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 노림수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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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도 구원이라는 목표는 이미 실패했고, 희생양도 생겼으니 쇼토와 엉어투가 더 미적거릴 이유는 없었다.
한윤을 반적으로 몰기로 결정한지 하루도 되지 않아 철군을 시작한 것이다.
이를 눈치챈 이자원은 즉각 명령을 하달했다.
"마병별장 황익에게 청군을 추격하라 일러라!"
"또한 부원수께도 이를 알려라! 의주군이 길을 완전히 막지는 못하더라도 돌아가는 저들을 들이치면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자 이자원은 어랑산에 주둔해있던 조선군을 지휘해 천천히 청군이 있던 자리로 밀고 들어갔다.
청이 남기고 간 군기(軍旗) 따위를 노획하고 있을 때, 이자원에게 수상한 자들을 붙잡았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박 초관. 적비를 데리고 군영을 감독하도록."
“저 자를······ 말씀이시오이까?”
“그렇다.”
이자원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소인은 계속 장군의 옆을 지키겠습니다."
"필요없다."
적비의 청도 단칼에 거절하는 그였다.
‘파총께서도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도 알 수 없는 자를 계속 데리고 다니시기는 뭐하신게로군.’
반면 박철균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어흠, 파총 나리의 명이시니라. 어서 나를 따라와라.”
박철균의 재촉에 적비는 하는 수 없이 이자원의 옆을 떠났다.
"사로잡았다는 자를 데리고 와라."
이자원의 말에 사내 몇이 포박을 당한채 끌려왔다.
복색을 보아하니 청군이었으나 왜 그들만 낙오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너희는 누구냐."
이자원의 말에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가 포로의 면면을 한번 지긋이 쏘아보자 옆의 부하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저, 저희는 청군 솔호 니루의 병사들이고, 여기 계시는 이분은 아다하 하판 한택(韓澤)이라는 분입니다."
"이놈이······!"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하판. 용서해주십시오."
한택이 병사를 노려보았지만 묶인 포승줄 때문에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너희는 어찌하여 이런 곳에 머무르고 있었느냐. 아니, 뻔하군."
이자원은 질문하려던 것을 거뒀다.
자신이 한윤을 청군 수뇌부의 먹잇감으로 던져줬지 않은가. 한택은 그와 운명공동체이니, 같이 잡히기 전에 간신히 몸이나 뺀 것이리라.
"우리를 어떻게 할거요?"
한택이 이자원을 노려보며 으르렁댔다.
"해서(海西)에서 그리도 많은 사람을 죽였으면서 살기를 바라는가?"
이자원은 그런 한택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한택의 경우 정묘호란 황해도에서 학살을 벌인 일로 한윤보다 그 악명이 드높았다.
"그렇소. 살고 싶으니 조선에서도 도망쳤지. 복수하기 위해 백성을 도륙했고. 이제 내가 조선의 포로가 되었으니 나를 죽일 셈이오?"
숫제 울부짖듯 하는 한택을 내려다보며 이자원은 피식 웃었다.
"네깟놈의 목 따위에 무슨 대단한 가치가 있겠느냐."
한택의 목을 베어가는 것도 공이라면 공이겠지만, 이자원은 그것으로 끝낼 생각이 별로 없었다.
이자원은 회수한 정홍기(正紅旗)의 깃발을 잠시 쳐다보더니 말했다.
"풀어주마. 청으로 돌아가라."
"······그게 무슨 소리요."
"네 형을 구하고 싶지 않으냐? 그렇다면 돌아가서 청 조정에 진상을 낱낱이 고하는 수 밖에 없다."
정홍기를 이끄는 자는 한윤에게 혐의를 덮어씌우며 면피의 명분을 세웠다 생각하겠지만, 한택이 살아서 돌아가면 진상을 두고 한바탕 난리가 벌어질 것이다.
산적한 문제보다 정치적 공박이 우선시될테고, 청을 이끌고 있는 호거와 도르곤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흔들 수 있을 때 흔들어놓는다.'
조선이 준비를 끝마칠 때까지 청이 회복하지 못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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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택을 살려 돌려보낸 뒤, 이자원은 다시 용사포로 복귀했다.
가도에서는 아직까지 전투가 한창이었던 모양인지, 섬 전체에서 연기가 흩날리고 있었다.
“심적은 미처 사로잡지 못했고, 도망가던 부총병 백등용만 잡을 수 있었습니다.”
오삼계가 얼굴을 찌푸리고 말했다.
명군이 가도 남쪽에 상륙한 후 중간에 낀 고갯길을 넘어 동강진을 기습하자, 심세괴군은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일패도지했다.
유림은 그 기세를 몰아 해상에서 주의를 끌며 교전을 벌이던 조선군을 일제히 상륙시켰고, 동강진이 무너지는 틈을 타 심세괴는 도망쳤다.
“심세괴는 어디로 도망갔느냐?”
이자원이 묻자 백등용은 머리를 바닥에 처박고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소인은 군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 먼저 몸을 뺀 터라 모르옵니다! 심 총병의 강압에 의해 억지로 역모에 가담한 것 뿐이니 부디 선처해주십시오······.”
“끌고 가라.”
쓸모 없는 자였다.
어차피 역적질을 하다 잡혀버린 이상 숭정제 앞에 보내지는 것은 기정사실이고, 그때 가서 저 변명이 얼마나 먹혀들어갈지는 순전히 황제의 마음이었다.
이자원이 보기에 결말은 뻔했지만 말이다.
“소관이 생각하기에 심세괴는 신미도(身彌島)로 갔을 것이오이다.”
“내 생각도 그렇네.”
이자원의 말에 유림이 답했다.
큰 배를 타지 못했으니 가까운 섬이 없는 서쪽으로 향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동쪽에 있는 섬에 잠시 숨어있으려 할 것이다.
가장 가까운 곳은 소대도나 무근장도 등이었으나 섬이 작고 발견되기 쉬우니 자신이라면 제법 크기가 되는 신미도로 갔을 것이다.
게다가 한때 가도가 아닌 이곳에 동강진이 설치되어 있었던 만큼 병력이 일부 주둔해있는 것도 장점이었다.
“그렇다면 이어서 신미도 공략에 나서야겠군.”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지요.”
이미 가도가 함락당하며 대세가 기울었다.
역적이란 오명을 쓰고 토벌당해서 기어들어온 상관을 누가 달가워하겠는가.
“이런 상황에서는 칙서 한 장으로 포로가 된 심세괴를 얻을 수 있을 것이오이다.”
이자원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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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세괴는 곧 엉망이 된 얼굴로 끌려왔다.
신미도의 명군은 반란에 협조하지 않은 자는 사면해준다는 칙서의 내용을 듣자마자 심세괴를 묶어 바쳤다고 했다.
"본관을 그리도 보고 싶어하더니 이렇게 만나게 되었군."
"오랑캐가 제때 도달했다면 입장이 반대가 되었을 것이다! 무능한 놈들."
이자원의 말에 심세괴가 발악하듯 외쳤다.
그러나 이자원은 딱히 신경쓰지 않았다.
심세괴가 조선말을 알아듣는다는 사실에 약간 놀란 것이 전부였다.
"청군은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내가 물리쳤을 뿐."
전리품으로 청의 군기와 수급을 많이 거두었지만 구태여 심세괴에게 보여줄 필요는 없었다.
오삼계는 그 말에 이자원을 불편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가 가도를 함몰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청군과 심세괴군은 하늘과 땅 차이다.
게다가 전략 자체도 이자원이 내놓은 것이니 합산하면 이자원이 자신보다 크게 앞설 것이었다.
하지만 이자원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심세괴에게 의도적으로 위압감만 안겨주고 있었다.
"빌어먹을, 흐흐흑······."
처음에는 악에 받혀 지껄이던 심세괴도 그리되자 갑작스레 흐느꼈다. 마음이 무너진 것이다.
이자원은 천천히 그에게 걸어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협조해라.”
이자원의 속삭임을 들은 심세괴가 몸을 흠칫 떨었다.
“그리하면 편히 죽을 수 있도록 힘써주지.”
명나라에서는 반역자를 능지형으로 다스린다.
충분히 피를 보기 전에 쇼크로 사망하지 않도록 소량의 아편을 복용시킨 뒤, 그 살을 한점한점 발라내는 것이다.
곧 자신이 처하게 될 운명을 깨달은 심세괴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을까.
"심세괴를 옥에 가두어라."
이자원의 명령에 심세괴는 착잡한 표정으로 끌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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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삼계의 병력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군비는 조선이 지출했다.
그렇다면 동강진의 재정을 뜯어 벌충해야 마땅하나, 애초에 심세괴를 쳐내고 가도를 정상화시키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공식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 공식적으로는.
'자, 장부는 김문재라는 한인 선비에게 맡겨 두었소. 비록 공식적으로 맡은 직책은 없는 자이나 그렇기에 쓰기가 편했지.'
'다행히 그자는 죽지 않고 사로잡힌 모양이오이다.'
'빼내오도록.'
가도는 명과 조선, 그리고 비밀리에 청까지 잇는 무역의 중심지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치부(致富)를 할 수 있는 곳에서 심세괴 같은 자가 딴주머니를 차지 않았을 가능성은 없다시피 했다.
그 결과 발견된 것은 모문룡 시절부터 쌓아온 십 수만 냥의 잠화(潛貨, 비자금).
당연히 심세괴 혼자 삼킬 수 있는 양은 아니니, 명나라 고관들에게 시시때때로 바치는 인정이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 분명했다.
이자원이 자신의 목숨을 틀어쥔 사실을 알고 있는 김문재는 이러한 사실을 빠짐없이 털어놓았다.
"과연. 이 정도니 황룡부터 유흥치까지 숱한 모리배들이 총병 자리를 탐냈군."
이자원이 이중장부를 살펴보며 말했다.
단돈 10만 냥을 내리는데도 입술까지 떨던 숭정제가 이 장부를 보게 되면 눈이 돌아갈 것이 분명했다.
'그러기 전에 적당히 사탕을 물려놔야겠지.'
"부르셨소이까."
이자원의 부름을 받고 온 적비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글을 읽을 줄 아느냐?"
"그렇사오이다."
이자원은 손을 깍지끼며 말했다.
"가도의 재정은 모두 황제 폐하의 것. 군비로 전용할 정도만 빼고 모두 대국 조정에 되돌릴 것이다."
“그런 말씀을, 왜 소인에게 하시는지요.”
눈이 살짝 흔들렸지만 말투는 태연하다.
그러니 이자원도 마찬가지로 태연하게 나갔다.
"일손이 부족하다······ 뭐, 그 정도 이유로 충분하지 않느냐."
이자원은 살펴보라며 심세괴가 지니고 있던 명목상 장부를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아드는 적비를 보며 이자원은 차를 들어 한 모금 머금었다.
'숭정제는 지독한 의심병 환자다.'
북경에서야 이자원에게 호감을 보였지만, 그가 숭정제의 시야에서 멀어진 지금 어떤 변덕을 부릴지 모른다.
아마 끊임없이 충성을 증명한다 해도 마찬가지겠지.
그런 의미에서 적비는 이자원을 위한 최고의 변호인이 되어줄 것이다.
그의 눈을 속여 넘긴다면, 이라는 단서가 붙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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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자원이 천자에게 가도 총병 자리를 약속받았다더라
- 쳐들어온 청군과 가도의 역적을 손쉽게 물리쳤다더라
- 전하께서는 그가 돌아오는대로 새로 공신을 더해주신다더라
책봉주청사와 합류한 이자원이 한양으로 돌아오기도 전에 이런 소문이 도성을 휩쓸었다.
"논공이 끝나고 제대로 승차하기도 전에 다시 대공을 세우다니······."
"게다가 이제는 대국 총병이라지 않은가."
이자원은 과연 어디까지 올라갈 것인가.
이것은 한바탕 피바람이 몰아친 조정 뿐만 아니라, 정국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늘어놓기 좋아하는 한량들이며 초야의 선비들에게조차 초미의 관심사였다.
주청사와 함께 명나라의 책봉사가 왔다는 소식조차 화제에서 밀려날 지경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임금은 모화관에 거둥하여 칙서를 받들고, 정전(政殿)에 나아가 백관의 진하(陳賀)를 받을 때까지도 아무런 언질이 없었다.
그것이 신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전하께서는 이자원을 옆에 두고 북벌을 의논하려 하신다. 헌데 그가 가도 총병에 앉아버렸으니······.'
신경진은 저 멀리 선 이자원을 보며 염려했고,
‘이자원이 외방에 나가있는 사이, 산림과 협력해 여론을 다시 바른 곳으로 이끌어나가야 할 것이다.’
은퇴해 쉬다가 나온 김상용은 신임 예조판서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임금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그의 이름은 바로 김집(金集)이었다.
호란 이후 계속해서 선대왕의 원수를 갚자는 의견을 피력해왔던 김집이 마음에 들었는지, 임금은 비어있던 예판 자리에 그를 앉혔다.
상당히 파격적인 인사였지만 옥사 후 임금의 명을 거역할 사람도 감히 없었을 뿐 아니라, 김상용의 언질을 받은 청서가 나서서 이를 추진하니 김집은 별 논란 없이 예조판서에 제수되었다.
‘북벌을 국시로 삼더라도 그것은 이자원, 신경진 같은 무부가 아니라 정학(正學)을 배운 선비가 주도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반드시 무신이 국사를 농단하게 됨이야.’
촉한의 제갈량이 기산에 여섯 번 나아가고도(六出祁山) 정치가 바로 선 것은, 그가 당대 제일의 선비였기 때문이다.
반면 제갈량이 죽자 바로 위연 같은 자가 꿍꿍이를 품고 병권을 쥐려 나섰으니 사람을 쓴다함은 이처럼 어렵고 조심스러운 것이었다.
"전하께서 들어오십니다!"
내관의 얇은 목소리가 울려퍼지고 임금이 신하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눈길은 공서의 신경진과, 청서의 강석기를 잠시 훑었다가 마침내 끝에 서있는 이자원에 닿았다.
이자원의 눈 또한 임금을 향했다.
“훈련도감 파총 이자원은 이 앞으로 오라.”
"예, 전하."
뚜벅뚜벅뚜벅.
이자원의 발이 성큼성큼 움직일 때마다 신하들은 그를 주목했다.
이 나라 제일의 공신이 된 그에게 무엇이 내려질까.
그렇게 이자원이 임금의 앞에 섰을 때.
임금이 입을 열었다.
작가의말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최명길은 한윤을 포섭하자 주장하며, 한택은 해서(황해도) 일대에서 많은 사람을 살육했지만 한윤은 그렇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조에게 한윤 포섭의 중요성을 납득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한택에게 떠넘겼을 가능성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한택보다는 한윤에 대한 시선이 나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모문룡은 온체인 등 명의 고관들에게 자주 뇌물을 상납했는데, 후금과 화의한 일이 걸렸을 때는 관계관원들에게 은 4만 냥을 뿌려 무마했다고 합니다. 명나라의 인사는 고관에게 바치는 뇌물에 달려있었던 만큼 심세괴 시절에도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