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 남한산성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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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역사를 바꾸고 싶지 않나?"
시작은 약수터에서 만난 웬 노인의 실없는 소리였다.
그러면서 역사를 바꿀 기회를 주겠느니 뭐니 수상쩍은 말을 지껄여대는게 아닌가.
잡념을 떨쳐내고자 올랐던 산이건만 이런 얘기나 듣고 있으니 그, 이자원(李子元)이 짜증이 불쑥 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자연히 대답도 불퉁하게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영감님이 직접 하지 그러쇼?"
저보다 나이가 스무살 넘게 많아보이는 노인에게 취할 말투는 아니었지만 노인은 그저 허허 웃을 뿐이었다.
"그러고는 싶지만 노부(老夫)는 은퇴한 이래 요 남한산에서만 쭉 살아와서 말이야. 세상물정도 잘 모르는 내가 설쳐보았자 큰 도움이 되진 않을테지. 기왕에 모인 공력이 이만큼이나 모였으니 어찌한다······ 싶을 때 자네가 보인걸세."
거참, 핑계는 좋구만.
이자원은 속으로 비꼬며 생각했다.
요새는 이런 레파토리가 유행하는 중인가. 어차피 말 좀 섞다가 저 보따리에서 부적이나 주섬주섬 꺼내면서 강매를 시작할 터였다.
그럼 이 귀찮은 노인네를 골려주려면 어떻게 해야할지 잠시 고민하던 이자원은 적극적으로 맞장구를 쳐주기로 했다.
열심히 기름칠 다 쳐놓고 물건을 꺼냈을 때 손님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만큼 허탈한 순간도 없을테니 말이다.
"그래, 보아하니 남한산 신령님 쯤 되시는 모양인데 어째 나를 왕이라도 시켜줄 작정이시오?"
"그래줄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은, 내 관할은 남한산 일대라 자네 영혼을 저어기 한양 궁궐에 던져넣기가 난망하거든. 뭐, 병자년에 이리로 피난온 인조 임금 정도라면 모를까."
이자원은 듣다보니 제법 설정이 치밀하다 싶었다.
어느새 대충 꿍꿍이를 품고 치던 맞장구도 열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이 산에 들어온 이후면 별로 쓸데도 없는거 아뇨? 이미 남한산성에 갇힌 시점에서 전쟁은 진 셈인데, 호란 지고 나서 임금 노릇해봤자 별로 좋은 꼴도 못볼테지."
"그게 그렇게 되는건가?"
노인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껄껄 웃었다.
"당연하지요. 팔도에서 올라오는 근왕군은 격퇴되고, 성 안에는 식량이 없고, 강화도는 함락까지 됐는데 산성에 갇혀서 뭘 할 수가 있소. 아예 청 황제를 잡아내는 수준이 아니면······."
이자원이 무심코 내뱉은 말에 노인이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며 물었다.
"청 황제를 잡으면?"
"뭐, 그럼 일이 아주 재밌게 꼬이겠지."
이자원은 몇해 전 국방부 산하 연구소에서 근무하던 시절 기억을 떠올렸다.
분명 병자호란사를 정리하면서 살펴봤던 자료에선······.
"그래도 될리가 없소. 천운이 따라줘야 하거든."
이자원은 딱 잘라 말했다.
"예끼, 내가 이 산 터줏대감인데 그거 하나 못 도와줄까. 헌데 그러자면 임금 노릇까지 시켜주기는 공력이 부족한데······."
은근히 말을 흐리는 노인을 보고 이자원은 피식 웃었다.
"알아서 하쇼. 임금이든 민초든 제 하기 나름이지."
이자원은 한바탕 영양가 없는 대화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까지도 잡상인인줄 알았던 노인이 꾸러미를 풀 생각을 하지 않은 점은 이상했지만······
'그냥 미친 영감인가 보군.'
이자원은 스스로 납득하고 돌아섰다.
'빙의라······ 재밌긴 하겠지.'
경술국치 이전 민족의 최대 치욕으로 꼽히는 삼전도의 굴욕을 막아낸다.
어차피 현생에 미련도 없는 몸이니 괜찮은 조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며 이자원이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땅이 꺼지는 감각과 함께 그는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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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정축년, 남한산성.
난데없이 벌어진 황망한 상황에 성 아래의 청군도, 성 위의 조선군도 넋을 잃은 와중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건 이 참사를 만들어낸 이 하나 뿐이었다.
"영감이 약속은 지켰군."
훈련도감(訓鍊都監) 별파진초관(別破陣哨官) 이자원은 멀리 박살난 어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설마하니 정말로 병자호란의 한복판에 떨어질줄은 몰랐지만, 상황을 파악한 순간부터 빠르게 움직인 그였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대포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훈련도감 별파진 소속 초관이 된 이자원이 노릴 수 있는 유일한 찬스는─
바로 오늘, 정월 초하루 홍타이지가 직접 벌봉 위로 정찰을 나온다는 사실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지금 조선군 포대가 주둔 중인 망월대에서 벌봉까지의 직선거리는 약 560m에 달한다는 것이었다. 그에 반해 천자총통의 유효사거리는 200~500m. 체계적인 탄도학도 없는 이 시대 조선군 화포수들만 믿기에는 너무나 성공 가능성이 희박했다.
게다가 11단계나 되는 장전 과정 탓에 두번의 기회는 없을 터.
초탄에 홍타이지를 뭉갠 것은 실로 천운이라 할 만했다.
"초, 초관 나리. 명중했사옵니다."
"그래, 수고했다."
겨울이라 벌봉 주위의 나무는 앙상하게 말라붙어 관측하기 쉬웠던 것이 다행이었다.
그 덕에 모두가 육안으로도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를 날아간 철환이 어가가 있던 곳을 정면으로 파고드는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아······."
어이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일어난 장면에 조선군은 잠시 넋을 잃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며, 명중이다!"
"와아아아아!"
"명중이야, 명중!"
"우리 군사가 오랑캐 임금을 맞혔다!"
이윽고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부지불식 간에 일어난 일에 당황해하던 이들도 상황 파악이 되자 따라서 환호를 질렀다.
그러나 이자원은 그저 담담하게 그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홍타이지를 곤죽으로 만들었다고는 하나, 전쟁이 바로 끝나버릴리는 없다.
오히려 그의 목숨은 지금 사선에 서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다음 수를 두기 위해 움직여야 했다.
===
"하, 한(汗)이 죽었단 말이냐?"
남한산성 행궁.
조선왕 이종, 훗날 인조라 불릴 남자는 느닷없이 들려온 소식에 당황해 손을 떨었다.
"망월대에서 한 초관(哨官)이 포를 쏘아 노추(奴酋, 오랑캐 추장)의 행차를 정확히 맞추었는데, 어가가 부서지고 그 땅이 한 자나 파였다 하니 실로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옵니다."
"······그래도 확실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화색이 도는 신하들과는 달리 인조는 근심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마치 한가닥 희망이라도 잡는 듯이.
"오랑캐가 화친코자 간 김신국과 이경직의 목을 베었사옵니다. 아무리 배우지 못한 야인들이라 한들 사신을 맞는 예는 알고 있을 것이온데, 한이 죽어 저들이 분을 이기지 못한 것으로 보이옵니다."
"적진에 조기(弔旗)는 보이는가?"
"전하, 노추가 직접 적지에 대군을 이끌고 들어왔으니 죽었더라도 그 사실을 알리려 하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여러 정황을 볼 때 노추는 죽은 것이 확실하니, 실로 종사의 홍복이옵니다!"
예조판서 김상헌이 나서서 말했다.
"감축드리옵니다, 전하!"
척화파 신하들은 이미 홍타이지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한 상태였다.
그러나 인조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전하, 우선 사신을 보내 한의 알현을 청해보시지요."
인조의 근심을 읽은 이조판서 최명길이 말했다.
"한이 살아있다면 반드시 건재함을 드러내기 위해 모습을 보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죽거나 위독하다는 뜻이니······."
최명길은 차마 말을 끝맺지 못했다.
'이래서야 도저히 화친을 맺을 상황이 아니지 않은가?'
주화(主和)를 주장하던 그로서는 지금의 상황이 몹시도 곤혹스러웠다.
홍타이지가 죽었다 한들 청의 대군이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다.
분노한 대군이 공격을 감행할 것이고, 만에 하나 성이 깨진다면 조선의 수백년 사직은 그대로 끝장날게 뻔했다.
그가 추측하기엔 지금 상께서 순수하게 기뻐하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였다.
심정적으론 주전(主戰)에 가까운 임금이지만 막상 대대적으로 싸움이 시작될 상황에 놓이자 최악의 가능성만 떠오르는 것이리라.
"옳은 말이다. 누가 적진에 가보겠는가?"
이미 김신국과 이경직이 죽은 마당이다. 사신으로 가는 자는 죽음을 각오해야했다.
누구도 쉬이 말을 꺼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청한 사람은 좌의정 홍서봉이었다.
그러나 홍서봉은 의외로 죽지도 않고 귀중한 정보를 가지고 돌아왔다.
"여러 장수가 칼을 들고 마구 소리를 치는데, 역관의 말을 들으니 신의 목을 베라는 요청이었다고 하옵니다. 하지만 대왕(大王) 귀영개(貴永介)가 그들을 꾸짖어 물리쳤습니다."
귀영개는 홍타이지의 이복형인 예형친왕(禮兄親王) 다이샨을 말함이다.
"그가 김신국과 이경직의 목을 벤 것은 한의 본의가 아니고 아랫사람들이 멋대로 한 일이라며 두 사람의 수급을 내어주었습니다. 그러나 한을 알현하게 해달라는 신의 요청은 거부하였사옵니다."
최명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홍타이지가 건재하다면 제 형인 다이샨을 통해 말을 전달할 필요가 없다. 아마 한이 죽은 혼란상 속에서 사신이 오자 서열이 가장 높은 다이샨이 홍서봉을 일단 접견하고 본 것이 틀림없었다.
정말로, 한이 죽은 것이다.
곧장 격렬한 반응이 터져나왔다.
"우리 군사가 다만 한번 포를 쏘아 노추 황태극을 격살하였으니 참으로 장쾌한 일이옵니다!"
"그렇사옵니다. 고려조에서 김윤후가 적장 살례탑을 손수 쏘아죽인 일이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일개 장수가 아니라 오랑캐의 가장 우두머리를 해치웠으니 공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크옵니다. 모쪼록 후히 치사하소서!"
만면에 화색이 돌아 외친 사람은 각각 예조판서 김상헌과 동양위 신익성으로서, 싸움을 주장하는 일파였다.
인조는 그러고보니 아직 이 사단을 만든 자의 이름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포를 쏘았다는 그 군관의 이름이 무엇이라 하더냐?"
인조의 물음에 사간 이명웅이 나서서 답했다.
"훈련도감 초관 이자원이라고 하옵니다."
"음."
인조는 포상을 내리라는 신하들의 청에도 그 말만을 남기고 입을 다물었다.
이자원이 죽인 사람이 일개 청군 장수였다면 인조도 단지 통쾌하게만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한이 죽은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인조는 이제 청이 어찌 나올지 두려웠다.
"좌상은, 좌상은 계속하라."
"예, 전하."
떨리는 목소리로 인조가 말하자 홍서봉은 말을 이었다.
"······그러나 감히 한의 어전에 포를 쏜 것은 용서하지 못할 대죄(大罪)라 하며, 관련자를 모조리 묶어 보내라 하였습니다."
"그것 뿐인가?"
인조는 놀랐다.
한이 죽었는데 관련자를 압송하라는 요구 뿐이라니.
"그리하면 화친을 맺겠다고 하였느냐?"
"확답을 주지는 않았사옵니다."
요컨대 이자원 등을 보내는 것은 화친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당장에라도 오랑캐가 쳐들어올줄 알았던 인조로서는 상당히 안심되는 이야기였다.
척화파 신하들이 들불처럼 일어날 조짐을 보였기에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전하, 이자원이 세운 공이 실로 크나 지금은 대위(大位)를 생각하셔야 하옵니다."
침묵도 잠시, 임금의 마음을 읽은 최명길이 나서서 말했다.
"오랑캐가 아직 성을 범하지 못한 것은 한이 제 군대의 피해를 꺼렸기 때문이옵니다. 허나 이제 한이 죽었으니 저들은 필시 군사가 상하더라도 복수를 위해 날뛸 것이온데, 만에 하나라도 성이 깨지면 이백년 종사가 크게 위태로울 것이옵니다.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이판! 그 무슨 망발이오!"
김상헌이 나서서 호통을 쳤지만 인조가 급히 손을 저어 제지했다.
"그래, 그럼 어찌해야 좋겠는가?"
"우선은 오랑캐를 달래야 하옵니다. 한이 죽었으니 저들도 이 땅에 오래 머물지는 못할 터, 적절한 명분만 얻는다면 저들도 모른척 군대를 거둘 것이옵니다."
최명길은 눈을 질끈 감고 말을 이었다.
"이자원을 보내시옵소서! 일개 군관의 독단적인 행동이라 해명하고 사죄하면 화친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전하, 이판의 말은 지극히 더럽습니다! 이자원의 대공(大功)은 고금에 없는 것이온데 그런 자를 화친하고자 벤다면 그 누가 나라를 위해 싸우겠사옵니까? 목이 베여야 할 자는 이자원이 아니라 바로 최명길이옵니다!"
최명길의 말에 즉각적으로 반발이 터져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홍타이지가 죽었다는 소식에 잔뜩 흥분한 신하들이다. 최명길의 말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신하들의 눈치를 살피던 인조는 슬쩍 운을 띄웠다.
"······이자원의 자손들을 등용하고 사후에 품계를 높여준다면 어떻겠는가?"
"전하!"
그러자 좌우에서 격렬한 반대가 터져나왔다.
"산성의 성벽이 결코 낮지 아니하고 적은 추장이 죽어 혼란한데 어찌 싸워볼 생각을 하지 아니하고 화친을 구하려 하시나이까? 설령 저들이 그대로 물러간들 다음 군주가 제 아비의 원수를 갚겠다며 다시 쳐들어온다면 그때는 누구의 목을 내어주시렵니까?"
"기신(紀信)이 한나라 고조를 대신해 형양에서 희생한 것은 제 군주를 무사히 탈출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한이 비록 죽었으나 적군의 정예함은 우리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일단은 적의 흉수(兇手)에서 벗어나야 하오니 모쪼록 명을 내려주시옵소서."
김상헌과 최명길, 양자의 말에 인조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입술을 짓씹었다.
한이 죽었으니 싸워볼만하다? 그게 쉽다면 어찌 저 대명도 요동을 잃었겠는가.
그렇다고 이자원을 죽이자니 신하들의 반대가 심하다.
그때 한쪽에 좌정하고 있던 영의정 김류가 입을 열었다.
"전하, 이런 문제는 쉬이 결정할 수 없으니 본인의 말도 들어봐야 할 것이옵니다. 이자원의 용기가 가상하니, 설혹 충심으로 자진하여 오랑캐의 군영에 나아갈 수도 있지 않겠사옵니까?"
"실로 영상의 말이 맞다!"
인조는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치며 동조했다.
이자원이 그리 해준다면 더없이 아름다운 일로 세상에 남지 않겠는가?
"선전관은 망월대로 가서 이자원을 불러오라!"
아니면······ 그렇게 만들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