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화상 (1) >
태어나기 전부터 조국은 흔들리고 있었다.
왜적이 휩쓸고 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북쪽에서는 다시 오랑캐가 흥기했고, 그들은 천하의 주인이 되겠다는 야심을 품고 이 땅을 두번이나 침노했다.
이런 암담한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나가야 하는가.
답은 주자 그 자체에 있었다.
"주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금나라가 승세를 타 중원의 절반을 병탄했으나 그 치세는 모질고 패도에 불과했다! 그리하여 정통은 오로지 아름다운 의리와 도덕을 간직한 남송으로 이어진 것이니, 오늘날 조선의 형세가 이와 같지 않은가?
우리가 중화의 예법을 갈고 닦는한 졌어도 진실로 진 것은 아니다!"
정묘호란 이후 이어진 패배감과 위기의식을 극복하기 위해선, 같은 시련을 겪었던 주자의 가르침에 투철해져야 한다.
때문에 젊다면 젊은 나이였지만, 그 짧은 평생을 그는 주자를 위해 걸었다.
정학을 숭상하고(崇正學, 숭정학), 이단을 배척하고(闢異端, 벽이단), 주자를 수호하고(守朱子, 수주자), 주의 정통을 지키는 것(尊周大義, 존주대의).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사명이 아니겠는가.
아마 역사처럼 조선이 청에게 패배하고 그 신하가 되었다면 이러한 인식은 강해지면 강해졌지 약화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혜성처럼 등장한 이자원이 홍타이지를 참살하고 병자호란을 승리로 끝내자 송시열의 세계관은 조금 흔들리기 시작했다.
"도학에 정통하지도 않은 무관 하나가 나라를 구했다······?"
그의, 주자를 향한 맹목적인 숭상은 현실에 대한 체념에서 기반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전제 자체가 조금씩 깨져나가고 있었다.
역설적으로 이자원의 승리와 조선의 변화가 그에게 영향을 미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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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께서 남만에요?"
봉림대군이 놀라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스승께선 조선에 남아 하실 일이 많으신 분이 아닙니까."
봉림대군은 임금의 근친이자 군무에 연관되어있는 자신의 위치상 무당(無黨)파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친척이기도 하며 인조반정의 주요 공신들인 신경진이나 구굉, 구인후 등이 공서에 속한만큼 어느정도는 그쪽과 가까운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봉림대군은 또한 스승인 송시열 또한 아쉬운 인재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조선에서 소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사오이다, 봉림대군 대감."
산림은 조정에서 힘을 잃었고 사론 또한 그의 처신을 두고 반으로 갈렸다.
관리로서도 초야에 묻힌 선비로서도 송시열은 운신의 폭이 대폭 좁아졌던 것이다.
자신과 송준길의 목숨을 구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남만까지 가실 필요는······."
"있사오이다."
송시열이 말했다.
"이자원, 그자가 만드는 흐름에 이 나라가 모조리 빨려들어가고 있습니다. 실로 두려운 일이지요."
자신과 송준길이 거기에 일조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 아니었더라도 이자원의 의도가 처음부터 성리학의 독점을 깨겠다는 것에 있었던 이상 언제고 관철해냈을 것이다.
이자원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나 송시열은 그리 짐작하고 있었다.
"주상 전하께서 남만승들의 의술로 어체를 회복하셨다지요. 백성들 사이에서는 남만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가고 있고, 그 교인이 되는 자들이 늘어가고 있다 들었소이다. 군문에서도 홀란도인들에게 병사(兵事)와 관련하여 지원을 요청했다니, 양명학이 벌여놓은 틈으로 남만학이 비집고 들어오는 것은 순식간일 것이오이다."
하지만 송시열은 손쓸 수 없었다.
어려운 현실에서 눈을 돌리기 위한 수단으로 교조화되고 철옹성이 되어갔던 주자학은 그 기반을 잃었다.
'정사를 닦아 이적을 물리치셔야 하옵니다.'
'마음을 바르게 하고 사욕을 극복하여 정사를 수행하면 바라시는 뜻을 점차 이룰 수 있게 될 것이옵니다.'
조정이 북벌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상황에서 스승 김집과 산림은 언제나 수신론을 강조했다.
병가(兵家)는 그들의 전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떠한 과정을 거쳐 그리된다는 말인가? 내가 수신(修身)하여 도통(道通)하게 되면 저절로 오랑캐들이 죽어 나자빠지는가?'
그러나 당연히 이런 반론이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임금은 북벌의 방법론으로서 수신을 강조하는 그들의 말은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다.
대신 그는 이자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자원은 예학이나 도학에 깊지도 않았고, 그것에 별로 관심도 없어보였지만 전쟁에는 누구보다 능통한 장군이었으니까.
자신이 배운 도학으로는 임금의 소원을 들어줄 수 없었다.
온 나라의 관심이 북벌에 쏠려있으니, 조종으로부터 내려온 학문이 무슨 소용이랴.
북벌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남만학이 주류로 자리잡아 영원토록 이 땅을 다스리는 것이 아닐까.
"이대로 가다간 주자의 가르침이 이 나라에서 영영 사장되는 것이 아닌지 치열하게 고민했사오이다."
양명학이야 이단이라고는 하나-어디까지나 송시열의 입장에서- 같은 계통의 학문이었으니, 퇴계가 그러했던 것처럼 하루종일이라도 변척(辨斥)할 수 있다.
그러나 송시열은 남만학에 대해서는 조금도 아는 바가 없었다.
정도전이 불씨잡변을 지어 불교의 허망함을 비판하였던 것처럼 그 또한 예씨잡변 같은 것이라도 편찬하려면 우선 저들이 무슨 가르침을 갖고 있는지 알아야 했다.
"남만승들의 이야기만 들어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으니, 직접 호굴로 들어가야겠지요. 그곳에서 성리학이 진정한 정학임을 증명할 것이오이다."
낱낱이 배우고, 그 모순을 밝히고 끝내는 주자의 가르침이 옳았다는 것을 널리 알릴 것이다.
그것은 비단 세상에 하는 선언일 뿐만 아니라, 흔들리는 자신을 위해서 하는 말이기도 했다.
"실로 큰 뜻을 품으셨습니다."
봉림대군은 진심으로 감탄하며 말했다.
그 또한 성리학을 배운 유자(儒者).
남만학의 유용함은 인정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성리학이야말로 학문의 근본이라고 생각하던 터였다.
그는 스승이 이 싸움에서 끝내 이겨내기를 바랐다.
얼마 뒤 송시열과 송준길은 봉림대군의 추천장을 들고 벽란도에 도착한 홀란도인들의 배에 올라탔다.
조금 긴 여행이 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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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비는 천천히 검을 뽑아들었다.
그가 명나라에서부터 지니고 다니던 물건이지만 여느 중국검처럼 화려하고 날 폭이 넓지는 않았다.
오히려 날렵하고 예리한 것이 일본도를 연상케한다.
이것은 그가 사사받은 검법 때문이다. 거기에 맞는 칼을 선택해야했기 때문이다.
적비의 검이 춤췄다.
검에 반사된 달빛 때문에 주위 1m 가량은 온통 검에 반사된 달빛으로 번뜩였다.
"부는 바람 뿌리는 비 성문 옆 지나는 길
독한 기운 응달에 오르니 백 척 누각이라
푸른 바다 파도 속에 날은 이미 땅거미 지고
청산의 슬픈 기색은 싸늘한 가을 기운 앉았네
가고픈 마음에 질리도록 왕손초를 보았지만
나그네 꿈은 어지러이 임금의 도시에 깨이누나······."
적비가 읊는 낭랑한 시가 사방에 울려퍼졌다.
요즘 어떠한 연유로 호사가들이 구해다 몰래 읊어대는 시였다.
"죽은 광해군이 남긴 시라지요."
다가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검무(劍舞)를 추며 한층 날카로워진 적비의 기감(氣感)은 누군가의 접근을 눈치챘다.
그러나 적비는 태연하게 그리 말을 건넬 뿐이었다.
"그런 것을 외우고 있었는가? 죽은 이가 조선 제일의 문인도 아닐진데."
"옛 임금이 남긴 비감이 더한다 하여 자못 인기가 있는 모양입니다. 게다가 저를 모시던 한낱 종에게 독살을 당했다니 고금을 따져보아도 한스러운 죽음입니다."
적비는 그 말을 남기고 계속해서 검무를 춰나갔다.
한걸음을 나아갈 때는 물흐르듯이, 그러나 발을 내딛을 때는 묵직하게.
검격은 날카롭지만 보법은 태산처럼 무겁다.
달을 찢을듯이 검을 치켜 올리는 것으로 마무리한 적비는, 검신의 진동이 멎자 조용히 그것을 갈무리한 뒤 땀을 닦았다.
"훌륭하구나."
적비의 검무를 감상하던 이자원이 툭 내뱉었다.
"별것 아닌 재주올시다."
적비는 이자원에게 포권하여 말했다.
"쾌검(快劍)이로군. 훈국 왜인들이 쓰는 검법과 비슷해보인다."
이자원의 추측은 타당했다.
애초에 적비가 배운 것이 거기에서 비롯된 검술이니 말이다.
"용행검(龍行劍)이라 하는 검법입니다."
용행검법은 그 유명한 척계광이 창안한 검법으로, 적비의 고향에서 왜구를 토벌하던 그가 적이었던 그들의 칼에 영향을 받아 만든 것이다.
당연히 일본도의 냄새가 풍길 수밖에 없었다.
적비가 무심하게 꺼낸 말에 이자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적비는 멀리 변방 조선 사람인 이자원이 이것을 알줄은 상상하지 못했지만, 후대인인 그는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척계광이 고안한 용행검법. 절동, 복건, 혹은 광동······. 이쪽인가.'
그러나 이자원은 적비의 출신을 추리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은 아니었다.
이자원은 짤막하게 말했다.
"나는 퇴청이 늦는다. 먼저 처소로 돌아가거라."
광해군을 처리하고 돌아온 박철균과 할말이 있었다.
그러나 적비는 이상하리만치 버티고 섰다.
"장군을 호위하는 것이 제 임무입니다."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말하는 적비에게 이자원은 쓴웃음을 지었다.
"오늘은 더 필요없으니 물러가도록."
"장군."
적비가 말했다.
"장군은 아직 저를 믿지 못하시오이까?"
"너를 믿어야 할 이유라도 있느냐?"
이자원의 물음에 적비는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소인이 비록 다른 주인을 모시고는 있지만, 이제껏 장군께 도움이 되면 되었지 털끝만한 해도 끼치지 않았습니다. 조금은 더 신뢰를 보여주십시오."
"네가 있던 곳에서는 그렇게 가르쳤느냐?"
대놓고 그리 말하다니.
누군가에게 자신을 믿어달라고 하는 것만큼 공허한 외침은 없다.
"나는 너를 모른다."
신뢰란 말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관계거나,
자신의 명령을 거절할 수 없는 처지에 있거나,
혹은 탄로나면 타격을 피할 수 없는 약점을 쥐고 있거나.
그러나 적비는 그 무엇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이자원은 그렇기에 적비를 신뢰할 수 없었다.
하물며 진실된 정체까지 알 수 없는 자가 아닌가.
잠시 생각하던 적비는 이자원을 쳐다보고 말했다.
"제 정체를 말씀해드린다면, 장군께서는 저를 믿으시겠습니까?"
"거짓이 아니라면."
의미없는 이야기다.
적비가 자신의 정체, 사정, 심지어 부모, 고향과 그 팔고조도(八高祖圖, 고조까지의 세계도)까지 낱낱이 늘어놓는다 한들 그중 사실인 것은 하나도 없을테니까.
이자원은 돌아섰다.
"네 일이나 잘하도록."
숭정제의 의심을 누그러뜨리고, 조선과 명 사이의 비공식적인 가교 노릇을 하는 것.
그정도 역할이면 충분했다.
그때 적비가 말했다.
"저는 장군께 빚이 있습니다."
돌아서던 이자원은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쳐다보았다.
"이것은 거짓말이 아니오이다."
이자원은 잠시 기억을 뒤져보았지만 어찌 짐작가는 바가 없었다.
설마 말단 군관 시절 본신에게 빚진 자는 아닐 것이 아닌가.
생각하던 와중 적비가 인사를 올렸다.
"그럼 장군, 소인은 먼저 물러가보겠사오이다."
이자원은 떠나가는 적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설사 그렇다한들 달라질 것은 없다.
그가 보아온 적비는 은원보다 명령을 우선할테니.
이자원의 뜻대로 된다면, 언젠가는 갈라설 수밖에 없는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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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3년이 지나 1641년.
벽란도.
"배가 들어온다!"
멀리 선두(船頭)를 보고 백성들이 외쳤다.
< 변화상 (1)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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