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SOMEDAY(3)
몇 가지 룰을 알려준 팀장님은 B팀에도 동일한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회의실을 나갔고, 각자 생각에 빠진 멤버들 사이에 잠시 동안 침묵이 내려앉았다.
“형, 우리 생각나는 거 하나씩 얘기해서 정리해보는 게 어떨까요?”
“그래, 아무거나 좋으니까 아이디어를 좀 모아보자.”
먼저 말문을 열자, 하준이 옆에 있던 종이와 펜을 찾아와 나에게 건네주었다. 갑자기 회의 서기가 된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경직되어 있던 분위기를 풀 수 있는 방법이 하나 떠올랐다.
“이름이?”
“어?”
“뭐라고 써드릴까요?”
종이와 펜을 받자마자 하준을 향해 진심 가득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내 장난을 눈치챈 하준은 순간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다가 금세 씩 웃었고,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이해한 힘찬이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다가 자기도 종이랑 펜을 들고 하준의 뒤에 섰다.
“앞에 분, 빨리빨리 진행해주세염.”
“‘준아 사랑해’라고 써주세요.”
“저도 사랑합니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를 멀뚱멀뚱 보던 경환은 내가 흰 종이에 내 이름을 적고 ‘준아 사랑해’라고 쓰고 나서야 풉 하고 웃음이 터졌다.
“제 첫 사인이니까 소중히 간직해주세요.”
“저도 ‘찬아 사랑해’라고 써주세요.”
“잠시만요.”
힘찬이 들고 있던 종이에도 사인을 빙자한 끄적임을 끝내자, 새초롬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하준과 이미 표정 관리에 실패한 힘찬이 대비되어 이 광경이 제법 유쾌해 보였다.
한결 풀린 분위기에 만족한 내가 미래를 상상하며 입을 열었다.
언젠가 진행하게 될 언래블의 진짜 팬 사인회. 그리고 그 안에서 웃고 있을 지환이와 나.
“우리도 언젠가 진짜 우리 팬분들한테 사인해줄 수 있는 날이 오겠죠?”
“그때까지 우리 지환이는 글씨 연습 좀 하자. 이게 뭐냐.”
“아 왜요!”
“지환 씨, 뭐라고 쓴 건지 못 알아보겠는데요!”
“와, 찬이 너까지 이러냐!”
알아보는 데 문제없다고 생각한 글씨 모양으로 놀림당하자 억울한 마음이 차올라, 괜히 툴툴대며 메모를 하기 위해 종이를 챙겼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환이의 글씨체를 몸이 잘 기억하고 있어서.
그런 우리를 보며 왠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던 경환이 내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네가 기운 좀 낸 거 같아서 다행이다.”
“뭐야, 경환이 형 갑자기 되게 어른스러운 척했어! 빨리 평소의 형으로 돌아와요!”
“내가 뭘.”
“맞아, 경환아. 그건 형이 해야 할 대사잖아.”
경연 시작 전부터 긴장해서 실수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많이 담기면 동정이야 살 수 있겠지만, 그건 거기서 끝이다. 이렇게 서로 장난도 치고 하며 사이좋은 모습을 팬들에게 전달해야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시작한 장난이었다.
순전히 혼자 생각하고 했던 돌발 행동이었는데, 잘 받아준 멤버들의 센스에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전에 봤던 영상에서 A팀은 자기들끼리 무언가를 주도적으로 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굳어있었고, 그 모습은 당연히 좋지 못한 평가를 받았다. 할 일을 못 찾고 우왕좌왕한다는 느낌이 강했다고 해야 할까.
그 당시 팀을 이끌었던 영빈은 망아지처럼 날뛰던 우빈을 케어하기 바빴고, 힘찬은 안무에 힘을 싣고 싶어 했지만, 노래에 더 치중하자는 우빈을 이기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회사 사람들에게 너무 재미없는 편곡이라 원곡이 차라리 낫다는 말을 들으면서 폭삭 망했었다.
지금은 팀이 바뀌어서 분위기가 어떨지 모르겠지만, 일단 나는 지금의 내 팀에 집중하기로 했다. 회의실 카메라가 쭉 돌아가고 있었으니, 내 행동을 잘 받아준 하준과 힘찬이의 넉살좋은 모습은 좋은 반응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에 엉뚱한 모습을 보인 경환도.
얘들아 진짜 내가 어떻게 해서든 너희 고생 덜하게 꽃길 깔 테니까 나만 믿어…!
* * *
본격적인 아이디어 회의에 들어가자 긴장이 풀린 멤버들이 온갖 아이디어를 내놓기 시작했다. 어느순간 내 글씨를 지적했던 하준이 종이랑 펜을 뺏어갔다.
그 정도였니? 이건 이거대로 눈물 나네….
“이 곡이 엄청 신나는 댄스곡이잖아. 여기서 우리가 갈 수 있는 방향은 결국 두 개 중에 하난데.”
“아예 발라드 느낌으로 편곡하거나 여기에 힙합 요소를 넣어서 편곡하거나. 그쵸?”
“맞아, 지환이 공부 좀 해온 거 같다?”
“에이 그냥 다 아는 얘기잖아요.”
그리고 난 절대로 이 곡이 발라드로 편곡되지 않도록 막을 생각이었다. 원래 신나는 곡이었으니 전혀 다른 분위기로 만들면 임팩트가 강해질 거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애당초 이 곡 자체가 이미 인기 있는 익숙한 곡이었다. 잘못 손댔다가 죽도 밥도 안 된다.
물론 나는 편곡에 대해 아는 게 없지만, 이미 그렇게 해서 망한 결과를 봤던 사람이었다.
“지환이 말대로 둘 중 하난데, 경환이나 힘찬이는 어느 쪽으로 가는 게 나을 것 같아?”
“B팀이랑 보컬로 승부 보기엔 좀 힘들 거 같아. 차라리 힙합 분위기로 편곡 방향을 잡아서 아예 더 신나게 가는 게 좋지 않을까?”
하준이나 경환이는 곡을 만들었던 경험이 있었고, 힘찬이 같은 경우에는 춤이 특기다 보니, 다들 서서히 신나는 쪽이 나을 것 같다는 방향으로 기울고 있었다.
아무래도 조금 더 익숙한 방향으로 가는 게 이득이 될 것 같다는 반응이었다.
“전 좀 애매한 포지션이잖아요. 춤도 보컬도 중간이니까. 차라리 준이 형이랑 경환이 형을 메인으로 잡고 저랑 찬이가 보컬로 받쳐주는 게 더 자연스러울 것 같아요. 다행히 찬이가 안무 잘 짜니까 퍼포도 그림이 될 거 같고.”
쏟아지는 의견을 적히고 지워지고 반복한다. 어느 정도 무르익었다 싶어서 내내 고민했던 의견을 정리해서 털어놓자, 나를 바라보는 3명의 시선이 참 오묘해졌다.
이 시선을 내가 지금 며칠째 받는 거 같은데….
재 뭐 잘못 먹었나, 혹은 쟤 그 지환이 맞아? 라는 그 시선.
“그… 되게 이상한 생물 보듯이 보면 아무리 저라도 상처받아요.”
조금 이상한 기분이 되어서 뺨을 긁적거리며 딴청을 부려봤지만 셋의 시선은 매우 집요했다.
“흠흠, 준이 형이랑 얘기했던 게 있어요.”
하준에게 눈빛을 보내자 그제야 아, 하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작게 혀를 찼다. 이대로 두면 너무 오해가 깊어질 것 같았고 적당히 밑밥을 깔아둘 때도 된 것 같았다.
“우리가 하나의 유기체와 마찬가지라는 걸 제가 너무 잊고 살았어요. 팀이니까 서로 잘하는 거 못하는 거 다 커버하고 맞춰가면서, 그렇게 하나로 보여야 하는 거잖아요. 근데 저는 너무 제 생각만 했어요.”
회의실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았고, 이미 대화를 나눈 하준만 나를 조금 기특하다는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신뢰도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준이 꽤 높은 수치였는데, 그 구간 설명이… [70 이상 : 당신이 길거리에서 갑자기 춤춰도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으며 박수 쳐줄 사이]였지. 하하….
처음으로 그 스킬이라는 게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분위기가 나쁘지 않은 것 같다는 판단이 들어 ‘내적 친분’ 스킬을 경환과 힘찬을 대상으로 발동시켰다.
“그러고 나서 제가 팀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게 뭔지 고민해봤는데, 중간에 쿠션 같은 역할을 하면 딱 맞을 것 같더라고요.”
“쿠션?”
조금 진지한 눈으로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던 경환이 되물어왔다. 그래 쿠션. 저 쿠션이라는 포지션이 내가 언래블에서 맡고 싶은 포지션이기도 했다.
“네. 우리 멤버들은 각자 자기 색이 확 튀는데, 저는 조금 묻히는 편이잖아요. 그 색이 튈 때는 튀게끔 배경을 잡아주고, 모여야 할 때는 뭉칠 수 있는 바탕이 되는. 그런 검정색을 제가 하고 싶어요.”
“그러다 이도 저도 안되게 되는 수가 있어. 알고 있는 거야?”
힘찬이 어째서인지 조금 흔들리는 눈으로 물었다. 아까 들었던 ‘그만둘까’ 하는 고민과 닿아있는 듯한 멘트에, 나도 모르게 힘찬의 어깨를 두드렸다.
“알아. 특색 없이 살아남기 힘든 거. 하지만 난 우리 멤버들이 어우러질 수 있는 그런 쿠션 포지션이 어쩌면 제일 독특한 자리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반대로 말하면 난 누구랑이든 잘 어울릴 수 있다는 거잖아. 쓸모가 많아지는 거야.”
“이제 보니까 지환이가 욕심이 엄청 많은 거였네.”
“하하, 이제 눈치채신 겁니까! 제가 좀 욕망 덩어리예요!”
자칫 무거워질 수 있었던 분위기를 하준이 적절한 타이밍에 끊으면서 장난스럽게 살려줘서 다행이었다.
“그러면, 편곡은 나랑 경환이가 보는 거로 하고, 퍼포를 찬이랑 지환이가 보자. 대략적인 분위기라도 잡아놔야 A&R팀이랑 안무팀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 것 같아.”
“네. 그럼 우리 일단 다 같이 선배님들 무대 좀 몇 개 골라서 볼까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할지에 대해 방향성도 정했고 역할 분담도 끝냈으니, 오늘의 회의는 성공적이었던 것 같았다.
“근데 B팀은 어쩌고 있으려나.”
그 팀의 구성이 영빈, 우빈, 세빈이다 보니 하준은 조금 걱정이 되는 것 같았다.
지금이야 팀을 나눠서 경쟁하는 구도라고 쳐도, 하준은 여전히 모두를 걱정하고 챙기려 하고 있었다.
“와, 준이 형. 지금 형 팀원들 앞에서 타 팀 걱정하기 있음?”
“아니, 그냥 애들 뭐하냐고 한 거잖아!”
“와, 하준이 형 나빴네!”
조금 더 이 상황에 집중하길 바란 나는 하준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장난을 걸었고, 내심 뜨끔 했던 하준이 펄쩍 뛰었다. 그 모습에 건수를 잡은 힘찬도 옆에서 같이 쿡쿡 찌르며 장난을 걸었다. 하준이 경환에게 도움의 눈빛을 보냈지만, 그조차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알았어, 알았어! 경연 끝날 때까지는 너희들을 더 챙기면 되잖아!”
“와, 당연한 건데 성질낸다. 경환이 형, 어떻게 생각해요?”
“하준이 형이 잘못했네.”
“그래 내가 잘못했다!”
어느새 회의실에 들어온 포잉이 공원에서 나와 하준에게 보냈던 그 하찮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저 냥아치 요정이?
슬쩍 노려보자 콧방귀를 뀐 포잉은 폴짝폴짝 잘도 뛰어올라 내 어깨에 턱 하니 자기 몸을 걸쳤다. 요정이어서인지 무게가 느껴지지 않아 조금 이상했다.
3명에게 지나친 사랑을 받은 하준은 그사이 10년은 늙은 듯한 얼굴로 마른세수를 했고 우리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자, 이제 장난 그만하고 팀장님한테 가서 보고하고 필요한 거 요청하자.”
“네에~.”
하준 형의 뒤를 졸졸 쫓아서 이동하던 우리는 B조가 자리 잡고 있는 회의실에 한 번씩 시선을 주고 형의 뒤를 따랐다.
‘포잉, 저기 회의실 보이지? B조 회의실이라고 적힌 곳. 저기 가서 보고 상황 좀 보고 알려줘.’
‘너는 도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임?’
‘유능하고 재주 많고 착한 내 요정님?’
‘…하.’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정말 도와주기는 할 거였는지, 어깨 위에서 훌쩍 뛰어내린 포잉은 사뿐사뿐 회의실 안으로 사라졌다. 문을 통과하는 모습에 소리 지를 뻔했지만 주먹을 꾹 쥐면서 손바닥을 눌러 참았다.
저거 완전 어디든 프리패스잖아?
생각보다 포잉이 날 도와줄 수 있는 일이 굉장히 많을 것 같다는, 아주 행복한 미래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