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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283화 (283/317)

283화

백작의 습격을 방치한 결과 도시 하나가 반파되었다.

엄청난 피해다. 나름 요충지 중 하나였기 때문에 제국 쪽의 피해는 정말 극심하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피해를 감수할만한 가치가 충분했다.

공작을 죽여버렸으니까.

단숨에 전선 한가운데 구멍이 뻥 뚫려버렸고, 마왕군의 군세는 순식간에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저들의 판단은 빠른 편이었다.

백작 둘이 동시에 전선을 뒤로 물려버렸으니까.

확실히 전선을 정비할 시간도 필요했고 마왕의 지시도 필요했을 터다.

단 셋 있는 귀족 계급의 뱀파이어 중 가장 높은 계급인 공작이 죽어버렸다. 마왕군의 이인자가 사망해버린 것이다. 당연히 적 전체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그들이 전선을 뒤로 물렸다는 소식은 당연하게도 즉시 우리에게 전달되었다.

“곧바로 쳐들어갔으면 합니다.”

용사 레고스트의 말에 일행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여러분의 힘은 상상 이상이십니다. 지금이라면 저들은 제대로 대응도 하지 못할 겁니다. 아니, 솔직히 대응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군요.”

도착하기도 전에 공작을 말려 죽여버린 그때의 힘을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탑에서 마왕과 싸운 것이 도움이 되기는 했지. 오빠에게는 과하게 도움이 된 모양이지만.”

“경험이 중요하기는 하네요. 가지고 있던 기술들이 그렇게까지 발전한 것을 보면 말이에요.”

“…저는 끔찍했지만요…….”

작게 중얼거리는 남은주. 다들 그녀의 고생은 알고 있었기에 조금 안쓰러운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폐하 또한 적극적으로 나서 주시겠다는 약조를 하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설득하기 위해서 황제까지 끌어들인 모양이었다.

‘좋은 기분은 아니었겠군.’

용사이기에 말을 흘려들을 수도 없었을 터다. 게다가 이전 자신의 욕심이나 다름없는 이유로 로지우스의 왕족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나쁘지 않았다. 공작의 힘이 그 정도였던 것을 생각한다면 백작 둘이라면 동시에 상대할 자신도 있었다.

게다가 레고스트 파티는 공간 계열의 공격을 무효화할 수 있었다. 그것을 생각하면 백작 둘을 상대하는 것은 우습고 마왕 또한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만만히 봐서는 안 된다.

그 또한 혈신의 갑옷과 비슷한 무언가를 갖고 있을 테고 본신의 힘 또한 마왕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수준을 보여줄 터였다.

‘그래 봐야 거인의 층에 비하면 어렵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지구의 위기 수준과 제소시아의 위기 수준이 다르기에 그런 일이 일어난 일이다. 그만큼 지구 쪽의 위험이 심각했다.

‘게다가…….’

나는 슬쩍, 내 허리춤의 검을 쳐다보았다.

신화 등급의 검. 완성된 흡혈검의 위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사용하기가 쉽지만은 않았지만.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것은…….”

“최소한의 수비만을 한 채 전선을 위로 끌어 올리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미친 짓을 한다고?’

저들이 내가 오기 전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최대한 수비만을 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껏 자신들을 지켜준 성들을 버리고 공격을 하는데 전력을 기울이겠다니?

“뱀파이어 공작은… 저희 파티를 제외하면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유신후 님, 당신은 상성 상 쉽게 이겼다고는 했지만 그건 저희에게 있어서 마지막 희망이나 다름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마왕이 직접 움직일 수도 있습니다. 그 마왕의 뒤에 백작 둘이 있다면… 솔직히 말해 무섭습니다.”

위험하지만 이대로 방치했다가는 더 큰 위험이 되어서 돌아온다.

“저희가 그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런 판단이 빨랐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지킬 수는 없다. 이기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뭐든지 했습니다.”

저들이 뭉치기 전에 처리한다. 그것을 위해 사활을 걸겠다.

문득 황제의 얼굴이 떠올랐다.

단 한 번 만났을 뿐이지만 어쩐지 당시 나를 만나는 황제의 얼굴은 피곤에 찌든 것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 준다면 할 만할 것 같은데.”

백작 둘. 상대 못 할 것은 없었다.

최상위 전력은 이쪽이 우위라는 판단은 진작 끝났다고 봐야 한다.

거기에 더해 제국이 전력을 다해 도와준다면 하급부터 상급에 해당하는 전력들 또한 한동안은 밀리지 않을 터였다.

저들이 뱀파이어임을 생각하면 최대한 빨리 끝낼 필요가 있기는 하겠지만.

“수비의 주축은… 유신후 님의 길드원들이 하게 될 겁니다.”

레고스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건 통보처럼 말하고 있지만 사실상의 배려였다. 내 휘하의 길드원들을 위험한 전장에서 빼 주겠다는 것.

우리들만으로도 지원으로는 차고 넘친다는 판단인 모양이었다.

‘내 눈치를 보는 것도 있겠지.’

내 힘이 보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 이상 내 비위를 맞추는 것은 자신들의 생존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인 모양이다.

내심 이미 이 세계에 온 이상 한배를 탄 몸이니 살려면 전력을 다하라고 배짱을 부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하기에는 내가 보여준 힘이 상상을 뛰어넘은 듯했다.

여신의 요청으로 온 용사라는 타이틀도 도움이 된 모양이고.

내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곧바로 작전에 관한 설명들이 이어졌다.

짧은 시간 만에 용케도 이 많은 준비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마왕에 의해 멸망해가는 세계라고는 해도 한 차원의 모든 구성원이 힘을 합친 제국이다. 그 저력이 얕지는 않았다.

“현재 마왕이 있는 곳은 최북단입니다. 처음 그곳에 강림한 뒤 사실상 거의 움직이지 않고 있었죠. 그가 직접 나선 전투는 최초의 전투를 포함해 5번이 채 되지 않습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북부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더군요.”

그리고는 빠르게 지도 이곳저곳을 짚는다.

“저들의 목표가 북부인 이상 이쪽은 반드시 지나갑니다. 다행히 적들 중 하나인 바럴드 백작은 남부에 가까운 쪽에 있었던 만큼 지금 행동한다면 저희가 길목을 막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다른 한 백작은…….”

“리베티 백작의 경우 북부에 가까운 전선이었던 만큼 이미 늦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저쪽이 어떤 판단을 하느냐에 달렸습니다.”

리베티 백작. 이전 우리가 행동하기 직전에 공격을 했었던 놈이다. 습격 이후 뒤늦게 돌아간 레고스트의 파티원들이 막기 전까지 일대의 성 하나를 완전히 반파시켜 놓은 주범이었다.

“이전에 보인 움직임으로 봐서는 중간에 합류할 듯합니다만, 정확한 위치는 파악이 힘들어서…….”

중간에 놓쳐버렸다고. 하기야 제국의 정보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이미 점령된 지역에서 그것도 백작급 뱀파이어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합류할 장소를 알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저희가 노리는 곳이 위험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겁니다. 빠르게 지나가려면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곳이니까요. 제국 정보부는 저들의 합류 장소를 저희가 갈 곳인 보로크 협곡 내지는 아예 최북단 근처인 브롬비 평야 둘 중 한 곳이라고 짐작하는 중입니다.”

“근처 혹은 아예 먼 곳이라…….”

‘결국 운인가.’

이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한 놈의 길목은 반드시 막을 수 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우리는 공작과의 전투 이후 제대로 된 휴식도 없이 재차 전장으로 복귀하게 되어버렸다.

* * *

“딱히 힘든 것은 아닌데…….”

나서윤의 말에 한바다가 동의한다.

“공작과의 전투야 사실상 신후 님이 혼자 다 하셨으니까요. 저희야 뭐… 산책 나간 수준이었죠.”

바럴드 백작이 반드시 지나갈 장소인 보로크 협곡. 남부 전선에서 북부로 갈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다.

나와 내 파티원, 그리고 레고스트 파티원들까지. 우리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이곳을 향했고, 덕분에 바럴드 백작이 오기도 전에 위치를 선점할 수 있었다. 며칠의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거리상 우리가 분명히 가까웠다. 텔레포트 게이트의 힘도 있었고. 나름 근처까지는 텔레포트 게이트를 사용했다.

그에 비해 바럴드 백작은 홑몸이 아닌 가문이 통째로 이동하고 있었다. 거리도 있다 보니 우리가 먼저 도착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레고스트와 황제가 빠르게 결단을 내려준 덕분이기는 하지만.

황제가 지원한 정예병들 또한 최대한 빠르게 이곳을 향해 오고 있을 터였다.

“지금 다른 전선에서는 난리가 났겠죠?”

핑기나의 말에 레고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이 전선을 다기는 만큼 우리 쪽은 밀고 올라가고 있으니까. 설마 방어만 하던 이들이 나설 줄은 몰랐겠지.”

공작이 죽고 백작 둘이 후퇴하며 전선을 당겼다.

그러나 그 백작 둘은 현재 마왕을 찾아가는 상태. 그렇다고 모든 군사를 데리고 뒤로 빠질 수는 없다 보니 아마 부관이나 다른 뱀파이어들이 지휘를 하고 있을 터였다.

전선을 당긴다고 해도 모든 영토를 포기하고 그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으니까. 아마 본래라면 적당한 곳에서 멈출 생각이었겠지만, 지금은 제국이 유례없는 반격을 결심한 상황이다.

이제껏 없었던 총공세에 아마 골치깨나 썩고 있을 거다.

상당수의 제국 병사들이 죽어갈 테지만, 지금은 필요한 일들이었다. 저들을 혼란시키고 전력을 줄인다. 동시에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는 일이기도 했다.

현재로서는 알 수 없는 전장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내 기감에 한 무리의 뱀파이어들이 걸려들었다.

“옵니다.”

“…벌써 말입니까?”

내 말에 레고스트의 표정에 깜짝 놀랐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이거, 병사들이랑 같이 왔으면 망했겠네.”

구알라사의 말에 애니디가 동의를 표했다.

한 기운이 특이할 정도로 거대했다. 분명 수준이 다르다. 레고스트보다도 거대한 기운. 나름 숨긴다고 숨긴 듯하지만 내 감각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아무래도 제대로 찾은 모양.

우리는 곧바로 기척을 지워버렸다.

이런 쪽은 우리들이 저들보다 낫다고 볼 수 있었다.

우리야 거인의 층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런 일은 익숙한 편이었고 레고스트 파티 또한 약자의 입장에 있던 경우가 많았기에 저쪽 또한 나름 익숙한 모습을 보였다.

저들이 우리를 알아챘을 때는 이미 도망칠 경로는 없는 상태였다.

“젠장. 뭐 이렇게 빠르게 움직인다는 말인가.”

바럴드 백작.

그는 하늘을 보며 한탄을 내뱉었다.

“너희들이로군. 새로 나타났다는 용사 놈들이.”

아무래도 그는 중간에 가문원들 중 일부를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들었던 것보다 규모가 더 작다.

대신 더 빠르게 이곳을 지나칠 생각이었던 듯했다.

“상황을 안다면, 도망칠 구석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겠지? 리베티 백작은 어디에 있나? 순순히 말해 주면 좋겠군.”

“하. 고작 인간 따위에게 이딴 취급을 받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어이가 없군.”

한차례 더 한탄을 내뱉은 바럴드 백작은 곧바로 눈을 붉게 물들이며 외쳤다.

“그딴 대답, 내가 할 것으로 보이는가! 설령 이 자리에서 죽더라도 내 입에서 원하는 대답이 나올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다!”

레고스트는 슬쩍 나에게 눈짓을 하더니 바럴드 백작을 향해 접근했다.

가장 기감이 좋은 내가 반대쪽을 확인하기를 바라는 듯했다.

“유진아.”

“네, 형.”

“도와주도록 해. 나는 반대쪽을 좀 보고 올 테니까.”

만약 멀지 않은 곳이 약속 장소였다면 이쪽의 충돌을 알아채고 지원을 올 수도 있었다.

“알겠어요. 걱정 마세요, 형.”

“프레드 님.”

“네, 길드장 님.”

“혹시 모르니 프레드 님도 남아 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나머지 인원은 따라오세요. 연아. 정령을.”

“응. 실라페.”

사샤가 아직 깨어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정령사로서의 역량이나 바람의 정령이라는 특징까지 합한다면 정찰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사이 바럴드 백작과 레고스트 일행이 부딪쳤고 하유진 또한 지원을 위해 세계 동화 스킬을 사용, 자신의 몸을 허공에 숨겨버렸다.

나조차도 쉽게 기척을 찾을 수 없을 정도.

저 정도라면 걱정할 것은 없었다.

쿠쾅!

바럴드 백작과 레고스트 일행이 부딪침에 따라 허공의 마력이 크게 흔들린다.

가까운 곳에 있다면 도저히 전투가 일어났음을 모를 수는 없었을 거다.

나는 협곡의 반대편으로 빠르게 몸을 날렸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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