래 그 일을 했어야 하는 매니저 형은 뒤에서 흐뭇하게 웃으며 따라오고.
“아이쿠, 우리 쭌디가 이 친구들이 마음에 들었나 보네. 직접 소개를 다 시켜주고.”
“친구들이 인사성도 바르고 재밌더라고요.”
명준 덕분에 비교적 무난하게 인사를 마친 우리는 작가님들과 대본을 다시 한번 체크하고 라디오 부스 안에 들어갔다.
“어제 데뷔했다고 봤어요. 아직 엄청 떨리겠다.”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방송국도 처음이고요. 어… 근데 선배님, 말 편히 해주시면 안 될까요?”
우리 앞에서는 그렇게 늘 여유롭고 푸근한 하준이 긴장한 모습으로 명준을 대하는 게 너무 새로웠다.
그러니까 매우 귀엽다는 얘기였다.
바로 옆에서 최애를 덕질할 수 있는 자의 특권이랄까?
“그럴까요? 내가 존대하면 좀 불편하겠다. 지금 하준이 옆에가 히스 맞지? 쇼케 봤는데 고음처리 좋더라.”
“감사합니다, 선배님.”
“이 친구 낯 많이 가리죠? 안 친한 사람들이랑 있으면 긴장해서 굳는 타입 같은데.”
“우와, 어떻게 아셨어요? 히스 형 지금 엄청 긴장한 상태예요!”
명준이 오랜 시간 라디오 DJ로 자기 영역을 확실하게 굳힐 수 있었던 건, 게스트를 굉장히 편안하게 해주며 라디오 진행을 이끌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인 것도 컸다.
지난 생에서도 한껏 기죽어 있던 언래블을 초대해서 굉장히 편하게 대해줬고 그 덕분에 친분도 생겼다고.
서글서글한 명준에게 금방 익숙해진 힘찬은 아까까지 긴장해서 눈치 보던 것도 잊어버리고 벌써 자기 페이스로 돌아갔다.
그저 중간에 있는 히스만 하준에게 눈빛으로 헬프 요청을 할 뿐.
“명준 씨, 언래블 준비해주세요!”
“네!”
“오늘 잘 부탁해, 얘들아.”
그리고 라디오 생방송이 시작됐다.
“얼마 전에 오랜만에 비가 내리는 모습을 구경하면서 커피를 한잔 마셨는데요,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창밖에 풍경을 바라보는 그 시간이 너무 편안했어요. 온갖 생각들이 다 사라지더라고요. 나 자신을 쉬게 해주는 시간. 가끔은 일상에 그런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해요. 안녕하세요, 여러분. 푸른 음악 노트의 명준입니다.”
방금 전까지 우리에게 웃으면서 장난치던 사람은 어디 가고, 사람을 진정시켜주는 차분한 낮은 톤의 목소리가 시청자들에게 다정하게 인사하고 있었다.
PD님의 손짓을 따라 스탠드 마이크 앞에 선 우리는 다시 한번 서로를 바라보며 긴장을 가라앉혔다.
명준의 인사가 끝나자 곧바로 명준이 프로듀싱했던 같은 그룹 멤버들의 듀엣곡, ‘우리의 밤’ 전주가 흘러나왔다.
우리가 선택한 두 곡 중 하나가 이 곡이었다.
“겨우 오늘 하루가 또 이렇게 끝났어. 오늘은 조금 많이 지치는 것 같아, 일이 많았거든.”
시작은 담담하게 읊조리는 하준이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가슴에서 무언가 흘러나가고 있는 것 같아. 이대로 살아도 괜찮은 걸까?”
힘찬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질문하듯 노래했고.
“내가 뜬눈으로 지새운 밤의 숫자만큼.”
영빈이 애틋함을 담아 외치고,
“네가 그 밤에 내쉰 숨의 무게만큼.”
맑은 세빈의 목소리가 그 마음을 받아주었다.
“서글퍼 말자, 너의 밤에는 내가 함께할게. 영원을 노래하지 않는 모든 것들과 함께 우리가 있잖아.”
그리고 허무함에 젖어 그대로 흘려보냈던 수많은 밤을 떠올리며, 내 목소리를 더했다.
퇴근길에, 지친 어느 날 밤에, 잠이 오지 않는 날 침대에서 눈을 감고 들으면 어느새 눈물이 툭 떨어지는 그런 노래였다.
그래서 나도 이전 생에 자주 듣던 노래였고, 늦은 시간에 진행되는 라디오에 잘 맞을 것 같아 추천했던 노래였다.
다행히 멤버들은 평소보다 더 본인들의 마음을 담아 흔들리지 않고 안정적인 가창력을 뽐냈다.
“오늘은 시작부터 아주 특별한 분들을 모셨어요. 방금 전에 되게 설레게 노래해 주신 분들인데요, 이보다 더 따끈따끈할 수 없다! 바로 어제 데뷔한 분들이죠. 언래블, 어서 오세요!”
“와아!”
“안녕하세요!”
“네, 언래블 안녕하세요. 아직 잘 모르는 가족분들을 위해서 인사해 주실래요? 언래블도 단체 구호 있죠? 그걸로 인사 부탁드릴게요.”
“넵! 둘, 셋! 안녕하세요! 함께 풀어나갈 미래 언래블입니다!”
“안녕하세요! 함께 풀어나갈 미래 언래블입니다!”
“이야, 따끈따끈한 만큼 힘도 넘치네요.”
“감사합니다!”
그 뒤로 자연스럽게 멤버별 인사가 이어졌다. 개인 소개 때마다 한 명, 한 명 그 멤버를 바라보며 눈을 맞추고 멘트하는 명준의 모습에 속으로 감탄했다.
마치 우리를 원래 알던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이런 노력이 4년 동안 프로그램을 잘 이끌어 나갈 수 있었던 밑바탕이지 않을까.
데뷔했을 때의 마음을 물을 때는 본인의 경험까지 같이 얘기해 줘서 다 같이 한마음 한뜻으로 뭉치기도 했다.
“데뷔 전부터 아이돌 창조라는 프로그램으로 먼저 팬분들에게 다가간 걸로 알고 있어요. 생방송은 저희가 처음이죠?”
“네. 그래서 지금 저희 엄청 떨고 있어요.”
“진짜요? 하나도 안 떠는 것 같은데.”
“저 지금 긴장해서 손에 식은땀 날 거 같아요.”
하준과 명준이 화기애애한 대화를 이어나가고 힘찬이 중간중간 웃을 수 있는 멘트를 넣어줬다.
명준이 이야기할 때는 긴장해서 명준만 바라보던 멤버들도 하준이 눈빛을 주면 기가 막히게 알아채서 대답하고 있었다.
“그런데 평소에 하준 씨가 좀 무서운 리더인가 봐요. 군기가 바짝 들어있는데요?”
“그럴 리가요. 오해십니다. 얘들아?”
“저희 리더는 무섭지 않습니다.”
“그렇게 국어책 읽듯이 말하면 누가 믿어!”
중간중간 긴장을 풀어주는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우리 반응을 유도하던 명준의 눈이 살짝 빛났다.
“자, 공식적인 질문은 이쯤하고, 우리 그 얘기 안 들어 볼 수 없잖아요?”
“무슨 질문을 하시려고 이러시지…. 저희 신인이에요. 살살해주세요.”
우는소리를 하는 하준을 바라보며 씩 웃던 명준이 무서운 이야기를 꺼냈다.
“연습생 딱지 뗀 지 며칠 안 됐으니까 아직 파릇파릇할 텐데요. 우리 연습생 시절 에피소드 몇 개 얘기해볼까요?”
그러자 멤버들의 모든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아냐, 얘들아, 그러지 마….
어째서인지 식은땀이 주르륵 등 뒤로 흐르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