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귀찮네.’
한 쪽은 직접적으로 도움을 줄 용사 일행이고 한 쪽은 나중에 도움이 될 제국이다.
가까운 미래를 생각하면 용사를 도와주는 것이 좋겠지만…….
어려운 일이 아니기는 하나 그 결과가 성가시다.
쓸데 없는 것까지 신경 써야 하는 현실이 짜증이 났다.
그런 내 심기를 눈치챘는지 레고스트가 내게 따로 이야기하자는 말을 꺼냈다.
“…폐하 때문이겠지?”
“그래. 굳이 황제의 심기를 거스를 필요는 없으니까. 물론 직접 돕는 것은 너이니 정 원한다면 해주기는 하겠다만, 그 책임은 져야 할 테지.”
두 세계의 연결. 그것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선택이다. 내 말에 그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그건 걱정 안 해. 사전에 이야기가 되어 있으니까. 이쪽 영토를 수복하고 마왕을 쓰러뜨리면 로지우스 왕국의 재건을 가장 우선하겠다고 폐하께서 직접 약속했다.”
직접 약속을 받아낸 뉘앙스였다. 제국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용사가 직접 요구했다면 아무리 황제라고 하더라도 지금 상황에 약속을 안 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그쪽 왕국 출신이었나?”
“그래. 평민이기는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공주와도 제법 연이 있어 보였다.
‘하기야 저 정도 위치에 지금 왕국 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당연한 처우인가?’
공주 입장에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용사를 놓칠 수는 없었을 터다.
“그렇다면… 상관없겠군.”
“걱정된다면 내가 직접 황제 폐하께 말하도록 하겠어. 책임은 질 테니 꼭 부탁할게. 아니, 부디 부탁드립니다. 유신후 님.”
용사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말해왔다.
어떻게든 나와 친근한 관계를 맺고자 노력하던 놈이 말을 높여가면서까지 부탁을 해왔다.
내 힘을 봤고 그 차이를 체감하면서도 편하게 말을 붙이려 했으며 언제나 먼저 다가왔다. 그런 놈이 태도를 바꿀 정도로 중요한 일인 듯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책임까지 다 지겠다고 하는 마당이다. 그렇다면 거리낄 것이 없었다.
내 허락에 용사의 얼굴이 무척이나 밝아졌다.
공작까지 죽은 마당에 그랜드 마스터 무리를 막을 수 있는 병력은 없었다.
주인을 잃은 뱀파이어는 미쳐간다. 로드인 마왕이 살아있다고는 해도 공작 본인에게 직접 감염된 이들처럼 세대가 가까울수록 큰 영향을 받는다. 그렇다고 세대가 멀리 떨어진 이들이라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분명 천천히 정신이 붕괴되어 갈 거다. 하급 뱀파이어의 경우 세대가 멀다고 한들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힘들 터였다.
일부 인원들은 곧바로 텔레포트 게이트를 사용해 본래의 위치로 복귀했다.
백작이 날뛰고 있는 이상 늦었더라도 갈 필요는 있었다. 올 때까지 날뛸 수도 있었고, 늦었더라도 조금이나마 피해를 줄일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이후 주변을 훑으며 제 주인을 잃어 미쳐 날뛰는 뱀파이어들을 처리함과 동시에 살아남은, 감염된 왕족을 찾아 헤맸다.
그 과정에서 미쳐 날뛰는 수 없이 많은 뱀파이어들을 처리했다.
주로 하급의 뱀파이어일수록 더 날뛰는 모습이었다.
이곳에서 노예 비슷한 처지였던 듯했다.
그런 이들을 바라보며 레고스트의 표정에 불안함이 묻어났다.
“분명 살아 있을 겁니다. 쉬운 통치를 위해 지배 계급을 노예로 삼는 것은 저들의 특성이니까요.”
구알라사의 격려에 레고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불안할 만했다. 왕족쯤 되면 공작 본인이 직접 감염시켰을 가능성도 있었기에 얼마나 버틸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
목표는 오래지 않아 찾아낼 수 있었다.
“이런 젠장…….”
레고스트의 한탄.
왕족들의 상태는 상당히 좋지 못했다.
공작이 죽은 즉시 저들끼리 싸움이 났었는지 몇몇 뱀파이어들은 회생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레고스트 일행은 빠르게 달려들어 지금까지도 서로를 향해 이빨과 손톱을 들이대는 저들을 막아섰다.
이성이 없는 저들은 여전히 날뛰며 레고스트 파티를 향해 달려들었지만, 당연하게도 소용은 없었다.
‘하급인가?’
정말 딱 지배를 편하기 위한 도구, 그 이상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직접 감염시켰다면 아주 작정을 했다는 뜻이 될 거다.
‘피 한 방울 때문에 미쳐 날뛰었겠군.’
하급일수록 욕구를 참기도 힘들다. 아마 그걸 이용해 이들을 다루었을 터다.
레고스트는 그들을 붙잡은 채 애타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곧바로 그들에게 접근해 지배력을 행사했다.
주인을 잃은 뱀파이어들이다. 물론 나보다 낮다고는 해도 공작이 살아있었다면 지배력을 빼앗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터다.
‘으음…….’
그래도 아주 쉽지만은 않았다. 내 마력과 지배력이 한 왕족의 몸으로 파고들었으나 내부에는 아직 하나의 낙인이 남아있었다.
‘마왕…….’
로드의 낙인. 공작 본인도 귀족급에 달하는 괴물이기는 했으나 분명 그 위에는 혈족의 우두머리인 마왕이 있었다.
하급에 해당하는 뱀파이어인 만큼 낙인의 위력이 약한 편이기는 했으나 로드의 낙인을 지워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법 오랜 시간 동안 상대의 낙인 위에 내 낙인을 덮어씌우기 위한 노력을 해야만 했다.
하급 뱀파이어인 점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낙인의 위력도 위력이지만 상대가 내 지배를 피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어떻게든 저항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찍어누를 수 있었으니까.
로드, 마왕의 낙인도 만만한 것이 아닌데 본인이 내 낙인에 저항하는 힘까지 더해진다면 더욱 오랜 시간이 필요했을 터였다.
“후우…….”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마침내 내 낙인을 새기는 것에 성공했다.
그러자 미친 듯이 날뛰던 뱀파이어는 단숨에 그 움직임을 멈추었다.
비록 내 낙인이 새겨지기는 했으나 나 자신이 뱀파이어가 아니다 보니 지배를 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그렇기에 비록 낙인을 갖고는 있으나 그는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을 터였다.
‘그래도 내가 죽는다면 큰 피해를 입는 것은 똑같겠지만.’
이 낙인을 사용한다면 내가 직접 인간을 뱀파이어로 만들 수도 있었다. 다만 하급이 한계였고 지배도 할 수 없다는 점은 이전과 같았지만.
“폐하!”
‘왕이었나.’
하긴. 가장 중요한 인물이니 가장 먼저 하기를 원했겠지.
“감, 감사합니다. 정말로…….”
나는 용사의 감사를 뒤로한 채 다음 왕족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하기로 한 것 최대한 열심히 해줄 필요는 있었다.
모든 왕족들을 자유의 몸으로 풀어주었을 때는 이미 날짜가 바뀐 뒤였다.
어지간해서는 지칠 줄 모르는 내가 몸에서 옅은 땀을 흘릴 정도.
그런 내 모습에 레고스트 본인과 그의 일행은 무척이나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쉬지도 않고 고생하며 신경을 써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내가 그러한 작업을 하는 와중 일부 인원들은 돌아가며 왕국 주변에서 미쳐 날뛰는 뱀파이어들을 처리했다.
모든 영토 내부를 처리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그 피해를 줄이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살아남은 왕족은 총 여섯. 그들은 내가 자신들을 구해주었음을 알기 무섭게 내게 감사의 인사를 전해왔다.
우리의 행동이 늦었기 때문에 죽은 왕족은 셋이었다. 그러나 왕과 왕비, 왕세자 정도는 목숨을 건졌고 후궁인 아드윈의 어머니 또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다른 셋이라면 모르지만 아드윈의 어머니의 경우에는 정말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었다. 후궁의 목숨을 살릴 필요가 뱀파이어들에게는 크게 없었으니까.
솔직한 말로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결과였다. 아홉 전원을 구하지 못한 것은 조금 아쉬운 일이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동시에 그게 최대였다. 더는 시간을 지체하기가 힘들었고 우리는 곧바로 제국으로 복귀해야만 했다.
이 영토를 수복하는 것은 아마 마왕을 쓰러뜨린 이후가 될 터였다. 미쳐 날뛰는 이들이야 오래지 않아 스스로 자멸할 테고 정신을 차릴 수 있는 이들이라면 살기 위해서라도 마왕을 찾아갈 거다. 왕국 꼴이 말이 아니게 되기는 하겠지만 그것은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복귀하기 무섭게 지배에서 풀려난 왕족들의 소식이 빠르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본래라면 이들을 당분간 왕궁에 숨게 하는 방법도 있었다. 정신을 차린 로지우스의 왕이 직접 했던 말로 자신들의 종족 때문에 자신들이 배척받고 심한 경우 처형을 당할 수 있으며 최악의 경우에는 아드윈에게까지 피해가 갈 것을 염려했다.
그러나 그런 그들에게 이곳은 위험하다며 안전은 자신이 책임지겠다며 레고스트가 직접 설득을 했고, 결국에는 설득되어 다 같이 제국으로 오게 된 것이었다.
공작을 죽였다는 결과 또한 화제가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적어도 타 왕국에서 제국으로 망명을 온 이들에게는 왕족들에 관한 소식이 더더욱 화제가 되었다.
특히 아드윈 로지우스의 반응은 무척이나 극적이었다.
그녀는 비록 뱀파이어의 몸이기는 하나 살아서 돌아온 왕족들의 모습에 기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래도 홀로 왕국을 재건해야 한다는 생각에 심적으로 고생한 모양이었다.
그런 아드윈을 보며 레고스트는 가벼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당연하지만 책임은 꼭 지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아드윈의 모습을 지켜본 레고스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본래는 포기할 생각이었습니다. 살아 있다고 하더라도… 제 손으로 죽여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죠.”
차마 그럴 수는 없어 외면하고 돌아갈 생각이었다고. 레고스트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덕분에 저런 상태이시기는 하나… 돌아오게 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후 레고스트는 자신의 말을 지키기 위한 행동을 시작했다.
저들을 불러들이기 위해 황제가 보낸 병사들과 함께 황제를 만나러 간 것.
이후 대화가 잘 되었는지 저들이 뱀파이어라는 이유로 처리되는 일은 없었다. 피 또한 주기적으로 공급받기로 약속을 했으며 그와 관련되어 이후 있을 왕국의 재건에 피해를 주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확답을 받았다고.
동시에 이번 건에 관해 황제는 내게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확실히 레고스트가 약속을 지킨 모양이었다.
대가로 어떤 것을 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조용한 황제와는 다르게 다른 왕국의 생존자들은 하나같이 나를 찾아왔고, 로지우스의 왕족과 같은 배려를 받기를 원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이유가 없었기에 그들의 요구를 거절했다. 내가 거절을 한다고 해서 그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없었고 지금 일일이 그런 행동을 할 시간도 없었으니까.
“감사합니다, 유신후 님. 폐하와 어머님께 자비를 베풀어주신 덕분에 이렇게라도 다시 뵐 수 있었습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왕족들의 거취가 제대로 정해지기 무섭게 아드윈이 나를 찾아와 인사를 건네왔다.
“훗날 기회가 된다면 이 은혜는 반드시 갚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그 말을 거절하지 않았다.
다른 곳은 몰라도 용사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돕는 것을 본다면 로지우스 왕국 자체는 분명 다시 일어날 터였다.
그녀는 이전에 만났을 때에 비해 한층 더 활발하고 강인해진 모습을 보였다.
확실히 뱀파이어의 몸이라고는 하나 가족들과의 재회가 큰 도움이 된 듯했다. 어쩌면 막중한 책임을 나눠줄 왕족이 생겼기에 그런 것일 수도 있었으나 적어도 그녀의 어머니를 만났을 때의 모습을 본다면 전자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의 거취가 결정되는 사이에 공작이 죽었다는 소식은 제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또한 공작의 사망은 당연하게도 이쪽에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었다.
남은 두 귀족. 백작들이 전선을 뒤로 물리기 시작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