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11)화 (11/456)

11. 말 좀 해줘(1)

포잉은 기분이 썩 좋지 못했다.

같이 안 있어 준다고 징징대는 계약자를 위해 새벽같이 나가서 볼일을 마치고 돌아왔건만, 오자마자 염탐이나 시키다니.

고생했다고 털도 조금 쓰다듬어 주고 말도 예쁘게 해주고 하면 피로도 풀리고 더 노력할 맛도 날 텐데.

그래도 이놈이 잘돼야 나도 살지 하는 서글픈 팔자를 떠올리며 묵묵히 염탐을 들어왔는데, 이곳 분위기는 참으로 난장판이었다.

사람은 겨우 3명이 앉아있는데 공기는 어쩜 이렇게 무거운지.

“그러니까 우빈아, 너무 무거운 분위기로 가면 무대 구성을 짜기도 힘들고,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기 어렵다니까.”

“형, 근데 생각해봐. 형이나 나나 노래가 메인인데 세빈이 하나 믿고 댄스로 가면 너무 본래 곡이랑 분위기가 겹치잖아.”

“그러니까 편곡을 해야지.”

“그 편곡을 좀 더 쉽고 임팩트 있게 하려면 원곡이랑 아예 다른 분위기로 가는 게 낫지 않겠냐는 거잖아.”

“…하아.”

커다란 두 인간은 계속 싸우고 있었고, 제일 작은 인간은 눈 밑이 벌써 시커멓게 죽은 걸 보니, 여기는 이대로 그냥 내버려 둬도 알아서 망할 분위기였다.

아까 계약자 놈이 있던 회의실의 인간들은 유치하긴 했지만 밝은 분위기의 냄새가 폴폴 나서 꽤 기분이 괜찮았었는데, 이곳은 더 있어 주기 괴로울 만큼 욕망의 냄새만 가득했다.

그것도 적절한 활력이 되는 농익은 욕망이 아닌 극단적인 감정이라 없던 두통이 생길 것 같았다.

불쾌해진 포잉은 문제의 근원이 되는 얼굴을 잘 보아두었다. 저 인간이 조만간 사고를 칠 것 같다는 나름의 감이 왔기 때문이었다.

‘엮이지 말라고 잘 타일러놔야지.’

어리바리하고 무엇 하나 똑 부러지지 못하는 계약자가 심히 걱정되기 시작했다.

자신의 새로운 계약자는 근거 없이 긍정적이었고, 가끔은 정말 만사태평해 보이기까지 했다.

속에 들어간 인간의 나이가 아주 어리지 않음에도 어떨 때 보면 10살짜리 어린아이 같았다. 물가에 애를 놔둔 심정이었다.

이래서 선배 요정들이 차라리 다른 지성체의 소원을 들어주는 게 쉽다고 했던 것인가.

인간만큼 손이 많이 가고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은 종족도 없는 것 같아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만큼 어렵기 때문에 중급 요정으로의 길이 인간 계약자에게 걸린 것이지만.

인간 계약자가 요정족의 대전제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얼마나 만족스럽게 살다 갈 수 있느냐에 따라 미래가 갈리는 시험이었다.

포잉이 상념에 빠진 사이 회의는 결국 결론 없이 끝나버렸다.

계속 똑같은 얘기만 반복하더니, 결국 잠시 머리를 좀 식히자는 제일 큰 인간의 목소리를 끝으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런 회의실을 뒤로하고 포잉도 지환을 찾아 나섰다.

저 불쾌한 인간은 너무 진득하고 끈적거리는 냄새를 풍겨 별로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다. 그에 비하면 차라리 좀 애 같아도 지환이 낫다고 생각하며, 포잉은 다시 터덜터덜 지환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계약자 놈이 그래도 쓰다듬는 것 하나는 잘하니 그 쓰다듬을 받으며 한숨 푹 자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 * *

“그래, 어느 정도 방향은 잡은 거니?”

소현 팀장님의 눈에는 감출 수 없는 기대와 신뢰가 묻어났다. 애써 그런 감정들을 우리에게 드러내지 않으려는 게 보여서, 조금 새롭다는 기분이 들었다.

조금만 신경 써도 이렇게 주변 사람들의 눈이 많은 내용을 얘기해주는데, 어째서 이전의 ‘나’는 그런 것들을 알아채지 못했을까.

생각할수록 답답한 삶을 살았던 이전의 ‘내’가 안타깝기도 하고, 바보 같아서 화가 나기도 했다.

내가 이곳의 지환으로 살아간 지 고작 이틀째였다. 조금만 더 주변 사람들에게 다가가려고 했다면, 조금만 개인의 욕심을 밀어두고 팀에 집중했다면 좋았을 것을.

이전의 ‘내’가 팀원들과 좋은 사이만 유지했어도 1차 평가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제외 멤버로 논의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이전의 ‘나’와 다르게 한 거라곤 팀에 섞이려는 노력뿐이었는데, 하룻밤 사이에 나에 대한 시선이 이렇게나 많이 달라졌다.

이런 사실들을 사람들의 시선에서, 말투에서 조금씩 느낄 때마다 아주 쓴 약을 한 움큼 삼킨 것 같아 조금 서글펐다.

“지환이가 아이디어가 많더라고요. 힘찬이는 제가 생각하지 못한 방향의 의견을 많이 줘서 큰 도움이 됐고요. 이제는 경환이의 편집 실력에 기대를 걸어볼 생각이에요.”

“어이구, 넌 어쩔 수 없는 리더인가 보네. A팀도 하준이 네가 리더인 거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저희는 팀 정해지자마자 그렇게 암묵적으로 정했는걸요. 하준이 형만 몰랐나 봐요.”

자신이 한 것은 하나도 말하지 않고 또 팀원들이 어떻게 좋은 의견을 주었는지만 구구절절이 전하는 하준의 모습에 소현 팀장은 혀를 찼다.

그리고 타이밍 좋게 경환이가 말을 보태서 훈훈한 분위기를 잘 이어졌다.

“자, 필요한 걸 말해봐. 도와줄 수 있는 건 도와줄 테지만 그 외의 건 너희가 알아서 해야 해. 직접 보고할 수 있도록 계획서도 만들어서 가져오고. 이거 실장님한테 직접 드릴 거니까 신경 써야 된다.”

“넵!”

원곡의 다양한 무대를 참고할 수 있도록 영상을 돌려볼 노트북을 받아들고 나가려는 우리에게 소현 팀장님이 물었다.

“얘들아, 재밌어?”

“네?”

“모처럼 되게 신나 보여서. 잘해봐.”

하루하루를 초조해하고 쫓기듯이 지내온 우리였다. 그런데도 스스로 인지하지 못할 만큼 팀장님과 대화하는 내내 웃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팀장님에게 저 멘트를 듣는 순간, 나는 내가 보았던 ‘아이돌 창조’에서의 경연보다 훨씬 더 멋있는 무대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팀장님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사무실을 나온 우리는 복도를 걷는 내내 서로를 힐끔거리며 웃고 있었다.

“흠흠, 그럼 나는 경환이랑 A&R팀에 먼저 가볼게. 찬이랑 지환이는, 팀장님이 아까 회의실 써도 된다고 하셨으니까 거기나 빈 연습실에서 영상 보면서 안무 짜고 있어 봐.”

“준이 형, 신났어요? 아주 그냥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네.”

“그러니까. 맨날 혼내기만 하더니 저렇게 웃을 줄도 아네.”

“난 지금 하준 형이랑 있는 게 맞는지, 혹시 다른 사람 아닌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야.”

“야, 진짜 너네 그만해라….”

자고로 리더는 몰아야 맛이라고 했지.

회의실에서 이미 리더 몰이의 맛을 알아버린 힘찬과 경환은 내가 조금만 불을 피워줘도 하준을 다 불태울 것처럼 기름을 콸콸 들이붓고 있었다. 하준의 목덜미가 불이라도 난 것처럼 빨갛게 변하는 건 덤이었다.

평소 카메라 앞에서만 다정한 웃음을 보여주던 하준이 멤버들 앞에서도 편하게 웃는 모습이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멤버들을 챙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너무 심한 게 눈에 보일 정도라, 하준은 언래블 활동 중에도 늘 팬들의 걱정을 샀었다.

세빈이 성인이 되던 그해, 막내의 미성년자 탈출을 축하하자는 핑계로 진행되었던 음주 방송에서 영빈이 했던 자조적인 이야기가 나는 아직도 기억에 깊숙이 남아있었다.

다른 동생들을 걱정할까 봐 말하지 않고 감내하는 건 하준과 자신(영빈)이 감당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하지만, 하준조차 자신에게 말하지 않고 혼자 감당하려는 부분이 너무 많아서 때로는 서운하기까지 하다는 그 말.

그때 하준과 영빈이 지었던 표정은 수많은 솜뭉치의 눈물 버튼이 되었고, 조금 창피하지만 나도 울었었다.

그래서 나는 하준과 모든 멤버들이 서로 기대기도 하고 보듬기도 하면서 상부상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자, 물밑 작업을 하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노트북을 들고 다시 회의실로 돌아오던 중 힘찬이 잠깐 화장실을 간다고 자리를 비웠고, 나 먼저 회의실에 앉아 찌뿌드드한 어깨를 풀고 있었다.

이제 시작되는 1차 경연과 그 후에 연달아 있을 2차 경연.

그리고 최종 투표까지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만 남아있다는 사실이 자꾸만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님, 나 왔음.’

‘이야, 능력 좋은 우리 요정님 오셨네. 고생 많았어.’

카메라가 여전히 돌고 있었고, 누가 언제 어떻게 들어올지도 알 수 없었기에, 무릎 위에 올라온 포잉을 쓰다듬진 못하고 살짝 다독여주었다.

도대체 나랑 떨어져 있는 시간 동안 어디서 무얼 했는지 이틀 내내 지쳐있는 모습이었다.

‘님, 다른 팀은 망한 듯. 거기 개판임.’

‘어떻길래 그래?’

‘큰 인간 둘은 결론 없이 계속 싸우고, 작은 인간은 다 포기한 얼굴로 앉아있음.’

‘어떤 거로 싸우고 있어?’

‘욕망 덩어리인 인간이 노래를 메인으로 하는 발라드를 밀었고, 좀 차가운 인상의 인간은 반대하고 있었음.’

‘김우빈은 팀이 바뀌든 어떻든 참 한결같구나….’

‘그 욕망 덩어리 인간이랑 엮이지 마셈. 걔 냄새가 안 좋아.’

‘냄새?’

포잉의 설명에 의하면 요정들은 인간의 감정이나 상태에 따라 그 특유의 향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향을 견디고 익숙해지는 게 제법 힘들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더 자세한 이야기가 이루어지려던 그때, 힘찬이가 회의실로 들어왔다.

“지환아, 영상 찾아봤어?’

“아, 아니. 너 화장실 다녀오는 동안 나도 좀 넋 놓고 있었어. 아까 너무 열심히 생각했더니 머리가 쉬어달래.”

“어련하려고. 일단 선배님들 거 안무 중심으로 좀 보자.”

힘찬이와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포잉과 대화하는 건 멀티플레이가 안되는 나에게는 무리였다. 포잉에게는 조금 있다가 마저 이야기하자고, 쉬고 있으라고 하며 달래주었다.

‘일단 나 이거 먼저 손봐야 하니까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자. 포잉은 좀 쉬고 있어. 너 너무 피곤해 보여.’

‘이제라도 알아채서 참 기특하다, 이 인간 놈아.’

욕인 듯 욕이 아닌 얘기를 남긴 포잉은 온몸에 힘을 뺀 것처럼 내 무릎 위에 늘어졌고, 나는 여전히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이상한 기분에 어색해하며 포잉의 등을 살짝 쓰다듬어 주었다.

힘찬이 카메라를 가리고 있으니 이상하게 잡히진 않을 것 같았다.

“단체 군무씬 안무를 다 간소화해야 할 거 같아.”

공식 뮤직비디오부터 방송 출연작, 행사 무대 등 대표적인 무대들까지 둘이서 열심히 돌려본 결과, 아무래도 모든 군무를 살리기 어렵다는 결론이 나왔다.

Limitless의 멤버는 총 7명이었다. 자연스럽게 꽤 많은 인원이 칼 같은 각을 잡고 대칭되는 모습을 만들거나 서로 교차되어 가며 자리를 바꾸는 등, 인원수가 어느 정도 필요한 안무가 많았다.

하지만 우리는 4명이었다. 저 안무를 그대로 가져왔다가는 무대가 엄청 비어 보일 게 뻔한 일이었다.

“아니면 차라리 4명이 소화할 수 있게 안무를 조금 바꿀 수는 없을까?”

“어떤 방향으로?”

“예를 들면 여기, 이 부분.”

힘찬이에게 보여준 장면은 7명의 인원이 커다란 브이자 대형을 만들었다가, 꼭짓점을 담당하는 한 명이 전면으로 나오면서 나머지 인원들이 교차하는 장면이었다.

“우린 4명이니까 차라리 2명씩 서로 거울 모드처럼 마주 보는 안무를 넣는 식으로.”

“아, 아예 단체 군무를 4명용으로 싹 갈자는 얘기지?”

“그렇게 하는 게 덜 비어 보일 것 같은데.”

춤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지만, 다행히 언래블의 팬이 되면서 영상들을 통해 꽤 많은 아이돌의 무대를 봐왔다. 특히나 연말 시상식에서 신인 그룹들이 기존 선배 그룹의 무대를 재해석해 공연하는 것은 꽤 흔한 일이었다. 각자의 색으로 재해석 된 색다른 춤과 연출. 꼬박꼬박 챙겨보다 경험치가 쌓인 덕인지 무대를 보는 게 조금은 익숙했다.

“비어 보이느니 차라리 그게 나을 거 같은데, 그렇게 하면 손봐야 할 부분이 너무 많은데…. 일단 체크 해볼까?”

“대형을 맞추거나 많은 인원이 필요한 부분만 최우선으로 고려해서 정리하고, 우리가 생각하는 모습이나 느낌을 몇 가지 적어서 제형 쌤한테 의견을 구해보면 좋을 것 같아.”

애당초 1차 경연에서 회사가 중점적으로 보고 싶어하는 부분은, 멤버들 개개인의 실력이 아니라 멤버들끼리의 융합, 회사 부서들과의 소통, 그리고 적극적인 의견 어필이다.

우리가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봤자 연습생이고, 앞으로 데뷔를 한다고 해도 결국 회사 내의 많은 부서에서 도움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본 ‘아이돌 창조’에서는 멤버들이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못했었다.

아예 편곡을 통으로 넘기거나, 적절한 조언을 구하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해보려고 노력할 뿐이었다.

때문에 나는 조언과 도움은 받되 방향성은 팀에서 목소리를 내고, 멤버들이 적극적으로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무대를 만들어가는 그림을 그리고자 했다.

그래야 이 경험들을 토대로 나중에 멤버들이 직접 곡이나 안무를 만들고 가사를 쓰는 그런 시기를 앞당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앞으로 점점 더 아이돌에게 전문성을 요구하는 대중이 많아질 것이다. 대중의 눈높이는 높아지는 데 정작 아이돌은 회사가 만들어놓은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도태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덕질 하던 시기에는 직접 작사, 작곡을 하는 아이돌이 대중들의 호의를 더 많이 받았다. 그러다 보니 자기만의 감성이나 색이 담긴 믹스 테이프를 무료 음원 사이트에 공개하는 아이돌들도 점차 늘어나는 추세였다.

그런 아이돌이 더 많이 늘어나기 전에, 아직 희귀성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을 때 먼저 선점하는 쪽이 이득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내가 여러 생각에 빠진 사이 변경이 필요한 모든 안무를 체크한 힘찬의 얼굴이 벌써 핼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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