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45화 (45/213)

〈 45화 〉 어랑산 (2)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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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이 우리 움직임을 읽었다······.”

어랑산 돌파 시도가 좌절된 후 열린 회의.

쇼토는 씹어뱉듯이 말했다.

“의주에서 철산까지는 불과 반나절 거리입니다. 조선군이 용사포로 가는 길을 막고 있고, 우리 뒤에는 의주군이 남아있으니 이만 철군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정홍기 구사 어전 엉어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가 보기에도 이 소기주는 생각이 그다지 깊은 편은 아니었기에, 이쯤하고 물러나는 것이 좋아보였다.

하지만 쇼토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

“이미 십왕정에서 큰소리를 떵떵 치고 왔는데 어찌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물러날 수 있겠는가?”

좌우섭정왕들이 권력을 나누어 가진 이래 청나라의 정국은 요동치고 있었다.

일반 신하들이야 그저 자라처럼 머리를 껍질 속에 숨기고 풍파가 지나가기를 빌겠지만, 그는 달랐다.

전공을 세우고 가도의 물자를 취해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우섭정왕 도르곤의 만류도 뿌리치고 출진한 쇼토였다.

이대로 물러간다면 그는 비웃음을 면치 못하리라.

아니, 그 뿐이면 다행이다.

정홍기와 양홍기에 섭정왕들이 손을 뻗칠 수도 있었다.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저 어랑산이라는 곳에 진을 친 조선군은 몇 쯤 된다고 했지?”

“천 명 가량일 것입니다.”

“우리군과 비슷하군.”

본래 공자는 방자의 세 배 병력이 있어야 능히 이길 수 있다고 하지만, 청군과 조선군의 기량 차이는 그 이상이니 저곳을 뚫어내는 것도 가능할 것이라 생각한 쇼토였다.

“하지만 정공법으로서 진채를 뚫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버이서.”

그때 한윤이 차분히 말했다.

초를 치는 듯한 그의 말에 쇼토는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의미냐? 너도 구사 어전의 말처럼 조선군을 피해 다시 우리땅으로 물러가자는 말을 하려는게냐?”

“그런 것이 아닙니다.”

쇼토의 짜증에 한윤이 황급히 대답했다.

청에서 이방인 출신 팔기로 살아가며 윗사람의 심기를 맞추는데 강제로 능숙해질 수 밖에 없던 그였다.

이럴 때는 재지 말고 바로 자신의 제안을 분명하게 밝혀야 했다.

“청사포로 들어가는 가장 빠른 길은 분명 어랑산을 통과하는 것이지만, 조선군과 교전하며 시간을 끌면 설령 이기더라도 그러한 이점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군사는 신속한 것이 귀하니(兵貴神速) 차라리 조금 돌아가더라도 조선군을 피해 움직이는 것이 낫습니다.”

“음······.”

쇼토가 들어보니 일리가 있었다.

“좋다. 잘란 어전의 말대로 하자. 조선군은 우리가 용사포를 들이치는 것을 구경이나 하라고 해라!”

===

마병별장 황익은 입술을 깨물었다.

부서면 쪽으로 들어와 서창(西倉) 일대에 매복해있으라는 명 때문에 어랑산에서 이어지는 숲에 병력을 숨겨두긴 하였지만, 정말로 청군이 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척후의 보고를 받고 나자 명확해졌다.

‘이 파총, 그 놈의 말이 맞았구나!’

긴장 때문에 손에 땀이 흥건했다.

청군이 지나가는데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황익을 보며 옆의 군관이 말했다.

“별장 영감, 어떻게 하오리까?”

‘젠장······.’

청군과 맞붙기는 싫은 황익이었지만, 이자원은 그가 명령을 어겼을 때 그냥 놔둘 것 같지 않을거란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는 결국 눈을 딱 감고 소리쳤다.

“전군, 공격하라!”

===

‘청군은 오늘밤 움직인다.’

붓이 종이 위를 노닌다.

본신의 서체는 그리 미려하지 않았지만, 어차피 글이란 내용만 전달하면 되는 것.

이자원은 그 외의 일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청군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용사포의 본영을 공격해 가도를 구원하는 것. 우리를 뚫고 지나가봤자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

어랑산을 돌아 빠져나가면 바로 서창 일대다.

그곳에 기병들을 매복시켜 두었으니 황익이 제 소임만 다해준다면 오늘밤 청군은 큰 피를 볼 것이다.

“파총 나리!”

“어찌 되었느냐?”

박철균이 달려와 외치자 이자원이 물었다.

“청군이 걸려들었사오이다! 대승이오!”

“됐군.”

황익이란 자는 그리 미덥지 않았지만, 이정도 일도 해내지 못할 정도의 위인은 아닌 모양이었다.

“마병들이 선두는 보내고 중간 대열에 덮쳐 들어 헤집으니, 청군은 차마 더 나아가지 못하고 물러난 모양이오이다.”

“그런가.”

이자원은 붓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 청군은 어떻게 나올까.

가도 구원은 요원하니 이대로 철군하지 않을까?

하지만 임경업의 의주군이 퇴로를 막을테니 다소간의 손실을 감수할 수 밖에 없으리라.

‘가도는 구경도 하지 못하고 패퇴한다면 지휘관의 면이 말이 아닐 것이다.’

지금 청군을 이끌고 있는 자가 청나라에서 벌어지는 정치싸움의 플레이어인지, 아니면 그 부하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강력한 황제가 아니라 여러 세력가가 다투고 있는 지금이라면 본인, 혹은 그 윗사람은 상당한 정치적 타격을 입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변명할 거리를 만들어주어야지.’

“오늘 사로잡은 조선인 포로를 끌고 오라.”

이자원이 말했다.

포박당한 병사가 끌려 왔다.

- 털썩

옆에 서있던 적비가 병사를 강제로 무릎 꿇렸다.

이자원은 일어나서 고통에 신음하는 병사 앞에 섰다.

“살고 싶으냐?”

이자원이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갑작스런 말에 병사는 미처 알아듣지 못했다.

“예, 예······?”

“살고 싶냐고 물었다.”

이자원이 재차 말했다.

“사, 살려주실 겁니까요?”

이자원이 찬 환도를 힐끔거리며 병사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

“너 따위의 목을 베어 무엇하겠느냐.”

이자원은 평탄한 어조로 말했다.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단,”

조건이 있을 뿐.

“내가 시키는대로 하겠다 약속해야 한다.”

“무엇을······ 시키려 하시오이까?”

“별 것은 아니다. 너희 조선인 부대, 솔호 니루에는 대장이 있지.”

“한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역시나.’

그 자가 맞았다.

“그에게 이 서찰을 전하도록 하라.”

이자원은 방금 써내려간 서찰을 병사의 옆에 던져주며 말했다.

“무슨 이유로······?”

“너는 알 것도 없고 그 내용을 봐서도 안된다. 그저 한윤에게 전하기만 하면 충분하다.”

이자원이 말했다.

그가 고갯짓을 하자 적비가 병사를 포박하던 밧줄을 풀어주었다.

“가라.”

눈치를 살피던 병사는 재빨리 편지를 낚아채더니 군영을 빠져나갔다.

“한윤에게 순순히 저 서찰을 전하겠사오이까?”

박철균이 의아해 하며 물었다.

너무도 수상한 상황이 아닌가. 자신이라면 한윤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일러바칠 것이다.

“한윤에게 전하지 말라고 보내는 것이다.”

애초에 그 서찰의 수취인은 한윤이 아니었다.

저 편지가 향하는 대상은 이번 출병의 책임을 어떻게든 떠넘겨야 하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

그러나 이자원과 박철균의 예상과는 달리, 병사는 한윤을 곧장 찾았다.

한윤에 대한 의리 때문인지 아니면 사람 자체가 고지식해서인지는 몰라도 말 그대로 그 서찰을 열어보지도 않고, 곧이곧대로 한윤에게 전한 것이다.

그것을 받아본 한윤의 눈이 커졌다.

“이따위 하찮은 반간계를······.”

한윤은 이를 빠득 갈며 말했다.

적진의 정보와 상황을 알려주어 고맙다,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을 잊지 않았으니 기특하다 따위의 말도 안되는 헛소리만 잔뜩 적혀 있지 않은가.

“형님, 이런 서찰은 그냥 태워버리시지요. 조선군이 얕은 꾀를 쓰는 것입니다.”

한택이 분개하며 외쳤다.

“이런 말도 안되는 서찰은 숨기는 것이 오히려 더 의심받는다. 우리가 조선땅에 들어온지 하루 무렵 밖에 되지 않았는데 어찌 저들과 통할 수 있단 말이냐?

아무리 소기주가 얕은 사람이라도 이런 편지를 보고 우리를 의심하겠느냐?”

그러나 한윤은 침착하게 말했다.

말도 안되는 서찰이지만 괜히 태워없앴다가 말이 새어나가면 오히려 죄를 뒤집어 쓸 수도 있었다.

“나는 지금 당장 소기주를 찾아 이것을 보여드리고 화근을 뿌리뽑을 것이다.”

한윤은 즉각 행동에 옮겼다.

마침 쇼토의 막사에는 불이 환했다.

“조선군이 어랑산을 점거하질 않나, 우회로에는 매복을 해있질 않나······ 적에 지모가 뛰어난 장수가 있는 것이 분명하오.”

녹초가 되어 돌아온 쇼토는 엉어투에게 한탄했다.

“그러니 말입니다. 아무래도 슬슬 퇴각을 생각하셔야······.”

엉어투가 낮과 같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보았다.

그때는 화를 내던 쇼토도 두 번이나 당하니 더 이상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빌어먹을. 하지만 이대로 철군하면 조정에서 나를 어찌 보겠소?”

좌섭정왕 호거와 우섭정왕 도르곤 모두 그를 우습게 여길 것이다.

아니, 그 전에 아버지가 나서서 자신에게 주어진 정홍기와 양홍기의 지휘권을 다시 빼앗아갈 수도 있었다.

“소기주, 잘란 어전 한윤이 뵙기를 청합니다.”

밖에서 들려온 말에 쇼토가 외쳤다.

“오늘은 그만 쉬고자 하니 찾지 말라고 전해라!”

그러나 한윤이 호위병을 밀치더니 막사 안으로 막무가내로 들어왔다.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소기주! 급한 일이 있어 이리 찾아뵙게 되었나이다!”

“무슨 일인가?”

쇼토가 짜증을 가득 담아 물었다.

따지고 보면 매복에 걸린 것도 한윤이 어랑산을 우회하자느니 지껄여댄 탓이 아닌가.

“조선군을 이끄는 장수가 소장에게 보낸 서찰입니다. 그 내용이 터무니없고 황당하지만 이런 사실은 알려야 할 것 같아 들고 왔습니다.”

한윤이 그러면서 서찰을 공손히 바쳤다.

쇼토는 그것을 낚아채 읽어내려갔다.

‘이건 뭐, 뻔히 보이는 계책이로군.’

한윤이 같은 조선인이라 하여 의심암귀를 심어넣어 주려는 것인가.

하지만 쇼토는 여기에 걸려들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소기주, 무슨 내용입니까? 소장에게도 보여주십시오.”

“읽어 보시오.”

흥미가 떨어진 쇼토가 엉어투에게 그것을 건넸다.

엉어투는 길지도 않은 글을 한참을 읽어내려갔다.

“한윤.”

“예, 구사 어전.”

엉어투가 마침내 글에서 눈을 떼고 중얼거리자 한윤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네놈이 조선군에 우리 군의 움직임을 낱낱이 알려줬구나! 전사들은 무엇하는가! 저 반역자를 잡아 가두어라!”

엉어투가 소리치자 한윤은 당황해 눈을 굴렸다.

“무, 무슨 짓이오?”

놀란 것은 한윤 뿐만이 아니었다. 쇼토마저 엉어투가 뭘 잘못 먹었냐는 듯 쳐다보았지만 그는 완강했다.

쇼토가 소기주로서 기의 소유주인 다이샨을 대행하고 있다지만, 기 지휘관은 따지고 보면 구사 어전인 엉어투이다.

쇼토가 놀라있는 사이 엉어투가 다시 한번 다그치자 호위병들은 한윤에게 달려들어 그를 붙잡았다.

“소기주, 구사 어전! 왜 이러십니까! 소장은 죄가 없습니다! 결백하나이다!”

한윤은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지만 엉어투는 대답하지 않았다.

곧 발버둥치던 한윤이 끌려 나가자 그제야 엉어투는 쇼토 쪽을 쳐다보았다.

“소기주. 마음을 굳게 먹으셔야 합니다. 소기주께서는 지모와 용맹이 부족해 조선군에게 지신 것이 아니라 내부의 간자에게 기밀이 새어나가 당하신 것입니다.”

“그런······.”

엉어투가 쇼토의 손을 꼭 부여잡았다.

“한윤이 우리군을 조선군이 매복해있던 곳으로 유도했음이 또한 분명하지 않나이까? 천하의 명장이라 한들 그런 상황에서 어찌 승리할 수가 있겠습니까.”

엉어투가 속삭이는 말에 쇼토도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렇군. 내가 간자의 말에 속은 셈이야.”

쇼토가 말했다.

“분명 대청이 조선과의 전쟁에서 패퇴하자 다시 한번 조선 쪽에 붙을 속셈이었겠지요.”

“그 말이 맞다. 한번 배신한 자가 두번은 배신하지 못하겠는가. 한윤이 그런 작자라는 것을 알지 못했음이 다만 통탄스럽구나.”

“태조와 태종의 지극한 은혜를 받아 잘란 어전에 오르고도 청에 반역한 자입니다. 어찌 소기주께서 예측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쇼토와 엉어투는 주거니 받거니 하며 그리 말을 꾸며대었다.

내부의 간자로 인한 패배.

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철군한다.

한윤의 결백이나 청에 대한 충심은, 아사리판으로 돌아가는 정국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또한 한윤이 그렇게 숙청되고 나면 솔호 니루에 속한 조선인들의 처우가 어떻게 될지 따위의 문제는, 쇼토와 엉어투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당연하지만 그것은 이자원도 마찬가지였다.

“아다하 하판(輕車都尉, 경차도위)! 어서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오로지 한택만이 종형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얼굴이 새파래졌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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