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
프레드를 통해 자신들이 복수할 기회를 얻었다는 것을 알게 된 미국 쪽 사람들은 한껏 기대에 찬 눈으로 우리 일행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런 눈빛은 얼마 가지 못했다.
출발할 준비에 필요한 것들이 많은 것도 아닌 만큼 준비 자체는 이미 되어 있었다. 복수고 뭐고 다시 그 지역으로 가고 싶지 않다는 사람들이 몇 명 있었기에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만이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리프라소의 배웅을 받으며 미국 쪽 인원들을 이끌고 다시금 하층으로 진입했다.
하층으로 돌아오자 미국 쪽 인원들이 불안해하는 눈초리가 느껴졌다. 제국에 넘길 피해자들을 감시하고 관리하기 위해 일부 병력들이 넘어오기는 했지만 그리 많은 수는 아니었다. 당장은 외부의 침입을 막고 혹시 모를 생존자들이 제국으로 넘어갈 수 없도록 방어해야 했으니까. 아무리 피해자들을 살린다고 한들 중층으로 가는 퀘스트를 완료하지 못하면 넘어갈 수는 없으니까. 병력은 추후 추가가 될 거다.
전투 자체는 나를 포함한 8명의 파티원이 한다는 사실을 아는 미국 쪽 사람들은 고작 8명이서 가능하겠냐는 의구심이 가득한 모습이었다.하지만 그런 걱정은 첫 번째 마을에 도달함과 동시에 사라져버렸다.
“사샤, 묻어버려. 죽이면 안 되는 거 알지?”
“안다, 알아.”
“쇼크웨이브(shockwave).”
나연은 간단하게 정령을 이용, 이번에도 땅에 파묻어 기절시키는 간단한 방법을 사용했고, 나서윤은 무속성 마법 쇼크웨이브의 출력을 줄여 닥치는대로 전원 기절시키는 작업을 계속했다.
한바다는 내부로 들어가 시선을 끌며 적당히 수련자들을 기절시켰고, 하유진은 하찮은 인질극을 벌이는 이들을 중점으로 기척 없이 접근해 그대로 기절시켜버렸다.
나는 직접 쳐들어가는 대신 도망치는 이들을 붙잡는 역할을 맡은 상황이었다.
우리의 일방적인 전투를 보며 미국 쪽 인원들을 할 말을 잃은 모습이었다.
같은 수련자가 맞는지, 아니 그 전에 같은 인간이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워하는 듯했다.
일부는 그런 우리를 두려워했고, 다른 일부는 일방적으로 쓰러지는 무법자들의 모습에 환호했다.
“…내가 필요하긴 한 건가? 왜 나를….”
직접 일행의 힘을 확인한 프레드는 의구심을 가진 모습이었다.
“……은주야, 너도 저 정도로 강해?”
“응. 신후 오빠나 서윤이만큼 강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우리 파티에게 짐이 될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해. …신후 오빠에게 받은 것들을 생각하면 조금 부끄러운 수준이기는 하지만….”
“아니야, 은주야. 그렇게 따지면 나도 그런걸? 넌 충분히 잘하고 있어.”
“그러면 다행이기는 한데요… 서윤이나 최근 들어온 아멜리아를 생각하면….”
“…그 둘은 예외로 하자.”
“음….”
“지금 마을은 제압이 끝났어요, 오빠.”
“고생했어.”
“쯧, 기왕이면 한군데 뭉치게 하면 좋을 텐데. 힘 차이가 크니 도망칠까 봐 그러지도 못하겠고….”
“참아, 사샤. 귀찮아도 별수 없잖아. 그래도 오래는 안 걸릴 거야.”
“신후 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네. 아직 하층인데도 진짜 최악이군.”
막 나가는 무법자들의 절정기를 보는 기분이다. 웃기는 것은 지금 외부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무법자들도 이거보다 더하면 더했지 부족하지는 않다는 거다.
마을 가운데 우리에게 반항했던 무법자들과 피해자로 추정되는 이들을 적당히 분류해 놓는다. 이후 미국 쪽 수련자들에게 모조리 넘겨버렸다.
“적당히 분류하세요. 이후 피해자들이 깨어나면 2차로 확인할 겁니다.”
명백히 피해자로 분류되지 못하면 모조리 사망이다.
“잊지 마세요. 용서는 없습니다. 살리는 것도 본보기로, 단번에 죽이는 것이 자비라고 생각되는 자들만 즉결 처형을 피하는 것일 뿐입니다.”
“미리 일러두었습니다.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내 허가가 떨어지기 무섭게 프레드를 비롯한 미국 쪽 사람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이 새끼… 마지막까지 우리를 쫓아왔던 놈이잖아?”
“하. 씨발. 언젠가 죽여버리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잘 만났다, 카르텔 새끼들아.”
“기절한 채 평온한 죽음을 내리면 안 돼! 당장 깨워!”
곧바로 미국의 수련자들은 카르텔 조직원들을 두들겨 패거나 물을 뿌려서 깨웠다.
“뭐, 뭐야! 뭐가 어떻게….”
“괴물, 그 괴물 새끼들은 어디….”
“너, 너는… 프레드? 네가 어떻게….”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카르텔 조직원들이 반항하려 하였지만 소용없었다.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이들 투성이었고 멀쩡한 이들은 포박되었거나 팔다리가 부서진 상황이었기에 그들은 제대로 대항할 수 없었다.
“크아악! 으아악!”
복수가 이어진다. 당했던 그대로를 돌려주겠다는 듯이 두들겨 패거나 관절을 짓뭉갠다. 더러는 이빨을 뽑거나 혀를 자르고 눈을 뽑아버렸으며 급소를 짓뭉개는 이들도 있을 정도였다.
문제는 복수를 해야 할 이들이 너무 많았다는 것. 처음에는 흥분해 마구잡이로 분노를 표출하던 미국 쪽 수련자들은 곧바로 이렇게 해 봐야 비효율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악질이었던 몇몇을 선발해 본보기로 고문하기 시작했다.
다른 조직원들은 관절이 뭉개진 해 본보기들이 당하는 끔찍한 고문을 바라보며 공포에 떨었다.
뒤늦게 깨어난 피해자들이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당황해 했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제국군이 다가와 상황을 알려주고 협조를 요청하자 그제서야 제대로 상황을 파악한 모양이었다.
우리가 자신을 구하러 온 자들이 아니라 그냥 마을을 몰살시키는 이들인 줄 알았다고. 하기야 반항하지 않고 도망치는 피해자들도 일단 무차별적으로 기절시키기는 했으니까.
그때 피해자들 사이에 섞여 있던 조직원들이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도망치려고 했지만, 나와 일행이 그것을 두고 보지는 않았다.
모조리 붙잡아 관절 하나를 망가뜨린 뒤 본보기로 고문, 처형을 당하는 이들 사이로 던져버렸다.
미국 쪽 수련자들은 그런 이들을 환영하며 한층 더 잔혹한 장면을 연출했다.
처음에는 남은주를 보며 자제하려던 이성훈도 쌓인 것들이 많았는지 조금씩 그들의 행동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두려움에 떨던 피해자들도 상황이 자신들에게 유리함을 깨닫기 시작하자 제국군에게 협조해 자신들 사이에 섞여 있는 조직원들이나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동조했던, 한때 피해자였던 이들을 지목하기 시작했다.
“아니야! 난 아니라고!”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너희도 알잖아!”
그들 중에는 아직도 제대로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이 빌어먹을 쓰레기들이! 우리 카르텔이 이대로 끝날 것 같아! 곧 카를로스 님을 비롯한 간부님들이 수천 명의 조직원들을 이끌고 쳐들어올 거다! 고작 저딴 놈들이 우리 카르텔을 쓰러뜨릴 수 있을 것 같아! 전부 죽을 거다, 차라리 죽여 달라고 빌도록….”
피식.
퍽!
“컥!”
한 제국군 중 한 명이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조직원의 주둥이를 갈겨버렸고 다른 조직원들처럼 본보기로 던져버렸다.
“이야, 카르텔의 천사, 라파엘 님 아니야?”
미국 쪽 수련자 중 한 명이 그를 잘 알고 있었는지 아주 반갑다는 얼굴을 해 보였고, 기세등등했던 조직원, 라파엘의 눈에 공포가 떠올랐다.
“너, 너… 네가 이러고도 무사….”
벌벌 떨면서도 협박을 건넸지만, 소용없었다. 남자는 그의 턱을 부수고 이빨부터 하나하나 뽑기 시작했다.
조직원들을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미국 쪽 수련자들을 보며 피해자들은 처음에는 공포에 떨었다. 하지만 차츰 상황을 파악하고 나자 천천히 그간의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죽여! 죽여라! 없애버려!”
“빌어먹을 놈들! 잘라! 잘라버려!”
“잘한다!”
대부분은 여전히 보복이 두려운지 선뜻 나서지 못했지만 일부는 아예 그들 사이에 동참해 복수를 즐기기도 했다. 우습게도 그들 사이에는 과거 조직원이었던 이도 끼어 있었고 곧바로 그런 사실을 지목당해 피해자들의 돌팔매질을 얻어맞았다.
직접 다가가 죽일 용기는 없지만 멀리서 다수가 되어 돌을 던지는 행위 정도는 하는 모양이다.
“살려줘! 돈을, 돈을 줄게! 투항, 그래 투항하겠습니다! 제발 그만…!”
나를 바라보는 프레드를 향해 고개를 저어주었다.
돈 따위는 알 바 아니며 투항을 받아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
하루 가까이를 마을에서 보냈다.
“지루하네.”
“그러게.”
일행은 저들의 처지를 동정하고 심정에 동의하기는 했지만 토벌의 진행이 늦어짐을 그리 달가워하지는 않았다.
나 또한 그 사실에 동의했으며 다른 마을에 사실이 알려지면 골치가 아플 수 있기에 프레드에게 빠르게 처리부터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알겠습니다.”
첫날에는 그간의 설움과 고통, 복수심에 미쳐 날뛰었지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자신의 약혼녀의 안위가 더 중요하다. 그렇기에 그는 내 말에 동의했고, 사실을 알렸다.
이후 페소타 지역의 유일한 성을 제외한 다른 마을을 최대한 빠르게 습격, 최소한의 분류만을 마치고 이동에 박차를 가했다. 이동하는 과정 자체도 조직원들에게는 고통이었다.
최소 팔다리 하나는 작살난 상태로 이동한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고문이었다. 그런 그들의 사정을 봐줄 우리도 아니었으며 도망치려 하거나 뒤처지면 예외 없이 잔혹한 처형을 당했다.
그들은 말 그대로 짐승처럼 끌려다니며 그들의 터전이 초토화되는 것을 목격해야만 했다.
토벌과 행군이 지속될수록 그들의 공포심은 극에 달했고, 일부는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물론, 처음 몇몇을 빼고는 쉽게 죽지 못했지만.
그들이 그리 쉽게 가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미국 쪽 수련자들은 과거 자신들을 도와주거나 잘 대해주었던 이들을 포섭해 덩치를 불렸으며 그들로부터 최고로 악질적이었던 조직원들의 리스트를 만들어 따로 관리하는 등 복수를 더욱 철저하기 위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이성훈과 남은주를 관찰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주하연은 내 부탁대로 둘을 관찰하고 때때로 정보를 가져다주었다.
그녀는 내가 이렇게 예민하게 구는 이유가 이성훈을 영입해야 할 가능성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일반 길드원도 아니고 영입하게 된다면 남은주의 인맥 때문인데, 그가 제대로 되먹지 못한 이라면 남은주의 평판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이니 주하연도 상당히 세심하게 살피는 모양이었다.
아주 틀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건 절반의 이유에 불과했다.
나는 동시에 남은주가 이성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파악하고자 했다. 그에게 과한 관심이 있다면 남은주가 이성훈에게 휘둘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남은주에 대한 영향력이 있는 이의 등장. 그건 내가 원치 않는 바였다. 마음 같아서는 처리해버리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위험이 너무 컸으며 득보다는 실이 더 많았다.
“첫날 전투가 끝나고 이성훈 씨가 은주에게 놀랐냐고 그러더라고요. 자신이 원래 그런 성격은 아니었는데, 너무 많이 당해서 폭주한 거라고 변명하더라고요. 솔직히 은주도 놀라는 눈치기는 하더라고요. 그래도 이해는 하는 모양이었어요. 되려 많이 힘들었냐고 위로해 주기는 했는데….”
“일행들이 활약하는 모습에 조금 자괴감을 느끼는 것 같았어요. 자신과 비교하는 것 같더라고요.”
“은주에게 어떻게 하면 강해질 수 있느냐고 묻던데요?”
“옛날 추억을 많이 얘기하기 시작했어요.”
“상당히 의지하는 모양인데… 아예 곁에서 떨어질 생각을 안 하네요.”
고작 5일 만에 이성훈이 보이는 태도가 상당히 변해버렸다.
4년간의 공백 때문인지 어딘가 어색했던 사이는 일행과 남은주의 능력을 보고 자신과 비교함으로써 차차 변해갔다.
“은주도… 슬슬 태도가 이상한 것을 눈치챈 모양이에요.”
자신에게 상담을 해 왔다고.
“그런데… 아무래도 그냥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나 봐요. 집안끼리 친분도 있어서….”
아무래도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인 애매한 관계였던 모양이다. 게다가 하필이면 오랜 시간 같이 자라면서 친분도 많은 상태. 20살이 된 이후 유학을 갔지만 연락은 제법 하는 편이었고 가끔 만나기는 했다고.
22살에 탑에 넘어왔으며 4년간 연락이 두절되었지만 예상외의 곳에서 만났다. 상당히 성가신 상황이다. 애초에 내가 간섭할 일도 아니고.
“그래서, 은주는 그걸 받아 준답니까?”
“…네. 아무래도 탑에서 험한 일을 해서 그렇지 원래 착한 애라고 하더라고요. 부모님까지 알고 있는 사이다 보니 외면하지를 못하고 있어요. 그리고 사실… 집안에서는 반쯤 공인된 사이라고….”
진짜 사귀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부모끼리는 상당히 밀어주고 있었다나?
‘짜증 나는군.’
얼마 안 있으면 중국의 세 랭커중 하나, 자칭 신선이 마스터로 각성할 시기다. 그 영감은 1회차부터 워낙 대단했고 괴물 같은 인간이었기에 상당히 유명했다.
현실에서부터 무를 단련한 인간이라고 알려진 그 인간은 탑에서의 시스템과도 상성이 상당히 좋아서 탑 입장 후 채 5년도 되지 않아서 마스터가 되는, 말이 안 되는 짓을 저지른다. 무려 그 과정에서 환골탈태를 하는 최초의 인간이 바로 이 영감이었다. 이후 계속 성장한 그 영감은 최강의 랭커라는 수식어를 갖게 된다.
그리고 그 영감 때문에 중국이 여러 문파로 나뉘고 서로 이합집산을 반복하며 동시에 영입 전쟁이 시작되는 시기다. 이 빌어먹을 영감이 자신이 마스터가 된 이유가 무공 덕분이라고 광고를 해댔으니까.
제 딴에는 중국 쪽 수련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려고 한 짓이지만 이게 돌고 돌아 상당히 일이 커져 버린다.
어처구니없게도, 이 일 때문에 대규모로 탑을 올라가지 않고 눌러앉으려는 시도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아마 이번에는 1회차보다 더 크게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그도 그럴 게.
‘무법자들이 지구로 돌아가려고 할 리가 없으니까.’
게다가 힘도 원하는 이들이다. 수련자들을 납치하고 자기들 세력으로 빼내려고 기를 쓸 거다. 특히 중국 쪽에 작업이 심하겠지. 그놈의 무공 때문에.
‘그 쓰레기들.’
무공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모조리 쓰레기다. 한참 후에나 밝혀질 사실이다.
혼란한 시기지만 내 입장에서는 득보다는 실이 많은 기간이다. 중국 쪽에 집중이 되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최상위 수련자들에게 아무런 작업이 없을 리가 없었다. 내 가이아 길드는 정점에 해당하는 길드니 당연히 귀찮게 굴 가능성이 있었다. 다만 내가 구축한 길드는 워낙 철옹성에 가까웠기에 문제 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냥 잠잠해질 때까지 길드를 걸어 잠그고 던전과 황제로부터 많은 것을 빼먹을 생각이었는데 이러다가 내 길드까지 진흙탕에 빠지게 생겼다.
내 길드의, 끼어들 틈이라고는 하나 없었던 내 직속 파티원에게 틈이 생겼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심정으로 들이대겠지만 한창 바빠야 할 시기에 그딴 것에 신경 쓰고 싶지는 않았다.
‘진짜 받아들여서 어디 가둬 둬야 하나?’
힘을 동경하고 강자에게 친분을 무기로 빌붙는 모습을 보인다. 상당히 거슬린다. 살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것은 알지만 성가신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특히 저딴 행동을 보이는 것을 보면 우리끼리 위로 올라가는 것을 두고 볼 것 같지도 않았다. 매달리고, 도와달라 하겠지. 아마 탑에 남는 것에 긍정적인 모습을 보일 거다. 그도 그럴 게 벽에 막힌 이들은 권력자들과 함께 가장 탑에 눌러앉으려는 모습을 보이는 대표적인 유형이었으니까.
위험을 감수하고 성장하는 대신 성장을 포기하는 거다.
더 악질인 것은 최상위 수련자들은 플로어 마스터들이 간섭이라도 할 수 있지 벽에 막힌 이들은 간섭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거다.
게다가 진짜, 만에 하나, 남은주가 위험을 감수하고 싶어 하지 않고 남고 싶다는 마음이라도 갖게 된다면… 그리고 이성훈의 꼬임에 넘어가 남은주가 흔들리기라도 한다면… 그로 인해 성장할 의욕을 잃고 멈춰버린다면?
안 그래도 노력이 장점인 수련자인데 그게 흔들리면 답이 없었다.
걱정이 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대상이 걸리는 게 있는 남은주다 보니까 그냥 넘기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진짜 저 가정이 사실이 된다면 잃는 것이 너무 크다. 남은주가 내게 받아간 것이 얼마인데, 작은 위험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믿고 놔둬야 할까, 아니면 간섭을 해야 할까….’
고민이 되기 시작한다.
내가 어떤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주하연이 침묵한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성훈 씨가… 마음에 안 드시나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네 그렇습니다.”
“태도가 별로 좋지 않기는 하지만, 어째서….”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말할 수도 없고, 오래전 튜토리얼에서의 일을 꺼내는 것도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주하연도 중립이기는 했지만 연관되기는 했었으니까.
내가 침묵하자 주하연이 멋대로 오해를 하기 시작했다.
“…역시, 은주에게도 마음이 있으신가 보네요.”
“…네?”
이게 뭔 개소리인가. 순간 반박하려던 나였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쁜 선택이 아니었다.
대놓고 끼어들, 건수가 될 수 있었다.
애초에 제국에서 능력 있는 인간이 애인 여럿 있다고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고.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오해는 아니지만….
나는 침묵하기로 결정했다.
“후우. 역시 신후 씨도 남자네요.”
“…….”
“아뇨, 뭐, 그 정도 위치에 있고 평소 행동을 생각하면 상당히 얌전한 편이기는 한데….”
지구 기준으로는 이미 애인이 둘인 상황에서 충분히 난봉꾼이다만, 탑에서 본 인간군상들 때문인지 비교적 얌전한 남자 취급이었다. 하기야 나 정도 능력이 있으면 애인이 두 자릿수를 넘어가는 것은 흔한 일이니까. 이건 남자든 여자든 능력 있는 이들 대부분이 갖는 공통적인 속성이었다. 그 때문인지 나는 알게 모르게 제국에서 알아주는 순정남 중 하나가 된 모양이다.
“그래도… 은주라면… 하. 언젠가 이렇게 될 줄은 알았지만….”
혼자 멋대로 오해하기 시작하는 주하연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남은주에 대한 믿음?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위험을 방치하는 것은 병신같은 짓이었다.
“하연 씨. 부탁이 있습니다.”
“…말씀해 보세요.”
“제 수호 기사 말입니다. 은주로 하고 싶습니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하연이 마치 쓰레기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해는 된다. 현 애인에게, 나서윤을 받아들인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새 애인을 들이는 것을 도와달라고 하는 격이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쓰레기 같았다.
나는, 주하연에게서 시선을 돌렸다.