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3
“랭커란 수련자들 중 선발하며 황실 또는 권한을 가진 귀족의 지시 아래 수련자들을 조사하고 위법을 저지른 수련자들을 처벌할 의무를 갖는다.”
무법자들 같은 경우에는 요청 따위는 필요 없었다. 게다가 어지간하면 요청 없이도 움직일 수 있었고, 랭커들이 먼저 요청이 가능하기도 했다. 황실은 어지간해서는 랭커들 편을
주기도 했고. 이들을 이용해 황실의 권한을 키우기도 했었으니까.
랭커들이 거대 길드에 들어가지 않는 이유 중 하나였다. 들어갈 필요도 없었고 들어가 봤자 좋은 취급을 받을 수도 없었다. 겉으로야 존중할 수밖에 없겠지. 다만 랭커의 권한은 어지간한 길드장보다 강하다. 그것도 황제가 보증하는 권한이다. 물론 대부분의 거대 길드는 대부분 귀족 가문 또는 황실과 연관되어 있는 만큼 랭커라도 해도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지만.
‘랭커들이 거대 길드를 장악하는 것을 원하지 않기도 했고.’
그러면 너무 세력이 과해지니까.
랭커 제도라는 것에 대해 발표가 되기 무섭게 제법 큰 반발이 있었다. 주로 중립에 속하는 귀족들을 비롯해 파벌에 들어가지 못한 귀족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3대 대귀족인 다이딘 대공가, 아르테인 공작가, 애슐란 백작가가 아무런 반발을 하지 않았고 그쪽 파벌인 인원들 또한 침묵하자 반발은 오래가지 못했다.
‘하기야 이런 일을 황제가 단독으로 정하기는 힘들지.’
저 세 가문은 나름 수련자들을 휘하에 끌어들이는 것에 성공한 가문들이다. 아마 물밑으로는 나름 자격만 갖추면 곧바로 랭커를 하나씩은 안겨주겠다는 약속이 있었을 거다. 보는 눈이 있으니 아무나 대충 줄 수는 없지만.
어지간한 랭커들이 전신에 전설급 아이템과 영약을 마음껏 구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자격을 갖춰주기 위해서 필요했으니 좋은 아이템이 있을 법한 던전의 정보를 알아보고, 통제하고, 때로는 구입해서 랭커들에게 안겨준 거다.
‘이번 회차에서는 내가 다수를 빼앗았지만.’
과거에는 랭커들은 어느 집단에도 소속되지 않은 경우가 다수였고 황실은 랭커를 제법 잘 이용해 먹기는 했지만 역으로 랭커들은 그런 황실과 적정 거리를 유지할 뿐 완전히 소속되었다고도 힘든 세력에 가까웠다. 그들끼리 뭉치는 행동을 하거나 한 것은 아니다. 게다가 대귀족이나 황실 휘하에는 나름 거대 길드들이 있기도 했었으니까.
그러나 이번 회차는 다르다. 나라는 예외가 존재함으로써 많은 것이 달라졌다.
물론 내 휘하의 수련자들이 말썽을 부린다면 흔한 제 식구 감싸주기라던가 길드 내부의 규제로 제재하는 정도로 끝내기는 어려워진다. 황실이 아무리 내게 호의적이라고 해도 세력이 커진 만큼 그냥 풀어주지는 않을 테니까. 눈을 크게 뜨고 이쪽이 어떻게 처리하는지 감시할 거다.
딱히 신경은 쓰이지 않았다. 떠날 날이 머지않기도 했고, 애초에 가이아 길드는 내가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고 나는 길드 내규를 상당히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었으니까.
길드를 제대로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애초에 나 또한 그런 길드의 내규를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고.
오히려 제국의 법이 더 약한 부분도 있을 정도였다. 대표적으로 거주민들을 대하는 태도.
신분을 불문하고 가이아 길드 소속이라면 어지간한 경우가 아닌 한 거주민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한낱 화전민일지라도. 내가 상당히 신경 쓰는 부분 중 하나다.
적어도 우리 길드가 중층을 떠날 때까지 절대로 깨지지 않을 규율이다. 이유는 단순했다. 복수자 NPC. 그가 문제였다. 1회차에서 한차례 등장했던 복수자 NPC는 무서울 정도의 무력으로 수련자들을 학살하고 다녔었다.
랭커들도 피해 다녔던 괴물 같은 NPC로, 똑같이 복수자라고 불렸던 프레드와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이번 회차에서는 그가 등장하게 둘 생각은 없었기에 상당히 신경을 쓴 편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한 역할이 주어진 만큼 그 대가 또한 주어질 것이다.”
수련자라는 특수성을 인정해 딱히 고정된 작위는 없으나 랭커쯤 되면 최소한이 귀족, 그것도 백작급에 해당하는 귀족 취급이다. 물론 1회차 기준이라 지금 나서윤이 그런 대우를 받기는 힘들겠지만.
게다가 활동비와 자유로운 텔레포트 게이트 이용, 수련자들의 처벌을 위해서는 요청한 귀족과 연계해 타 귀족들의 협력을 받는 등 상당히 권한이 막강했다.
황제 혼자서는 결정하기 힘들만했다고 할까.
그러나 나는 이미 전부 누리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괜히 황제가 아무런 의무도 없이 이름만 올리는 조건으로 창고를 개방한 것이 아니다. “랭커는 차차 늘어갈 터이나 현재 그 자격을 갖춘 이는 둘이다.”
황제는 이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유신후 백작 그리고 마검사 나서윤, 앞으로 나오라.”
미리 알고 있었던 만큼 우리는 동요 없이 황제의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그대 둘을 랭커로 임명하고자 한다.”그런 우리를, 수많은 귀족과 수련자들이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논공행상 때문에 수많은 수련자들도 참가한 장소다. 자신들을 제어할 이들이 눈앞에서 탄생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구도 아니고 이곳은 신분제인 제국. 힘도, 권한도 없는 주제에 함부로 움직였다가는 목이 날아가는 곳이다.
귀족들 또한 자신들이 힘을 키울 수단이 줄어드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끼면서도 별다른 반발은 힘들었다.
대귀족 셋과 황실. 그들과의 격차가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물론 황제의 목표는 그 대귀족들마저 굴복시켜 중앙집권을 하는 것이었지만.
“받아들이겠는가?”
“물론입니다. 폐하.”
“영광입니다.”
나와 나서윤의 짧은 대답에 황제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짧은 임명식이 지나간다. 황제는 우리에게 랭커를 상징하는 특수 제작된 검을 나누어 주었다. 딱히 뛰어난 성능을 지닌 검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권위를 상징하는 물품으로 제법 장식이 되어 있기는 했지만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과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인벤토리에 처박히겠지만.’
필요한 순간에나 꺼낼 뿐이다.
이전 전공을 치하하고 나누는 것과 다르게 이번에는 격렬한 박수나 환호는 없었다. 달갑지 않을 만하다.
짧은 임명식이 끝나고 연회가 시작되었지만 생각보다 밝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런 우리에게 다이딘 대공, 아르테인 공작과 애슐란 변경백이 다가왔다.
“오랜만이에요, 백작.”
“대공을 뵙습니다.”
“처음 보는군요. 반갑습니다. 유신후 백작.”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애슐란 백작님.”
애슐란 변경백은 제법 나이든 중년 남성이었다. 노년에 가까운 모습에 어딘가 푸근해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외모에 속아서는 안 된다. 나름 냉정하고 계산적인 남자다.
티드린드 영지와 헬모사 영지 이후 가까운 지역인 홀루 영지가 개방되기 무섭게 접근했던 것이 저 애슐란 변경백이다. 홀루 영지는 독일과 프랑스가 속해 있던 하층이다. 이번 전쟁에서도 나름 치열한 전투를 치른 영지이기도 했다.
그는 프랑스 쪽 수련자들을 흡수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길드가 갈리아에… 1회차 랭커는 크리스토퍼였던가?’
참고로 황제가 흡수한 독일 쪽 길드는 바이에른 길드고 랭커 후보는 톰 뮐러다.
대부분 저쪽 지역에서 갈리아 길드와 대치하는 중이기에 황제 쪽 라인이기는 하나 유동적으로 쓰이지는 못하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두 길드와 랭커들은 각 국가의 길드와 랭커끼리 힘을 합쳐 서로를 견제하던 이들이었다. 1회차에서는 둘 모두 애슐란 변경백 휘하로 들어갔기에 랭커 둘은 훗날 지역을 떠났지만… 이번 회차에서는 독일이 황제 쪽에 붙으면서 계속해서 서로 견제하는 중이었다.
그래도 나름 이번 전쟁에서 공훈을 세운 덕분에 둘 모두 4등급 훈장은 받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수준도… 괜찮고.’
확인 결과 수준은 나쁘지 않았다. 저들끼리 싸우느냐고 눈에 띄지는 않지만 나름 남부, 애슐란 영지 주변에서는 유명하다고.
이대로 성장한다면 1회차와 마찬가지로 둘 모두 랭커가 될 터였다.
“이번에 휘하의 크리스토퍼가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고 들었습니다. 따로 4등급 훈장을 받던데… 기쁘시겠습니다.”
“이런, 유신후 백작이 알아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어떻습니까? 크리스토퍼는.”
“미래가 기대되는 인재더군요. 훗날 랭커가 될 가능성이 높아보였습니다.”
“하하. 저도 그러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제가 최근 가장 많은 투자를 해 주는 친구이기도 합니다.”
내심 가장 뛰어난 수련자인 내게 평가를 받고 싶었다며 크리스토퍼가 기뻐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나서윤 경, 축하해요. 유신후 백작이야 원체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당신까지 랭커가 될 줄은 몰랐어요.”
“저도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는 놀랐습니다.”
다이딘 대공의 말에 나서윤이 겸양을 떨었다. 상대가 대공인 만큼 나서윤은 최대한 예의를 갖춰주었다.
가벼운 덕담이 지나간다. 주요 화제는 랭커와 수련자들이었다. 이는 연회 전체의 공통된 화제이기도 했다.
애슐란 백작은 과거 기술 교류에 참가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나와 친분을 다지기 위해 말을 무척이나 많이 걸어왔다. 나와 연결된 황제를 통해 독일 쪽 수련자들의 세력이 더 커져 백작 쪽 수련자들이 밀린다고 들었다.
나와 친해지려는 백작과 다르게 나는 그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그런 내 태도에 아르테인 공작과 다이딘 대공이 백작을 조금씩 견제해 주었다.
‘친해질 이유가 없지.’
어차피 그의 세력은 우리들 중 가장 약하고 얻어낼 것은 딱히 없었다. 나름 강병을 갖고 상업 쪽으로 유명하기는 하지만 내가 딱히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며 무력이 부족하지도 않았다.
만약 기술 교류 때 그가 있었다고 해도 그가 얻는 것은 많지 않았을 터다. 그가 가진 것은 우리들에 비해 한참이나 모자랐다.
어쩌면 본인이 당시 연회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교류에서는 배제되었을 가능성마저 있었다.
그렇게 그날의 연회가 끝날 때가 되었을 때, 나는 공작과 시간을 내어 따로 자리를 만들었다.
“제안은 생각해 보았는가?”
그리 오래 시간이 주어진 것도 아니었는데 먼저 물어올 줄은 몰랐다. 하기야 내가 그와 따로 자리를 가진 시점에서 예상하기는 했겠지만.
“카바락의 시체로 무엇을 하려고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오크 대전사의 신체가 궁금했을 뿐이네. 특히 마력 회로 쪽이 말이야. 멀쩡한 대전사의 시체를 구한 적이 없었거든.”
과연 공작가라고 해야 하나. 카바락의 시체가 제법 온전하다는 정보를 얻은 모양이다.
“그건 저희 쪽도 조사할 예정이었습니다.”
“물론 오크의 신체를 과하게 훼손할 생각 따위는 없네. 뭐, 자네가 알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가문은 그런 정보에 관심이 무척 많거든.”
그럴 만 했다. 신체 개조술까지 갖고 있는 가문이다. 거기에 더해 비약까지 생각해 보면 타 무가들과는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원한다면 이쪽이 알아낸 정보들 또한 공유할 의사가 있네.”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확실히 대전사의 시체를 구하기가 힘들기는 한가보다. 상당한 저자세였다.
‘우리보다 훨씬 낫기는 하겠지.’
그쪽을 전문으로 하는 이들이다. 이쪽이 조사하는 것보다 더 많은,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터.
애초에 그와의 대련과 감각의 적응을 위한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충분히 끌린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 조건을 더 붙였다.
“그 대련, 제 파티원들도 해 볼 수 있겠습니까?”
“…소문이 사실이로군. 좋네. 어려울 것도 없지.”
“어디까지나 파티원들은 안전해야 합니다. 단순한 대련보다는 지도 대련의 형식을 원합니다.”
“어렵지 않은 이야기일세.”
공작은 내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솔직히 상당히 저자세기에 찔러본 것이었는데 결과가 좋았다.
충분히 만족할 만한 조건이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안, 받아들이겠습니다.”
“현명한 선택일세, 백작.”
주는 것이 더 많음에도 공작은 무척이나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와 공작은 일정을 조정했다. 우선 나는 카바락의 시체를 먼저 공작에게 인계해 주었다. 조사가 빠르면 빠를수록 결과를 빨리 받아볼 수 있을 테니까.
어차피 남은주는 나에 대한 의지를 바탕으로 점점 나아지고 있는 만큼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공작과의 대련 일정은 최대한 빠르게 잡았다. 연회가 끝난 직후, 공작가를 방문하기로 약속을 잡았다.
일행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자 놀란 반응을 볼 수 있었다.
“아르테인 공작이면… 제국 제1검 아닌가요?”
“맞습니다. 그랜드 마스터에 오른 전사입니다.”
나보다도 강하다. 우리 세력이 아무리 3대 대귀족과 비견될 수준이 되었지만 그는 혼자서도 우리 세력을 몰살시킬 가능성이 있는 괴물이었다.
제국에 단 셋 존재하는, 대전사와 싸울 수 있는 규격 외의 강자.
그중 하나와의 대련이 예정되어 있다는 말에 일행의 얼굴에 긴장과 기대감이 깃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